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시대 전의 특정한 남녀 : 사가랴와 엘리사벳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6일
안녕하세요. 오늘까지 여기 오늘까지 오시기로 노력하셔서 참석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미팅이 여러분께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제는 '모임에 있는 남자 여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어느 '특정한 성경에 나와 있는 여자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원합니다. 이 부분은 교회가 생기기 전에 있었던 부분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시겠습니다. 성령의 통지하심으로 누가는 이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대략적으로 신약 성경의 4분의 1이 의원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 더 많은 기록입니다. 이 누가 복음과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누가는 이 새로운 공동체인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이 책을 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누가복음 1장 1절부터 4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눅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몇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한 것이 신실하시고 그리고 주권적인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부터 13절까지 읽겠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5-13).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눅 1:18-25).
그리고 이다음에는 이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그녀가 구주를 잉태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는 이 엘리사벳을 방문함을 알게 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눅 1:36-45).
이 45절에는 "또 이루어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하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45절은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음을 저희는 보게 됩니다.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56-75).
이 4명의 모든 복음서 저자들은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누가의 설명은 다른 것보다 약간 더 긺을 저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누가만 유일하게 세례 요한의 부모님인 사가랴와와 엘리사벳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1장 2절은 마리아의 관점으로 적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어떻게 보면 이 누가와 마리아 사이에 어떤 개인적인 대화가 있었을 걸로 예상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와 마리아가 같이 앉아서 어떻게 이게 시작되었는지 물었을 때, 아마 마리아가 이것은 나사렛에서 단순히 시작한 게 아니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사렛에서 시작되지 않고 내가 이 세례 요한의 부모님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겠다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는 아마 이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엘리사벳과 수개월을 같이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를 겸손하게 하였고, 아마 그들이 잘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가랴는 작은 마을의 제사장이었고, 그리고 그 부인은 그냥 아이를 잉태치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저희에게 가르치고, 특히 오늘 이 부른 찬송가에 대해서 저는 감사하게 여깁니다. 다시 1절에서는 "이루어짐"에 대해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사가리야와 엘리사벳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고대에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됨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5절을 보시면 이제 그들의 '이름의 특별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이제 저명한 선교자들과 같이 이 's'로 시작되는 5가지의 단어를 가지고 이 포인트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가랴'라는 이름의 뜻은 '주님은 기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기억하기에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은 기억하시고 잊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나오는 그 아름다운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섬김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가랴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마 성경에도 대략 30명 정도에 다른 사가랴라는 이름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의 뜻은 '주님은 기억하신다'라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 부모들이 그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었을 때, 그것은 마치 기도와 같았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그리고 그게 아마 흔한 아이들의 이름이었다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제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루시기를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사가랴의 이름이 주님은 기억하신다라면, 이 '엘리사벳'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맹세'라는 뜻입니다. 저희는 이 하나님의 맹세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저희가 기억할 때, 하나님이 자기의 신실하심을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하나님은 언약으로서 그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단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히브리서 6장 17절에 보면 "그 일의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두 번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특별한 커플이었고 놀라운 부부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신다'와 '하나님의 맹세'와 합쳐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의 결합은 아마 매우 약속된 듯하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일로부터 700년 전에 이사야서 40장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약 그 후로 300년 후에 말라기서에서 말라기가 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리라"라고 예언했는데, 이것은 또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40장의 예언과 말라기서 4장의 예언이 확실히 있었지만, 그 후로 약 400년 동안 이 하늘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이 고요함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잊어버렸는가? 하나님은 과연 신실하신 분이신가?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부분은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분의 맹세를 지키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고 그분의 진실하심에 대한 교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디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내가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려움에 처했고 곤경에 처했을 때 저를 위로하시는 말씀은 고린도전서에 두 번이나 나오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붙들기 어렵다고 느낄 때, 제가 하나님을 붙들기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저를 붙드십니다.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에 대한 간증입니다.
