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요단강 : 가나안에 속한 축복들, 영적인 전투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5월 18일
예, 제가 드디어 이제 한국 찬송가를 일부분이나마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그 구절은 제가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함께 또 식사에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와 같은 토요일에 집회에 나와주시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여호수아서 3장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말씀을 드린 후에 신약의 골로새서 말씀을 또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호수아서 3장 말씀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17).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 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수 4:8-9).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것 같이 하였더라"(수 4:14).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수 4:18).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3-24).
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두 번의 큰 그 물을 건너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홍해 사건이 보다 더 조금 유명한 것을 알고 있는데요. 그 홍해는 분명하게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기록한 것 같이 이 홍해 사건에 대해서 이제 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에서 침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다시 한 번의, 이 물을 건너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민수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민수기에서는 두 번에 걸친, 두 번의 두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롭게 나타난 그 새로운 세대에 대해서 이제 그들도 이 새로운 물을 건너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가데스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을 때, 이제 20세 이상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홍해를 건너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홍해를 건넜던 과거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인도자로 따르며 그를 신뢰함으로 그와 함께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지만 이제 요단을 건너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인도자 여호수아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들이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지, 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두 번째로 이 물을 건너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지, 또한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 두 번째로 물을 건너는 데 있어서 이제 상징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홍해'는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를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건짐을 받았으며 바로의 '노예된 상태'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우리의 대적에 그 노예된 가운데 있었으며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우리가 그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 이 홍해에서 말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이제 사단의 그 손아귀는 더 이상 나를 다시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홍해를 건넌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건짐을 얻었는지, 우리가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우리가 '어디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이 '가나안에 속한 그 축복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영적인 전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임을 또한 말해줍니다. 마찬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많은 대적들과 전투를 벌였어야 되는 것처럼, 이제 구원받은 우리도 많은 축복을 누림과 동시에 또한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대적들과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홍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강조되었다면, 이제 요단강을 건너는 데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해주신 일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요단강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느니라." 우리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나를 죽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죽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골로새서 말씀은 분명하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제 잠시 후에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두 가지 측면이 우리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이해한, 이 두 가지 측면의 십자가를 다 온전히 경험한 신자들이 누리는 복은 무엇입니까?
이제 20세 이상으로는 다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15세 정도 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하였고, 그리고 광야의 그 기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요단강 앞에 그 약속의 땅 경계에 다달았을 때, 그의 나이는 55세 정도가 되었을 것이고 이제 그도 아마 그의 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은 요단강을 건너는 가운데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아빠, 이게 아빠가 말했던 그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건가요?"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아빠는 여러분이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또 여기 다른 점이 있구나." 우선 같은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제 물들은 뒤로 머물러 섰고 사람들은 마른 땅으로 가운데를 건너가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고 그 뒤에 다른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그 건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인도자에 대해서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4장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또한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4장에서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모세를 경외한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도 그와 같이 경외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의 딸에게 "그래, 분명히 여기에 비슷한 점이 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대로 그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여기 분명히 비슷한 점이 있지만 또한 아주 다른 점이 분명하게 그에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참 여기에 특별히 젊은 형제 자매님 여러분들이 성경을 공부하게 될 때에, 다른 성경의 부분에서 같은 내용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도 유익한 성경 공부지만, 더욱더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가치 있는 성경 공부는 그 비슷한 두 가지 일들 가운데서 아주 '세세한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더 덧붙인 것들을 그 의미를 찾아내고, 하나님께서 여기서 빼신 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면서 다른 점을 생각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많은 것을 성경에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대조되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홍해'는 그것이 '밤'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낮'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홍해를 건너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준비 과정이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여호수아가 이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별케 하라라고 준비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홍해는 이제 그 거대한 물이 '양쪽 벽'으로 세워져 쌓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단강에는 그렇게 벽이 쌓여진 것이 아니라 그 강의 흐름을 끊으시고 그 밑에가 '흘러가 버리고 위에는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3.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널 때 이제 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잡고' 그의 손을 앞으로 뻗어가지고 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여호수아가 그렇게 손을 들지 않습니다. 