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복음 말씀

복음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박이레 2022. 12. 21. 16:24

< 복음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 2022년 12월 18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10).

누가복음 19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여기서 인자는 한자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자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구원자를 가르키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특별히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성경은 구원자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구원하려" 왜냐하면 성경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위험한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원하다는 이 단어가 많이 사용이 되는데요. 그런데 여기 특별히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것은 9절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특별히 이것을 명사로 사용된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이 신약성경에 두 군데에서만 구원이라는 명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왜 굳이 이것을 따지냐면, 이 두 군데를 살펴 볼때에 구원이 무엇이구나, 라는것을 우리가 주목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딱 두군데니까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군데는 금방읽은 이 구절,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부분이고요. 또 한군데를 가서 보겠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여기서도 명사로 구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두군데에 사용하셨습니다. 이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특별히 구원자가 누구인지, 구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에 읽은 누가복음 19장에서는 구원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특별히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군데서 구원하는 사람이 누구냐,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이냐, 이 두 부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22절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은 구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해서 '아, 구원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해서 아는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것을 이 내용에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는 유대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 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고 동정녀에게서 났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후손이고, 그래서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자가 누구냐라고 따져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해서 추측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 필요가 없을뿐만 아니라 그렇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자기가 생각해서 '아, 이러한 신이 있겠다.' '아,이러한 구원자가 있겠다.' '그래서 그 신을 내가 예배해야 되겠다.' 이렇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그렇게 한 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제가 최근에 네팔을 방문하였습니다. 네팔은 힌두교 국가입니다. 그런데 힌두교를 종교라고 하는데, 힌두교는 참 이상합니다. 보통 종교라고 하면, "우리 종교는 이 신을 믿는다." 그런게 있습니다. 그런데 힌두교는 우리는 어떤 신을 믿는다가 아니라 우리는 모든 신을 다 믿는다 입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트럭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트럭을 몰고 다니는데 이 트럭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자기가 그 일을 하니까, 그래서 이 트럭을 잘 운행해 주는 신이 있겠지. 라고 자기가 생각합니다. 그 신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트럭신의 날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트럭신의 날에 축제를 합니다. 트럭을 예배하고 중요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야, 그럼 트럭신만 있냐? 우리 부엌에 그릇의 신도 있다." 실제로 그런게 있습니다. 그릇신을 자기가 만들어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이게 끊임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 만들어 내고, 그러면 이런 신도 있겠거니, 하고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항상 그렇게 잘못 나가기 때문에, 너희들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계속적으로 차근차근 자세하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구원자는 유대인에게서 난다." 이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누가복음 19장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구원받지 못할거 같았던 한 죄인, 사람들이 "아, 저사람은 죄인이야." 라고 부르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 주위에 있는 바리새인들, 맨날 교회 가고, 그리고 여러가지 종교적인 일을 잘 하는, 십일조도 잘 내는 그런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부르는 그 세리장인 삭개오를 가리켜서 "이 사람이 구원받은 자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고 하시는 걸까요?
우선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잫되는 사람, 부자인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사업도 성공하고, 자식도 잘되고, 오래살고, 그런 사람이 아닌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삭개오는 구원받자마자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는 부자였는데 구원받은 후에는 가난뱅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 쌓아두었던 많은 재산을 이제 "절반은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순간, 그의 재산의 절반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절반도 자신이 가지고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억지로 잘못해서 다른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배씩 갚아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네배씩 갚아 주려고 자신의 재산을 절반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사실상 그의 재산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으면 잘 살고 이 세상에서 형통한다,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구원 받으면 죽어서 좋은곳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이 삭개오에게 "오늘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죽었을때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에나 누릴 수 있는 어떤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즉시로 누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구원이 아니라면 구원이 뭔가? 우리는 이 삭개오의 변화를 보고 구원이 뭔지를 보게 됩니다. 삭개오는 그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생각할때에 이게 세상에서 살기에 최고 좋은 방법이다, 라고 생각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생각할때에, '지금 이 세상은 로마가 세상을 잡고있어. 로마가 최 강대국이야. 봐 바, 로마가 모든 나라를 다 다스리잖아.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도 다스리고 있어. 로마에 빌붙어 사는것이 최선이야.' 이게 그가 생각한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로마의 힘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돈을 뺏어서 로마에 바치고 그런 와중에 자기의 뱃속을 불렸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생각할때에 그게 이 세상에서 사는 최고의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방법대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게 그가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후에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네배로 갚으라." 이것은 사람의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기준이 자신의 기준이 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것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기준으로 갖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구워받은 사람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핵심적인 변화입니다. 이게 주 예수께서 "이게 바로 구원이다.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이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분명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각할때에 '아니, 그런 구원이라면, 그게 구원이라면 내가 해도 되는것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구원이라는게 내가 얻지 못하는 큰 부를 하나님께서 해주시니까,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으려고 하는거지.' 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구원이 이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못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해달라고 한 것이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변화가 우리 인생이 가장 못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죄악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내 마음속에 두는 것, 이게 우리가 가장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건강관리 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잘 가르치면 자녀들이 훌륭하게 됩니다.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어느정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이기적인 마음대로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대로 하고자 하는것은 조금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그 성공한 부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성공했지만 그의 부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원의 변화에 대해서 한군데를 또한 찾아서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1-7).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 에베소서 2장에서는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다음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아니,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서 숨쉬고 움직이고 있는데 나보고 왜 죽었다고 말하는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기 때문에 죽어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죽은 시체에는 아무리 말을 해도 그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에는 우리가 아무리 바늘로 찔러대도 그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금 이 몸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는 반응을 잘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전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지금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아. 그렇게 하는것이 맞구나. 그렇게 해야 겠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고 그렇게하지 못할때에 마음이 찔리고 이렇게 해야되는 것이 마땅한데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죽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않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보면 "세상 풍속을 좇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이 세상 가운데 살 때에, 내 자신이 판단하고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것이 좋다하면, '아 그래 나도 그것이 좋아.'라고 하면서 생각없이 그것을 좇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게 좋은것이라고 하면 나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나의 판단 기준이고 내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도록 여러분을 노예처럼 끌고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사단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왠지 싫고, '아니, 왜 꼭 그렇게 해야 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바로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을 따르는 이 세상의 권세잡은 자를,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결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더니"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살때에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 풍속을 좇아서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 살다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에는 진노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것이 그런 사람들의 결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이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아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않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여기 놀라운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4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떠한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믿는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구원받은 자가 갖게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수 없는 변화입니다. 죽어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 다시 살아나실 때에 우리도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믿는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삭개오도 예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삭개오를 구원하시고 그를 다시 살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기준이 된 것입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함께 일으키사" 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나셨다라고만 끝난것이 아니라 그를 일으켰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분께서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를 다시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부활하실 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그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사망 권세를 이기고, 그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까지는 그 사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더이상 사단의 권세아래 있는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떨쳐버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이상 구원받은 자는 사단이 명령하는대로 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 가운데서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가지를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제 우리는 세상 가운데 있는것이 아니라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더이상 우리에게는 세상 풍속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하늘에 앉은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복된 세가지 변화입니다. 살아나고,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이제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있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구원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죽어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스스로 살아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사단의 권세 아래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 풍속 가운데서 하늘의 그 자리에 앉게 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스인은 아프리카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흑인이 자신의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 있겠느냐? 못한다는 것입니다.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빼고 하얗게 할 수 있겠느냐?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할 수 있으면 악에 익숙한 우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내가 잘하면, 내가 열심히 하면 그러한 것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이것을 절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 없는것처럼 여러분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도 그래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가운데서 자신의 생각대로 다 형통하였습니다. "이것봐, 내가 생각한대로 되니까 성공하잖아." 삭개오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에 있어서는, 그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눅19:3).