6절을 보시면 그들의 인물의 성격이 어떠함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의로움'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위치적인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로운 자입니다. 그것은 '의롭게 됨'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섰고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제 삶이, 제가 완벽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의롭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이 세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그가 얼마나 놀라운 자인지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세리는 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누가 복음에 기록하고 있음을 저희는 보게 됩니다. 그는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우리의 위치의 의로움을, 우리가 법정 앞에서 의롭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른 것은 실용적인 '행함에 있어서의 의로움'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행하는가를 드러냅니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제가 의롭다 선포되었으면, 제 삶은 의로운 것을 드러내야 되며, 의로운 것으로 나타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6절에서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실제 삶에서, 그들의 행동에서 드러내는 의로움일 것입니다. 그들은 의심할 필요 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였고, 그들의 행동이 의로움을 드러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으니" '하나님 앞에'라는 절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차려 입고 좋은 말을 하며 매우 종교적인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것보다 조금 더 깊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부부의 삶을 지켜보셨고, 하늘에서의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또 그 삶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고 그 삶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시면 주님은 의로움을 사랑하시고 죄악을 싫어하신다고 기록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이요"라는 말씀을 저희로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은 온전히 순종하였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바쳤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그들을 자기 자신을 드린 부부였습니다. 이 "흠 없이 행하다"는 이 '흠 없다'는 말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 나오는 '감독자'들을 말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이 흠 없다는 말은 죄가 완전히 없이 완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장로 형제님들이 죄가 완전히 없기를 바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그들의 공적인 간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공적인 삶을 바라보았을 때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이러한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여분의 여유를 가지고 '이 정도 의롭지 않은 것은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법 앞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흠 없이'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는지는, 우리에게 좋은 따라가야 될 예시가 됩니다.
하지만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런 고난을 받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7장 이후에 저희들은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 특히 이 엘리사벳의 이 고난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제가 이제 여러분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어떤 부부에게도 상당한 시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매님들의 가치는 꼭 자녀가 있어야지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자녀를 잉태치 못하는 것은 아마 이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봤을 때, 이 엘리사벳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6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아들과 손자가 늘어날 것을, 자손이 증식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자손이 번식하지 않을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가 많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자녀를 잉태치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녀를 인탱치 못하는 것은 이제 재정적으로도 부부에게 위기임을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늙었을 때 그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잉태치 못하는 것은 약간의 불행이 아니라 정말로 멸시를 당하는 것이었고, 큰 일을 당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이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면 "내 부끄러움을 얻게 하시려고"라고 기록하고, 이 '부끄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잉태치 못함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아마 그녀가 드러내지 않은 어떤 죄악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지 않은 것은 아마 그들에게 좀 의롭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것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 고난을 받음은 아마 가장 빈번하게 이 부서진 세상에, 잘못된 세상에 사는 그냥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뛰어난 부부였으나 그들도 이 고난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엘리사벳은 잉태치 못했고 이 부부는 아주 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이 문제를 그들의 날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늙고 잉태치 못한 여자는 아마 끝까지 잉태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커플에 대해서 좋아하는 점은 이러한 고난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이 그들 자신을 더 씁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의롭게 살아봤자 내게 좋을 게 무엇인가? 저렇게 의롭지 못해 사는 자는 자녀가 7명이나 있는데, 이렇게 나한테 의롭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마 사가랴에게 어떤 사람들은 지금 부인과 이혼하고 다른 결혼을 하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로운 일을 하는데 목마르고 배고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난 속에서도 그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들에게 신실하셨습니다. 6절에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로움을 사랑하는 여자가 의로움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으로 하나로 합쳐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가치관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그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결혼 상대를 찾는 데 있어서 찾아야 될 것들입니다. 이 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다. 다른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동의했을 때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들의 우선순위가 일치할 때,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아마 그 자녀 요한에게 큰 교훈을 남겼을 것입니다. 이 세례 요한은 자라면서부터 이 두 명의 의로운 부모님으로부터 본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의 믿음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라가면서 이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부터 일관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요한는 이 교훈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는 '의로움을 전하는 전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헤롯의 의롭지 못함을 어떻게 책망했는지를 보면 그 사실을 저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머리가 잘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들이었으나 세상에서는 아마 아무도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유다 산악지대에 사는 아무도 모르는 애 없는 늙은 부부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누가가 복음서의 시작을 이러한 늙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이 누가는 옛날 시대의 작가입니다. 현재 시대의 작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핸드폰에 가치를 줍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핸드폰에 많은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부여하였고, 늙은 이들에게 그러한 가치를 부여하였습니다. 