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기는 자들

박이레 2026. 1. 6. 22:54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기는 자들 > 강성찬 형제님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1-8).

예,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대전 중구 모임에서도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을 성경 읽기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아시리라 생각이 들지만요. 아직 익숙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이 시점은 이제 '영원한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이 다 없어지고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못에 영원토록 있게 됩니다. 그게 이제 우리가 읽은 이 마지막 8절 말씀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이러한 자들은 모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모세에 참여하려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것은 앞에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그 둘째 사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 영원토록 이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에 반해 이제 하나님을 믿은 자들, 그 성도들은 부활에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그 특별한 거주지에 대해서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에 대해서 특별히 7절에서는 "이기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기는 자들이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이기는 자들이 둘째 사망을 겪게 되는 그 불못에 던지게 되는 그런 불신자들과 대조돼서 이 이기는 자들이 새 예루살렘 성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기는 자'가 그러면 누구인지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이제 성경에서 이제 믿는 자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이제 그것을 이기는 자라고 특별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기는 자라고 표현하냐면은 그들은 이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믿는 자들의 특징은 그 안에 이기는 것이 있습니다. 이긴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기는 자에게 있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를 말할 수가 있는데요. 그 세 가지가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8절에서 나온 그 세 가지를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없다고 말하고 아주 대범하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평가하는지, 특별히 내가 하나님을 따른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다고 하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왜냐하면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핍박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도 죽였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반대하고, 조롱하고, 그리고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핍박, 사람들의 반대를 두려워해서 믿지 않는 것,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있는 첫 번째 도전, 어려움은 이 '세상의 핍박'입니다. 이 8절에서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이렇게 두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특별히 세상을 두려워해서 믿지 않는 것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죄악된 본성대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흉악자"라는 것은 '가증하다'라는 단어로도 번역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자신의 정욕대로 살게 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런 정상적인 자신의 욕구를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증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욕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식욕이 있고 또한 성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테두리 안에서 사용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이제 가증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이제 구약 성경에서 이 흉악자 할 때, 그 흉악이 사용된 단어를 보면 '비정상적인 그런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이 가증하다, 이제 흉악하다, 이렇게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살인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그대로 절제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데 나간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 통제되지 않고, 자신의 미운 감정을 따라서 자기의 이기적인 본성을 따라서 행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음자'들은 역시 자신의 성욕을 절제 없이 사용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나오는 그룹은 '자신의 정욕대로 산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성도들은 '이기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도들에게 있는 두 번째 도전은 자신의 정욕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더 이상 그 정역대로,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지 않겠다라고 그는 분명하게 믿는 가운데에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통제하는 가운데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미혹하는 모든 거짓말'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술객이라는 것은 이제 심령술, 귀신들을 가지고 점치는 그런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제시하신 그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것과 상반되는 다른 우상에 대한 것들, 사단의 거짓말들, 그런 것들을 따르는 것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이 사단에 연결되어 있는 그런 거짓된 신령술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거짓된 사상 체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는 모든 거짓말들이 이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믿는 자들이 직면하는 또 한 가지의 도전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여러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비튼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된 사상과 논리 체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믿는 자들에게 있는 도전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 가지 것에 대해서 모두 믿는 자들이 이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이 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이제 진리를 쫓아가는 이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거룩한 성품을 따라서, 그 생명을 따라서, 썩어지는 정욕대로 살지 않는, 그래서 의로운 삶을 사는, 그래서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래서 이기는 자들입니다.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이제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들이 그 예루살렘 성을, 그 새로운 예루살렘 성에서 살고 있고, 그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이제 이들이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이라는 것은 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말로 하자면 서울,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제 서울도 이제 '한성'이라고 불렀죠. 그런 것처럼 여기 성이라는 것이 단지 그 성벽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성'이라는 것은 '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 성이라는 것은 그 한 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기는 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앞에 말씀드린 그것과 대조되는 이 세 가지 사람들, 두려워하는 사람들, 자신의 정욕대로 산 사람들, 그리고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사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이 영원한 때에서는 불못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고요. 성경에 이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성이 나옵니다. 사실 이 성경에 이 도시라는 말이 언급된 곳을 살펴보면 3개의 성이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이제 창세기에 보면 '가인이 쌓은 성'이 나옵니다. 그게 이제 성경에 기록된 이제 첫 번째 성입니다. 그리고 좀 이제 가다 보면 '바벨'이라는 성이 나옵니다. 이것도 이제 성경에 나오는 이 두 번째 성입니다. 또 조금 더 가다 보면 창세기에 '소돔성'이 나옵니다. 이게 이제 성경에 기록된 이 세 번째 성입니다. 이 성경에 기록된 처음에 새 성을 보면 이기는 자들이 사는 성과 정반대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 성에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기는 자들이 아니라 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거기 삽니다.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거짓말에 속아서 진리가 아니라 거짓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말로 사는 사람들이 거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에 나와 있는 새 성을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대조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삶의 태도로 살아야 되는가를 한번 교훈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창세기로 가서 첫 번째 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3-17).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4).

