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

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박이레 2026. 5. 23. 19:08


< 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9일 일요일

예, 이제 한 번의 집회가 남았습니다. 제가 통역하는 형제님께 오늘 매우 힘이 든 하루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참 즐거운, 참 기쁜 그 피로감이 있습니다. 이 마포 모임 성도님들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참 여기 한국 방문하는 기간 동안에 저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 이곳에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저를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고, 또 여러 집회에 함께 참석해 줌으로써 동역해 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통역해 주신 김형제님과 또 강형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알아차리셨겠지만, 참 이 자켓을 입지 않고 또 힘들게 그렇게 일을 하신 두 분을 아실 것입니다. 참 이 통역을 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성경을 펴서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아마도 제일 잘 알려진 시편인 시편 23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새로운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내용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새롭게 상기시키고, 또한 격려를 받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6).

참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익숙한 그런 구절이지만, 참 이건 놀라운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참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참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잠시 생각을, 또한 우리의 마음을 이 앞에 두고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주님처럼 잘 돌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시편에는 세개에 아주 중요한 그럼으로 인한 선언이 나옵니다.
1. 우선 23편 1절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래서 저는 이 영어 성경 구절을 읽을 때에 이것을 이렇게 조금 다르게 읽곤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내게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첫 번째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4절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두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세 번째로 6절 마지막 부분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참 아주 담대하고, 참 아주 귀중한 그러한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고백에서는 '여호와께서 나를 초청하신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하게 보호'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 가지 소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고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안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5절과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공급'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분이 '충만'하신 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서 내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고, 그리고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은 특별히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이유로, 바로 이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3장에서 그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모세는 이제 그가 받은 사명 가운데서 주저하면서 "누가 나를 보냈다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러한 내가 너를 보냈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내가 '항상 존재해 왔고 그리고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그분의 이름입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지만, 그것이 사그라들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어떠한 다른 연료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그분이 존재하시기 위하여 다른 어떠한 필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며, 다른 환경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며, 그분은 온전히 홀로 만족되는 분이다. 이것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능력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자원은 결코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은 항상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온전히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특별히 신약적인 영어 단어로 하나님의 '아세이트'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 그분의 스스로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외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스스로 온전히 충만하신 분께서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히 스스로 충만하신 바로 그분께서, 이제 시편 23편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생을 지금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주'시며, 그분은 '왕'이시며, 또한 그분은 '나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 가운데 일어난 일들은 이제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나의 태도가 바뀌어 버립니다. 무엇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응하면서 나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이 다 잘 진행되고 있을 때, 이제 나는 너무나 활기차고 기분이 좋고 이제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슬픈 소식 하나만 들려와도 우리는 금방 낙심되고, 슬픔에 잠기고, 그리고 힘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참으로 너무나 공감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참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승인을 갈망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참 우리와 상관없이 그분은 예전에도 그러신 분이었고, 또 현재도 그러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아세이트'라는 단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스스로 충만하신 것'을 말하고 있는 단어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존재와 상관없이 그분은 과거에도 그러신 분이고, 지금도 그러신 분인 것입니다.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3편 1절은 이와 같은 아주 놀라운 담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것이 단지 '4개의 단어'로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서는 네 단어인데, 영어 단어로서는 10단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들리기에는 한국어로는 한 27 단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지 4개의 히브리어 단어지만, 참 여기에 거대한 파도와 같은 아주 커다란 충격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참 이 신뢰하는 것, 우리가 만족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일터에서 열심히 노력해야만 얻는 그런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신뢰와 이런 만족감, 이것은 여러분이 어떤 돈을 많이 벌어야지만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신뢰하고 만족이라는 것은 어떤 탐심과 대조적인 것으로 여기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신뢰하고 만족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여기에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뢰와 탐심을 이제 여러분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 구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 여기서 나오고 있는 이 신뢰와 만족감은 내 스스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얻어야 되겠다고 추구하고, 내가 저것을 탐내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더 높은 것을 구하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복된 길은 "그 죄를 사함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1절에서는 이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가졌든지 간에, 여러분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든지 간에, 사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실제로 정말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졌을 거라고 이 구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때문에 그분을 모시고 있는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많은 필요들을 이 시대에 말하고 있지만, 제가 여러분들을 둘러보면 여러분들은 모두 적당한 옷을 차려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배고파서 굶주리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분이 있다면은 집회 후에 저에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분과 좋은 불고기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주께서 여러분의 목자시면, 여러분의 모든 필요한 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이제 잠시 멈춰서 깊게 우리는 안도의 호흡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돌봐주시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만족한 그 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양을 그렇게 누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양들이 이제 온전히 안도하고 만족했을 때, 그 목자가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했을 때, 그 양들은 그렇게 풀밭에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제 나는 그 목자를 신뢰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에만 양이 눕기 때문입니다.