이 누가의 조서는 이 두 가지 두 책의 세트와 같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 복음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똑같은 받는 이에게 적힌 책입니다. "내가 복음서를 적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것을 시작하였는지 그 시작부터 적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가르치고 전하는 것들이고, 이제 사도행전은 그것을 사도들이 대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이 운동을 시작하였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은 이 '교회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어떻게 이게 시작돼서 자라나는지, 그리고 이게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누가는 이 두 가지를 시작한 인물을, 이 두 부부, 이 부모님은 위대한 선지자의 부모님이었고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의 부모님이었지만, 하지만 이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이 교회라는 운동을 시작한 것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지 않았음을 저희는 볼 수 있습니다. 모임은 아마 이들이 이 기록된 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시작됐기 때문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님께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시작하였지만, 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축복이 온 세계로 퍼지는 것을 지켜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냈고, 영적으로 빈곤한 상태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엄청난 것이, 놀라운 것이 이제 앞으로 일어날 예정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작과 함께였지만, 그것이 시작되는 것을 아마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늙은 자들은, 참고로 '늙은 자들'이라는 거는 이 세상 나이로 49세 이상인 자들입니다. 49세 이하는 젊은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부부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을 서울과 풍산동과 다른 지역 모임에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나빠진다는, 이 모든 것이 하락한다는 그러한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신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냥 계속 하락하는 궤도로 쓰여진 역사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부흥과 실패가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이 젊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 도시에, 이 나라에 큰 복음의 역사를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 이 늙은 형제님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의 시작을, 디딤돌을 기도와 간증을 드러냄으로 기초를 다질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시작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들은 아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데 사가랴는 제사장인데 그건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닌가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마 이 시대에 제사장이 약 2만 명 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1년에 2주 동안만 성전에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예루살렘이라는 멋진 도시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도 모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겸손했고 의로운 의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들입니다. 형제건, 자매건, 영적으로 성숙했건, 성숙하지 않았건, 우리 모두는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영적인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으로 받은 것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능력과 기쁨을 드러내는 데 결코 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데 아무도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영적인 제사장인 것입니다.
이 사가랴 시대 때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2주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하기로는 아마 그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아마 그들의 생에 있어서 단 한 번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가랴에게 한 번만 일어났을 거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이러한 일이 사가랴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수년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시기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그때가 되었습니다. 아마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은 그가 성소 안에 들어감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문자를 보낼 게 없었기 때문에 몰랐을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그 시간에 모두가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이 의로운 부부는 밖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에 이제 들어왔습니다. 시편 34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구',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놀랐고 이 당시에는 이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당시 그의 믿음이 잠깐 흔들렸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기도를 분명히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가 저희가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으로부터 배울 점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의 지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늙은 부부였고, 아마 이것은 오랜 기간 그들의 마음속에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서 움직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특히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이 기도는 저희에게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기도하는 것은 저에게 이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내용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베드로서 3장에서 베드로는 "아내를 영예롭게 하고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은혜를 위협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영적으로 더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고, 그다음에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생각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걸 읽을 때 우리는 결혼한 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애들이 있고, 그럴 때 특히 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을 재우거나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귀중한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매와 함께 기도하며 얻은 유익 중에 한 가지는 이 자매가 기도했을 때, 제가 몰랐던 자매의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들이 배울 교훈은 저희는 결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부부는 함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장인어른과 장모님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기를 바랍니다. 저희 장인어른은 16년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9월에 그 지역 모임에서 매년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그 기간 중 토요일 밤에 젊은 사람과 그리고 이제 중년의 성도들이 그분의 집에 가서 함께 찬송을 매년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장인어른이 저에게 이 찬송이 끝난 후에 짧은 말씀을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이 말씀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016년에 이제 장인어른은 저에게 이 말씀을 나눌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그분이 인생의 마지막에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매우 연약해졌고 이제 저는 그분에게 이번 년은 형제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은 그러기로 하고 컨퍼런스에서 약간 더 일찍 자리를 떠나 집으로 가서 쉬면서 전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분의 집에서 약 45분 동안 찬송을 부를 동안, 그분의 위층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분은 일어서서 말씀을 드리기에는 너무 연약했기 때문에 구석에 앉아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온전한 침묵만 있었습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아마 그 말씀이 그분의 마지막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저희는 어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모든 청년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주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를 들은 것처럼, 저희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들이 있을 것으로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자녀가 사람들을 주님께 나오기로 준비시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관습적으로 이제 제사장이 성소를 나갈 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떠나면서 민수기서 6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하지만 사가랴가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는 약간 그 사실을 창피하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누가 복음 마지막에 제사장은 벙어리가 아니고 조용하지 않은 제사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누가 복음의 시작은 실패한 제사장직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제사장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에 우리 주님을 제사장으로 드러내면서 누가 복음은 끝납니다. 