여기 이제 가인이 나오는데요.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나서 자신이 잘못한 죄로 말미암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호를 말씀해 주십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을 면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 잘못한 가인에게 "그래도 너를 보호해 주겠다."라고 하셨는데 가인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16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그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앞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17절에 "가인이 성을 쌓고" 자기가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호하려고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는 이제 자기를 보호하려고 성을 쌓고 이제 거기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하고 있는 말을 보면 더 큰 폭력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의 후손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 일진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이리로다." 그 가인의 후손 라멕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건드리면 77배나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이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호하기 시작하면 그 보호의 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더 큰 보복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보복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건드리면 너한테 더 큰 해를 가할 거야. 네가 나를 한 대 때리면 나는 7대 때려줄 거야." 여기서 7대 정도가 아니라 77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제 번역에 따라서는 "70번씩 7번 할 거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과 정반대죠 우리 주님은 이른번씩 일곱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70번씩 7번, 거의 무한대로 너를 보복할 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자기 보호'입니다. 사실 보호가 아니라 더 큰 폭력을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한 사람은 또 가만히 있나요? 그 사람은 더 큰 보복을 약속합니다. 또 당한 사람은 더 큰 보복을 약속합니다. 점점 더 이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보호하는 그 모습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보호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이 지키시겠다고 한 것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희가 창세기랑, 앞에 읽었던 요한계시록 말씀을 잠깐 반복해서 이제 왔다 갔다 할 텐데요. 다시 이제 요한계시록 21장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면 거기에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하나님의 앞을 떠난 것과 정반대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이 이기는 자들이 거하는 이 새 도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보호'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장막으로 우리를 덮으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의 위협이 있을 때에, "너 나한테 해코지하면 내가 7배로 갚겠다." 이렇게 말을 안 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속으로 '내가 기회만 있으면은 갚아줄 거야.' 이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영원토록 살게 될 우리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자세는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70번씩 7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가장 잘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보복을 위협한다고 해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4절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가지고 무슨 일이 있냐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 이것은 단지 그 영원한 나라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히 "그 눈물을 씻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폭력이 안 좋은 게 뭐냐면, 폭력은 우리 마음속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폭력을 당한 사람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당한 그 폭력, 그것에 대해서 트라우마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고를 당해서 그 트라우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지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폭력 문제가 다 해결됐지만, 더 이상 나한테 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그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지금도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는 그것조차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반대일 뿐만 아니라 그 반대를 넘어서는 치료입니다. 사람들은 폭력을 행사해서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로 그 폭력의 흔적까지도 없애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보호입니다. 우리를 어떠한 위험에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고가 남긴 그런 것까지도 모두 제거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분을 우리가 지금도 의지하고 그분 앞에서 그분의 임재를 누리면서 그분의 보호를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보면 이제 "다시 사망이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앞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망'이라는 것과 '다시'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망은 계속해서와 어울립니다. "다시 없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단어입니다. 사망은 우리에게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제 한 부친님을 심방하고 왔는데요. 이제 거의 돌아가실 때가 다 돼서 이제 병원에서는 곧 이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신 분이고 구원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한 나라에 갈 소망이 있는 분입니다. 그랫 이제 그분을 만나러 이제 가족들이 함께 갔는데 그 할아버지의 이제 며느리 되는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그 시아버지죠. 시아버지께, "아버님 하늘나라에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또 지금 아버님보다 먼저 죽어서 주님 나라에 간 시어머니, 아버지의 부인도 만나고, 그리고 당신의 아들도 만나고," 그 할아버지의 아들이 먼저 죽으셨거든요. 그 아들도 만나고, 그리고 손자도 만난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의 손자도 어렸을 때 죽은 겁니다. 그 며느리의 아들도 어렸을 때 죽은 겁니다. 죽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그러한 너무나 많은 죽음이 다시 없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죽음 때문에 얼마나 애통하고, 곡하고, 아픕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 사망이 다시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 완전한 보호 앞에서, 우리는 다시 그 사망의 폭력에 고통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보호'입니다. 우리는 이 보호를 가인처럼 어리석게 거절하지 않고, 참 그 하나님 앞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 가인이 첫 번째로 세운 성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교훈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이 성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성을 보기 위해서 다시 창세기로 가서 보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 11:7-8).

