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온전한 지정의) > 23년 4월 16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함께 요한복음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입니다.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세 구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 3:1-3).
여기 이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이제 거듭난다는 것은 그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모습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지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한 사람이 유대인의 관원이고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아침에 일찍 일어나가지고 기도하고 성경 보고 교회 가고 헌금 많이 내고 그러한 사람인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라면은 당연히 하늘나라 갈 수 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들로부터도 "아, 저 사람은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라면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아니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모르지만은 저 사람에게 그래도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면 아니 그 부분을 조금 고치면 하늘 나라가 갈 수 있겠구나. 이렇게 말씀해 주셔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그냥 싸그리 그걸 무시하고 다시 태어나야지만이 그가 하늘나라 갈 수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한 대로 한 것 같은 저 사람도 다시 태어나야지만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늘나라 갈 수 있는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제가 잠깐 다른 얘기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특별히 여기 대전 중구 모임에는 영어를 하시는 이제 외국 성도님들이 많이 계셔가지고 특히 영어 표현과 관련된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혹시 시험에 나올 수 있는 표현입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총을 이 영어에서 세 부분으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긴 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특별히 이건 또 군 생활을 하신 저희 아버님한테도 또 생각나게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이 총에 긴 부분 있죠. 총열, 그거를 영어로 하자면은 이제 배럴이라고 합니다. 배럴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그 중간 부분 이제 방아쇠 부분 노리개 뭉치 있는 그 부분을 락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물쇠에 락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걸어놨다가 탁 해야지 총알이 발산되는, 그리고 이 개머리판을 스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거는 그걸 합쳐가지고 '락 스톡 앤 배럴'이라고 하면은 모든 것을 말하는 그런 표현이 됩니다. 모든 것을 표현하는 표현이 됩니다. 총이라는 게 참 제가 이제 군사 훈련 받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총이 굉장히 정밀한 그런 기계입니다. 장치입니다. 굉장히 멀리까지도 그 총알을 정확하게 보내는 이제 그런 장비죠. 그런데 신기한 게 그게 분해가 된다는 겁니다. 군사 훈련을 받을 때에 빠르게 분해하고 조립하는 연습을 합니다. 몇 초 안에 이렇게 해야 되고 그래가지고 분해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게 총을 쏠 때마다 거기에 이제 화약이 끼고 또 흙먼지가 들어가니까 자주 이제 정비해야 되는거죠. 그렇게 정밀한 기계를 군인들이 현장에서 금방 분해해가지고 닦고 다시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보면은 그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개머리판, 그리고 노리개 뭉치, 그리고 총열,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렇게 정밀한 장비가 이렇게 세 가지로 분해된다는 게 또 신기하더라고요. 어쨌든 영어 표현이 뭐냐면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락 스톡 앤 배럴' 이라고 하면은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이게 숙어예요. 모든 걸 다 표현할 때 '락 스톡 앤 배럴'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숙어를 배우긴 배웠지만 그걸 누가 써, 이런 거를 어디다 쓰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게 우리가 한국에 사니까 들어본 적이 없죠.
근데 고금 책자를 보니까 나오더라고요.
언제 나오냐면은 어떤 미국에서 어떤 농부가 거기는 총을 막 쓰잖아요. 총이 너무 오래돼서 이제 고치러 간 거예요. 그래서 수리하는 사람한테 내 총이 좀 잘 안 된다고 좀 고쳐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디가 문제인데요?" 그랬더니 "아, 여기 여기 개머리판이 좀 깨졌어요." 개머리판을 바꿔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방아쇠도 뭐가 꼈는지 빡빡해서 안 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방아쇠도 바꿔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총신도 여기가 녹이 쓸어가지고 이것도 바꿔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꿔달라고 하면서 '락 스톡 앤 배럴'을 바꿔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다 바꿔달라는 거니, 새로 사세요. 그런 거예요.
