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권능을 누리는 삶 > 2022년 12월 18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창 23: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창 23:14-19).
창세기 23장에는 성경에서 첫번째로 장례 치르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23장 전체 장에 거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앞에서도 장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기 때문입니다. 처음 창조받은 아담부터 계속해서 그 후손들은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때마다 장사지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사라의 장사를 기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그 장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잘 나타났기 때문에 특별히 이 사라의 장례를 우리를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부활, 이 장사를 통해서 그것이 잘 드러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들어서 자세하게 기록하신 것입니다. 참 이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관계죠. 그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2절에 나외 있듯이 슬퍼하고 애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그가 비록 127세나 되는 오랜 세월을 살아 왔을지라도 그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히 슬픈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슬픔 가운데서 3절에서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이기고 일어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이기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떠한 인생 가운데서 성취를 했다 할지라도 죽음은 다 그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게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 죽음 앞에서,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 아브라함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부활의 믿음은 그 몸이, 그 죽은 시체가, 그 몸이 부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 밭을 돈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이 동네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나라에서 살던 사람이었는데 말하자면 이민와서 사는 것입니다. 이민와서 사는데 그는 계속 월세집에서 삽니다. 자기가 한번도 돈 주고 집을 산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이 특이하게 무덤은 돈 주고 삽니다. 여기보면 은 사백 세겔을 달아서 주고 샀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원래 그 땅값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땅을 팔려고 하는 사람은 호의로, 의례적인 말이지만 그냥 주겠다고까지 말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굳이 돈을 주고 사게 됩니다. 이 땅이 적법하게 내가 소유한 것임을 분명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니, 죽었는데 그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집도 안사는 사람이 무덤은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무덤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이것은 그 죽은 사라가 다시 부활해서 그 땅 가운데서 산다는 것을, 그 땅을 소유로서 산다는 것을 믿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라가 죽고나서, 자신의 아내가 죽고나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있다는 것 이상입니다. 하늘나라에만 있다면 땅을 살 필요가 없지요. 그가 부활해서, 그 몸이 부활해서 다시 이 땅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을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믿음이 특징적인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제가 특별히 찾아서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때에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 이삭이 출생 할 때도 그는 부활의 믿음으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더이상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그런 몸이지만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사라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을 드릴 때에도 그는 동일한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날때나, 이삭을 드릴때나 그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가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몸이 다시 살아서 이 땅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라고 그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의 행동으로 그는 그 땅을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활에 대해서 중요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몸이 부활하는 것을 중요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가 복음을 전할때에 이 몸의 부활을 전하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 17:32).
여기 사도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아덴이라는 곳은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는 철학이 발달한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나오는데,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에피쿠로스 학파, 그리고 스토아 학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높은 지성과 철학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듣기에 이 몸의 부활은 그들이 32절에 기록된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듣기에는 비웃을만한, 이것은 좀 하찮은 이야기인데,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철학자들은 사람의 정신을 높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지적인 능력,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은 필요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통해서 사람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귀한가? 그래서 사람의 영혼은 몸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이다. 그들도 죽고난 다음에 다 사라져 버리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그게 이들의 철학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느냐면, 그들은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영혼은 그냥 사라져 버리면 안되는 그런 중요한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의 불멸을 그런 의미에서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와서 몸이 부활한다고 말하니, "그것은 필요없는데? 오히려 몸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그 몸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중요한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몸의 부활이 중요하냐면, 몸의 부활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불멸은 사람의 존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높으심,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썩어져 버린 그 시체를 다시 부홣시키시고, 부활 시키실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시킨다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몸의 부활을 전했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활이라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해결되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망이 왜 온 것입니까? 왜 우리 몸이 병들고, 늙고, 그리고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과학자들은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죽는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죽고 썩어지는 것은 죄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죄가 온전히 처리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공의롭게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구속사역이 온전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역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직 죄가 처리된 자만이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4).
