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별됨 :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강성찬 형제님
이번 시간에는 창세기 12장 말씀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지난 달에 여기 대전 중구 모임에서 우리가 이제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또 함께 이제 살펴보고 많은 유익을 누렸습니다. 이제 그중에서 특별히 이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관련돼서 이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또한 특별히 이제 세상과 구별되는, 그런 부르심인 것을 이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제 그런 부분들을 좀 더 이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무엇이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또 어떻게 성별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금방 말씀 읽은 대로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특별히 이제 '떠날 것'을 이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이제 교제가 되었지만, 이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보면, 참 이게 이제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생각하게 되고요. 참 은혜 가운데서 부르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성별해야 되는 부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떠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했을 때, 그냥 단순하게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떠날 수 있는 그런 힘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떠나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사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이때 당시 이 본토는 굉장히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그러한 땅이었습니다. 잠깐 이제 사도행전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7:2).
여기 이제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메소포타미아는 여러분들이 이제 학교에서 많이 들어봤을, 이제 인류의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한 군데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로 따지자면 지금의 이제 미국과 같은, 굉장히 화려한 문명을, 가장 앞서 나가는 문명을 자랑하는 이제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지금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이제 아프리카로 지금 가라고 하면 그게 쉽게 갈 수가 있는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로 하여금 그 믿음의 발걸음을, 이제 거기서 떠나는 발걸음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 1절에 보면 "내가"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내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어디 어디로 가,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이라면 내가 어디든 갈 수 있지, 이런 것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이라면, 그리고 또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지시한 땅'이 아니라, 이미 어디로 구체적으로 '유천동 273'인가요? 여기로 가라, 이렇게 딱 하신 것이 아니라 '지시할'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속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걸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함께하시면서, 이제 내가 말하는 계속 알려줄 땅, 내가 너랑 함께 가면서 알려줄 땅, 내가 너를 인도하는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다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아브라함과 동일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로운 부르심이며, 또한 영광의 부르심이며, 성별되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이 부름을 받았을 때에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계속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 가운데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산속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이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나온 이제 메소포타미아에 대해서 조금 이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좀 더 성경을 통해서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제 창세기로 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그 메소포타미아, 본토를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본토, 이 세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빼고도 자기들이 행복할 수 있다. 복을 누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제 세상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0장에 가보면 이제 그러한 부분을 이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0장 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창 10:8-10).
여기에 이제 '바벨'이라는 단어가 이제 처음 성경에서 사용이 됩니다. 이 바벨이라는 곳이 아까 아브라함이 떠나왔던 그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 메소포타미아라는 지역에서, 그 지역의 중심이 되는 수도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바벨'입니다. 그리고 그 이제 바벨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니므롯'입니다. 그런데 그 니므롯의 이름의 뜻이 '반역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하는 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이게 이제 우리 표현으로 정확하게 그 의미가 이제 전달되지는 않지만, 그 문맥을 살펴봤을 때 이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고 했을 때, 이제 그는 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 가운데서 신격화된, 자신이 지금 이제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이 이제 하나님처럼 이제 신격화된 인물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특이한 사냥꾼이라는 것도 그 이제 문맥을 보았을 때에, 그냥 이 짐승들을 이제 사냥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냥하는, 특별히 자신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들을 이제 사냥하고 처단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각 시대를 나누어서, 이제 각 시대에 어떤 특별한 책임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는 내가 이러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겠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기준을 말씀하시고 그 시대를 다루십니다. 이제 그것을 그 시대를 그렇게 경영하시기 때문에 이제 '경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시대를 경영하시는지, 그것을 이제 우리 이제 신학적인 용어로 이제 '경륜'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제 앞선 시대를 보면, 지금 이 창세기 10장에 앞선 시대를 보면 '무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제 거기도 하나님이 이제 말씀하셨고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시간은 먹지 말라." 이렇게 이 말씀을 해 놓으십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말씀을 어기고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이 정하신 경륜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이후의 시대를 또 경영을 하십니다. 이제 그때는 이제 '양심의 시대'라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요. 이제 그들 안에 그 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들 가운데 양심을 두시고 그 죄의 욕심을 다스리실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또 사람들은 그 시대 가운데서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죽이고, 가인이 자신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처럼 죽이고, 그 가운데서 많은 폭력이 일어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로 그 시대를 심판하시고 또 다른 시대를 이제 시작하십니다. 그 시대가 이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시작이 되는데요. 9장을 보면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 그러면서 9장 5절에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5-6).
