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박이레 2022. 8. 26. 16:27

<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 2022년 8월 21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요한복음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이제 주님을 배반한 가룟유다가 나간 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예수님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듣게 될때에,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 '나의 것'을 여러가지를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금방 읽은 부분에서 "나의 평안"을 보았고요. '나의 기쁨', '나의 영광', '나의 계명', '나의 아버지', '나의 친구', '나의 이름', 이렇게 '나의', '내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부요하신 분인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나의 것이라고 부를수 있는것이 많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 주님께서 소유하신 것들은 그냥 잠깐 있다 사라져버리는, 우리가 흔히 내것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나의 돈, 나의 차, 이런 것이 아니라 정말 가치 있는 것들, 주님께서 그것을 나의 것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 중에 하나, "나의 평안"을 이번 시간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않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평안을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의 평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아니한, 참된 평안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은 평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평안의 모습을 생각할때에, 우리가 앞에 복음 시간에 읽은 것처럼 그 부자가 누리는 평안, 그런 모습을 평안이라고 합니다. 매일같이 좋은 옷을 입고 친구를 불러서 파티를 즐기는 그런것을 평안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코로나로 인해서 전세계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제 식량위기라고도 하고요.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기름도 원유 조달이 안되서 기름값도 폭등을 하고, 그래서 특별히 가난한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는것을 보게 됩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스리랑카 같은 나라들은 석유가 공급이 안되서 차를 운행하지를 못하고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폭동이 일어나고, 그래서 정부가 뭐하는거냐고 해서 거의 무정부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뉴스의 한가지 또 놀라운 사실은 그래도 부자들은 아무 상관이 없더라, 라는 것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자들은 여전히 큰차 굴리면서, 그 기름이 어디서 났는지, 큰 차 굴리고 다니면서 파티를 열고 오늘도 저 호텔에서는 누구의 으리우리한 결혼식이 열렸는데 큰 차들이 몇대나 와서 있었더라, 이렇게 뉴스가 끝나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그런 어려움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으까요. 기름값이 올라도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돈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모습을 평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커버할 수 있는,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에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할수있는 그런 것을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부자와 같이 어떤 것이 일어나도 자기와 상관없을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모르는 상태, 이것을 평안이라고 오해합니다. 부자는 죽음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요. 자기가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누리는 그런 떳떳함, 자유로움, 이것을 평안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사실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안은 죽어있는 시체가 누리는 그런 평안과 같은 것입니다. 시체는 세상이 별 일이 일어나도 걱정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뭐라고 말해도 시체는 걱정이 없습니다. 자기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이 죽었을때, 서양에서는 그것을 인삿말로 합니다. RIP라고 하는데요. 뭐의 줄임말이냐면 'Rest in peace'. 죽어서 평안 가운데 쉬고있다고  말합니다. 죽었을때 사람들은 평안을 누린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죠. 이 얼마나 잘못된 평안에 대한 생각입니까? 이 세상에서 추구하고 있는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시체가 누리는 평안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것도 나에게 상관없게 해줘. 어떤것도 몰라도 되게 해줘. 이것은 시체가 누리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참된 평안은 반대입니다. 주님께서 누리는 평안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영향을 안미쳐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지라도, 나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도 누리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몰라서 누리는, 그냥 무지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이 아니라, 알아서 누리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말함은", 내가 이것을 말해주고,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게 하고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리고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알아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서, 알아서 누리는 평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16장에서도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주님께서 일어날 일들을 다 말씀하시고 그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그래서 알아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확신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우리가 알고 확신했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확신할때에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것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에게 안좋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고통을 겪으면서도 내적으로 확신하고 있을때에 성령께서 알려주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확신하고 있을때에 우리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확신입니다. 이것은 결국에는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에게 평안을 말씀하시고 이것은 내가 혼자서 '이것이 진리야.'라고 확신하고 있을뿐 아니라 이 진리가 결국에는 승리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진리가 진리지만 힘이 없어서 지고 뭍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온 우주를 통치할 것임을 아는 그 확신,  그것 가운데서 누리는 평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르는게 약이지." "모르는게 맘 편하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알아서, 진리를 알아서, 그리고 이기는, 결국 그것이 옳은 진리라는 것을, 승리하는 진리라는 것을 알때에 평안을 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확신이라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큰 확신, 강한 확신이라는 그 특별한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네군데에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 네군데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그 확신이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개역한글).

