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봉래 형제님
< 03. 교회의 비유들_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
이번시간에는 윌리암 맥도날드 형제님이 쓰신'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에 나온 부분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교회진리가 무척 많은데 형제님께서는 일곱개의 중요한 제목들을 설명을 하셨거든요. 그 일곱가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에베소서 1장 23절은 교회를 그의 몸이니, 이것을 약간 바꿔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는까요. 주님의 몸입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자' 이것이 주님 입니다. 여기까지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주님의 충만이니라 라고 이해할수 있겠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에베소서 1장 에서는 교회가 몸이라고 했는데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 몸이 하나라고 하는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하나인 이유가 성령님이 하나시며 주님이 하나시며 하나님이 하나시다 라고 삼위 하나님을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한분이ㅣ고 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분이시고4절에서는 성령님께서 한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 다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되어 있습니다. 우선 큰 틀에서 일곱가지를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맥도날드 형제님께서 신약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진리, 특별히 반드시 맨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한몸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두번째 교회진리에서 저희들이 기억해야 하는것은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첫번째, 한몸이다. 두버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강조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로 가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세번째는 교회는,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지체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 몸처럼 기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을 보면 발이 손더러 이르기를.. 합니다. 곧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역모임은 사람의 신체처럼 손,발,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몸은 하나지만 여러지체가 기능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진리 세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10시간 전 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열한제자들이 사도들입니다 교회의 터를 닦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시지요. 대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교회와 하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진리 네번째는 교회는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인도자는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에 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했고 그 다음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의 특징을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거룩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진리 다섯번째 입니다. 그다음 여섯번째로 가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4:11-13).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주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냐면 사도와 선지자 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거니까 전도자, 그리고 목자(목사)입니다. 목사는 번역을 잘못한 것입니다. 목사는 이 단어의 헬라어가 '포이멘' 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의 뜻이 양을 치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교파에서 '목사'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원어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목자로 번역해야 원어의 뜻을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자 교사 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묶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번역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성격을 가진, 심령을 가진 교사 입니다. 사도 선지자 전도자 그리고 교사 네개입니다. 네명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이중에서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날 없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성경을 완성함으로서 임무가 끝납니다. 사도들은 은 주님을 친히 뵙고 주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도 마찮가지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성겨을 기록하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랫 현재 교회의 하나님이 주신 사람은 두사람입니다. 전도자와 교사 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진리 여섯번째 입니다. 마지막 교회진리 일곱번째로 가겠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2:5).
이것이 저희들이 많이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가운데 낄수 있는게 없습니다. 주님외에 중보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계층이 없습니다. 예를들면 신부님이라든지, 목사님이라든지 이 모든것들이 다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옛날로 치면 제사를 드릴수 있는 신약으로 치면 예배를 드릴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만인 제사장입니다. 이 일곱가지 정도를 맥도날드 형제님께서 교회진리의 중요한 진리로 설명 하셨습니다. 이런부분은 약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진리가 많은데 그 중에서 일곱개를 뽑을때에 어떤 가치관을 따라서 뽑았는가에 따라서 동의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 일곱개를 하고 이 일곱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교회에 관한 원칙들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일곱가지를 다 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저희들이 이미 알고 실행하고 있고 그래서 쉽게 지나갈수 있는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일곱번째, 만인 제사장, 모든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들이 믿고 실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릴때에 모든 성도들이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것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형제들은 입을 벌려 예배를 드립니다. 자매님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원칙에 따라 잠잠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몇번 말씀 드렸습니다. 