우리 주님은 두 손을 들고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우리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는 히브리서 4장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신 제사장을 우리는 모신 것입니다. 승천하신 제사장을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율하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신실하십니다. 이 사가랴는 그의 믿음이 없으므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이제 잠시 후에 다시 이 사가랴로 들어오겠습니다. 저는 이 사가랴에게 너무 나쁘게 굴지를 원치 않습니다. 사가갸의 혀가 풀리자마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건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이 '엘리사벳의 영적인 특징'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25절을 보면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내 부끄러움을 얻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약간 특별한 차를 마시거나, 한방을 써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셨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느끼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시면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됨을 보게 됩니다. 제가 잘못되었으면 저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여인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이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령 충만한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여기 나오는 엘리사벳의 모습의 이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3절에 나오는 이 영적인 결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이 마리아의 태에 있는 아이가 주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으로 누가 복음에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엘리사벳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하늘이라도 감당치 못할 주님을 마리아의 태에 주님께서 들어가셨음을 저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이러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눈이 트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39절부터 55절까지 나오면, 이 엘리사벳이 어떻게 더 젊은 마리아를 도와주었는지 저희는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아마 연약하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아마 마리아는 10대였을 수도 있고, 굉장히 어린 여인이었을 텐데, 그녀는 우리 주님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가 말해줬기 때문에 이 엘리사벳도 기적적인 잉태를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더 특별함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하나님의 여인으로 여겼습니다. 어제 말씀으로 잠깐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는 나이 든 자매님이 젊은 자매님을, 나이 든 여자가 젊은 여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을 보면 "늙은 여자들로부터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 신학 모임에 있어서 이러한 가르침은 늙은 자매들이 할 수 있는 큰 사역입니다. 종종은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것들을 형제가 언급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형제님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자매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 형제들은 알아차릴 수 없지만, 자매들은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역이 제대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1. 먼저 젊은 자매들이 나이 든 자매님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다른 신실하고 영적인 자매님들을 높게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 금방 알아 보았습니다. 아마 젊은 자매님들은 "이게 필요한데 나에게 아무도 더 나이 든 자매님이 이러한 것들을 가르쳐 주거나 상담하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디도서 2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지만 이 누가복음 1장을 보시면 먼저 시작을 한 것은 마리아였음을 저희는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러한 필요를 먼저 느꼈고 나이 든 자매님을 찾아감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로 나이 든 자매님을 공경하고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나이 든 자매님은 이 젊은 자매님을 '격려'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이러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세 달이나 머물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마리아에게 "그렇게 그런 거 먹지 말고, 그렇게 행하지 말고, 그리고 핸드폰 좀 금방 쳐다보라!"고 얘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나를 돌보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42절에 보면 마리아가 들어서자마자 엘리사벳이 그를 축복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격려하고 그녀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합니다. 45절 보면 "믿는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두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가랴는 믿지 못했지만 엘리사벳은 믿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리라." 제 어머님은 이제 치매가 있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저희 어머님을 50대쯤에 보았을 때, 다른 50대 자매님들과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40대 자매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30대 자매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20대 자매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 교제를 어떨 때는 저희 어머님이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자매님들이 교제를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집회는 아니었지만 이거는 디도서 2장에 나오는 그러한 사역이었습니다. 이 엘리사벳이 어떻게 젊은 엄마인 마리아를 도와주었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그의 자녀에 대해서 충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모릅니다. 이것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젊은 자매가 먼저 이것을 시작하는 것이 더 유익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이 사가랴로 돌아가서 이 사가랴의 '영적인 특별함'에 대해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 1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회복되었음을 저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약간의 믿음이 없을지라도 저희를 지워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불신으로 인한 침묵은 가고, 이제 성령으로 인한 놀라운 찬양이 나옴을 저희는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67절에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구절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놀라운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의로운 자들이었으며, 그리고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70절을 보시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루심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이 사가랴도 똑같이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72절에 보시면,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73절 보면 그는 "우리 조상 아브리암에게 하신 맹세"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사벳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이야기의 교훈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누가복음 마지막에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또한 이야기 하십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받기까지,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똑같은 성령님이 지금도 역사하셔서 모임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이 누가는 우리를 교회 전의 부부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데려갑니다. 아마 우리들은 이 교회 시대의 마지막 부분에 거하는 자일지도 모르지만, 이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동일한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님을 가지고 있고, 동일하게 의롭게 자랄 수 있는 기회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신실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심을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이 여러분 앞에 빛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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