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

디모데전서 2장 : 모임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

박이레 2026. 5. 9. 21:29

< 디모데전서 2장 : 모임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5일

안녕하세요. 이곳 풍산동에 방문할 수 있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요. 또 이곳 집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제가 요새 성경 공부를 하면서 유익하게 느낀 점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 책이 뭘 말하는지를 짧은 문장으로 적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성경 책들은 이 성경 말씀에 독특한 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66권 중 특정 한 권에 대해서 제가 그것을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그 성경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짧은 문장으로 그것을 기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여러분께 이렇게 공부하기를 권해드리며, 특히 젊은 형제 자매님들에게 보내드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게 한 단어로 성경책을 요약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여러 번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이 말하고자 하는 그 목적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게 될 것이고,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단어나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어야 되는데, 그런 곳에 여러 가지의 단서가 숨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책을 요약하는 한 문단은 자꾸 바뀔 수 있지만 이 디모데전서를 저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설계를 잘 지키기 위해서 올바른 교리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디모데전서 2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주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2장 전체를 다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5).

여러분이 복음서에 나와 있는 주님이 여러 여자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기억하실 때, 그 모습이 어떠했으며, 또 그 당시 문화와의 비교했을 때 그 모습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우리 주님께 엎드렸던 여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얼마나 따뜻한 우정을 나누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 중에 여자를 고르시지 않았지만 많은 여자들이 주님과 함께 같이 이동하면서 다녔습니다. 수잔나나 요한나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이 여자들에게 아주 적대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은 우리 주님이 오신 후 한 몇 세기 동안 모임의 구성원들 중에는 약 3분의 2가 여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이방 다른 종교들이 기독교를 여자의 종교라고 놀리곤 했습니다. 왜 많은 여자들이 우리 주님을 따르기를 간절히 원했을까요? 아마 그중에 한 가지는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존중'하면서 대했던 그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디모데전서 후반부에 나와 있는 여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읽으시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배경과는 매우 다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 주님의 감화하여 이제 명령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같이 바울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받아들이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두 가지 다른 성이 영적으로 모임 안에서 하나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두 가지 팔은 각각 성적인 모임에 있는 역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론 하나 되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디모데후서 후반부를 저희가 보면서 5가지를 살펴볼 텐데 이 다른 성적인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오늘 시간에는 이 자매님의 모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인데, 먼저 이 형제들의 이 남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 말씀이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8장에 나와 있는 이 헬라어 원어는 '남자'를 뜻합니다. 8절은 바울이 "남자들은 남자답기를 원하며 그리고 손을 들어 모든 곳에서 기도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점은 여러분의 그러한 다툼이나 이해 충돌에 관해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모임으로 오지 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교리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또한 경쟁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예전 사람들은 그들은 서로 의견이 다름을, 다투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여기서도 문제인지 모르지만 캐나다에서는 '도로 분노'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로 분노는 운전하다 하는 거죠. 언제나 남자들의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 교회는 그러한 분노나 어떤 종류의 분노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권력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7절에서는 이 화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 남자들이 이 분노로 문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TV를 봤는데 국회에서 많은 남자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툼을 하나님의 성소로 가져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태도를 모임에서 지키면서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집단적으로 모임의 간증을 보면서 이 2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장은 이렇게 '소개하는 장'이며 믿음을 지키라고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은 1절부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면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은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르치는 것을 모든 교회에서, 모든 곳에서 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전하는 내용은 이 에베소에 있는 특정한 지역에 있는 모임에만 전하는 게 아니라 사도적으로서 모든 모임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에 더 익숙하여져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에 조금 더 익숙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임에서 하는 기도는 너무 유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간결하고, 구체적인 기도는 모임과 성도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님들은 이 다음 세 가지로 여러분이 왜 모임의 기도에 공적인 기도에 참여해야 되는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8절에 나온 것처럼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형제의 의무'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모든 형제들이 예언해야 된다고, 가르쳐야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8절에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의 '지역 모임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제일 못했던 과목은 생물입니다. 제가 그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세포에 관해서 기억할 때 그 세포 중에서 미토콘드리아라는 게 있는데, 이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발전소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교자들은 기도 집회는 모임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것이라고 말하거든요. 모임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역 모임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은 모임에 있는 자매님들에 대한 섬김입니다. 