여기서는 두 번째 성경에 기록된 이제 바벨 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벨에 있는 사람들은 의논을 합니다. 서로 3절에 보면 "서로 말하되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이 것은 이제 사람들의 지혜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떠난,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꿔버리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그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또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자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진리를 자신의 생각으로 바꾸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의논하고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변경하는 그 거짓말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상, 그들이 이것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그러한 사람들의 헛된 노력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거짓말을 분별해 내고 하나님의 진리만을 붙드는 그 이기는 자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 대신 자신의 생각을 따라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닿자", "자신의 이름을 내자" 그 자신들의 교만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까지 이르게 되냐면, 하늘에 닿기까지, 하나님과 경쟁하기까지, 그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보호는 77배나 되는 그 사람들의 폭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사람들의 사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하는 그 '교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바벨탑이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이제 그들은 각자의 쓰는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그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됩니다. 그 일은 멈췄고, 그들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야만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야만인이 되는 것입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사실 바보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살아보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대학원 공부까지 했지만, 영국에 가서 말을 못하니까 완전히 바보더라고요. 실제로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하늘에 닿기까지 한다라고 했지만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다 바보가 되었습니다. 이게 사람들의 추구의 결과입니다.
이제 다시 요한계시록에 와서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하게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뭐가 정말 참된 영광인가, 무엇이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가를 보게 됩니다. 21장 2절에 보면 그 성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여기 이 성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스스로 높아지는, "하늘에까지 닿아가지고 우리 이름을 내자." 이런 교만함이 아니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할 것 같은 그 겸손함, 그 정결함, 한 신랑만을 위해서 자기를 정결하게 지켜온 그 아담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성의 아름다움입니다. 정말 사람의 자기의 지혜가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결국 서로 야만인이 되게 하였으나, 정말 이 겸손한 모습,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 그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참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성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21장 조금 뒤로 가서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1).

여기 이 성을 봤을 때, "여기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밝게 빛을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요. 귀한 보석 같다. 이 보석이라는 것은 특별히 형형색색, 여러 가지 색깔을 내는 그런 이제 '아름다운 색깔'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첫 번째 그 성을 봤을 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모습은 이제 '밝은 빛'입니다. 그게 이제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되어 있는데요. 이 벽옥이라는 게, 우리 말로 벽옥이라고 하니까 이게 옥색인가? 이렇게 생각이 되겠지만 이 원어를 보면은 '밝다' 이런 단어입니다. 밝게 빛을 내다. 그리고 그 사용된 부분들을 살펴보면 이게 지금의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맑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렇게 맑은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뭐냐면, 맑은 투명한 그 밝은 빛이 있고 그리고 형형색색의 보석 같은 그런 빛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이제 한마디로 말하자면 밝은 빛, 그리고 여러 색깔의 빛이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뭐가 그런 빛을 내는가를 보면, 조금 밑으로 또 가셔서 보면, 18절에 보면 "그 성벽은 벽옥으로 싸였고" 이제 그 성벽이 다이아몬드로 쌓여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 자체는 정금이다. "맑은 유리 같더라" 여기서도 '정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는 지금의 금하고 다른 그런 금입니다. 지금의 땅과 하늘이 다 사라지고 이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입니다. 여기서 금도 지금의 이제 누런색 금이 아니라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인 것입니다. 그 금에 대해서 '맑은 유리 같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과 성이 맑은 빛을 내는 이제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 맑은 빛은 그 성벽과 그 성 자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석의 색깔은 19절에서 보듯이 그 성벽의 기초석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계 21:19-20).