여기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라고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확신'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때에 그것은 단지 말로 끝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확신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이 하나님의 진리는 놀랍게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확신 가운데서 전하는 것이고 드는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그 복음에 거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9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우상을 버리고"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 사회의 일반적이고 그것이 규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이 사시고 참된 하나님이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믿은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상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이 사람들만, "저 우상은 살아있는 신이 아니다. 참된 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격렬한 반대에 부딧치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것을 한 것입니다. 큰 확신이 없으면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게 복음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평안한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사람들이 "야, 너 왜그래? 우리는 이 신이 참된 신이라고 하고 있잖아.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우상을 섬기고 있잖아." 라고 말해도 그는 혼자서 하나님을 섬겨도 평안한 것입니다.
제가 학생집회때도 이런 말을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요. 우리가 영화같은데 보면 미래를 타임머신같은 것을 이용해서 미래를 알고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상상으로 한 것인데요. 그런 가운데서 미래에 어떤 로또가 당첨될지를 알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번호를 "이번주에 이 로또가 일등이야."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왜 안샀어? 이건 샀어야지. 다음번 번호 내가 또 알려줄게. 이거 사." 계속해서 그 미래를 보고 왔다는 사람이 말해주는 번호가 당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로또를 살려면 너의 전 재산을 걸어야 되. 또는 너의 생명을 걸어야 되. 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살수 있을까요? 저는 살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분명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 전 재산과 온 생명을 걸어야 한다면 그것을 걸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데도 확신이 안생기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예를 많이 듭니다. 이제 우리가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가보면 나이야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거기에 외줄을 걸어놓고 외줄타기를 잘 하는 사람이 이제 그 위를 자유롭게 걸어다닐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거기를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가 넘어지지 않고, 그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폭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내 등에 업혀서 같이 한번 외줄을 타고 같이 건너갔다올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했을때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업고 문제없이 왔다갔다 할수 있는 것은 알지만 거기에 맡길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큰 확신을 우리 마음속에 들게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게 사실 "아 그게 사실이지."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재산보다 더 큰것을 거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확신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단어가 사용된 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여기 22절에 "온전한 믿음"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온전함'이 '확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앞에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와있는 그 '큰 확신'에서 확신이라는 단어가 이 온전함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확신이라는 단어가 번역된 것을 보면 각각 다르게 번역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온전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온전한 확신'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말하자면 이 '믿음의 온전한 확신'입니다. 여기 믿음의 온전한 확신은 언제 사용되느냐면 하나님께 나아갈때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때 온전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그 확신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뿌림을 받은 사람,그리고 예수께서 큰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을 도우심을 받는 사람, 그 사람이 이 믿음의 큰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평안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 평안을 누리자"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 평안을 누리자고 되어 있습니다.
평안의 또 다른 부분은, 그 모습은, 관계에 있어서 평안입니다. 그것도 절대자, 가장 크신 분, 지극히 거룩하신 분, 하나님과 우리가 좋은 관계에 있을때, 그때 우리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2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큰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게 평안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 누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은 두려워 하는 가운데 그 얼굴 낮빛을 피하면서 두려워 하면서 얼굴을 보지않고 그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큰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여기 이것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두가지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담력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의 피로만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게 씻기고 우리가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뿐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를 위해 행하고 계시는 일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큰 제사장으로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돕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그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나아갔습니다. 제사장은 이제 금으로 한 패를 세기게 됩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그 패를 세기고 그것을 제사장의 의복 가운데 머리에 쓰는 관에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그 패를 붙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그 백성들의 허물을 그가 담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백성들에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이제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그 패를 붙인 그 제사장이 그것을 담당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제사장은 어떤 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섰던 그 제사장 같이, 그도 역시 죄인일뿐인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제사장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온전히 거룩하신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그분께서 십자가에 담당하셨고 그리고 지금도 담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력과 온전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실때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끼친다는 것은, 평안을 남겨놓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유산처럼, 주님께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 놓으시는 그 평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 담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평안에 대해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남겨 놓으셨을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큰 제사장이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온전한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안을 남겨 놓으셨고 또한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고 계십니다.