저희들이 실행을 어떻게 하냐하면, 모든 형제님들은 주일에 만찬 예배때에 감사를 가지고 나와서 감사를 준비해 오셔서 입을벌려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이것이 형제의 책임입니다. 자매님들은 잠잠하지만 마찬가지로 감사를 준비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더 어려운 역할 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님들은 입을 벌려야 하니까 표가 나잖아요? 그래서 할수없이 준비를 합니다.그런데 자매님들은 표가 나지 않으니까 준비를 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자매님들께서 특별히 유의 하셔서 내가 주님앞에 나올때에, 구약에서는 이렇게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바구니에 주님게 드릴 예물을 가지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물은 돈이나 물질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가사와 찬양을 가지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자매님들께서 특별히 주일에 교회에 나오실때 내가 이번주 이와가은 찬양을 입으로 드리지 못하지만, 자매님들께서 언제 예배를 드리나면 보통 이렇습니다. 형제님들이 찬송을 택하시거나 감사를 드리지요. 그런데 사이사이가 있습니다. 가운데 약간 인터벌이 있습니다. 그때 자매님들이 조용히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자매님들께서 그렇게 시간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잘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6번도 먼저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그가'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교회에 사도 선지자 전도자교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는 대체적으로 몸인 교회 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를 에클레시아라고 했었지요. 세상에서 어던 목적을 가지고 불러낸 무리들, 불러낸 성도들, 이것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불러낸 무리들을 저희들이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부터 데사로니가전서 4장까지 교회가 오순절에 시작되서 휴거될때가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총칭해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몸인 교회입니다. 두번째, 성경은 교회를 두가지로만 나눕니다. 또 하나는 지역교회 입니다. 어떤 특정한 시대에 지역에서 모이는 무리들을 지역교회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편의상 이둘을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몸 하면 이것은 우주적인 교회입니다. 그 다음 지역교회는 저희들이 편의상 모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서 모임은 지역교회 입니다.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모이는 교제하는 성도들이고 몸인 교회하면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특징을 조금 말하면 몸은 한번도 모인적이 없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한곳에 모인적이 없습니다. 예루살렌 교회가 시작될때도 그렇게 모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될때도 120명이 모었는데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보면 주님이 부활하신후 나타난 사람이 갈릴리에 500명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120명이 구원받은 성도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몸은 한번도 이 세상에서 전부 모인적이 없습니다. 언제한번 제대로 모이냐면, 휴거할때 뿐입니다. 그때만 전부 모입니다. 휴거할때, 주님 앞에서 그때만 전부 모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모인적이 없습니다. 가이 모일수가 없지요. 그 다음이 지역 모임입니다. 에베소서는 주로 몸인 교회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가 나오면 주로 몸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도 몸입니다. 에베소서는 큰 틀에서 교회의 영광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의 주제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골로새서는 주로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는 전부 지역교회 입니다. 원칙적으로 지역교회를 설명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를 주셔서 성경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보면 교회의 원칙들이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가 터를 닦은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장). 그 터 이위에 우리가 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신것이 전도자와 교사 입니다. 그 전도자와 교사를 몸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지역모임에는 성경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와 교사가 다 있지 않습니다. 어떤 지역모임은 전도자는 있는데 교사가 없고, 어떤 지역모임은 교사는 있는데 전도자가 없을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지역모임에는 전도자도 교사도 없는 지역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었다고 하는것은 몸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은 이 전도자와 교사를 초청해서 유익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전도자와 교사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은 이와같은 전도자와 교사를 초청ㅎ서 유익을 함께 나누며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1절을 가지고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교회 진리중에 모든 모임은 이와같이 합니다. 모임에는 순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지역교회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 지역교회를 다니면서 각 지역교회를 세워가는 교사와 전도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풀타임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이 전심으로 각 지역모임을 섬깁니다. 그리고 각 지역모임은 복수 장로가 인도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믿는 성경의 교회진리 입니다. 각 지역모임은 복수 장로들이 인도합니다. 지역모임은 두 시스템이가는 것입니다. 복수의 장로들이 인도하고 또 하나는 순회하는 전도자와 교사들이 그 교회를 돕습니다. 그래서 인도자 그룹이 두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순회하는분은 지역교회의 내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역교회 내에서 할 것입니다. 내정간섭을 하는것이 아니고 자치권이 있지요. 말씀과 전도의 원치들에 대해서 전성경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러면 그와같은 원칙들이 지역모임에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지역모임의 장로들이 그 지역교회에 적용하는 두 시스템으로 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루어 내는데 처음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어떤 지역모임이 장로라 인정하면 장로가 지역모임을 마음대로 어느 방향이든 끌고 가 버립니다. 이것도 안되는 것이고요. 또 그다음 순회하는 분들이 지역모임을 지배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피차간에 말씀에 맞게 가야 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장 말씀 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다섯번째로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 이것은 징계의 문제 입니다. 이것은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 첫번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몸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다닌적이 없습니다. 주일아침 예배드린적이 없습니다. 