그래서 어떤 사람을 해하면,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러한 정의를 구현할, 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기준을 행사할 권위를 정부에 부여하십니다.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보다 더 이제 높은 권위를 이제 정부를 세우시고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권위를 둡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이제 '정부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시대 가운데 이 니므롯이 나온 것입니다. 그가 이제 나라를 세운 것이죠. 그런데 이 니므롯은 그 하나님의 뜻대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신성화하고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특이한 사냥꾼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시고 그 권위를 주신 것인데, 이 니므롯이라는 사람은 그 권위를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특이한 사냥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1장에 보면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그들은 아까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9장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7).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널리 퍼져서 살면서 그 가운데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니므롯은 이제 바벨을 세우면서 오히려 그 반대로 이제 바벨에 모아 살자. 이 바벨이라는 성에 이제 모아서 우리의 힘으로, 특별히 이제 3절에 보면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높은 성과 대를 쌓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있는 돌과 역청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만든 벽돌과 역청을 이용해서 그 높은 성과 대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거꾸로, 널리 퍼져 사는 것이 아니라 바벨에 모여 살면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없이 이 가운데 번성하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이 만든 나라, 이제 조직적으로 나라로서,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응하는 그 바벨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전체적으로 이 성경의 역사 가운데서 이 바벨이 계속적으로 이제 언급이 되는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는 그 바벨이 어떻게 멸망당하는지도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으로 와서 그 마지막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8절을 보게 됩니다. 이 바벨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람들의 역사 가운데서 이제 이어져 오면서 그리고 마지막 때까지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14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바벨을 특별하게 심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우리가 이 계시록 말씀에 대해서 이제 좀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래도 여기 대전 중구 모임에서는 계시록 말씀을 성경 읽기를 하셨기 때문에, 그래도 이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다 이해가 되실 걸로 생각이 됩니다. 특별히 이제 14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바벨론이 심판받는 것,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거역한 인류에 대한 심판 가운데서 특별히 이 바벨론을 콕 집어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이 큰 성 바벨론이여" 특별히 그가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함께 진노로 형벌받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군데 1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 16:19).
여기 이 16장 19절에서도 그 바벨론, 그 특별한 그 성이 그 물리적인 어떤 한 지역에 있는 성이 특별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무너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 바벨, 그 성은 하나님의 주시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잔을 받았다"라고 그가 얼마나 큰 심판을 받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17장과 18장에서는 두 장에 걸쳐서 왜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벨을 기억하시고 심판하셨는지를 그 이유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게 될 때에, 그 바벨이 상징하고 있는 세상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왜 그 세상이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것인지를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17장은 그 바벨을 '음녀'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17장 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여기 보면 이 바벨을 음녀와 연관하고 있습니다. 이 음녀라는 것은 이제 창녀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소중한 것을 이제 파는 존재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벨은 무엇이 특징'이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 '소중한 것을 파는 것'이 특징인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이렇게 경영하시겠다. 그 말씀하신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것보다 사람에게 주어진 것 가운데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은 항상 그것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앞에 니므롯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것을, 그리고 이 땅에 퍼져서 번성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가지고 계신 뜻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벨은, 그리고 니므롯은 그것을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오히려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에게 이제 이익이 되는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력을 불리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이 가운데 더 모아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 강하게 만들고 더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이 더 높아지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니므롯 이후로 계속해서 이어진 그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바꾸고, 더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계속 자신의 입맛대로 말씀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또 이제 18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8장에도 바벨론의 특징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바벨론의 특징은 여기서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3).