이때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을 건널 때에 그 물이 갈라지는 것이 시작이 됩니다. 4. 그리고 요단강 홍해를 건널 때는 '애굽 병사들이 죽고 그들의 시체'가 해안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결과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12개의 돌'이 요단강 안에 놓여 있게 되며 그리고 다른 12개의 돌이 강가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투에서 건져내어 이제 '광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그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이제 그들의 '전투'로 들여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홍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건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건너가는 것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골로새서 2장에 가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신약 성경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그래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을 강조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장 20절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이것을 제가 특별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요. 우리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는 장사합니다. 그래서 2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이 '침례에 대한 분명한 그림'입니다. 이 물이라는 것은 그 죽음과 또한 무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침내를 줄 때 우리는 그를 물 속 밑으로 내립니다. 그것은 마치 장사 지낸 것과 같으며 참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요단강 물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그것을 건너서 다시 다른 편에 나왔을 때, 이제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침례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상징'이지만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어느 누구도 침례를 받아선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 새로운 삶을 받은 자들이, 이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분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산 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토미와 마가렛과 톰슨이라는 분이 이제 알래스카의 선교사로 1950년대에 방문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제 코퍼 강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주 물살이 굉장히 심해서 거기서 어떤 사람을 침례주는 게 적당하지 않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참 어떤 사람을 거기서 침례를 주다가 거기서 그 사람을 놓쳐서 그가 물살에 휩쓸려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 간증에 도움이 되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그 지류를 발견하였고, 거기에 그 물살을 막을 수 있는 댐을 톰슨 씨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침례식이 거행되게 될 때 모든 신자들은 그 작은 강의 한쪽 편에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톰슨씨는 그 안에 들어가서 침례를 주기 시작하였고 침례를 받는 자들이 한 사람씩 들어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침례를 받고 올라오게 될 때 여전히 물살로 인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편에 가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톰슨 씨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쪽 편에는 당신이 예전에 어디에 속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죽었으며, 장사되었으며, 이제 살아나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그 편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옛 삶은 모두 이쪽 편에 다 놓아두었고, 이제 여러분은 다른 편에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다른 편에 젖은 옷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그 새로운 침례를 받은 신자들은 이 침례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침례 자체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침례를 통해서 이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장사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
이제 여기서는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3장과 4장에서 이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를 성막에서부터 가지고 나와서 메고 가게 되는데, 그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이 언약궤가 그 땅을 지나서 그 요단강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3장과 4장에 걸쳐서 여호수아는 그 언약궤를 계속적으로 언급하면서 강조해서 언약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의 여러 기구들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바로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그 물가에 닿으면 그때 그 물이 멈춰주게 되고, 끊어지게 되리라."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물을 밟고 섰을 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이제 그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그 언약궤가 있었던 장소에서 그 언약궤와 함께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그 동일한 장소에서 영적으로 동일하게 연합되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상세한 것을 말씀을 드리자면 이건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인데요. 그 요단강의 차가운 물을 실제로 접촉해서 느낀 사람은 이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그 발바닥이 그 물을 접촉하였을 때 즉시로 그 물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실제로 그들은 물을 접촉하고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차가운 물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그분께서만 오직 그것을 다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저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고 여기에 요단강에 2개의 쌓인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록하기를 오늘날까지도 그 돌 무더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12개의 돌 무더기가 요단강 안에 쌓여져 있고, 그리고 또한 12개의 다른 돌무리가 그 강에서 3마일 정도 벗어난 길갈 쪽에 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돌 무더기는 요단강 속에 지금 쌓여져 있고, 다른 한 돌 무더기는 새로운 땅에 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단강 물을 멈추게 하실 때 그들이 건너는 위치에서 꽤 위에 부분에서 그 물이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왔고 그것이 거기서 멈췄는지, 그 특별한 성읍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을 오직 여기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우리가 주의 깊게 그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하는 지점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커피를 두 잔 마신 것처럼 정신을 맑게 해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른 한 강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강인데요. 이제 다른 한 비유적인 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이제 실제 어떤 성읍, 아담이라는 성읍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비유적인 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부터 이제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모든 인류에 흘러가고 있는 그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으로부터 흘러가고 있는 그 강에 대해서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 죄된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류'를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옛 사람은 너무나 부패해서 이 옛 사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옛 사람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은 것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옛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 사람을 이미 심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아담에 속한 모든 부패한 인류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을 또한 창조하십니다. 이 옛 사람은 부패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라는 '새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래서 아담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5-14).
