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로마서 성경읽기(요약) 완료

성경읽기 : 로마서 7장 14-17절

박이레 2023. 3. 12. 16:04

성경읽기 : 로마서 7장 14-17절

성경읽기 : 로마서 7장 14-17절(요약)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4-17, 개역한글)
 
 
-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고 죄를 심히 죄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가를 인생에게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13절까지는 영어 성경을 보면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14절부터는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앞에 'for'라는 전치사가 붙어있다. 이는 설명의 내용이다. 어떠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지 교제할수 있다. 또 이 내용은 24절까지 쭉 이어진다. 그리고 24절의 탄식은 누구의 탄식인가 하는 질문을 할수 있다.
 
-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신령한 자'가 나온다. 이는 영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또 하나는 '육신에 속한자'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있다. 이는 구원받았지만 세상적인 삶 가운데 있는 아주 연약한 자들로 이해할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1, 개역한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4, 개역한글)
 
또한 고린도전서 2장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 표현을 그대로 로마서가 쓰고 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이렇게 육신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온다. 육신이라는 것은 고린도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 여기서 육신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3, 개역한글)
 
그러나 8장에 나와있는 '육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육신으로 이해하는것이 옳다.
 
- 로마서 말씀에는 여러 단어들이 장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육신에 속했다는 단어들이 7,8장에 계속되어 사용된다. "우리가 육신에 거할때에" 이것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개역한글)
 
그러나 7장 14절에 나오는 '육신'은 우리가 입고있는 이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성도들이 육체를 가지고 있고 죄의 본성아래 있기 때문에 14절 이하의 탄식들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5, 개역한글)
 
- 14절부터 25절까지의 전체적인 말씀을 보면 구원받은자의 현실성을 말씀하고 있다. 사도는 속사람과 육신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구원받은 성도속에 죄의 속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본이되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육신에 져서 죄에 팔려가는 자신을 말씀한 것은 우리의 삶을 경고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하기 위한 측면을 생각할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계속에서 그 연약함속에 있을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15절 말씀을 이어서 교제하면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라고 사도바울은 말씀한다. 이것은 자기가 행하는것을 무의식중에 행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것이 맘대로 되지 않음을 고백한다.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서 성도의 갈등이 고백되어 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갈등에 휩싸이지 않는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질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였는데 그것이 되지 않으면 그에대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롬6:11, 개역한글)
 
여기에는 "반드시"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분명히 죽은 자이다. 그런데 죽은 자가 죄를 지을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죄를 지을수 없다가 맞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살아가며 죄를 짓는다. 성도의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 값이 완전하게 지불되었다. 이것은 법적으로 완전하게 성취가 되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완전하지 않다. 그 부분을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의 죄의 본성이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을때에 우리는 죄의 본성에 무릎꿇게 되는것을 말씀하고 있다.
 
-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선한 것이다. 이와같은 역할을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율법의 기능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바울 형제님이 육신적일때가 아니라 신령한 상태에서 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때에 율법이 어떠한 것이냐,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15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와같이 행하는 사람에게 율법의 순 기능이 드러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면 도리어 율법의 선한것을 시인하노니"(16절)
 
신령한 사람일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못미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가 심히 죄되게 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14절부터 23절까지 총 세개의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각 탄식은 동일한 구조를 따라 탄식한다. 14절에는 자기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탄식한다. 이것이 두번 더 반복되어 탄식한다.
 
- 15절을 볼때에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는데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정확한 표현은 "내가 행하는것을 내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적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행하는 죄는 내 의지가 허락한 것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화를 내고 싸우는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님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을 말씀하고 있다.
 
14절에 또한 "팔렸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원어의 원래 뜻은 '바다를 건너 다른 땅으로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흑인들의 선조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데 잡혀서 바다를 건너와서 팔렸다.
 
17절 말씀에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이 잘못은 새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죄악된 내 성품이 그 죄를 짓는다는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수 있다. 우리가 갈등과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변명하려고 이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새사람이 있고, 내가 원래 보유하고 있던 죄성이 있는데, 이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죄성이 문제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마치 "내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는데 이것을 마치 내가 아닌 다른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수 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의지를 발동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여지는것은 비슷할수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고 할수 있다.
 
종이 있는데, 외부적으로 충격을 주면 둥둥둥 울리게된다. 그러나 구원받으면 더이상 외부에서 종을 때리지 않는것과 같다. 그러나 전에 때리던 울림이 남아있기 때문에 종은 당분간 전자운동을 하며 잔음을 울리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종은 울림은 낮아지며 완전히 멎게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같아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 17절에 대한 말씀을 옳게 이해한다면 죄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17절도 율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자에게 작동한다.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았다 할찌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악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중에 간혹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할때 율법이 기능하고 율법의 순기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공중재림을 하시고 믿는자들이 새몸을 입고 공중으로 끌어올려질때 우리는 이 육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더욱더 내가 죄인임을 느낄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