이 18장에서는 그 바벨론이 치부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신의 복을 추구하는 데에 특별히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들이 복을 누릴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특별히 물질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에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니므롯이 그 바벨탑을 쌓으면서 그가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성과 대를 쌓았으며, 그 성을 높이 쌓는 가운데에, 사람들을 많이 그 가운데 모으는 가운데에,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 없이도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존재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그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지가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 요한일서로 가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대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앞에서는 이제 역사적으로 그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았고, 요한일서에서는 그 '세상의 특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는 처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그런데 단순히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라고 하지 않고,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라고 했을 때, 이것을 단지 이 '지역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잘못 오해해서 산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떠나서 산속에서 홀로 수도 생활을 하는 그런 것으로 이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분명하게 이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장소와 상관없이 어디에나 있는 것임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주목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특별히 두 가지로 나눠서 하나님이 계속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8장에 나와 있는 바벨론 심판은 정말로 그 물리적인 어떤 한 성, 바벨론이라는 성이 심판을 받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또 나눠서 17장에 비밀 바벨론이 심판받는 것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비빌 바벨론은 어떤 물리적인 성이 아니라 그 성 바벨론과 연관된, 그 바벨론의 안에 있는 어떤 시스템, 그 바벨론 안에 있는 '정신'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바벨론, 그 물질적인 성 안에 있는 정신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 하나님의 말씀을 바꿔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변역한, 이제 그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것도 동일하게 미워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동시에 나누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세상을 사랑하면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거를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세상과 벗된 것이 이제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을 해야 됩니다. 왜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세상에서 떠날 것을, 그 본토에서 떠날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냐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이 요한일서에서는 그 세상의 정체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다", 이제 정욕이고 자랑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 우리 눈으로 봤을 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고, 만져지는 것이고, 그것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것은 다 이제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의 정욕이 만들어낸, 우리의 허탈한 자랑이 만들어낸, 그 실체가 없는 그런 것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실체는 아버지의 것이 빠져 있는, 아버지가 빠져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한다 할지라도 거기는 하나님 아버지가 빠져 있습니다. 마치 없는 앙꼬가 없는 찐빵처럼, 그냥 겉으로 봤을 때는 좋아 보이는 것이지만, 그 가치를 만들어낸, 가치를 만들어내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 안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말을 보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는 장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에 이제 사단이 주님을 시험하면서 이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어 먹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떡을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떡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떡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지 않은 그것은 이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이 우리 주님에게 그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셨을 때, 참 그것은 참 놀라운 그 화려한 영광이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그것을 이제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럽게 보였지만, 참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영광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또 사단이 우리 주님에게 그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라라고 주님을 유혹하였지만 주님은 그것을 이제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인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볼 때에 이것으로 판단을 해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어떠함이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어떠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아버지의 어담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와 같이 허상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참된 가치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려한 외향을 가졌다 할지라도, 참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없다면 거기에 진정한 영광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많은 인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인정이 없다면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인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이와 같이 주님이 평가하신 것처럼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 이 바벨론, 이와 같은 세상은 계속적으로 이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이 성경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또 그 이전에 니므롯 때 부터 계속해서, 이 세상은 정치적인 힘을 형성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중에 이제 사사기 3장 말씀을 한 군데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장 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삿 3:8-10).
여기 이제 사사 시대 때에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이 이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제 그들을 이제 종으로 삼아 이제 부려 먹게 됩니다. 이 메소포타미아는 이제 계속적으로 이 세상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산 리사다임이 그의 왕이라고 되어 있는데 리사다임이 뜻이 뭐냐면 이제 '두 가지 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이제 바벨론이 이 두 가지 측면으로 제시된 것처럼, 또한 요한일서에서도 세상과, 그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그 두 가지 측면으로 제시된 것처럼, 이 왕의 이름도 그 '두 가지 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는 이 세상은 그 세상이라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와 '장소'로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 있는 세상적인 '사상'으로서 우리에게 악으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왕의 손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는 '옷니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리고 이제 유다 지파에 나온 사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 주님을 이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옷니엘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승리할 것인지 그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 비결은 1장으로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1장 11절입니다.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1-15).