그는 교회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운 위대한 왕이지만 그는 교회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교회가 비밀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알려지지 않다가 신약시대에 비로소 알려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기원은 창세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기 전에 교회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보다 먼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위하면 안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약에서는 비밀이었습니다. 두번째, 신약에서 비로소 계시 되었다 할지라도 -주로 사도바울을 통해서 계시됩니다- 그 교회를 생각하신 시점은 창세 전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는데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면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작은 벌레도.. 예를들면 파리 모기 같은것을 왜 만드셨을까? 안만들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싶은것도 그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피해가 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목표가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부 하늘라가서 주님께 물어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퀴벌레 때문에 참 고생했습니다. 왜 만드셨나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일반적으로 그 창조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그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 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많은데요. 예를들면 해와 별이 있고 나무가 있고 저희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가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이 전부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실때 의도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여기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을 드리면요. 주님께서 몸을 가지셨지요. 주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천년전에 베들레햄에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사람처럼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앞에 경배하지요. 저희들이 머리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십니까?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입으신 육체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첫번째 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몸이 교회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세상에서 30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 주님을 세상 사람들은 볼수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이시고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우편의 영광의 자리에 계신다 해도 볼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이 땅에서 보이는 존재가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이게 드러내는 것, 이것이 교회의 목표 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 주님의 인격이 어떤 분인가, 주님이 무슨일을 하셨는가, 주님의 마음은 어떤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표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말로나, 교회의 집회로나,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잖아요. 너울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지혜, 이것을 천사에게 보입니다. 이것이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들은 그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 자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최고의 피조물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이 교회시대에, 은혜시대에 태어나서 복음으로 구원받아 교회에 들어온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교회에 들어와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도안 찬양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니라" 교회는 주님을 충만케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입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아내로도 되어 있습니다. 혼인식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부입니다. 예수님이 신랑 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냐면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이 주님에게 적용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돕는자입니다. 괭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좀 표현이 그렇습니다.. 주님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더 충만하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데, 그 일을 하시는데 교회가 그 충만을 돕는자입니다. 다른 표현을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제일처음에 공중에 오셔서 교회를 끌고 가실것입니다. 그리고 7년 후에 이 땅에 지상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천년간 통치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실때에 교회가 그 보좌에 함께 앉을 것입니다. 그 보좌에 함께 앉아 주님과 함께 통치합니다. 이 부분이 교회가 주님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충만케 하시는자의 충만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이것이 교회와 관련된 이론적인 설명들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
교회는 몸입니다. 그런데 한 몸입니다. 오순절부터 휴거될때까지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 모아서 한곳에 모으시니 한 몸이지요. 구원받은 이 교회 말고 또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수 없습니다. 한몸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교회에 속하고 이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 교회의 지체들이다라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몸 교회는 하나 입니다. 그런데 지역교회는 여러개 입니다. 지역교회는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갈라디아에 교회가 세워지고 1,2,3차 전도여행으로 교회가 계속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저희들에게까지, 먼 극동 한국에까지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는 괭장히 많습니다. 많고 다양하고 서로 만난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볼수 있냐면 지역모임은 사이는 너무 갈라져 있습니다. 너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하나되자" 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운동을 대표적으로 '에큐메니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과 예수님을 모든 종교가 통합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개신교 따지지 말고 통합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한국에 장로교만 해도 200개 이상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운동이 벌어집니다.'