< 성도가 걷는 광야의 삶의 목적 > 강성찬 형제님 / 26년 4월 26일 일요일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 15:22-27).
우리가 금방 읽은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그리고 이제 막 홍해를 건넌 후에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이제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물을 물이 있는 곳에 발견해서 물을 마셔봤더니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참 놀랍게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또 그 홍해도 정말 기적적으로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져서 그 바닷물 사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그 뒤를 쫓는 모든 바로와 군대를 수장시킨 그 놀라운 승리를 하신 그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렇게 놀라운 아주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데, 지금은 갑자기 홍해를 건넌 이후에 그들에게는 지금 물이 없는 그 광야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통해서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교훈을 이제 받고자 합니다. 이 출애굽기를 보시면 이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그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제 여러 가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속함을 입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애굽에 있는 이제 모든 장자들을 죽이시는 그 심판을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을 잡아서 그 양의 피를 자기 집의 그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하나님께서, 그 장자를 멸하시는 그 심판자께서 그 집에 피가 발라져 있으면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멸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그 집 앞에, 그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가 발라져 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이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 심판이 이제 넘어갔기 때문에, 그 유월되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그 뜻에서 이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서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피로 받은 구속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 그것을 나를 위해서 흘리신 것으로 믿는 사람들, 이제 그게 그 피가 발라져 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믿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그 노예되었던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 자유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꽃길만 걸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왜 여기 앞에 이제 광야가 놓여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고 나서 이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제 이러한 경험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모든 것이 이제 순조롭게 잘될 것 같은데, 구원받고 나서 생각지 않았던 다른 어려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물이 쓴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맛이 아니었는데, 물이 쓴 것입니다. 사람이 바뀐 겁니다. 예전에는,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고 나니까 세상이 광야처럼 변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이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예전에 주었던 그 물이 이제 쓴 것입니다. 더 이상 옛날 사람처럼 똑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뭔가 다른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사람에게 세상은 이 광야와 같은, 이제 다른 환경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도 그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이제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죽음은 그 인생에 여러 가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다 이제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힘들게 많은 수고를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이 땅에 내려놓고 떠나야 되는 그 죽음입니다. 그런 죽음을 생각할 때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고 나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죽음 이후에 그 영원한 나라가 있는데, 그 앞에 '우리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형제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이제 페인트 공을 고용을 해서 어떤 담을 페인트를 칠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담은 그냥 다 이제 낡은, 이제 조그마한 볼품없는 그런 담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담을 페인트 칠을 해 봐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페인트 공은 이 담벼락에 뭐 무슨 중요한 담벼락이라고 하면서, 그냥 대충 금방 설렁설렁 칠하고 다 끝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래도 맡은 일이니까 열심히 그 벽을 아주 꼼꼼하게 잘 깨끗하게 칠해 놨습니다. 그런 그 주인이, 그 부자가 그 일을 맡긴 것은 그 담벼락을 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그 부자가 가지고 있는 이제 궁궐 같은 저택, 그 아름다운 저택을 큰 저택을 이제 페인트를 칠해야 되는데 누구를 고용을 해야 되는지, 이제 그것을 뽑기 위해서 한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름하고 작은 담벼락을 꼼꼼하게 칠한 페인트공을 택해서 자신의 큰 저택을 이제 칠하게 한 것입니다.
