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모든 미혹을 이기는 방법 > 23년 2월 12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7-14).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게 된다면, 지난 시간에도 보았지만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그 여정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 광야의 40년 기간동안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격통케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노하시고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격동케 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보면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8절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출애굽기와 민수기 기록을 살펴 볼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광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첫번째 것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이것은 광야의 초반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1-2).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여기 출애굽하여 광야에 서두입니다. 그들은 출애굽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들의 노정 가운데 물이 없자, 그들은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해서 그 내용이 뭐냐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17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당장에 물이 없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신거 아니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어려움이 있지? 이 가운데 물이 있어야 되는데 없잖아."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이것은 우리를 죽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의 뒷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민 20:1-3).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지 40년이 지난 이후에, 그 광야의 마지막 그런 나날입니다. 거기서도 물이 없자 그들은 "아, 우리가 차라리 예전에 죽는게 나았었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기록된 것을 내용을 보면 처음에 일어난 사건과 비슷해서 같은 사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게 될 정도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독같은 태도로 4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차라리 죽는게 나았겠다,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없는 것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격동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처음과 그리고 지금을 돌아볼 때에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혹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조금만 나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원망하고,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 맞아? 이렇게 하고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에서 이것을 엄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시험하지 말라. 사실 하나님께서는 광야 내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거 맞아? 이렇게 했지만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항상" 항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약성경 말씀을 한곳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1-6).
여기 4절에 보면 그들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마셨으매 그 박선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제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그들에게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 광야에서 한 반석을 명하셔서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시고 그 반석을 치자 거기서 샘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물을 마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반석이 지팡이의 치임을 받아서 그 반석에서 물을 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반석이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광야 40년 내내 그 반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물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물론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동안 계속 따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반석을 상징하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물을 공급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땅 가운데 안좋은 일이 생기면 "이거 봐라,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공급과 돌보심과 은혜를 받는 신자들도 때때로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도 말입니다.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도 시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저희가 마음이 미혹되어"라고 말합니다. 사실을 보지 못하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 그들을 따르시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이 미혹되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도 우리 주님께 미혹하려고 했던 일이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네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해라. 하나님을 시험해라고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사단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그리고 대표적으로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미혹한 것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5-7).
여기 마귀가 광야에서,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받은 그 광야와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광야에 계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나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성전 꼭대기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그래도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저가 너를 위하여 사자들을 명해서 그들이 너를 손으로 받들어서 발이 돌에 부딧치지 않게 하리라.' 그것을 실제로 네가 입증해봐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네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라." 그렇게 여러분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시고 그렇게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거절하시고 정말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을 때 다치지 않고 놀랍게 보호된다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그러한 것을 거절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과 똑같이 시험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여기에 말씀을 이용해서 이렇게 미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단이 인용한 이 말씀을 찾아서 보면, 사단이 뭔가를 빠뜨리고 인용한 것을 보게 됩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여기 사단이 인용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어떤 부분이 빠졌습니까? 11절 후반부의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이 부분이 빠진 것입니다. 사단은 이 부분을 빼고, "그 사자들을 명해서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딧치지 않게 하리라.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반적인, 일상적인 평범한 길에서, 그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특별하게 희안한 기적을 만들어내야 그분의 존재가 입증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상들은 그렇게 합니다. 우상들은 그렇게해서 자기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뭔가를 해 봐라. 아주 어려운 것을, 어려운 일을 네가 나를 위해서 수행하면 내가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겠다. 사업이 잘 되고, 불치병이 낫게 되고, 이런 것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존재하는 신임을 입증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더 수준이 높은 것으.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특별히 내가 생각하는 이것을 해 주셔야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거라고 믿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길에서 나를 지키신다는 말을 빼버린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따르는 반석으로서, 그들과 항상 모든 환난 중에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길에서 그들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이 순간에, 특별한 방법으로, 물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참 우리가 이 미혹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다시 히브리서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단은 주님을 시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계속 유혹하고 있는데 그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있는거 맞아?" 이게 강퍅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서로 권면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혹되기 굉장히 쉬운 존재입니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히 3:16).