자매님들은 모임에 영적으로 기도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참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같이 할 기도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의하면 자매님들은 여러 형제님들이 다양하게 기도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지역 모임의 자매님들을 위한 섬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노와 그리고 경쟁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이 수직적인 행동이며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평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모임의 다른 형제들을 비판하거나 비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형제님들은 형제가 되셔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성에게 주신 특별한 역할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은 이제 다른 성, 자매님들을 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이와 같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형제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자매들에게도 말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9절은 여러분이 옷을 입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표현하는 것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실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매님들은 '합당하게 옷을 입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경배하는 자매들에게는 합당한 옷차림이 있음을 저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복음의 은혜를 그 삶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여자들이 허영심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8절에서 모든 남자들이 이 분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9절에서도 모든 제자들이 이러한 허영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모임에 유능한, 화가 많은 형제님들이 있다면 그 모임에 많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임 안에 여러 자매님들이 그 단장으로 겸손함의 범위를 자꾸 밖으로 밀어내는 자매들이 있으면 또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9절에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그들이 어떻게 옷을 입고 있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마 네 가지 현대적인 단어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한 이러한 단어들은 아마 이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하는 이런 것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멋지게', '겸손하게', '센스 있게', 그리고 '자기 절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번째 말한 '센스 있게'가 이 자신을 '절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차려입고, 겸손하고, 그리고 센스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를 절제함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모두 다 똑같이 입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검은색 스커트가 발목까지 내려오도록 입어야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검은색 스포츠를 입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 가지 원칙들을,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을 생각하고, 이러한 것들을 진정성 있게 여기고, 그리고 그 삶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한국에서 봤을 때는 자매님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옷차림으로 옷을 입는 것을 보게 돼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딸들이 있는데 그 딸들이 옷을 사러 가서 오게 되면 그들의 결정이 제한이 되므로 이것은 그러한 옷을 사는 것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옷을 입었을 때, 그렇게 옷을 입고자 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고 또한 그러는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몇 가지 이제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패션쇼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모임에서는 이 시대에 매우 부유한 성도들도 있었고, 또 매우 가난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옷을 사기에 매우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온갖 종류의 옷들로 자기의 부를 과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옷들을 입고 와서 모임에서 사회적 계급을 나누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디모데후서를 보시면 또 디모데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유혹하는 듯한 그러한 옷을 입지 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절제하기를 바라며 바울은 이 단어를 또 15절에 "정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세대는 여러분 자신을 이 패션으로 드러내고, 더 많은 살을 드러내라고 우리를 푸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경건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옷차림으로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서에서는 여러분의 아름다움을 밖으로 보이는 것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여러분의 내면을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다면 그 모습이 밖에 입는 옷을 통해서도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다른 자매들의 주목을 받거나 또 형제님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는 옷을 입을 수도 있지만, 이 성경은 '자기 절제의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또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하는 듯이 그러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모습을 드러나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옷을 못 입거나, 또 이 패션이 뒤처지거나, 뭐라고 해야 되나요? 낡아 보이게 늙어 보이게 입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을 옷차림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이게 제가 염려하는 것인지 한번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많은 자매님들이 약간 심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간 나쁜 톤으로 말씀 이러한 것들이 가르쳐졌고, 그리고 약간 좀 법적으로 따라야 되는 것처럼 그러한 것들이 정해졌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게 말씀에서 벗어나서 이제 점점 다른 한쪽으로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제 팬들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벗어나서 다른 쪽으로 갔던 게 이제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더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제 실망함으로써 이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 원칙들을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어떤 오늘의 법에 대해서 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원칙들을 여러분이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1930년대 사람들처럼 입는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절로 자기를 가꾸고 그러한 옷을 입었을 때 자매님들은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욱더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여러분의 모임의 간증을 이렇게 입음으로써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저에게 어떤 자매님도 토마토를 던지지 않을 것 같아서 제 말씀이 괜찮았던 걸로 여기고 이제 다른 쪽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10절로 가서 우리의 '예배는 선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이상하게 울리는 것으로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선행으로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이 에베소에서 어떤 자매님들은 그들이 어떻게 옷을 입는지로 그 패션으로 유명해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령은 예배하는 자들은 그 선행으로 그들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디모데전서와 같이 하는 성경은 디도서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4번, 디도서에서는 6번 이 선행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은 이 선행으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선행은 우리 주님이 알려졌던 방식입니다.