참 우리 사람들도 그 중요한 일이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제 인생의 의미가 이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앞으로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 영원 가운데서 해야 되는 것을 이제 준비하는 그런 기간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이제 우리 짧은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 가운데서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돼서 이제 신명기 8장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앞으로 40년간 광야를 횡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40년 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광야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시험한 기간'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페인트공을 시험한 것처럼, 이때는 이제 시험한 기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은 "너를 낮추시며"입니다. 그들을 겸손하게 낮추시는 것이 그 광야 기간 동안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잠깐 이 모세 오경에 대해서 이제 전체적으로 이제 말씀을 드리자면, 1. 맨 첫 번째 '창세기'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한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사람은 범죄하였고 타락하였는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런 가운데서 다시 이제 회복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중에 하나가 이제 한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말미암아 이제 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이제 창세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2. 그리고 그다음 책이 이제 '출애굽기'입니다. 이제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이 죄의 종 되어 있는 것처럼 바로의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보내서 '구원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양의 피로 말미암아,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들을 구원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그 구원의 역사가 출애굽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3. 그리고 나서 나와 있는 것이 이제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어떻게 '교제'를 하시는지, 그들과 '함께 어떻게 거하시는지', 그 근거와 그 '교제의 행함'이 나와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레위기에 담겨 있는 '제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성별될 것'을 또한 레위기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레위기에 담겨 있습니다. 4. 그리고 이제 '민수기'에서는 그러한 그들이 어떻게 광야를 행하는지, 실제 그들의 '인생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책이 이제 민수기입니다. 그 민수기는 그들의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여기 신명기는 신명기 책 전체적으로가 하나의 '긴 말씀'입니다. 그 어떤 말씀을 하고 있냐면, 이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텐데 이 신명기 이후에 이제 여호수아서에서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준비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들어간 땅에서 이제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 그 준비하는, 이때 필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면기는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준비시키는' 이제 그런 책인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그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준비가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광야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신명기, 우리가 금방 읽은 8장 2절 말씀에서는 그 중요한 것 중에 하나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준비가 낮아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 기업을 얻는다는 것이 왜 낮아져야 되는 것인지를 이제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업을 얻으려면은 이 땅에서도 높아지는 게 준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제 학벌을 쌓고, 또 여러 가지 필요한 지식을 익혀서, 많이 높아져서, 그래야지 재벌의 후계가 이루어지고, 이제 그렇게 되는 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선 이상하게도 낮아져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은 그 하나님의 나라는 낮은 자가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낮은 자가 그 나라를 제대로 받아서 제대로 다스리는 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누가 복음 22장 24절입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4-30).
여기서도 우리 주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를 언급을 하시는데, 특별히 그 다스리는 자를 언급하시면서 '섬기는 자', '낮은 자'가 바로 그들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누가 크냐?'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내가 당신보다 더 낫다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다. 낮은 자가 오히려 큰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 그 사람이 큰 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전혀 자기를 위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신 바로 그분이 가장 크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섬기는 자가 그 하늘 나라에서는 큰 것입니다. 그가 그 하늘 나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 하늘 나라를 다스리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면서, 그리고 우리를 낮추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십니다. 놀라운 말씀 중에 하나는 로마서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부분 잠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로마서 8장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여기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면 또한 이제 "후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후사라는 게 '후계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냥 후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계자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계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게 놀라운 것이 그리스도는 무엇을 기업으로 받습니까? 이 후계자라는 것은 그 기업을 받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는 분입니까? 우리가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유를 그가 후사로 받을 자라고,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기업으로 받으실 자라고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만물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으실 분입니다.
여러분은 이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여기 대전에서, 그냥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만 인식하고 이제 살아가기 때문에 때때로 이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인식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만 타봐도 금방 압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조금 올라가면 이 땅이 보이는데, 생각보다 놀라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이 너무나 좁다는 겁니다. 몇 시간 계속해서 황무지를, 이렇게 바다를 비행기가 횡단하는 것을 볼 때에 인간은 얼마나 좁은 데서 이렇게 살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구도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근데 그 지구가 먼지에 비유해도 그것은 비유가 안 될 정도로 우주는 너무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우주를 그리스도께서는 기업으로 받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업으로 받으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함께 우리가 기업으로 받아서 받는 후계자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그와 같은 놀라운 자리로 부르셨다는 겁니다.
