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주님의 임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삶

박이레 2022. 10. 21. 17:45

< 주님의 임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삶 > 2022년 10월 16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1-3).

여기서 사도행전 기자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해 받으신 후에 또한 다시 살아나셔가지고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이 40일 동안인데요. "사십일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보면 우리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 후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을, 그리고 여러번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신 후에 계속 제자들과 함께 예전에도 그러셨던 것처럼, 죽기 전에도 그러셨던 것처럼 계속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고 왜 나타나셨다가 보이지 않고, 또 나타나셨다가 또 잠깐동안 보이지 않고 이렇게 하셨을까? 사십일간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모습과 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동안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쭉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됩니다. 주님은 곧 하늘나라로 올라가십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십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잠깐 그 약속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여기서는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 제자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것을 명령하시고 그런 일을 할때에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그런 명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고 또한 그런 제자들처럼 동일하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치고 또 지켜 행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떠나가시면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도록, 이제 그것을 준비시켜주는 단계가 그 사십일간의 시간입니다. 40일 동안 주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다시 만났을때에 금방 알게됩니다. '아, 주님이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구나.' 이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도 같이 있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저같은 경우도 두달만에 대전 중구 모임에 온 거잖아요? 그러면 "지난 두달동안 무슨일이 있었어요?" 이렇게 물어볼거 아니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잠깐 없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니?"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말씀을 이어나가십니다. 사십일동안 제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아, 주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주중에 그 제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아, 나는 못믿겠다. 나는 그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도마가 그 말을 할때에 주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제자들과만 이야기 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다음주일에 도마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셨을때 마치 계속적으로 제자들과 도마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도마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 손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부분이 있어서 요한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 21:9).

여기서는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가겠다 하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시고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제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 계셨지만 그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죠. 또 한가지 특징적인 부분이 우리가 금방 읽은 부분인데 주님께서는 이미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 놓고 계신 것입니다. 숯불을 펴놓고 그 위에 생선을 놓고 떡도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특별히 그 불이 그냥 불이라고 되어있지 않고 '숯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숯불이라는 것을 여러번 피워 보았는데. 여기있는 김태우 형제님도 자주 바베큐를 하시니까 아시겠지만 여기서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으려면 그냥 구원먹자, 해서 되는게 아니라 숯불은 미리 준비해야 됩니다. 한참 전에, 나무를 태워서 숯을 만든 다음에 그 다음에 숯불이 되는거죠. 나무로 고기를 구우면, 막 나무에서 안좋은 연기도 나고 붗꽃이 고기를 태우기도 해서 맛이 없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숯불을 만들어서, 시간이 걸리지만 준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숯불이 놓여 있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이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서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이 안계실때 일어났던 일들을 함께 있었던 것처럼 모두 다 아실뿐안 아니라 시지어 우리 마음 속도 알고 계시는 주님입니다. 심지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들이 어떠한 생각과 그로 인해서 마음속에 어떠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오히려 주님께 "당신이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요즘에 거기서 일어난 일도 모르냐?"고 말하였지만 사실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와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특징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을 하셨고, 그리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군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우리가 잘 알고있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지역교회로 모일때의 주님의 임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교회로 모일때의 주님의 임재와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개인적으로,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역교회로 모일때에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 있는 권위와 영광과 또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옛날에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집합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주님의 권위, 영광, 그 가운데 있는 질서,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생활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능력을,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능력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앞으로 말씀을 드릴텐데요.

우선 첫번째로 분명하게 해야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신비한 것이지만 어떤 이상한 그런 체험이 아닙니다. 예를 한군데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0-31).