여기서 9절에 어떻게 보면 디모데전서에서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하지만 바울은 여러분이 진짜로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를 바라는 점은 바로 이 '선행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예수님을 선택하셨고 그분께서는 선행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먹이셨고 환영했습니다. 그분은 아픈 사람을 섬겼고, 그리고 또 귀신 들린 자를 쫓아냈습니다. 디도서 2장에서 보면 그분은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도로가에 대해서 기억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는 언제나 선행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선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기회에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을 선행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까? 아마 힘들어하고 있거나 지쳐 있는 다른 성도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쁜 어머니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거나 그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다른 곳에서 놀아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전도지를 주는 것도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린 형제 자매님들 데리고 커피를 사주는 것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별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국에서 수없이 정말 많은 카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매님들이 모임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습입니다. 아마 이것은 형제들을 위한 역할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매님들을 위한 모임에서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 제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 어린 동생으로부터 얻었습니다. 한때 저희 집에 이제 많은 젊은 청년 형제님들이 왔는데 그중에 한 자매가 "내가 지역모임에서 어떻게 섬길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약간 놀랐는데, 왜냐하면 그 자매는 모임에서 많은 영적인 활동을 하는 자매였고 활발하게 그런 활동을 하는 참여하는 자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쭉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약간 답답해하는 모습으로 모임에서 이 자매의 역할에 대해서 얘기할 때 언제나 잠잠히 조용히 있으라고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임에서 자매님들의 역할은 그냥 단순히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저희들이 맡은 역할은 단지 이 모임 안에 있는 일주일에 4~5시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선행으로 인해서 구원받지 않았지만, '선행을 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직접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11절부터 14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임에서 '공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남자의 역할'입니다. 이 모임에 만약에 길리란드 형제님이나 샌드 히긴스 형제님이 오셨다면, 알파벳 똑같은 한 단어를 쭉 쓴 다음에 이것에 대해서 설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교리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거스리지 아니하는 복음에 합당한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시면 우리는 남자건 여자건 간에 주님 안에서 모두 '동등하게' 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복음은 이 창조에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르게'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르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임에서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임에서 '공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남자의 의무'입니다. 이 말은 형제님들은 이 의무에 합당하게 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일에 준비되었다면 이제 합당하게 이러한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직 모임의 전방 받는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간증이나 다른 것들을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읽기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여서 영적인 음식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 사회생활하면서 밖에서 우리의 영혼이 마치 독을 마신 것처럼 되지만,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모임에 참석해서 영적으로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돌아다니는 걸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께 받았고 그 받은 것을 다른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공적인 가르침'은 형제의 의무이지만, '성경을 배우는 것'은 형제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11절에 보면은 여자를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조부모는 디모데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아마 그들은 분명히 성경을 배웠었을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집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쳤지만 그들은 같이 아블로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고, 아마 바울에게 배웠을 것입니다. 1세기에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배우던 말던 별로 신경을 안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서 이 스탠다드가 높아졌고 여자들도 배우게 됨을 저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여자들은 순종함과 종용함으로 배우지만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남녀가 동일한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여자의 가르침을 제안하는 것일까요? 더 총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면 애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그럴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1세 에베소에 아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적인 활동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13절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남자와 여자를 지을 때 그 순서에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화가 후에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공적으로 서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 권위를 가지고, 권위가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12절 보시면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주관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헬라어에는 '첫 번째'와 그리고 '다스린다'는 것이 같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머리됨'은 이 범죄로 인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을 때부터 했던 그 '창조의 순서'임을 저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을 다스릴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같이 다스려 볼 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남자의 다스림 안에, 남자의 머리됨 안에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을 때, 이러한 것들은 또한 적용됩니다. 신부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다스리겠지만, 우리 주님의 머리됨 아래 그것을 행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됨은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셨듯이 동일하게 교회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머리 되시고 그다음에 저희는 신부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을 보시면 이제 두 번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셔야 될 점은 '여자가 그녀에게 부여받은 그 성의 역할을 벗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약은 하지만 아담이 이건 하와가 먼저 꾀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에게 또한 많은 그 '의무'가 지어졌습니다. 아담은 먼저 나와서 이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 여자를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남자는 이 무너질 만한 약자를 안전하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큰 책임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가능한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아담은 그 동산의 동산지기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의 동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특히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정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동산에 있는 자들이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뭘 가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돌봄으로 머리 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무는 쉽지 않고 도전적이지만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은 저희에게도, 자신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젊은 남자들은 좋은 직장을 가지고 합당하게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지만 결혼하기를 바라고 자녀를 갖는 것은 권장될 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적으로 이끌고 모임의 교제 안으로 이끄는 것도 그들의 의무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익하며 또 성경적이며 또 영적인 원함입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남자가 어릴 때 그 멍에를 매는 게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게 그냥 보통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 주님과도 같고 매우 고귀하고 또 선한 것입니다.