우리는 9절과 10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개의 돌 무더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돌 무더기는 요단강 안에 있었고, 그것은 예전에 우리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 '물속에 있는 돌 무더기'는 내가 받았어야 마땅한 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부패하였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그 옛 사람이 그 돌무더기가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새로운 땅'에 또 쌓여져 있는 12개의 '돌 무더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강 속에 있는 그 돌무더기와 같은 옛 사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부활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요단강이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그 형벌을 받은 그것을, 그 옛 사람을 강 속에 있는 돌 무더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땅에 있는 그 돌 무더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어떠한 새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땅에 있는 12개의 돌 무더기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인 것을 말해주고 있고, 내가 지금 무엇인지,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받은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마땅하게, 또한 당연하게도, 위에 있는 것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위에 것을 찾는 것이 그 새로운 생명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참 그 생명이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그 생명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까먹고 있을 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되는 수준만큼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인도하신 그 축복을 우리가 다 깨닫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리는 "너희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저는 아직 그것에 대해서 죽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느끼지 못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이 땅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발에 그 물을 느끼지 않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요단강을 실제로 건넜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심판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저 대신 경험하였고, 그것을 느끼셨고, 이제 저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을 느끼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실에 기반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구원을 주신 것을 믿고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이 말씀을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믿음만이 우리를 붙잡아주고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홍해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이제 그분께서 우리를 그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의 더 풍성한 이해를 그 위에, 십자가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에서 배운 것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이제 그 요단강의 경험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또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생명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한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까먹고 그것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실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12개의 돌은 그 요단강 안에 있고, 또한 새로운 땅에 12개의 돌이 쌓여져 있다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그 교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로 보여주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 가나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믿음으로 살고 있는 이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의 삶은 '영적인 축복'과 또 '영적인 승리'를 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전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 가나안 땅에서 있었던 그 전쟁들을 기록한 내용들은 많은 면에 있어서 신약 성경에 에베소서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가나안 땅에 대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축복의 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워야 되는 영적 전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호수아에서 기록된 많은 전투들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골로새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 그 경계까지 인도하는 장면을 집중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에베소서에서는 그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서 그 땅 안에서의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애굽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광야를 통과해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어떤 측면에서는 가나안 땅 안에서 전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하고 있는 놀라운 장면은 그들의 이러한 여정을 시작하게 했던 그 홍해 사건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의 마지막에 남아 있는 그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시작점'이며, 또한 이 동일한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것을 여정을 '마무리하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계속해서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주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십자가를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에 대해서 마지막 한 가지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는데요. 저는 집회에서 졸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그것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강대상에 있을 때 집회에서 존 적은 없습니다. 참 여러분께서 잘 해주고 계십니다. 참 이 통역을 통해서 이와 같은 오랜 집회를 듣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후에야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에 그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측면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요단강을 건너는 부분에 있어서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받아서 전해준 자였고 그 율법의 수혜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승리의 승리를 얻는 그 유일한 길은 이제 모세를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특별한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세의 율법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도 없으며, 이 모세의 율법은 여러분을 성화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승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이 영적인 성장을 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신약 성경에서는 그 율법이 성도들에 대해서 죽은 것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골로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그들의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이제 이 복음과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섞여져서 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이 율법주의, 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우리를 조금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여기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안식일", 그리고 20절에 "세상의 초등 학문"들이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규칙을 지켜서는 우리 안의 거룩함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만이 우리 안에서 오직 '거룩함'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주의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절제 없이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계획 없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규칙을 지켜서 나에게 그리스도를 닮아내는 것을 만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지켜야 되는 체크리스트가 있고, 내가 하나씩 이것을 지켰다고 하면서 우리의 거룩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배움으로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 영적인 훈련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집회에 참석하고, 내가 오늘 읽어야 되는 한 성경 구절을 한 장을 읽었고, 교회에 헌금하고, 이제 그러한 것들이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준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예수의 이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그들에게 이러한 이러한 규칙을 지키라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아름다움을 말씀을 통해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 십자가의 빛 가운데 사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핵심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위에 것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부활하신, 참 승리하신, 영광 가운데 계신 이 구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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