여기 그 성의 밑에 있는, 그 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그 터가 이 12가지의 보석으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보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 전체의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빛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이 기초석에서, 이 밑의 터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 바벨성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바벨성은 높이 쌓아서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에서는 그 성 자체도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 밑에 있는 아래에 있는 터에서 장식을 아름답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정말 뭐가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보석'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분의 낮아지신 그 아름다운 인격, 참 그것을 보석으로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가지 색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 주님의 인격은 정말 풍성하게 우리가 여러 가지 면들을 살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다른 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러한 모습, 그것이 이 예루살렘 성에 그 아름다운 빛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 성은 사람이 의논해서 이렇게 하자 해서 하나님의 것 대신 자신들이 고안한 것으로 성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을 보면은 금 갈대로 측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계 21:15).

그리고 그 금 갈대를 가지고 그 성을 측량합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계 21:16).

금 갈대라는 것은, 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금갈대로 측량했다는 것은 이 성이 하나님의 신성에 합당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성의 딱 맞게, 일치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육면체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그 지성소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그 지성소의 모습이 가로세로 높이가 똑같은 정육면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바로 그곳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 전체에는 그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원리에 따라서 만들어진 성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성 전체에 거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 만든 그 바벨탑과 사람의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바벨 탑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바로 믿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 이러한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이용해서 높아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부끄러움이며 그리고 망하는 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참된 영광의 길임을, 우리는 성 예루살렘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성은 이제 '소돔성'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창 18:20).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이게 이제 어떤 장면이냐면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모습에 대해서 잠깐 한 군데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4-5).

이 소돔성에 천사들이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외부에서 온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들을 보고 그들이 롯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그 성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강간하려고 우리한테 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론대소하고" 그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아이든, 어른이든, 할 것 없이 다 모여서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의 그 도덕적인 타락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아브라함이 "그중에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말아주십시요."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 그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타버리게 됩니다. 이 불과 유황이라는 것이 여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사용되었는데요.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그 둘째 사망, 그 불못에 던지우는 자들이 겪게 되는 것도 이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지우게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똑같은 성격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돔성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스스로 보호하려고 했을 때 그 끝이 어딘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안전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거짓된 지혜로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 끝은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을 추구했을 때 그 끝이 어딘지를 보게 됩니다. 의인 10명도 남지 않는, 사람이 생각할 수도 없는 도덕적인 타락을 여기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 브레이크가 없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요한 계시록에 와서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정욕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결코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계 21:6).

사람에게 유일한 만족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수 샘물', 그분께서 값없이 주시는 이 생명수가 우리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참 이 예루살렘 성에는 '만족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시간상 이제 그러한 부분들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2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3-4).

이 3절, 4절을 보면 그 '만족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만족을 하냐면,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을 섬길 때'에 만족합니다. 사람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희한하게도 섬길 때 만족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나를 위해서 섬기면, 내 욕심을 채우고자 하면 결코 만족을 못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만족합니다. 그 만족의 모습에 대해서 4절에 "그의 얼굴을 볼 터이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3절에 이제 '다시 저주가 없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저주는 사람들이 죄를 범했을 때에 이 땅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들이 아무리 수고해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수고해서 힘들어서가 아니라, 수고했는데 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사람이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대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는 대로 합당한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우리는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추구와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된 지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기 가인이 쌓은 성에 사는 사람이고, 바벨이라는 성에 사는 사람이고, 소돔이라는 성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결국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결국은 이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기는 자로서 이 복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닮아 그분의 아름다운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며 만족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영원한 때에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이 대전 중구 모임에서 더욱 풍성하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