여기 그 갈렙과 그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이제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게 되는데요. 이 기럇 세벨이라는 곳이 '책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 기럇 세벨의 이름이 '드빌'이 되는데요. 이 드빌은 특별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렙과 이 옷니엘은 특별히 책의 성, 즉 하나님의 말씀, 여기에 집중하고 그것을 취하고 그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요한일서 2장에서도 그러한 세상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특별히 '이긴 자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는데요. 그 이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다는 것을 요한일서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이 옷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특별히 다른 어떠한 무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할 때에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계속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여기 옷니엘이 아내를 취하게 되는데요. 그 이름은 악사이고, 악사는 특별히 샘물을 구하게 됩니다. 그가 밭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게 되었는데 그 밭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밭에 있는 윗샘과 아랫샘을 특별히 요청해서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샘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사용이 됩니다. 이 악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는 여인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 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옷니엘과 또한 그의 아내의 악사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고 등한히 여겼을 때에 그들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지고 심지어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서 그들이 멸망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바벨론에서 나왔는데, 그들의 후손 이스라엘은 결국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이 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 장면을 한번 이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대하 36장 17절입니다. 여기 '갈대아 왕' 이렇게 나오는데, 이제 갈대아가 우리가 앞에 계속 보았던 이제 메소보타미아, 또 이제 바벨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대하 36:17-21).
여기 이제 갈대아 왕, 그 바벨론 왕이 와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제 21절에서 그 결과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성경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내었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바벨론으로 다 포로되어 가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땅은 이제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낸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서 이제 70년을 거기서 있다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있는 기간 동안에, 이제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니까 이 땅은 70년간 쉬게 됩니다. 그냥 거기서 곡식이 자라지 않고 땅이 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특별히 이제 이런 일이 이제 발생하게 되냐면, 레위기 말씀을 한 군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레 26:34).
여기도 앞에 읽은 말씀하고 이제 같은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농사를 짓되 7년째 되는 해는 농사를 짓지 말고 그 땅을 쉬게 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아니 그러면 무슨 곡식으로 우리가 먹고 살까 걱정하겠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먹고 살 양식을 미리 공급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이제 자기의 생각대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그때도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그게 몇 번을 그랬냐면 70번을 그런 것입니다. 70번 동안 그러니까, 7년 곱하기 70번 하면 이제 490년이 됩니다. 사울 왕 때부터 그들은 계속해서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70번을 490년 동안 안식년을 안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벌로서 70년간 포로되게 하시고, 70년간 그들이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만큼, 70번 안식년 기간 동안 이 땅이 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사상을 따라서 결국에는 우리가 높이 쌓아야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우리가 농사를 지어서 우리가 곡식을 길러서 먹고 살아야 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에 가서 살게 됩니다. 그것이 이제 그들의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 바벨론에서는 시편 한 군데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37편입니다. 여기 이제 그 바벨론에 가서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시 137:1-5).
여기 이제 바벨론에 포로되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바벨론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노래를 좀 불러달라, 이렇게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포로되어 온 사람들은 내가 그 노래 부르는 재주를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내 힘으로 살아야지, 그게 참된 나의 행복을 이루는 길이야. 이 세상의 사상을 따라서 쫓아가다 보면 이와 같은 결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차라리 내 재주를 잃어버리기를 원한다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재주를 힘입어서 살아야지라고 한 사람들, 결국에는 차라리 그것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주가 그냥 다른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이 세상에서 오락거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가장 나에게 복된 것임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참된 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나의 재능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참으로 기쁘고 유익하고 의미 있게 사용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요한일서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요한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무게가 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유익하고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의 재능이 합당하게 사용되는 그것을 이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이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과 이 세상과의 계속되는 그 갈등이 여기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싸워 이겨야 되는지도 계속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말씀을 의지하여, 이 세상과 구별되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을 우리가 살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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