이제 세번째로 그 확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부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0-12).

여기 보시면 11절에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풍성함'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확신,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에서 온전함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풍성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확신이라는 면에서 살펴보기 위해서 번역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소망의 확신에 이르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확신할때 누리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있을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우리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그 복된 결과를 확신할때에 그때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소망의 풍성함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불의치 아니하냐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있어서 불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모든것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정확하게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오해받는다 할지라도,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그것이 작은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의 평안은 이 하나님을 알 때에 누리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일에 대해서 이것에 대한 결과가 불확실할때, 내가 지금 이렇게 수고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결과가 아무것도 없다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의치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하시는 작은 섬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하늘에서 계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정확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몇배나 큰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 때에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의 풍성함"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간절히 이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게, 끝까지, 우리의 삶의 끝까지 이 소망의 풍성함을 가지고 살도록, 이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이 평안을 가지고 살도록, 그렇게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것은 "나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누리신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고 있던 평안, 주님은 어떤 평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주님께서 이 평안을 말씀하실때에 몇시간 후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그 큰 고통을 당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 너머의 그 즐거움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온전히 흠향하시고 합당한 상급을 내리시고 주님을 지극히 높이실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소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시편 16편을 보겠습니다.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앞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여호와를 그 앞에 두시고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요동치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안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고 계시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나의 평안" '주님의 평안'은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함으로 그분께서 불의치 아니하시고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것을 믿음으로 요동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것을 믿는 그 확신 가운데 누리는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동한다고 되어 있는데요. 요동하는 것은, 성경은 바다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항상 요동합니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출렁이고, 그래서 거기에 진흙과 더러운 것이 뿜어져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악인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나니" 이 바다처럼 요동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요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다와 같이 요동하는,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앞두고서도 요동하지 않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동하지 않는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그런 물을 본적이 있습니까? 물은 항상 요동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번 물살이 없는 물을 본적이 있습니다. 언제냐면, 제가 조선해양공학을 공부했잖아요? 그 학교에 큰 수조가 있습니다. 큰 수조에 물을받아 놓고, 거기에 모형배를 띄우고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파도에서 어떻게 배가 움직이는지, 그래서 그것을 실내에 만들어 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오고 나오는 물도 없고, 바람도 없으니까, 그 물이 요동하지 않고 완전히 잠잠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볼수 없는 그러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마치 거울같이, 여기에 지금 유리가 놓여있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완전히 거울같이 보입니다. 그 큰 물이, 물결하나 없는 물을 볼 때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그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이라는 것은 조금만이라도 바람이 불고 거기에 조금만이라도 출렁거림이 있으면 전체가 다 흔들려버리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평안을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돈으로 자꾸 벽을 만들고 다른 것이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하지만 아주 자그만한 외적인 충격에도 요동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앞에 모시는 주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주님은 그 십자가를 앞두고도 요동하지 않는 그 평안을 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그 평안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평안의 확신을 보았고요.

이제 마지막으로 한군데를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1-3).

여기 2절에 보면 "원만한 이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만한'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계속보고 있는 확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원한만 이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보고 있는 확신이라는 단어로 다시 번역해 보자면 "확신한 이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았는데, 깨달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확신한 것입니까? 무엇을 확신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의 모든 보화가 있구나. 그리스도 만으로 충분하구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구나, 하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원만한 이해의 확신인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내가 뭔가를 빠뜨린 것이 있지 아닐까? 혹시 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것이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여기 그리스 아테네를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들이라고 부르는 우상들을 섬기는 그런 곳입니다. 많은 철학이 발달한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상한 한 신상도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명찰을 붙여놨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우스, 전쟁의 신, 미의 신, 사랑의 신, 여러가지 신들을 다 만들어 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빠뜨린게 있을까봐, 내가 몰라서 빠뜨린게 있을까봐, 내가 빠뜨려서 그 신이 "나는 왜 뺐어?"라고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안되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만 찾아다닙니다. 혹시 부족한게 있지 않을까? 내가 뭐 모르는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알고있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이것을, 이 놀라운 진리를 알고있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더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더 예비해 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평안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붙들고 계심으로 우리는 이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모든일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갚아주실 확신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그 확신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평안입니다. 주님께서 이 평안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의 평안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평안 가운데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