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예수님을 오해없이 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 강성찬 형제님
요한복음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요 7:53).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1).
예,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올바르게 교정하고자 합니다.
여기 이제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겠지, 예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겠지,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정작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심을 이제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제 그러한 장면들이 이제 계속 나옵니다. 오늘 그것을 살펴볼 텐데요.
사실 이제 우리가 복음 집회에 나와서 이 복음 말씀을 듣는 것도 이제 이러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교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복음집회를 끝나고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이런 분인 줄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 성경 말씀을 듣고 보니까 내 생각과는 다르더라. 내 생각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이제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특별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고 정말로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 복음 집회 말씀을 듣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오늘 말씀을 듣고 돌아가실 때에 몇 가지나 '예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라는 것을 이제 찾아낼 수 있는지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요한복음 8장에서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여자가 잘못됐다, 이렇게 말씀하실 거야. 꼭 그렇게 해야지, 안 하면 예수님 이상한 사람이야.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분이 명백하게 이 잘못을 한 여자한테, 설마 이 여자를 혼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겠지? 만약에 예수님이 그런다면 예수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이런 이런 잘못한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반드시 벌 주실 거야. 내 옆집에 사는 개똥이가 있는데, 그 개똥이가 나한테 어제 욕을 했어. 또는 내 돈을 가져가 놓고 안 갚아.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 이런 나쁜 이런 사람한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벼락을 내려서, 또는 병에 걸리게 한다거나, 나쁜 일이 생기게 해서 분명히 벌 주실 거야.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한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이야. 하나님도 아니야, 난 그런 하나님은 내가 인정할 수 없어. 이제 이렇게 다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 그런데 그 심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이거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그거를 그냥 지적하시고 그냥 딱딱 혼내시는 것, 이런 하나님을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가지고 예수님께 "이 여자가 가늠하다가 잡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한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뭐라도 말을 하셔야 되는데 말은 안 하시고 땅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씨만 계속 뭘 쓰시는 거예요. 여기 뭘 쓰셨는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행동 자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땅에다가 뭘 쓰셨을까요? 우리는 조금 이 장면이 '뭘까?' 이제 생각이 들지만,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제 구약 성경 한 군데를 한번 찾아보려고 하는데요. 신명기 9장 10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신 9:10).
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장면이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그 돌판에 십계명을 하나님이 기록해서 주셨는데 그것을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땅에 글을 쓰시는 장면은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의 조상에게 하나님이 처음 그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에 그 감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직접 손으로 돌판에다 적어서 주신 그 장면을 생각나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어떤 일을 이건 잘했다, 이건 잘못했다. 이제 우리나라로 치면 우리나라에 있는 판사들처럼, 판사들한테 가서 "지금 이게 누가 잘못했는지 판결해 주십시오." 했을 때 그 판사들이 그러면 "이것은 당신이 잘못한 겁니다." 아니면, "당신은 이것에 잘못이 없습니다." 판사들이 그런 일을 하죠. 그런 판사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사람들이 "이것 좀 누가 잘못했는지 평가해 주세요." 라고 했을 때에 "이것은 네가 잘못한 거야,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이렇게 평가하는, 단지 그런 판사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기준을 맨 처음 정하신 분, 그 기준을 맨 처음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분, 친히 손으로 그 돌판에 써서 이것이 내가 원하는 기준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이제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단지 우리가 우리의 80, 90, 100세 인생을 내 마음대로,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한번 살아보고, 맨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제 그제서야, 우리가 다 살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너는 이건 잘 산 거다.",
"너는 이것은 잘못한 거야. 이건 넌 문제가 있어."라고 맨 마지막에 그렇게 그냥 평가해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먼저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뜻을 정해 놓으시고 말씀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먼저 기억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요한복음 8장으로 돌아가서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 왜 말씀 안 해 주세요?"라고 계속 묻자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짧은 한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마음속을 전부 다 찔렀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정말 너희가 죄가 없단 말이냐?" 이렇게 질문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던 것입니다. 참 이게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랑 얼마나 다른지,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제 그러한 부분입니다. 우리도 우리 사는 가운데에 여러 가지, "뭐 이거 하지 말라." 뭐 이런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이제 우리 집 앞에도 이제 밖에 보면 이제 '금연'이라고 딱 붙어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금연이라는 글자 앞에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앞에서, 이상하게도 '잔디에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푯말이 붙어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붙어 있는 말이 전혀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은 길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한마디 하셨을 뿐인데, 그 말이 사람들의 마음속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 깊은, 덮여져 있는, 아주 그냥 어떠한 말에도 이제 뻔뻔하게 "내가 뭐가 잘못인데?"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얼굴이 두꺼운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그 말씀이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을 찔렀던 것입니다. 이게 또한 우리 주님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씩, 하나씩, 다 그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오래 살면 살았을수록 잘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마음에 찔려서 더 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 여자만 남아서, 간음 중에 잡힌 그 여자만 남아서, 그 여자에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고 그 여자가 말하자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를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또한 우리의 생각과 다른 놀라운 점입니다.