더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마는 잠시 마가복음 6장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는 많은 무리가 주님께로 모여들었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참 영적인 목자로서 그들을 대하시며, 그들에게 가르치심으로써 영적인 양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때 이 많은 무리들은 굶주렸고, 그리고 이미 날이 늦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가운데 걱정을 하였고, 그들이 어떠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가복음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제 그들을 푸른 풀밭에 앉게 하라." 그것은 마치 이 시편의 23편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분은 선한 목자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는 '4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그 모든 행동을 바로 이 목자께서 행하고 계십니다. 2절에 "나를 누이시며", "인도하시고" 3절에 "소생시키시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인도하시는도다."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홀로 스스로 모든 필요한 것을, 충만하신 분인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그 다음 부분으로 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느 장소로 인도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장소는 바로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이고 그리고 의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두 장소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첫 번째가 푸른 초장이고, 2. 두 번째가 아주 잔잔한 쉴만한 그 물가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이제 헬리팩스의 도심의 중심지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는 저의 그런 모습을 보고 교회에 그 넓은 집을 놔두고 이제 번잡한 도시 가운데로 들어가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참 이 헬리팩스가 이 서울 시내만큼 복잡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내이기 때문에 거기도 아주 분주한 곳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도시에서 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도시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도시에 살다 보니 이제 그 시골 풍경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저로 하여금 느끼게 합니다. 그 도시 바깥에 그 한적하고 그 고요한 풍경의 모습을 다시 그리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그런 톤으로 그리신 것을 느끼신 적 있습니까? 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색깔이 초록색, 파란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실 우리의 눈이 아주 강렬한 색깔을 피해서, 그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도록 부드러운 색깔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그 빛으로 눈을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네온 사인이라든지, 여러 가지 화면들이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이제 사람들이 만든 공간 안에서, 이제 사람들의 밝게 만든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 푸른 초장이 무엇인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초록색 잔디를 보고자 하고, 파란색 그 물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목자께서 우리를 진정한 그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와 불안과 그리고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목자께서는 그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아는 분입니다. 참으로 이 목자와 함께 지내보신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그곳을 떠나서 혼자서 방황하는 것을 다시는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참으로 아직 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분의 어깨에 여러분의 그 걱정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이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23편, 이 시편에서는 바로 이 영혼이 잔잔하게 쉴 수 있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그 영혼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 앞에 나오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다음 구절에는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길'이라는 것은 특별히 여러 가지 마차들이, 트럭들이, 그런 무거운 짐차들이 다녀서 그 길이 닦여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누군가가 먼저 지나가서 그 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길입니다. 바로 그 길을 먼저 가신 분이 이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순종하심'으로 그 '의의 길을 먼저 가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분명히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 길로 가시고 이제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옳은 길로 가셨습니다.
'데이비 깁스'라는 분이 이 시편 23편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교제하신 적이 있습니다. 참 여러분들이 이 내용에 대해서 이제 잘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그 옳은 의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누구도 모르는 여러분의 생각이 그 길을 벗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23편은 우리 주님께서 복음으로 인도하시는 길 외에, 그것보다 더 푸른 초장은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 이럴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길이 옳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가야 되는 건 알고 있는데, 혹시 저 길이 더 푸른 것은 아닐까요? 거기가 더 행복한 길은 아닐까요? 우리가 혹시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재 의의 길로 가고는 있지만, 여러분의 생각은 지금 다른 곳에 향해 가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까? 그것까지도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위험 가운데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입니다. 발은 이쪽으로 가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으로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마음이 향하고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의의 길로 따라가는 데서 조금 피곤하고 지치기 시작하여, 이제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조금씩 벗어남이 마음속에 이미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참 여기에 여러분과 주님이 지금 가까이 걸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이 가고 있다가 아주 살짝 그 각도가 벗어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한 2도 정도가 어긋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23편의 3절 말씀은 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지금 걸어가고 있다면 그 마음속은 어디를 원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 '나는 결국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참 우리는 놀라운 목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자를 따라가는 그 길은 이 위험한 세상 가운데서, 많은 시험이 있는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로 다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다르길로 벗어나서, 우리는 진흙창에 빠져서, 아주 더러워진 채로 발견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그러한 진흙탕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만, 그러한 순간에 정말로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분에게로 나를 당기시고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는 예전에는 우리 주님과 아주 가깝게 걸어가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 지금 잠시 벗어났다면,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마음을 흥분시키시고, 다시 한 번 그분의 길로 회복시키셔서 그분의 풍성한 가운데 따라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길로 따라갈 때에 이 '성경책'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그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의의 길로 인도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말씀으로, 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고, 그리고 절제하고, 그분을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내 양은 나를 알며, 내 목소리를 듣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바로 우리 '목자의 음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루의 일과 가운데서도 너무나 많은 다른 목소리들이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참 우리 주위의 많은 방송의 소리들이, 여러분의 직장에서 다른 친구들의 그 외침이, 여러분의 학교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내용들이, 여러분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계속 흔들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다시 되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계신 것처럼 이와 같은 집회에 나와서 이 성경 말씀을 함께 듣고, 또는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이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바른 방향인지 우리의 그 초점을 다시 재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목자'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목자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양 무리에 두시기 위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그분께서는 결코 그분의 소중한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그 각각의 양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편 23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그분은 '나의 목자'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4절을 보게 될 때 놀라운 면이 있습니다. 