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기도의 본 > 강성찬 형제님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번 시간에는 이제 '기도'에 대해서 교제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난 히기스 형제님 집회에서도 유다서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기도하며"라는 말씀을 함께 나눈 적이 있는데요. 이 기도에 대해서, 특별히 우리 주님의 기도의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참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고, 또 기도의 중요성을 알려주신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가운데에,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가운데에, 그렇게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볼 때에,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특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금방 읽은 이 35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그런 여러 기도의 때 중에 한 군데를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이제 기도하셨습니다. 저도 가끔 의도치 않게 일찍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 듭니다. 그 고요함 가운데, 그런 아침에 신선한 공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특별히 더 기쁨과 축복이 있는 것을 이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참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도 또 그러한 경험을 자주 해보시기를 경험을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제 새벽에, 그 아침의 시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아침을 시작하신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에, 참 우리의 그 모델, 그 이상적인 그 하루의 시작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또 성경을 읽어가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이 새벽 아침에 사람들이 없는 그런 곳에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한 케이스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42).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라고 하는 한 사람이 이제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신 장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그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여기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42절에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서 볼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항상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듣고 계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게 하시려고 이제 이 부분에서는 특별히 소리를 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새벽 미명에" 주님이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 주님은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이 땅에서의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가운데에,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는 가운데에 거니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 주님은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 가운데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가 복음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기도의 모습, 이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우리는 그 주님의 기도의 모습에서 그 기도가 어떤 것이고, 그리고 그 기도 가운데 우리는 어떤 복을 누리는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복음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복음은 이 사람이신 우리 주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우리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 복음 3장에 가서 보게 될 때에 여기서는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누가 복음 3장 21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쌔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이 누가 복음에서만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실 때"라고 덧붙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님의 모습에서 첫 번째로 '기도의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침례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셨습니다. 침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침례는 그냥 겉으로만 봐도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요단강 물 속으로 들어가시는 그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히 여기서 세례라고 하지 않고 '침례'라고 읽었습니다. 이 성경에 기록된 원어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 요단강 물 속에 내려가시고 잠겼습니다. 기도는 '내려가서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침례라는 것은 내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한 사람이 물속에 이렇게 깊숙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물속에 장사 지내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물속에 장사 지내시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주님의 기도의 모습에서 첫 번째 배우게 되는 그 기도의 태도는 기도는 '겸손한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도 한번 찾아보려고 하는데요. 창세기 4장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그래서 우리는 26절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말씀을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시점에 대해서 셋이 아담 맨 인류의 첫 조상, 이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 중에 하나가 셋입니다. 그리고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습니다. 그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이 '부서지기 쉬운'이라는 뜻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것을 이 에노스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이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앞에 그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아들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 인류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 가인은 다른 곳에서 살인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첫 번째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번째로 창조되었고, 그들 가운데서 태어난 가인은 첫 번째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배우지 않고 그는 자기 아우를 죽이는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마음속이 스스로 얼마나 악한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많은, 그리고 그 가인의 후손들이 또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 앞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혼란과 그 어둠 가운데서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안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사람들은 정말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 구약에 기록된 그 기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누가 복음 말씀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이제 우리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18장입니다. 이 18장 전체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부분은 불의한 재판장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뒷부분은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 내용이 길지만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14).
여기 이제 두 가지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나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이 누군지 그걸 오해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뒷부분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기도드리는 사람, '기도드리는 자신'이 누군지 오해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되고, 기도하는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오해하지 말아야 된다고,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이 불의한 재판관이 나오는데요.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제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하십니다. 이제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도 이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하시겠느냐? 이것을 이제 설명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나쁜 예를 '하나님이 그런 분이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실 사람들은 불의한 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나쁜 부모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겐 좋은 것을 주거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나쁜 부모도 자기 자식한테는 좋은 걸 준다는 겁니다. 가장 나쁜 예를 들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선한 부모다. 선한 부모는 얼마나 너희들에게 좋은 걸 주시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반대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불리한 청지기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이 세상의 불의한 청지기, 이건 이제 우리에 대한 건데요. 이 세상에 불리한 청지기,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 버리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그 불의한 청지기도, 그조차도 지혜롭게 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조차도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는 겁니다. 하물며 정말 선한 청지인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지혜롭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나쁜 청직이도 지혜롭게 대비를 한다면, 우리들은, 선한 청지기들은 얼마나 더 미래를 잘 대비해야 되느냐? 이걸 이제 극단적인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계시는 거죠.