하나가 되자' 그래서 무슨 장로교, 무슨 장로교, 좀더 친밀한, 공통점이 많은 장로교끼리 합칠려고 하는 운동들을 합니다. 모임도 그렇습니다. 전국에 약 200개의 모임이 있는데 각각 다릅니다. 왜 각각 다르게 되었는가, 이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각 지역모임이 성경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모임의 사역자가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가 한명이고 한명의 개성이 그 교회를 정해버립니다. 그 사역자의 성향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교회가 다 그 성향을 띄어 버립니다. 사람은 다 개성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 사역자 저 사역자에 따라서 교회가 다 다릅니다. 머리가 주님이라면 교회가 통일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사람이다 보니까 전부 분열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여서 하나되자" 이러면 안되고요. 그것은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전부 교회의 머리를 주님으로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되게 하신 것은 성령께서 이미 해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되자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 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 됩시다" 그래서 두 교회를 한 교회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그 다음 각 지역교회가 같이 연합해서 뭔가를 하고 하는것은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되지 않습니다. 하나됨을 목표로 놓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 방법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되게 하셨다. 사람이 나눌수 없다." 이미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역모임 사이에 이미 갈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요? 성령께서 하나되게 해 놓으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됨을 이루는 방법 입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킬까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내용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4절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몸으로 넣습니다. 구원받으면 그를 몸인 교회에 집어넣습니다. 이것을 성령침례라고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이것이 성령침례 입니다. 그래서 침례는 두개가 있습니다. 물 침례가 있고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무엇을 말하냐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그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것은 상관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ㄴ의 죄를 위한 것으로 그리고 영원한 속죄를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몸으로 넣습니다. 아까말한 오순절부터 휴거때가지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로 집어넣는, 몸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성령께서 몸으로 넣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침례라고 합니다.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구원받으면 성령께서 두가지를 하십니다. 하나는 교회의 일부로 넣습니다. 그가 부인해도 그가 알지 못해도 그는 교회의 한 지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성령을 마시게 하십니다.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십니다. 영원토록, 이 두가지가 그 사람이 구원받을때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몸으로 집어넣으셨고 그 사람 안에 내주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잘 깨닫고 이 사실을 붇들고 있으면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침례를 믿는 사람과 하나입니다. 그분들과 같이 교제할 것입니다. 그분들과 같이 한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성령침례를 안받아도 된다. 성령침례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될수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부르심의 한 소망"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휴거 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셔서 부르시면 우리가 전부 몸이 변화되어, 무덤에 있는자는 부활해서 새로운 몸을 가지고 그때가지 살아있는 사람은 몸이 홀연히 변화되어 다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을 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갈수 있을까요?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 이것은 중력의 법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은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는 중력의 법칙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몸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공중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끌어 올리시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지나 영광의 주님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진 사람,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사실을 믿고 붇들고 있는 사람과 우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면 하나되지 말라고 해도 그사람을 보면 우리는 이미 하나인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고 내 형제구나 같구나 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님이 하나"입니다. 주님이 하나라고 하는것은 이런 뜻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볼때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신랑 신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게 연애할때는 잘 모릅니다.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 합니다. 착각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는데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결혼에 삼각형이 있습니다. 이쪽은 신랑, 이쪽은 신부 입니다. 각각 믿는자 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두사람이 어떻게하면 가까워 지냐면, 사로 가까워지려고 접근한다고 해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주님께 나가면 이 두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항상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이십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들인데 다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직장도 다르고 다른 환경에서 살았고 지금도 가치관도 다 다릅니다. 공통된 것도 많지만 다른것도 꽤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희들이 모임에서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정치얘기를 하면 여기 틀림없이 1번 찍는분 2번 찍는분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애기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뭐할때 가까워지나요? 