이 4절에 보면 영어 성경에는 이제 굉장한 반전을 예고하는 그러한 표현이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절에서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제공하시는 안전'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러한 바른 길로 간다면 여러분의 삶이 아주 쉽고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여러분이 교회에서 잘 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주 좋은 직장을 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아주 훌륭한 아이들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동차도 결코 수리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아주 넓은 집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늙은 노년까지 살고, 또한 많은 자손을 둘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을 얻겠다는 그러한 복음에 대해서, 이 4절 말씀은 아주 반대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어떠한 어려움들도 없을 거라는 그런 성경적인 교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고 있지만,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는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하시는 일은 선하지 않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6절은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평하지 않는 말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다가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을 때, "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그 목자께서, 그 동일한 목자께서 또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참 여러분이 통과하고 있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주님의 골짜기가 아니라고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4번 주제에 대해서 1.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삶은 골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러한 '골짜기 가운데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는 그러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위해서 무장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삶은 이 '어둠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사망을 겪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어려운, 어두운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천보다 더 "아이고, 내가 죽겠어!"라는 그런 말을 하곤 합니까? 그 영어 표현으로도 아 거의 죽을 뻔했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실제로 죽진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 가운데서 그 죽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사망의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양들이 그 푸른 초장을 지나온 양들이 있습니다. 참 목자가 그들과 함께 있고, 그 옆에는 쉴 만한 물가가 흐르고 있고, 하늘에는 이제 햇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이제 그들의 집과 더 가까운 더 풍성한 초장이 있는 곳으로 양을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아주 깊고 좁은 협곡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해는 거의 질 것 같고, 그리고 그 산에 가로막혀서 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산 그늘이 져 있고 모든 것이 아주 어두워져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숲에 숨어 있는 늑대와 코요태와 그 들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양들은 '나는 이 골짜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죽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때로 그와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불확실하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건강에 문제가 있고, 또한 재정적인 문제로 있어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간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매우 수치스럽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참 우울증과 많은 걱정 가운데서 사실 거의 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러한 골짜기가 우리 삶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안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이 구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안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골짜기가 다 끝나서야 그 안전을 확보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안전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골짜기는 우리의 여정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골짜기가 결코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여호와의 집'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 때는 우리의 목자께서 이 GPS 같은 것이 없어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내가 어느 길로 인도해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해서 이 길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참 그분께서는 여호와이시고, 그분께서는 진실과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이 선한 목자께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전체를 걸쳐서 우리를 함께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 4절에서는 아주 큰 전환점이 나옵니다. 우리는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가 나를 누이시고", "그가 나를 인도하시고", "소생시키시고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4절에서 이제 앞에서는 계속 "주께서"라고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당신이" 우리 말에서 이제 '주께서'라는 것이 그냥 대명사, 이제 '당신이'라고 원어에는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인 다윗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그때 더욱 주님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주님에 대해서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그 목자께서 다윗 앞에서 부르시면서 "내가 여기 있다. 다윗아, 나를 따라오너라!" 이렇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다윗은 지금 이 어둡고 어려운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의 옆에 붙으셔서 그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지금 너와 함께 있다." 이것을 다윗은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어 단어로 이 시편 23편을 펼쳐보면,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이 표현이 이 시의 가장 중심부에 놓여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시를 기록할 때에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주제를 그 모든 시의 '가운데' 놓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는 위험하고 어려운 순간에, 바로 "'당신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가장 강조해서 가운데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제 아주 오래된 도시, 그래서 다 부서지고 폐허가 되신 도시를 지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깐 다른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도시를 지나가면서 자기 가족을 태우고 가는데, 이제 뒷자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누가 이 도시에 들어가서 혼자 한번 밤을 새우고 나올 수 있겠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뒷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자신이 하겠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래된 무너진 빌딩 앞에서 "그러면 이 건물 안에 들어가서 밤을 지새우고 나온다면 100만 달러를 주겠다. 누가 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그 뒷자리에 와 있는 아이들 어느 누구도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빠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제 내가 함께 그 밤을 지낸다면, 누가 나와 함께 갈래?"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내가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그와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무엇입니까? 다른 어떤 돈이 아니라, 바로 '누가 우리와 함께 했는지'가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로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신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계십니다.