14절에 말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에만 적용되는 그 당시의 특수한 지역의 문화적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에덴 동산에 있는 것까지 돌아가는 그러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와 그리고 관련된 이러한 가르침은 끝까지 가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이 창조의 관해서 실패된 이야기는 다시 이 구속에 관한 성공적인 이야기로 바뀜을 저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그러한 것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대적하며 있지만, 구속받은 형제 자매님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디자인과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3장은 '모임의 공적인 질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성도님들께 말씀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모임에서의 '여자와 남자의 각각 그 역할',  그리고 이제 '감독자들', 그리고 '집사들',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결론 짓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그리고 16절에 이제 마지막 보면 그다음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 되시고" 이것은 물론 우리 주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에 나와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모임의 이 '공적인 질서'는 '진리의 기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임이 증거하는 최종적 증거입니다. 사람이 우리 주님을 통해서 우리 주님과 같이 경건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종종 이 모임의 공적인 질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우리 주님을 잊곤합니다. 하지만 이 2장, 3장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이 클라이막스로 가면서 우리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이 모임 안에서 각각 다른 두 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8절부터 15절까지 있는 두 가지의 다른 성의 역할은 우리 주님을, 간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이 '자매들의 종용함'은 우리 '주님의 종용함과 순종함'을 드러냅니다. 양과 같은 온유함과 또 순종함은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특히 우리 자매님들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자발적인 순종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두 가지 성의 역할은 우리 '주님'과 이 '신부의 역할'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는 그분은 우리의 머리시며,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님들의 이러한 행동은 주님과 교회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신부로서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가르치지 마라"고 했을 때, 어떤 분들은 디도서 2장에 나오는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네, 그것은 참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디도서의 그 가르침은 이 디모데전서에서 말하는 가르침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볼 것은 이 '가르친다'는 것이 다른 단어로 사용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치는 목적이 이 디도서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이 디모데전서에서 말하는 디모데에게 주어진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음은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디도서에서 주목할 점은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남자의 권위 위에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며, 모임에서 자매님들이 행해야 될 한 가지의 섬김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다른 성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칠 때, 우리의 부활이 우리 주님의 부활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 성별이 있는 대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주님께서 남자로서 부활했듯이 우리도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부활해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에 그 메시지 지나온 다음에 어떤 자매님이 이렇게 코멘트 했습니다. 제가 그대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아마 농담으로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던 것이 제 마음을 약간 상하게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영원토록 나는 여자가 되기 싫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제 마음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여자로 만드시고 그 여자 됨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여성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알파벳 단어로 똑같이 시작하지는 않지만, 이제 아웃라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5절에 보시면 이 어머니가 되는 것은 '고귀한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고귀한 일입니다. 많은 성경은 이것이 모든 자매님들에게 적용되어진 것은 아님을 확실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자매님들이 결혼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결혼한 자매님들이 아이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환경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중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자매님들이 아이를 갖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며, 그리고 또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한국 사회에서 여러 가지 압박을 받고 있는 걸로 알지만, 또한 어떤 캐나다 가정처럼 가족 구성원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이 커리어를 갖고 있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잠언 31장에 보시면 일하는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현대 문화와 반대되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특히 이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이 있을 때 이 자매들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저희의 문화는 여러분이 이루어야 될 것은 '저 밖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돌보는 것과 가정을 돌보는 것은 여러분의 자아를 실현하는 데 방해하고,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 데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거를 여러분을 제한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것은 여러분을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이 1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브가 빠진 그러한 늪으로부터 여러분을 구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영적인 보호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 대로, 하나님의 질서대를 따르는 것은 영적인 보호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세상 문화가 강력한 바람으로 모임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저희를 향해 맞바람이 불고 있지만, 하나님의 그 디자인과 질서는 강이 되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남자 역할, 여자가 각각 그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의 역할을 다할 때 우리 모임과 우리 가족은 더욱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가게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들어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