어떤 사람이 나하고 견해가 같기 때문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족이기 때문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임에서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한국은 지역별로 투표할때 몰표가 나옵니다. 그러나 모임은 다행히 이런것이 없는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임에서 형제 자매님들이 다 다르지만 어떨때 가까워지냐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그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보면 가까워 집니다. "아 저분이 나와 다른 선택을 해도 주님을 사랑해서 저렇게 하는구나. 주님 때문에 저렇게 하는구나" 그렇다면 그 행동은 못받아들여도 그 중심, 주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은 주님이 하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고 주님이 우리 교회의 주인이고 주님이 우리 역사의 주인이고 이것을 인정할때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않을때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내 성격 내 경향, 내 가치관이 정면에 부각되니까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저희들이 다시 하나됨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네번째 "믿음도 하나요"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믿음을 발휘해야 할때가 있습니다. "주 예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것은 한 개인의 책임 입니다. 복음이 제시되고 그 제시된 복음을 그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성경에 믿음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고 객관적인 믿음일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말로 번역하면 교리 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고 제가 말한 성령침례는 이런 것이고 휴거는 이렇게 일어나고 하는 이 교리(doctrine)들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믿음도 하나요'라는것은 우리가 구원받을때 동일한 믿음을 행사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우리가 똑같이 말하는 내용,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교회진리 입니다. 교회 진리가 분명합니다. 이것이 애매하거나 해석의 차이가 있거나 한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몸이며 만인 제사장입니다. 은사를 따라 섬긴다. 분명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동일한 교회진리 구원의 교리 그다음 구원받은 후에 성도가 어떻게 거룩하게 변화될수 있는가, 그다음 주님님께서 오시면 어떻게 영화롭게 되는가, 또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한 것들이 같기 때문에 하나 입니다. 같으면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침례도 하나요" 여기서는 물침례입니다. 아까 몸이 하나요 하는것은 성령침례 입니다. 물침례가 하나 입니다. 침례는 전부 단순합니다. 물에 들어가서 주님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있습니다. 이것이 장사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죽으셨을때에 저도 함께 죽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실때에 저도 새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하나가 안됩니다. "유아 세례도 가능하다." 아직 구원받지 않았아도 아이를 앞으로 믿음으로 키우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유아세례를 준다 하는 이런것은 동의할수 없습니다. 그다음 침례를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꼭 복잡하게 물어들어가고 하기 그러니까 뿌리는 세례로 하겠다" 라고 하면 동의할수 없습니다. 침례의 의미가 뭔지, 형식이 뭔지 하는 성경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받아들이면 하나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안받아들였는데도 하나로 묶자 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추구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해 놓으신 것을 우리는 붇들어야 합니다.
여섯번째 "하나님도 하나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라고 되어 있는데요. 만물보다 만유라고 번역한 것은 그 안에 사람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만물하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만유하면 자연 플러스 인간입니다. 여기서 저희들은 자연과 하나될 필요가 없으니, 사람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붇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아버지이심으로 모든 성도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 입니다. 두번째 보겠습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위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고 다른사람도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다음 "만유를 통일하시고" 이 부분은 '통일하시고' 이 번역은 좀 그렇습니다. '통일하시고' 이 부분은 영어로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 홀로 하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홀로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사용해서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 입니다. 사용하신 후에 우리에게 상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이루었다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일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실뿐 아니라 다른사람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만 사용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은 모든성도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성도를 섬기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이 원리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요, 주님이 하나요, 하나님이 한분이시므로 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저희들이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켜낼까요?
1. 교회는 오순절부터 휴거때까지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거기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몸인 교회'에 대해서 저희들이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우리가 하나될수 있는 것이죠.
2. '교회의 소망은 휴거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주로 모시면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면, 사람이 주인이면 하나가 안되는 것입니다.
3. '믿음도 믿음의 내용이 같으면' 하나됩니다. 내용이 다르면 하나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이가 나면 이 내용이 성경적으로 맞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될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통치하시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종입니다. 이럴때에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사람을 사용하시므로 나를 사용하실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사용하신다. 이렇게 받아들일때 하나되는 것입니다.
5. '그 사람을 섬기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하나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몸된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냅니다.