이게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거 고쳐야겠다. 그리고 이거 고쳐야 되겠다. 이거 고쳐야 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가 어디 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제 하나하나 다 따져보면은 여러분 다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부가 다 바꿔야 되는 겁니다. 나는 이런 게 좀 안 좋아, 나는 이런 나쁜 습관이 있어. 나 이거 좀 고쳤으면 좋겠어. 그런데 말을 듣다 보면은 그것만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사실 여러분 전부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총은 총신, 방아쇠,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은 특징적으로, 사람에게 특징적인 게 우리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영혼는 특별히 이제 지적인 면이 있고 정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정의'라고 하잖아요. 사람에 대해서 그게 우리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짐승하고 다른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지적인 면, 우리 감정, 그리고 우리의 의지,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이제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 문제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거 하나 좀 바꿔주세요."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여기 사람들의 지식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얼마나 고장 났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 나 지혜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그런데 실제로는 우준하다.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하냐면은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영광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이 더 높다. 심지어 금수가 이제 짐승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짐승과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버러지 형상의 우상, 버러지라는 것은 이제 벌레를 말하는 것이죠. 벌레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식에 문제가 있다는 게 여러분이 어떤 복잡한 지식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식에 문제가 있다는 게, 가치 평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의 제일 중요한 게, '아, 이게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건 가치가 떨어지는 거야.' 이걸 판단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우리의 지적인 능력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이제 우리의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가치 있는 일이고 이건 가치 없는 일이야, 하면 이제 가치 있는 일을 이렇게 선택하게 되죠. 거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의 모든 선택은 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그 돈 계산하는 거에 대해서는 되게 민감합니다. 시장에 가서 저는 그래서 시장에 가는 게 좀 스트레스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잘 모르니까, 시장에서 뭘 좀 사려고 하는데 가격표가 안 붙어 있어요. "이거 얼마예요?" 하면 물어보고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거죠. 그런데 내가 지금 이걸 맞게 줬는지가 확신이 없는 거예요. 집에 와서 나 이거 얼마 주고 샀어, 하면 대부분 혼나죠. 실패해요. 다른 데서는 그거 1천 원 더 싸게 팔더라. 하면은 그게 되게 억울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천원 가치 평가를 잘못한 걸 가지고 굉장히 억울해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거는 사람들이 그거랑 비교될 수 없는 손해를 보고 있으면서도 손해인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가치 있는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영혼은 그 가치 있는 영혼은 아끼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은 그냥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영 원인 것처럼 빵 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서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영혼이 잘 되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오히려 그것보다도 당장 지금 눈에 보이는 천 원, 이 천 원이 여러분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과 그 벌레의 영광을 바꿔놓고도 그걸 모릅니다. 말하자면은 이것도 틀린 말인데 말하자면, 수천억 원을 들여서 10원짜리 물건을 사놓고 아까운 줄 모르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된 것이냐면 20절부터 보겠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0-21).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알도록 만물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봄에 새로운 싹이 나오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그렇게 섬세하게 때마다 생명을 가지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보도록,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분이라도 보도록 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분명히 그들이 보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만물을 통해서 봤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적인 부분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해서 우리의 지적 능력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 머릿속에 있는 가치 평가 시스템이 망가져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감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 28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여기 사람들이 이런 존재라고 한마디로 3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정하다" "무자비한 자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도 인격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봤을 때 그것을 슬퍼하고 동정하고 같이 아파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봤을 때 그걸 기뻐하고 축하해 주고 이게 당연히 있어야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옳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 감정이 망가진 경우를 또한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불행을 겪는데 마음이 좋은 거예요. 잘 됐다. 그 마음속에 시기가 가득한 겁니다. 악의가 가득한 겁니다. 악독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데, 아 괜히 마음이 쓰리고 배가 아픈 것이죠. 이게 그 시기가 가득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감정이 이제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어떻게 돼 있냐면은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기본적으로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에게 베풀어주니까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해서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느 정도로까지 감정이 망가지냐면 그 부모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정하다" 무정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감정이 파괴된 것입니다. "무자비하다" 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몰아낸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가까이 있기 싫어요. 하나님이 내 삶에 있는 게 싫어요. 그냥 하나님 없이, 나 혼자 살고 싶어요.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감정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이 망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지도 이제 망가집니다. 우리의 의지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할 때 그것을 이제 실행해내는 것입니다. 어떤 뜻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그런데 의지가 망가진 사람은 그 일을, 선한 일을 자기가 좋은 뜻을 가지고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작심 삼일이라는 말을 하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는 '저게 좋아, 저게 내가 해야 돼.'라고 하지만 3일을 못 가는 겁니다. 의지를 실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또 뭔 줄 아십니까? 3장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 3:14-15).