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그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잘못을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그 잘못을 의롭게 해결해서 이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간단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그래서 제가 좀 더 나중에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에 어떠한 근거 없이 그냥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아."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판사가 분명하게 잘못했는데, 그 사람의 죄를 "오늘 기분이 좋으니까, 내가 너의 죄를 오늘 정죄하지 않겠다. 당신은 괜찮아."라고 말한다면 그 판사는 불의한 판사입니다. 잘못된 판결을 한 것이죠. 예수님께는 결코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이 말씀에는 힘이 있어서 그 여자에게 참으로 안심과 평안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범치 말라, 이것도 역시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죄의 권세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는 그런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죄를 범치 말라."
여러분이 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 판단 기준으로 그냥 정죄하고, "아, 그래! 그거 잘못한 거 맞지." 이제 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판단 기준을 친히 정하신 그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그 말씀으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양심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고, 정말 이 죄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간구하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고, 그리고 죄사하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요한복음 10장 가서 두 번째로 예수님의 또 한 부분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0-15).
이제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선한 목자와 삯꾼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삯꾼'이라는 것은 이제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위해서 이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냐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삯꾼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보통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결국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이익을 취하려고 하시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이 아담과 하와한테 사단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속인 것도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냐? 그게 정말 좋은 건데, 왜 하나님이 그 좋은 것을 너희한테 먹지 못하게 하셨는 줄 알아? 그것은 그거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너희들한테 그렇게 좋은 것을 주기를 싫어해서, 하나님만이 그것을 누리려고, 너희들은 하나님 밑에서 계속 하나님이 너희를 이용하려고 그런 거야. 그런 하나님 계속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 자 봐봐, 이걸 따먹으라고 먹어도 괜찮아. 이거 먹으면 너희들이 하나님처럼 돼. 너희들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 이용받지 않고 잘 살 수 있어." 이렇게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에 속아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떠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을 때, 그들은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라 이제 오히려 죽음의 굴레 가운데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참된 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사단에게 속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이용받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참된 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목자와 삯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와 같다. '선한 목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여기 이제 사실 우리가 양을 치는 모습을 보면 비슷하게 보일 겁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선한 목자도 양을 치고 삯꾼도 이 양을 치죠. 그리고 선한 목자도 이제 양을 치면서 이제 양의 그 털을 얻게 되고 또 삯꾼도 그 양을 치면서 자신의 월급을 이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근본적이고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늑대가 왔을 때, 그 늑대가 그 양을 해치려고 했을 때, 삯꾼은 도망갑니다. 그 위험에 처했을 때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돈보다도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한 거죠. 이건 직장이잖아요. 그냥 잠깐 도망가서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한 것이죠. 삯꾼이라면, 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죠. 그게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가 위험에 처하는데도,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그 양을 위해서 늑대와 싸우는 것입니다.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니, 그런 목자가 어디 있겠어?"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그런 목자는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양을 위해서 대신 죽는 그런 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그래서 이게 특별한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이 선한 목자는 양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새끼처럼,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양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그런 선한 목자를,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그 선한 목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이익을 취하시는 게 그분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선한 목자께서는 정말 우리가 복을 누리고, 우리가 생명을 더 얻고, 그 꼴을 더 얻고,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그 선한 목자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는 이제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다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지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그 안에 절대 그 이기적인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이타적이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도, 우리를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참된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복인 것입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먼저 위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희한하게도 하지만 분명한 진리인 것은 우리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이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나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결국에는 복음을 듣는 분들 중에 구원받는 분들은, 이제 이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니, 이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맞다. 심지어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어준다고 해도 그게 오히려 나한테 이로운 것이다. 그게 나한테 복인 것이다." 이걸 인정하는 사람, 그걸 그걸 깨달은 사람,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참 하나님은,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 이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 번째로 요한복음 11장을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장 32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요 11:32-37).