주님께서 분명히 그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데 이제 제자들이 뒤늦게 주님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들이 알아 봤을때, 주님은 그때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환상을 본다거나 주님의 모습을 본다거나 이런게 초점이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고 하는것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 앞서서 경험한,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신,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그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될때에 우리는 그로 인해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격적인 그런 경험입니다. 단지 말씀을 지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런 교제를 말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처럼 주님의 임재를 경험햇는데 그것을 나중에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집회에서 말씀 교제를 들을때에 그 말씀을 집중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고 아멘하고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그때는 말씀을 집중해서 듣기 때문에 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집회가 끝나고나서, 그리고 생각해보니 알게되는 것입니다. "아,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구나." 우리는 말씀집회가 끝나고나면 그런 성도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듣게 됩니다. 제가 다음주에도 그런일이 있습니다만, 다른 형제님을 모시고와서 말씀교제를 하다 보니까, 성도님들이 말씀집회를 듣고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딱 필요한 말씀이었는데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그 강사는 사실 그 성도님을 염두해두고 한 말씀이 아닌데, 이제 항상 방문하는 곳마다 그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함께 하셨음을 우리는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의 특징은, 보다 더 친밀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보다 더' 예전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땅을 거니실때에 제자들과 나누었던 그 교제보다도 더 친밀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의 생명이 이제 우리 안에 있고, 그 생명을 통해서,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과 성령님의 교통하심 가운데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여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고 그리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도 범죄치 못한다고 말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 '범죄치 못한다.' 이런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체적인 태도가 죄를 짓지 않는, 죄를 짓지 못하는 그러한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생명이, 그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씨라는 것은, 특별히 여기서 씨라고 언급이 되어 있는데, 그 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 씨는 열매와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씨에서부터 싹이나고 줄기가 나고 나무가 되고, 그 씨가 모든것을 결정합니다. 그 씨가 작은 것이지만, 그 씨가 식물의 성격을 완벽하게 좌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은 그 씨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 씨가 우리 전체를,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씨가 바로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요한일서에서는 '거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두가지가 있는데요. 우리가 주 안에 거하시는 것이 있고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가지를 말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여기 나와 있듯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 그런 표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그때 우리는 주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6).

여기서 다시한번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이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맞는 말씀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면 주님이 행하시는대로 우리가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것이 역으로, 우리가 행하는것을 주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이 행하시는대로 우리가 행하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대로 주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약간 차이가 있는데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한다는 것은 덧붙여야 되는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때에, 그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때에 우리에게 능력을 주사 주님께서 역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주님께서 그것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 24절에 가 보면 3장의 전체적인 맥락이 어떤 거냐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를 돕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할때에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행함으로서 그 계명을 지키고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그 계명을 행할때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게 3장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그리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킬때에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그분의 임재를 능력으로 분명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주님께서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참 이것은 이와같은 면에서 더 친밀한 주님의 임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느끼는 것이고, 우리가 내적으로 주님께 힘을 얻는 그러한 임재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때에 우리는 많은 선한 결과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엠마오의 제자들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 24:17).

이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왜 슬퍼하고 있냐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꼐서 이제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슬픔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을때, 그들이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말씀을 깨달았을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참된 기쁨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때에 얻는 것이라고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기쁨을 너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통해서 주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의 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가 우리를 낙담하게 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이 우리가 그냥 지적으로 알고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특별히 그 말씀을 다루어 주시고 그 말씀을 우리 속에 해 주실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그렇게 경험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기쁨을 우리가 계속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두번째로 주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믿음을 굳게 합니다. 아까 잠깐 도마에 대해서 얘기 했는데요.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4-29).