여기도 극단적인 예가 나옵니다. 불의한 재판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재판해버리는, 그런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참 우리가 불의한 재판관을 만나면 얼마나 낙심되겠습니까? 내 이 원통한 일을 해결해 줄 것은 이 심판밖에 없는데, 이 과부는 세상에 의지할 데가 하나도 없고 그래서 결국에 그것을 이제 재판에 가져갑니다. 이 재판관이 이 과부의 그 원통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올바로 그것을 해결해 줘야 됩니다. 그런데 그 재판관마저도 불의하다면 얼마나 낙심되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의한 재판관으로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얼마나 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이걸 들어주시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겁니다. 결코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너의 말을 들어준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의로워서가 아니고 귀찮아서 너의 말을 들어준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이 과부가 자꾸 와서 자기를 귀찮게 하니까, 그게 너무나 귀찮아서, 이 사람은 그 과부의 사정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가 옳고 그름인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아서 그 과부의 사건을 해결해 줍니다.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도 그렇게 하는데, 하늘에 계신 의로운 재판관께서는 얼마나 너의 말을 들어주시겠느냐? 이거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그 일이 해결이 되지 않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의롭게 해결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에게 너무나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다.
이걸 말씀하신 것이고,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기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나옵니다. 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고 돼 있는데, 이게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은 "저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않고, 저는 이렇게 잘 하고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사실 그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러 나와서 자기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저는 이렇게 잘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왜 기도하러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옵니다. 내 자신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 봐야 됩니다. 기도할 때 바리새인처럼 나오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기도를 잘하려고 합니다. 잘 해야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저는 영국에 있을 때 우리 모임에 말씀을 아주 잘 가르치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책이 번역되어서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데이빗 뉴엘리라는 형제님이신데 말도 굉장히 빨리 하시고 말을 엄청나게 잘하시는 분이에요. 앞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걸 들어보면 말을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저한테 개인적으로 이런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도 기도할 때마다 이 머리가 갑자기 하얘지는 것을 경험하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리고 그런 게 있을까 봐 너무 두렵다고 얘기를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이 바리새인은 내용이 잘 준비되어 있어요. 말을 써보면 이 사람의 운율이 잘 맞아요. 보면,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게 아주 리듬이 잘 맞게 쓰여져 있습니다. 자기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여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기도는 잘 준비했지만은 기도의 태도에서 일단 틀려 있습니다. 기도는 에노스와 같이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 드리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서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경험해야 됩니다. 세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쳤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입을 열어서 지금 기도를 해야 되는데 지금 말을 하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냥 다만 가슴을 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라는 말뿐입니다. 이게 기도에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기도의 이러한 자세를 잃어버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그 자세를 잃어버리고, 내가 그 앞에서 이 가슴을 치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틀린 겁니다. 이 바리새인처럼 말은 잘했지만 다 쓸데없는 기도만 한 겁니다. 자기 자랑만 한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세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을 해 주십니다.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가느니라" 세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 겁니다. 그 말 못하고 서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서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약 4:13-15).
여기 이 앞에 보면 어떤 사람이 나오는데 잘 계획한 사람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입니다. 내가 이제 앞으로 1년 동안 이 도시에 가서 오늘은 이거 하고, 내일은 이거 하고, 그래서 이렇게 해서 이득을 보리라 이렇게 딱 말을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너는 너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너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이게 너의 인생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너희는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은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주의 뜻이면', 주가 허락하시면, 주께서 인도하시면 우리가 이것 하기도 하고, 아니면 저것 하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 세워야 세우는 것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본적으로 그 정신이 주님의 뜻이면,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 생각으로, 내가 다 짜고, 내가 이거 이거 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주님을 의지하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은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앞으로 1년은 이렇게 이렇게 살 거야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이면 이것을 하겠거니'라고 하는 것이 그 우리의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도 기도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그 1초, 1초,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이 유다서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부서지기 쉬운 그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우리가 기도의 모습을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낮아지실 때에, 그 죽음을 상징하는 그 침례를 받을 때에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누가 복음 그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복음 3장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결과는 하늘이 열리는 겁니다. 참 이 땅에서, 이 낮은 데서 기도하는 것인데, 그 순간 이제 하늘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늘로 인도합니다. 그 높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그 곳으로 인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한 군데를 이제 인용을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찾지는 않겠지만 참고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여기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 악망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 땅에 피곤할 수밖에 없는, 그 힘이 없는, 부서지기 쉬운 그러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이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그들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고 하늘로 쭉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하늘로 높이 올라가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이 피곤한 인생길에 힘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선한 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하늘의 위치에서 우리의 인생을 다시 돌아볼 수가 있게 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높이 올라갔을 때에 그는 높은 곳에서 저 멀리까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 보면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등산을 해보는 게 좋은 것이 높은 산에 올라가 보면, 그렇게 큰 높은 산이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북한산 한 800m 정도 되는 그 정도 되는 산에 올라가도 서울이 얼마나 이렇게 작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매몰돼서 살아가고 있다가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그렇게 나의 마음을 다 빼앗아가 버렸던, 그게 전부인 줄 알았던 그런 것들이 얼마나 작은 문제였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을 얻는 것입니다. 새벽에, 조용한 순간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늘 높이 올라가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멀리 보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더 먼 공간까지, 단지 오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이 인류를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끝내실지, 그 전체적인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는 이 현재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시선'을 기도할 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시선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께로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누가 복음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침례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그리고 그 하늘에서 성령이 우리 주님께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이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누리는 또 한 가지의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확신이 있는 분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신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사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그러한 것입니다. 참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확신'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만나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확신을 어디서 얻게 되냐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우리 마음속에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 시간에, 복음 시간에 그 십자가의 강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 십자가의 강도가 주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그에게 주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결과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강도에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침례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그분 위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참 우리 모두가 참 이런 것들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누가 복음에 이제 이것과 관련돼서 9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 9:18-20).