여기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께 대한 오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능력이 없다', 이런 겁니다.
지금 여기 이제 이 사람들도, 아니 예수님이 그 나사로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빨리 와서 그의 병을 낫게 하고 죽게 아니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더냐?"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냔 말이냐?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이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떤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세 남매가 있었는데요. 그중에 이제 나사로가 이제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빨리 와서 나사로를 낫게 해달라고 소식을 보냈지만 예수님께서는 늦게 오십니다. 소식을 듣고서도 늦게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사 지내는 그런 광경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왜 나서로의 병을 낫게 할 수 없었습니까?", "정말 왜 그렇게 못했습니까?"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또한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이제 많이 하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왜 이렇게 이렇게 못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정말 그가 죄로 말미암아 그도 역시 죄인으로서 죽어야만 하는 그러한 불쌍한 운명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눈물을 보고 정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알게 됩니다. 정말 그들이 예수님께서는 그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이거는 압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렇게 사랑하는데, 왜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가? 사랑한다면 그런 거는 좀 해 주셔야 되는데, 그건 그럼 왜 능력이 없는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다음 부분을 보면은 이 주님께서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38절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38-44).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사람의 무덤에 서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단지 이 말씀을 하자 나사로는 그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 죽은 나사로가 일어나서 그 베로 쌓인 채로, 그대로 일어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그 능력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자신의 생각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마리아가, 또한 마르다가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32절에,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여기 계셨다면', 이제 그 하나님의 능력을 '거리에 제한'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야지,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셔야지, 그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은 37절에,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닌가, 이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실 죽은 이후에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것도 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의 어떠한 힘으로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죽음 이후에도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능력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많은 병과 안타까운 죽음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 세상에 많은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볼 때에 '왜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을 다 해결하지 못하시고 왜 지금도 병 들어가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이렇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우리의 짧은 머리로 그것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미약하게나마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불행한 것들을, 그런 병과 죽음을 이 땅에 아직도 지금 허락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더 깊은, 더 중요한 뜻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분명히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특별하게 그 기도를 하나 하시는데, 42절에 보면 그 기도의 내용이,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서 무리를 위함이니"이다. 이렇게 이것을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말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 내용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냥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셔도 되는데 사람들이 듣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우리가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께서 항상 그 말을 듣고 계시다는 것을, 이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리신 것은 우리도 하나님과 이와 같은 관계를 얻도록,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간의 올바른 관계다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지금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 5장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은 그 아들의 생명인데, 그 아들의 생명의 특징이 뭐냐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잠깐 그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 말씀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1-14).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던 그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이렇게 "담대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 이것이 그 생명의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어디서 잘 나타나냐면, 그 나서로의 죽음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그 소리를 내서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여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때 그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것을 원하시고, 동일한 뜻을 위해서 역사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또한 응답하시는, 그러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병이 안 들고 뭐 그런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 문제, 이 문제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이와 같이 오해하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 당장의 우리 주위에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이 있을 때, '왜 하나님은 이것을 처리하는 능력이 없으신가?' 이렇게 오해할 것이 아니라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를 더 생각하게 하시고, 그것에 집중하게 하시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시고, 또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생명,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교제하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와서 요한복음 12장,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2-34).
여기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어떻게 죽을지를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자,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4).
"왜 그 인자가 죽어야 된다라고 말하고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게 이제 사람들의 오해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구원자가 죽어야 되냐?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의 대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쉽게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 지은 사람을 그냥 좀 기분이 좋다고,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는 어떻게 치를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좀 잘못했을 때 그만한 보상을 해서 그것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인간 사회에서는 우리가 100만 원에 피해를 입히면, 또 100만 원 더해서 또 어떤 정신적인 보상까지 더해서 그것을 대가로 지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라는 것은 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훼손한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일에 있어서 처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에 대해서 정하신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그 생명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죄라는 속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한 것이고, 그래서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그 대가는 죽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죄는 반드시 피가 흘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인자가 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와 같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인자께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말씀을 듣고 "아, 내가 이 말씀을 들어보니 내 생각과는 다르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분명히 그 마음에 깨닫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죄를 평가하시는 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거룩함의 그 기준을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의 책망을 받고, "내가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사람에게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고, 그 죄를 다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죄를 이기고 살도록 힘 주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참 이 복된 구원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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