믿음의 적은 교만입니다. 여기 도마가 처음에 하는 발언을 들어보면 그가 굉장히 교만한 상태에서 말을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 내가 직접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것은 실제로 "나는 그것을 안믿어." 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형제들이 증거를 말하고 여러번 강권하였지만 "나는 안믿어." 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장면들을 상펴보면 굉장히 영광스러운 주님입니다. 문들이 닫혀 있는데 그 가운데로 들어오시고. 주님의 부활하신 위엄과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굉장히 겸손하게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마에게도 "믿음없는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교만한 도마에게 오히려 겸손하게 다가가시는 모습, 그 도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기뿐만 아니라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음식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부르시는 모습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때에 뭘 느끼게 되느냐면 황송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께서 나와같은 자에게, 나를 이렇게 생각하시다니,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처럼 더욱 주님을 높이게 됩니다. 도마는 최고의 예배를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받기에 합당한 그 예배를 주님께 돌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이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시입니다. 이게 주님의 임재의 효과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할때에 우리의 마음이 더욱 낮아지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더욱 겸손하게 내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믿는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한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임재의 세번째 결과는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그런 장면인데요.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참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먼저이고 그 후에 우리는 다른 양을 먹이고 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여기가 우리의 점검하는 그런 부분이 되야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질문,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이 주님의 임재는 베드로로 하여금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여러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을때, 베드로는 주님께서 여러번 물으시기 때문에 근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제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사랑하지 않는거 같아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고 더욱 사랑하고, "제가 사랑한다는 말 외에 다른것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대답을 할수 없다고 베드로는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그는 더욱 그 사랑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 부분을 기록한 요한이 요한일서를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함께 보겠습니다. 왜 그런지, 왜 베드로는 그 앞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그 사랑이 더욱 분명하게 커지고 말할수 있게 되었는지를 요한일서 3장으로 다시가서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18-20).

요한은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20절을 약간 고쳐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원어에는 중간에 "하물며"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하물며라는 단어가 한국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원어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20절에 두번 나옵니다. 20절 처음에,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그리고 '하물며' 대신 그 다음에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일까보냐"도 그냥 들어간 단어고요. "하나님이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사랑의 적은 우리 양심이 우리를 계속 송사합니다. 특별히 사랑에 있어서 양심이 민감합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이타적인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내 양심이 내 마음에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에 그 마음이, 양심이, 자신을 송사하고 그 양심이 사랑을 주저하도록 사랑의 불을 꺼버리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그게 먼저입니다. 그리고나서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굳세게 하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우리 마음이, 우리 양심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하자. 더이상 그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고 계속 그렇게 하자. 또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우리의 송사하는 양심보다 크시고 모든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자. 우리의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모르는 어떤 상황의 제한 때문에 그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시고 우리를 격려하고 계시다. 더욱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하고 더욱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모든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도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것을 아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굳게하고 더욱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우리가 주님앞에 나올때에, 우리의 모든것을 아시는 주님앞에 나올때에, 우리는 더욱 베드로와 같이 주님께 의지하게 되고 더욱 주님을 사랑에 관해서, 더욱 주님께 맏기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100% 깨끗하게 사랑해야지, 하면 오히려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주님께 맏기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랑할때에 더욱 우리는 우리의 초점이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양심이 아니라, 주님께 두고 주님께 나아와 사랑하게 되는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주님의 임재를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을 누리고, 우리가 믿음이 굳어지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자라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그게 성경에서는 누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 16:6).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누룩이라는 것은 빵을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래 반죽이 적은 양인데 누룩을 넣으면 부풀어 올라서 크게 만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원래 있었던 것보다, 실체보다 더 크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우리 빵을 크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경건의 능력은 없지만 경건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말로는 경건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입니다. 형식적으로만 하는 것이죠. 사두개인들은 경건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들은 부활도 부인하고 천사도 부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때 당시에 제사장들을 말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은 잘합니다. 하지만 그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오히려 경건이 아니라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을, 그들은 제사장의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헌금을 착복해서 그들의 용도로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건을 부인하니까 이 땅에 속한 것들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이 실체적이고 실제적인, 이 내적인 주님의 임재를 놓친다면 우리는 겉모습만 하게되고 겉으로만 말로만 하게 됩니다. 누룩으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합니다. 알맹이가 없으니까 그럴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하라고 하신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우리가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눈에 쉬워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 내적인 진짜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냥 겉모습만 추구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겉모습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랬을때 참된 기쁨을 누리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의 사랑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게 진짜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확실한 많은 증거로 제자들에게 친히 살아계심을, 제자들과 함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증거를 받게 됩니다.
참으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대전 중구 성도님들께서 주님의 임재를 집합적일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적으로도 추구하며 그것을 누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