출애굽해서 나온 모든 이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왔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차 권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유혹되지 않도록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오늘 오늘, 하루 하루를 새로운 하루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잘 살아왔다 할지라도 오늘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늘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7절에 나온 것처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하나님께서는 매일 새롭게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구나, 그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13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뿐만 아니라 매일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말씀을 통해서 권면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도록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랬을때 우리 마음이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히 3:10).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 집중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생각할 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도께 집중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계속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계속 따르는 반석으로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에 낙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언제 그러냐면, 내가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마태복음 4장에서 읽었던 주님이 겪으신 시험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험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주님은 그 시험을 지금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아서 되겠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 멀쩡한 것을 보여서 사람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아라. 그게 네가 받아야 되는 마땅한 대우다." 라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가 '나는 이정도 대우는 받아야 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무엇인데.' 그리고 그 대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 정도 대우는 받게 해 주셔야죠. 그리고 그게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것이 맞는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주님은 그렇게 조롱과 멸시를 받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입증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이 받으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는 그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이러한 대우를 받으셨을 때에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욱 주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그분과 함께하는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만족 할 수 있는 비결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받으신 그 시험을, 이 자신을 입증하라는 시험 말고 다른 두가지 시험을 더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을 바라볼 때에 우리의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1-4).
그리고 앞에 읽은 부분은 건너뛰고 세번째 시험 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8-11).
우리는 광야에서 주님이 받으신 이 세가지 시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은 어려움들을 비교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주리셨습니다. 먹지 못하고 굶주리셨을 때에, 그때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뚯이 아니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배를 채우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주렸을 때에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광야에서 주려 죽는구나." "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내었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이셨습니다.
또 두번째 시험은 우리가 살펴 보았고요.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가 시험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깐 모세가 보이지 않았을 때,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경배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 사단이 주님께 이 세상 모든 영광을 보여주고 내게 절하면 그것을 네게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드리기만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조되는 우리 주님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 4장은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처음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생애의 마지막에서도 동일하게 이 모든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28-30).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목마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목마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메시아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을 때에 그분이 목마를 것을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굶주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셨고, 그리고 주님의 생애의 마지막에 있어서도 자신의 목마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복음서에서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조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네가 구원자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생애 처음에 사단이 주님을 시험하여 "그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 이렇게 시험하였던 것처럼, 사람들은 주님의 생애의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네가 메시아인 줄 알고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그 모든 피를 흘리시고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30절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머리를 숙이셨다는 것은 특별히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 주님의 생애 서두에, 초반에, 고난받지 말고 그냥 내게 절해서 이 모든 세상의 영광을 네가 취하라, 라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고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원해서 고난 받기 원하시고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에,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고난 받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께서 어떠한 그분의 삶의 순간 가운데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께 경배드린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분을 통해서 피차 권면하고, 이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 삶을,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우리에게 참된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에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잘 받아서 넘기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어려움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어려움은 그냥 우리가 체념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잘 넘어가야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어려움은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마땅히 채워져야 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죄의 정욕이 아니라, 그리고 피곤해서 쉬어야 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에 낙심하게 됩니다. 그럴때 우리 주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에, 미혹되지 않고,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알고 하나님의 길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그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굶주리셨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로 인해서 만족을 누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어려운 것이, 이것이 정당한 욕구였다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배고프면 떡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배고픈데 떡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그것을 이용해서 "야, 이건 너한테 당연히 있어야 되는게 없잖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단의 속삭임에 속으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럴 때에 우리는 놀라운 주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권리를 못누리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말이 이상한데요. 많은 사람들, 정당한 권리를 쉽게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 순간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되는 것이 없어본 사람들만이 주님께서 떡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오히려 굶주리시는 그 굶주림의 고통을 느낀 그 주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에, 이 부분이, 또 이 시험의 어려운 점입니다. 내가 다른 곳에서는 회사에 가면 사장인데, 모임에 오면 그냥 형제인 거예요. 회사에 가면 큰 기업이라 많은 직원들이 있고 다 직원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고 그러는데, 교회오면 그냥 한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대우인데 왜 저 형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그럴 때에 주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주님께서 얼마나 높은 분이셨고 그분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우리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 앞에 천사들은 손과 발을 자신의 날개로 가려야만 했습니다. 그분의 영광 앞에서 그들은 자신을 가리면서 그 앞에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영광을 누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서 오히려 죄인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에 그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순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영광을 원하고, 그리고 그 영광을 고통없이, 고난 받지 않고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난받지 않는 길이 있다면 항상 그 길로 갑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목적지를 생각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가지 경로를 생각할 때에, 고난 받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난받지 않고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어떠한 고난받지 않고 그분이 이 모든 세상의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께서 자원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에 그 주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전혀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는 가운데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그 고난을 자처하신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고난 받을 때에 원망하고, "나만 왜 이렇게" 되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정말 자원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오히려 어려움을 스스로 찾아서 할 때에, 우리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다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주님이 누렸던 기쁨입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경배해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하나님의 길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미혹되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가운데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참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서로 피차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계속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비록 우리를 이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미혹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계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견고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우리가 이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구원받을 때에 이 주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계속 이 주님을 붙잡고 살아 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가운데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함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대전 중구모임 성도님들이 더욱 이러한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의 삶을 즐거워하며 누리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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