그는 왜 예수님을 보고자 했을까요?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끄는것이 있었습니다. '아, 그 예수님이 참으로 나를,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많이 행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 중에 특별히 자신의 마음을 끄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누가복음 19장 바로 전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이 삭개오에게 오시기 전에 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있는데, 삭개오처럼 자기와 똑같은 일을 하는 그 세리가 있는데,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19장에서 보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라고 말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자신이 죄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행했던 그 많은 일들, 다른 사람들의 것을 억지로 빼앗았던 그 일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인식하는 가운데에 두려움, 그 진노의 심판, 죄 가운데 있는 고통, 그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하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내 스스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때에 그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세리가, 이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려서 의롭다함을 받은것이 아니라 단지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저는 죄인입니다." 단지 이 말만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저가 의롭다함을 받고 내려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삭개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는 자기도 그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 삭개오에게 먼저 다가와 주십니다. 삭개오는 이때에 나무에 올라가서 숨어 있었습니다. 참,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올때에 꼭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올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분들에게,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복음집회에 나오라고 초청할때 보면 그분들은 앞에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대체로 그분들은 뒤에 안보이는 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죠. 하지만 분명히 그분들도 그렇게 뒤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의 한편에는 이 삭개오처럼 내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면목은 없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구원받고 싶다. 내 이 죄가 씻음을 받고 싶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싶다. 나도 더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삭개오가 숨어 있었지만, 그 삭개오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삭개오가 있는, 숨어있는 그 자리 밑에 가서 정확하게 서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할테니, 내가 너의 죄를 깨끗게 씻겨 줄테니 내려오라.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는 너와함께, 너에게 거하겠다. 내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듣고 믿음을 발휘합니다. 참으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자비로운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내려갑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던 자리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것을 맡기고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려오기를 바랍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나중에 좀더 개선한 다음에, 그래도 아직은 하나님 앞에 나가기에 부족한 면이 있으니 몇가지 것은 조금 수정한 다음에 나가겠다.' 하는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그 즉시 내려갔습니다.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도 지금 있는 그대로, 즉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내려옵니다. 믿음은 즐거운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행했던 많은 일들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내 스스로 성공해 보겠다. 돈을 버는 그 일, 돈은 벌지만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억지로 협박해서 뜯어내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고 있는 그 일들,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즐거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수님께, 여러분을 의탁할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때에 '아,이게 즐거운 일이구나.'하는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이제까지 안했지? 예수님께 내 모든것을 맡기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일이구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첫번째로 하는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그런 구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이것을 위해서 바로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이 일을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주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 잃어버린 자를 찾는것은 하늘에서 더 잘 하실 수 있는것 아닌가? 하늘에서 보면 더 잘 보일텐데.' 그런데 잃어버린 자를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추적해서 거기서 데려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피를 흘려야 됐었습니다. 범죄한 여러분을 대신해서 대신 피를 흘리는 것이, 그것이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사람의 아들로서, 인자로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기 위해서, 그래서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지근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그분께서는 그 진노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야 되는 그 진노의 심판을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내가 지금부터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너에게 참된 구원을 주고싶다." 참으로 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급히, 즐거워하며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