그 다음 두번째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머리됨"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읽어드린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고 나옵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짐승들을 만드시고 식물도 만드시고 해와 달도 만드시고 그다음 사람을 만드실때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을 통해서 자녀들이 생기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가지를 만드시고 이 만드신 여러 피조물들이 조화롭게 살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인도 만드시고 황인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괭장히 다릅니다. 키가 큰 사람 작은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 사람들이 서 평안하고 하나되고 기쁨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삼고 인종차별하고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남자들과 같이 밥을 먹을수 있게 된것이 최근 일입니다. 100년전만 해도 다른일이었습니다. 각 사람들의 문화가 하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지배하고 착취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만드신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됨'입니다. 머리됨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예를들면 남자가 여자의 머리되게 하셨습니다. 그다음, 부모와 자녀간에는 부모가 머리되게 하셨습니다. 그다음 교회와 주님 사이에서는 주님이 머리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을 보겠습니다. 머리됨을 나타내는데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자의 머리인 이유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머리 입니다. 두번째, 예수님께서 남자를 위해서(여자도 마찬가지 이지만)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피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머리 입니다. 세번째,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시기 때문에 머리 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리스도가 내 머리라는 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 표현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표현방법까지 정해놓으셨습니다. "남자는 머리를 짧게하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마라" 입니다. 두번째 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하나님이 창조하실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여자를 돕는배필로 나중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머리 입니다. 그다음 두번째, 범죄한 순서가 여자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성경에서 말합니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 세가지 이유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 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 창조된 관계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머리됨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자를 위해서는 남자를 머리로 두셨습니다. 그 표시를 여자가 머리를 길게하고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세번째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했을때 저희들이 첫번째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드님은 동등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대목은 문맥을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인 입장에서 하나님인 아버지를 표현하실때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 "때와 기한은 인자도 알지 못한다" 라고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믿는 것이죠. '삼위일체'입니다. 이 세분은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됨에 대해서 한가지 보겠습니다. 머리됨은 우월과 열등이 아닙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이말은 남자가 우월하고 지배하고 여자는 복종해야 하는 우열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이가 우열사이가 아니듯이 남자와 여자도 우열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머리된다는 창조의 원리를 스스로 선택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을 남자와 여자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머리됨을 인정하셨듯이 남자와 여자에게 말합니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기꺼이 인정하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됨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훼손될수 있습니다. 싫다고 하면 깨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지면 그 둘사이의 관계는 조화롭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머리됨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머리됨을 나타내는 형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진리로 강조하자면 우주적인 교회로 치면 당연히 주님이 머리입니다. 그리고 지역모임에서도 머리가 주님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어떤 총회, 이런것이 되면 안되고 주님만이 머리되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이제 몸으로 가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14-27).
이부분은 고린도 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신체처럼 기능해야 합니다. 지역교회 내에 여려가지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랬을때 이 지체들이 하나되어서 기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비유를 든 것입니다. 눈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다른지체들이 보니 입이 제일 좋은것을 합니다. 먹을것은 다 거기 들어갑니다. 그래서 손이나 눈이 "우리는 매일 음식만 갖다주고, 우리는 입 좋은 일만 시킨다"하면서 파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지요? 다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몸으로서 기능을 못하게 됩니다. 그런일이 지역모임 가운데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써 놓은것을 보면 지역모임 가운데 매일 그런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첫번째, 몸은 다양한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몸에는 눈도있고 귀도 있고 발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렇게 합니다. 저희들은 목사제도를 반대 합니다. 성경을 어긋내는 것입니다. 곧, 1인 목회를 반대 합니다. 한 사람의 특정한 사람이 교회의 모든일을 결정하고 주관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그러면 다양성이 훼손 됩니다. 각 지체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수 없습니다. 다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두번째, 다 각각 자기 소견대로 하면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혼란스러워 집니다. 다양성은 확보되었는데 일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원칙 모든 지체는 다양하되 반드시 서로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립적인 행동을 금지 합니다.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만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 속에서도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다른 지체의 협조와 기도와 동의 속에서만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깨면 안됩니다. 모임은 다양해야 한다. 그다음 각 지체는 움직일때 반드시 관련된 다른지체의 동의 아래 움직여야 합니다. 이 두 원칙을 깨면 모임은 어지러워 집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원칙이 지켜질때 이와같은 결과가 일어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고통 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즐거워 합니다. 앞의 이 두가지를 하지 않으면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아도 "뭐 자기가 한 것인데" 하고 맙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아도 "나는 별로 기쁘지 않네" 라고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지역모임은 반드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의존해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데요. 