여기 로마서 8장 19절부터 이제 '피조물들'이 나옵니다. 19절에 이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피조물들의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왜 갑자기 여기에 이제 피조물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 피조물들이 우리한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그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 피조물이 이 모든 이 창조 세계가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여행 가서 보면 대단하다, 이런 생각을 하죠. 그런데 우리가 보는 그 이 자연 피조 세계가 지금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허무한데 굴복해 있는 겁니다. 지금은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온전히 다 완벽하게 나타나지 않은 그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회복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다시 온전하게 회복돼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받을 그 기업을 여기에게 쭉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피조물도 놀라운데, 온전히 회복된 그 피조물을 우리가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낮아져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 이 낮아진다는 것은 나중에 다시 이제 설명을 드리겠지만, 우리가 처음에 이제 낮아진다라고 생각되면 그냥 좀 볼품없는 이제 그러한 모습을 이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결코 그렇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 이제 덕언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광스럽게 높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낮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 광대한 피조물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그 놀라운 영광이겠습니까? 얼마나 그 존엄한 그런 자리이겠습니까? 정말 낮아질 때 우리는 그 영광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이제 광야 이야기로 이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양식도 없고, 이제 물도 없는, 그런 고난 가운데서 이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고난을 잘 받아야 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야 됩니다. 잘 낮아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의 반대가 뭐냐면 '원망'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5장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사흘길을 가서 물이 없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원망합니다. 사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을 특징을 지어보자면 원망하는 겁니다. 원망하는 게 계속 나옵니다. 지금 당장 여기 15장에서도 이제 원망하는 게 나왔고, 그들은 이제 출애굽기 16장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다음 장 17장에서는 또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그 광야의 걸음을 전부 원망으로 특징을 삼아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민수기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한 그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가 총 3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를 한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광야 생활을 이제 40년 동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40년간 원망한 기간은 성경이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들에게 유익이 없었던 겁니다. 거기에 그들에게 바라는 그 '배움'이 없었던 겁니다. 사실 민수기 1장부터 이제 14장까지는, 14장이라는 그런 분량에서는 '열하룻길'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가나안 땅 경계까지, 가네스 바네아까지는 열하룻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제 1장부터 14장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 가나안 땅 앞에서 그들 거기서도 원망합니다. 그때 여기서 다 죽게 되었다라고 원망하고 안 들어갑니다. 그 약속의 땅에 안 들어가고 38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6장이라는 짧은 그런 길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슬픈 일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고라 자손들이 반역하는 것, 이제 모세가 이제 실수하는 것, 또 아론이 이제 죽음으로써, 그 38년의 기간이 끝나는 때가 이제 그 6장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론의 죽음의 기록 이후에, 21장부터 이제 36장까지 나머지 이제 16장이 이제 다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는, 가난안 땅 앞으로 가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알게 되는 교훈은 '원망하는 시간은 우리의 인생의 걸음에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원망하지 않아야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고난을 잘 받을 때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제 올해가 이제 26년도이고, 제가 이제 마포 모임에 더해진게 96년이기 때문에 이제 30년이 됐습니다. 이제 한 세대가 지난 건데요. 그래서 사실 이제 여러 성도님들하고 오랫동안 이제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중에 이제 안타까운 건 뭐냐면, 어떤 분들은 원망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게 '성격이 그런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좀 원망이 많다. 보통 어떤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원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에 봤을 때, 그 원망하는 분들은 지금도 그래요. 이게 그분들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허투루 지나간 겁니다. 원망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래선 안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라지가 않는 겁니다. 이 원망은 낮아지는 것과 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왜 원망하냐면 자기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나는 이 정도 높은 자리에 있는데,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인데, 나는 이 정도 대우를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우하셔야 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 지금 물이 있고 양식이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원망은 낮아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받고 있는 대우가 지금 좋은 대우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이거, 왜 이렇게 안 좋지?' 하고 있는 대우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금 최선의 대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 판단이 잘못됐기 때문에 이게 지금 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사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수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쁜 대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광야길에서 우리가 원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베푸신 '최선의 길'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잠깐 이제 고린도전서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8).
여기서도 다시 이제 출애굽기를 인용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고, 그 유월절 양은 여기 기록된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유월절 양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죠.