좋은 일을 하려면은 그렇게 의지가 약한데, 나쁜 일을 하려고만 하면은 너무나 빠른 거예요. 나쁜 일은 계획을 안 세웠어도 그냥 아주 달려가서 하는 것입니다. 나쁜 말은 입에서 저절로 나옵니다. 내가 좀 잘 말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속에 저주 악독이 가득하다. 가득한 거는 그냥 기회만 있으면 열기만 하면 저주와 악독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헌담하고 욕하는 거는 너무나 쉽게 준비 안 했어도, 좋은 말은 준비하기도 힘들고 준비했어도 못하는데 나쁜 말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다시 이제 1장 32절에 그 결과를, 그 대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사형에 해당한다, 죽음에 해당한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나이 들어서 죽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토록 분리돼서 하나님 없는 그 지옥이라는 곳에서 영원토록 고통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은 참 그러한 곳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 지식이 망가져버린, 무정하고 무자비한, 악을 행하는 데만 빠른, 선한 것은 할 의지가 없는, 이런 사람에게 사형이 합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상태 가운데 있습니까? 만약에 이 가운데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야, 라고 인정하신다면은 참으로 이 사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 됩니다. 지금 빨리 찾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쳐가지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좀 성격이 급해." "나는 너무 쉽게 화를 내." "난 그것 좀 고쳐야겠어." 그걸 고쳐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전부가 바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도 그렇게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도 이렇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이미 한 번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믿으면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요한복음 3장으로 돌아와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3-14).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들려야 하리니, 반드시 들려야 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그들도 지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들에게 잠깐 어려움이 생겼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계속 아비와 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대로 행하지 않고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독사를 보내셔가지고 그 독사가 그들을 물게 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굉장히 이상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놋으로 뱀을 만들어가지고 높이 달라."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지고 높이 달라 그리고 그 뱀을 본 자마다, 그 뱀을 보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말씀을 믿었을 때에 그대로 믿고 그 뱀을 보았을 때에 그들은 그 뱀에 물린 독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형시키는 그런 사형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지만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거기에 달리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거기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옛적에 그 뱀을 본 자마다 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다시 태어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지금 이런, 이런 문제가 있으니까 이것만 좀 바꾸세요, 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은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의 지식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정말로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기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그분이 먼저 지식에 있어서 감정에 있어서 의지에 있어서 온전한 분이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답게 높여드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참된 감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순수한, 정말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함께 우는 그 눈물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전혀 이기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하게 우리를 위하시는 그 눈물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를 보게 됩니다. 그분처럼 많은 반대와 고난을 겪으신 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어느 순간에도 "내 아버지 일을 행해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일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한 가지 예로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시는 선한 목자로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제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7절에 보면 죄인 하나가 회귀하는 것을 하늘에서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그걸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사람들은 여기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5장 앞부분을 보면 사람들은 죄인에 대해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입니다. 죄인인데, 그냥 그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없었으면 좋을 뻔한 사람들이야. 무시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죄인 한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를 굉장히 여러분보다도 더 귀하게 보시는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아주 그냥 심판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 보면은 저 사람 한번 아주 그냥 세게 한번 혼나야 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십니다. 분명히 그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해서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귀하면 하늘에서 기뻐한다. 이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저도 그렇고요. 그 99마리를 들에 놔두고 그 양 한 마리를 찾으러 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 많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걸 찾으러 가다 보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거지? 99마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으러 간다면, 그는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해서 너무나 애타하는 것입니다. 그 양 한 마리에 대해서 너무나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너무나 불쌍히 여겨서 앞뒤 가리지 않고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엄마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자기 자식이 하나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되지? 남은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렇게 계산하지 않고 일단 뛰어내리는 게 엄마의 마음입니다.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죄인에 대해서, 여러분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또한 그 하나를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닌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찾다가 아 못 찾겠네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의지가 온전한 것입니다. 그 의지를 완전히 실행하실 때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찾을 때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주님의 의지입니다. 그분의 지식과 그분의 감정과 그분의 의지는 참으로 온전하신 분이었습니다.
또 한 군데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입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1).
여기 유대인들이 또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이 여자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죄를 미워하시고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 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온전한 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로 치라." 그런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죄가 정말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해야 되는 그런 죄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는 그냥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반드시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피가 흘려지지 않는다면은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물러서게 됩니다. 그들은 사실 말로는 간음 중에 잡혔으면 돌로 쳐서 죽어야지라고 그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라고 큰소리 치던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사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자기 자신은 그 심각한 기준에 대해서 적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 그들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사실상 모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죄의 기준이라는 것은 온전히 알지 못하는 지식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순간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해야 되는 그 기준이구나, 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다 도망가버리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피 흘리지 않는다면 사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돌로 치라고 죄의 대가를 치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이상하게 10절에서는 그 여자에게 "너를 고소하는 이들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11절에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왜 현장에서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내가 죄인을 찾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을 찾아 그를 회개케 하고 그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온전케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죄인인 여자를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되나요? 누구보다도 주님이 그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대신 죽을 의지를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그 죗값을 치르겠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그 주님의 의지를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뜻만 가지고 있다가 실행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을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위해서,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제 그 대가를 여기 치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하나님의 뜻을 온전한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시고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을 때에 "내가 이것을 하려고 했지만은 하나도 제대로 한 게 없구나."라고 하고 죽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의 의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계획을 온전히 이루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속하게 한 모든 피를 흘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참으로 우리가 믿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참 우리가 마땅히 믿어야 되는 분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의지해야 되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참으로 의롭다." 이제 영생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가지고 올바른 지식 가운데서, 올바른 감정 가운데서, 올바른 의지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말씀하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고장난 상태로 살지 않는 거듭난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바뀌어진 그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벗지 말라"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이 이러한 거듭남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그 거듭남을 받기를 바라게 됩니다.
'강성찬 형제님 > 복음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 2023.09.02 |
---|---|
복음 : 하나님의 증거 (0) | 2023.06.07 |
복음 : 하나님의 권리 (0) | 2023.02.16 |
복음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0) | 2022.12.21 |
복음 :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1) | 2022.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