잠깐 연습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해 보시고 이제 속으로만 한번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소리 내서 답변할 필요는 없는데요.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른 다음 문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가 주님께서 다루기에 너무 큰 문제입니까?' 참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맡겨드린 적이 있습니까?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 때에 바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물론 다윗이 그냥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이 무서운 골짜기를 갈 때에 그 위협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주님께로 가져가서 맡긴 것입니다. 그분에게 맡기고 그분이 자신과 함께함을 알고 평안을 누린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아주 경험이 많은 목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주께서 가지고 계시는 두 개의 목자의 도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무장하시고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막대기'는 단지 목자가 지팡이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사울 앞에서 다윗이 그가 사자와 어떻게 싸웠는지를 말할 때 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때때로 그 막대기 꼭대기에는 철로 쌓여져 있고 그래서 그 막대기가 아주 강력한 공격 무기가 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시편 2편에서는 오늘 오전 시간에 다루었듯이, 이제 그 왕께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목자는 그냥 연약한 힘없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자께서는 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신, 그 근육을 가지신 능력의 목자이시며, 우리가 대하는 모든 위협을 다 폐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막대기는 심판의 날, 그 마지막 날에 이 양들의 수를 계수할 때 사용될 것입니다. 그 막대기 아래로 양들을 지나가게 하시며 그 양들의 수를 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막대기는 그 '양들의 안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막대기가 그 목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볼 때에 양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라는 것은 그 주위의 '양들을 모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처럼 본성적으로 길을 벗어나는 경향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양들에게 그들의 길을 살짝 벗어날 때마다 목자는 지팡이로 다시 그들을 걸어서 데려오는, 교정하는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림은 다시 한 번 이 목자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한 회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구절에서 이 '주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씀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시편의 그림이 약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 푸른 초장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 '상 앞에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목자의 손에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있는 '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상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있으며 그리고 우리 주께서 그 초대를 하신 주인이십니다.
우리 캐나다에서는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됐을 때, 이제 손님의 자켓을 받아서 그리고 벽 옷걸이에 걸어 놓는 것이 그 주인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그 방문한 손님에게 필요한 슬리퍼 같은 것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대 이 시편에 기록된 시대에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는 그들의 손님의 발을 씻겨주고, 그리고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에게 마치 향품과 같이 제공해 주는 것이 주인의 의무입니다. 이 23편에 나와 있는 이 기름 부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나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위해서 기름 부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손님을 대접하는 그 '접대의 기름'을 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 이제 나는 그냥 불쌍한, 돌보지 않는 그런 버려진 양이고 주님께서 나 같은 자를 관심을 둘까?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놀랄 만한 그런 영적인 은사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나는 아주 잘 알려진 그 가문에서 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맨 뒷자리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그마저의 자리도 나를 위해 제공되지 않는 그냥 아무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상으로 초대하시고, 이제 결코 비어지지 않는 그 잔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 23편을 볼 때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목자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1절과 3절에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4절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5절에서는 우리와 함께 따라오시면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6절에 "정녕 나를 따르리니" 참 따르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출애기 33장에 보면 모세는 그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에게 그 영광을 보이시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며, 나는 선하신, 그리고 자비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계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말씀하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기 다윗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들을 우리가 더욱 알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계속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그들을 실제로 따라가고 있는 존재들이 그 악한 바로와 군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마포에서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집회에서 함께 이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 우리 인생의 모습이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 출애굽한 것은 단지 목적 없이 광야를 배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목자로서 우리를 분명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 집에 거의 다달아 왔습니다. 참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 여호와의 집에 다다를 때까지, 이 목자께서 우리를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돌보고 인도하심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따라가게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