그리고 나서 이제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무교절을 지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교절이라는 것은 이 '누룩이 없는 빵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누룩이 빵에서 제거된, 그 빵을 부풀게 하는 그 누룩이 제거된 빵을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게 뭘 우리에게 상징하고 있냐면, 누룩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받은 자들은,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자기의 삶 가운데서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구원받은 사람의 해야 될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8절에 유월절 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릴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누룩'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나의 잘못된 가치관, 나의 잘못된 욕심, 이런 것들을 내어버리라, 그 정욕대로 살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광야 생활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됩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그 가치관들, 세상에서 좋다고 생각하던 그 가치관들, 이제 그런 것들을 하나씩 내어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나의 욕심,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건데,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낮아진다는 것은, 나의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게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고 더 그럴듯하게 자기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는, 이제 그런 것을 누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또 그런 누룩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는 진실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만 좋아 보이고자 하는 그런 유혹을 계속 내려놔야 됩니다. 계속 진실하고 담백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정말 내가 하는 말 그대로 그 의미를 닮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나한테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내어 보이고, 우리는 그럴 때에 이 낮아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더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편안함을 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영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물질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돈을 취하고, 오히려 그 종교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이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누룩을 또한 피해야 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서 경건하게 사는, 이제 그런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이 누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또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여기 보면 그 이제 물이 썼을 때, 이제 나무를 그 물에 던져 넣으라라고 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넣었더니 그 물이 달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이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가 있는데, 이제 성경에서 특별히 이 '나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 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누룩들을 내어버리는데, 이 무교절을 지키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누룩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모든 시험을 우리와 같이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가 광야에서 이 인생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그 모든 괴로움 가운데 스스로 낮추시고, 그리고 이기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정말 이것이 복된 일이구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마태복음 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3-4).
여기 우리 주님께서 이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그 광야에, 아무런 양식이 없는 그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하였던 것처럼, 이제 우리 주님께서도 그 양식이 없는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시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제 사단이 나와서 이렇게 시험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단은 항상 이런 시험을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라." 그리고 그게 안 된다면은 원망해라. 네가 대단한 사람인데, 그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너는 원망해도 돼. 네가 지금 마땅히 음식을 먹어야 되는데, 그 음식이 없다면은 원망하는 게 당연하다. 아니, 당연히 먹을 게 있어야지, 어떻게 40일 동안 먹을 게 없냐? 원망해도 된다. 이제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너의 능력을 사용해 가지고 너 마음대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참 놀랍게도 그 시험을 자신을 낮추심으로 이기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의 그 능력을 사용해서 정말 그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그래서 떡을 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여전히 나는 더 굶주리겠다, 말씀하시고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이게 참 절묘한데, 낮아졌지만 굉장히 높아진 장면입니다. 낮아졌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낮아졌지만, 사람의 존재를 사단은 "야, 사람은 먹어야지." 이 정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단지 그냥 먹어야 사는 짐승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높이냐면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낮아졌을 때, 정말 이 높은 영광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사람의 존귀함을 제대로 나타내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정말 양처럼 온전히 낮아지시고, 이제 순종하신 분이지만, 그 레위기의 제사에 보면 이제 양을 제사로 드리고 또한 동시에 또 염소를 제사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낮아지고, 이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염소는 잠언에 보면은 위풍 있게, 당당하게 걷는 짐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염소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흔들림 없이 정말 위험 있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양인 동시에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 고귀함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낮아졌지만 그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단의 시험에서도 온전히 낮아졌지만, 또 온전히 위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또한 신명기 우리가 읽었던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8장 읽었던 그 말씀을 우리 주님께서는 그대로 이용해서 그 시험을 이기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걷게 하신 그 의도를 설명하신 것이 그 8장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리고 그 광야에서 그 광야의 의미를 말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명기 8장 16절에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렇게 낮추신 것은 반드시 너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를 낮추신 것은 반드시 너로 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이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만 받을 수 있는 복이 있습니다. 낮아져야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낮아졌을 때 얼마나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인지를 보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정말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지금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참 이와 같이 낮아지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와 반대로 원망하는, 내가 받아야 되는 대우를 지금 받지 못하고 있어서 원망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길 바랍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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