여기 고린도전서 5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단지 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부활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 가운데서 이 육신을 입고 사는것이 힘들어서 그냥 빨리 죽어서 주님과 같이 있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거기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몸이 변화되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사도는 덧입는 것을 자신의 소망으로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몸의 변화를 그렇게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몸이 부활의 몸을 입으면은 어떤 것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몸의 부활의 목적을 고린도전서 15장에 가서 보겠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기업으로 받아서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의 몸의 부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즉시 우리는 주님 품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니님의 나라는 우리의 영으로만 누리기에 부족합니다. 그것은 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몸은 우리가 지금 입고있는 것과 같이 혈과 육으로 된 몸은 아닙니다. 이것과 똑같은 몸은 아닙니다. 그때는 신령한 몸이라고 4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영으로 된, 안보이는 그런 몸이 아니라 이 몸은 영으로 힘을 얻는, 영의 원리에 따르는 그 하나님의 영적인 활동에 걸맞는 그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그 부활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때, 비록 죽었지만 그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을 다시 누릴 것을 그는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서는 이 부활의 범위가, 어떤 사람이 부활을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여기보면 "홀연히 다" 홀연히 모두가 변화하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축복이 일부의 어떤 사람만 받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몸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이 다 변화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놀라운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 땅 가운데에 다시 오실때에 참으로 영광스러운 왕으로서 모든 만물을 후사로 받으시고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그 몸은 주님과 함께 이 모든 만물을 기업으로 누리는데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몸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이러한 몸의 부활의 근거가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래서 우리 죄를 모두 갚아 주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족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에 매어놓지 아니하시고 그를 죽음에서 풀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고,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부활의 근거입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이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의 부활을 누리는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에는 이런 몸의 부활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에, 그때 우리가 살아있다면 우리의 몸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먼저 죽어서 잠자는 자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몸은 그 시체가 다시 부활해 주님 앞에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놀라운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몸의 부활의 소망이 지금 이 현재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또한 그 의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그는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기가 혹시 그 몸의 부활에 이르지 못할지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분명히 말한 것처럼 모든 믿는 자가 다 변화될 것을 분명하게 믿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어찌하든지 그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는 것은 지금 현재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찌하든지 내가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자 한다,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오실 때에 그 장래의 일이지만, 지금 오늘날도 내가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을 알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 부활의 권능,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는 부활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강하게 행사하는 능력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가 사망의 능력이고, 하나가 죄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사망이 왕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왕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그 능력 아래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
여기 사망이 왕노릇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왕노릇한다고 하니까 약간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요. 이것이 사망이 왕으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것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명령을 내리면 "아이, 나 안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해 보면, 사망이 모든 시람에게 그와같은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망이 죽음을 요구 할 때에 "아, 나 오늘은 못죽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은 말고,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며칠있다 죽겠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안타까운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직 어린 자녀를 둔 그런 홀 어머니가 있는데, 혼자서 아직 젖도 못뗀 아이들이 있는데, 이제 죽음이 그의 생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젖뗄 때까지만 조금 있다가 죽으면 어떨까? 이렇게 당연히 생각합니다. 죽음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정한 그 죽음의 시와 때를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죽음 가운데서 "사망을 두려워하여" 성경은 "사망을 두려워하여 일생에 매어 종노릇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그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이 일생 가운데서 종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것으 노예를 말하는 것인데요. 노예는 아무리 일해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인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여러가지 것들을 수고하면서 많은 것들을 쌓지만 죽고 나면은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죽음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 하면서, 언제 빼앗겨버릴지 모를 그런 내 제물을 쌓아가면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망이 왕노릇 하는 것을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죄가 왕노릇하는 것을 20-21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여기 21절에 보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특별히 그것을 율법을 더해서 그 죄가 왕노릇 하는것을 도와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시에는 그 죄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가 잘못했어도 잘못이라고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율법이 딱 주어지면, 이러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는 것이다. 라는 그 율법이 딱 주어지면 그때 그 마음이 알게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자기가 죄인이고 그리고 죄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힘은 그러한 죄의 고통입니다. 내가 이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된다는 그 자각, 그 죄책감, 그리고 그 죄는 한가지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이제 계속적으로 더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죄가 죄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기 전에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욕심이라는 것이 더욱더욱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한번 짓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욱더욱 더 많이 짓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죄가 우리를 왕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더해 졌을때, 이제 죄는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자구나." 그는 이제 그것을 자각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가 얼마나 힘이 있느냐면, 죄가 얼마나 끈질기게 왕노릇 하느냐면, 성경은 죄가 "계속적으로 생각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에 보면 심지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 제사를 드릴때에도 그 제사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가 생각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사람이 가지고 오는 어떠한 것으로도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방법이 없습니다. 죄는 그와같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왕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망과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전히 처리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죄가 얼마나 그 힘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죄가 더한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은혜는 더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힘이 세다고 말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21절에, "은혜로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륵 하여" 그 힘이 센 은혜는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의로운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신 그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힘이 세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원받은 자들은, 17절에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5:17).
이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이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구원받은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망이 왕노릇하고 죄가 왕노릇 하였지만, 이제 믿은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생명이 바로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은 죄가 의롭게 처리되서 죄를 이기고 그리고 사망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이상 사망이 생명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믿는 자들도, 그들도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들도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런데 믿는 자들의 죽음은 그 죽음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더이상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리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부요한 것이 있고 죽음은 그것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를 오히려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오히려 우리가 더 환영하는 것입니다. 더이상 죽음은 왕노릇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현재를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해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고려합니다. 그리고 영원을 고려합니다. 그리고 영원을 위해서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삶을 삽니다. 그게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매일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죽음을 이용해서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영원한 날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현재를 투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죄가 더이상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그 전에는 죄가 이끄는대로 살았습니다. 죄는 그리고 한번 지으면 더 다른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한번 지으면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리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죄는 그런 힘을 우리에게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죄를 이기는 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때,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더이상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버리게 만들어버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더욱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분을 힘입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얼마나 합당치 않은 것임을 자백하고, 다시 교제를 회복하고 아버지께로 나오게 하는 그런 것입니다. 죄는 더이상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권능을 매일 느끼고 있는 사람의 태도인 것입니다.
오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지라도, 그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도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서 죄를 의롭게 영원토록 온전히 처리하셨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고 그리고 감사로 하나님 앞에 더욱 나아오게 되는 것이 이 생명으로 왕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는 그의 삶이 이 부활의 권능을 매일매일 더욱 느끼는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부활의 믿음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그 많은 돈을 아끼지 않고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도 그러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이상 사망이 왕노릇하고 죄가 왕노릇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서 대전 중구모임 성도님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욱 복을 누리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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