여기 이제 놀라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 신앙 고백이 어느 시점에 있었냐는 것을 누가는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8절에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실 때에 그리고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셨고, 그리고 베드로가 이 신앙 고백을 한 것을 우리는 누가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사실 이것이 기록된 마태 복음에서도 보면은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알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함께 생각해 볼 때에 주님께서 이 계시를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리고 그 계시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주님이 정말로 그리스도인 것을, 그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기도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했고, '하나님의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하게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하고 확신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 집회 시작할 때에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사 이 진리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학교 시작할 때 그 아이들을 모아놓고 또 기도를 합니다.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러한 분위기가 지금 여기에 나와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참 믿기에 느린, 그 깨닫기에 둔한, 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치 주일학교 학생들을 앞에 두고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기도하시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서 주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기도할 때의 계시가 주어진 것을 여러 사건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에 여러 가지 예언이 있지만 그 예언의 뼈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그 예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히 이 시간과 관련돼서 그 하나님의 인류의 역사를 다루시는 그 다루심의 역사에 대해서 뼈대가 되는 그 예언이 다니엘서 9장에 있습니다. 다니엘서 다니엘 70이레를 우리가 그 예언의 뼈대라고 말을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경영하실지, 그리고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실지, 그것을 어떻게 마감하실지가 다 그 시간표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예언이 언제 주어진지 알고 계십니까? 다니엘에게 그 하나님의 시간표가, 참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가 언제 오시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언제 고난을 당하시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언제 다시 그 모든 것을 다 원상 복귀시키시러 오시는지, 그걸 다 시간표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진리를 다니엘에게 언제 알려주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다니엘서 9장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또 놀라운 계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분별이 없이 하나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이방인은 개와 같았습니다. 절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함께 기업을 누릴 수 없는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가 언제 주어졌냐면 이제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져 있는데요. 그 베드로가 "기도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참 이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지 않으셨음을, 환상 가운데 베드로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중요한 계시들이 전부 기도할 때에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시라고 보면, 계시라고 한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그래 말씀을 읽어야지, 말씀을 알아서 우리가 그걸 알게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건 이제 기본적인 지식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 그 말씀의 의미가 이거였구나라고 깨닫는 것은, 우리가 겸손히 기도할 때에 깨닫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무릎 꿇고 있을 때에, 그때 이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8-29).
여기도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신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게 변화산 장면인데요. 우리 주님께서 어떤 산에 올라가셨는데 거기서 우리 주님의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변화산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특별히 누가 복음에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변화산에 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변화되신 것입니다.
이건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이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변화됩니다. 기도할 때에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유일한 딱 한 가지 방법은 영광스러운 존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로는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야, 너 이거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사람은 죽어라 말을 듣지 않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영광을 볼 때에, 그 영광 앞에 있을 때에, 그것을 보고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한 가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출애굽기 말씀입니다. 여기도 영광스럽게 변화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이냐면 이제 모세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써주셨는데 그 돌판 2개를 들고 이렇게 내려오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그 돌판을 받아서 이제 내려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내려오는 장면을 사람들이 봤더니 모세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의 꺼풀에 광채가 나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제 우리가 이제 금방 이 구절을 보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있었으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나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하게 보면 "여호와와 말씀하였다"라고 돼 있습니다.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다. 특별히 '말한 것'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말한 것, 그가 하나님께 말씀을 듣기도 하였지만, 특별히 모세가 하나님께 말한 것도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에 더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모세가 그 신의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지고,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그의 얼굴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얼굴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한 거야?'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모세가 그 시내산에서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 앞에 구절을 보면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이 앞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인데 모세가 잠깐 안 보이는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서 이 우상이 우리를 구원하였다라고 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참 이렇게 어이없는, 참 희망이 없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벌 주시려고 하자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알았기에, 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기도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더욱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기도는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안 것을 또 기도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와 말씀할 때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입니다. 더욱 그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변화된 것입니다. 이게 기도의 모습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낮은 장세 낮은 자세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 하나님을 의지해서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이게 기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가 복음에서 나타난 주님께서 기도드리는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통해서 이러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참 우리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이 모두가 참 이런 기도의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이 은혜를, 축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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