제가 모임 생활을 해보면 어떤 경우가 나오냐면, 어떤 성도가 대학을 결정 하거나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려고 하면 교회가 개입을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 문제 입니다." 어떤분이 대학갈때 저희가 납부금을 대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하면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다닐건데요?" 결혼하면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살건데요?" 그렇죠, 살아주는것 아닙니다. 그래도 개입 합니다. 이런것이 미묘합니다. 보통 그러잖아요. 어떤 사람에게 "요즘 좀 살쪘네요" 라고 하면 기분 나빠서 "내가 살찌는데 보태준것이 있습니까?" 그런식이잖아요. 모임 안에서 이런것이 미묘한 것이지만, "왜 간섭하세요?"라고 하면 정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냥 놔둡니다. 그럼 모임생활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너무 독립적으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독립적인 권한을 인정 합니다. 최종 결정을 그가 할것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충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충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하느냐, 장로 형제님의 뜻대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미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해주셨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했는가, 성경적인 원리를 따르고 있는가, 혹은 그가 정말 순수하게 믿음으로 했는가 하는 것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임생활 할때에 항상 저희들이 이런 면에서 인격적이어야 하고 기다릴줄도 알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줄도 알고 그렇지만 성경을 근거로 해서 결정해서 나중에 성도들이 들으면 평안한 간증들이 있습니다. 누가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할때, 어떻게해서 그와같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하는 것을 들으면 성령님께서 움직이면 평안을 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지역모임에서 그와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네번째,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대표적인 집회가 예배입니다. 아무도 사회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각 성도들이 성령께서 감동하시는대로 순서를 정하지 않고 찬양을 고르기도 하고 감사를 드리기도 하고 떡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배때만 그래서는 안되고 기도집회때도 그래야하고 또 말씀집회때에도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예를 몇개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1-2).
1절에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인도자들은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과 사울 다섯명입니다. 다섯명이 인도자 입니다. 그런데 이 구성을 보면 괭장합니다. 첫번째, 바나바와 사울은 유대인입니다. 나머지 세명은 이방인입니다. 우리에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별차이가 없지만 한국인이나 일본이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릅니다. 괭장한 갈등 가운데 민족적 갈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인도자입니다. 그리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니게르는 니그로라고 번역할수 있습니다. 곧,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도 흑인입니다. 인종이 다릅니다. 여기는 흑인도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유대인이니까 백인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종을 뛰어넘어서 한 지역교회에서 갈등없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시므온과 루기오는 흑인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알수 없지만 사회적인 지위가 낮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이것은 왕가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왕자 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차별없이 사회적이건 인종적이건, 지식의 정도건, 차별없이 그들이 하나될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면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합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갈등이 없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들이 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해낼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2절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다섯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명을, 전도자로 다른 지역의,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교사로 부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주십니다.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행15:28).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사이에 논쟁이 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혹은 구원받으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논쟁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성경을 놓고 경험을 토론하고 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 결론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데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이 네가지를 해줄것을 권면 합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9).
우상의 제물, 음행, 목메어 죽인것, 피 이 네가지를 금해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율법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 유대인들에게 전도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파를 위해서 절제해줄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전의석 형제님이 다음 시간까지 조사해 오세요. 세가지를 안 먹습니다. 이 세가지는 먹어도 되고 안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행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해서는 안되는 도덕적인 것인데 이것이 항목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음행은 도덕적인 음행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음행일까를 생각해서 조사해 오시기 바랍니다.
하여간 성령께서 하시는 두번째 일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하셨냐면 선교사를 불러냅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명의 일꾼이 모임을 섬기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변화를 가합니다. 두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일꾼을 보내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이런일이 지역모임에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우상의 제물을 먹을것인지 말것인지, 먹으면 안되는 건지 먹어도 되는건지, 또 어떤 경우에는 안먹어야 하는건지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행동에 관한 제약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6-9).
이것이 2차 전도여행입니다. 2차 전도여행을 사도바울이 갑니다. 이것은 박희준 형제님이 다음에 조사해오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실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누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당대에 주님께서 사용하신 일꾼들입니다. 이분들이 복음을 전하고 아시아 쪽으로 갑니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는 에베소 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터키에 해당 합니다.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왜 성령께서 막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 입니다. 그 일꾼들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이것을 왜 성령께서 막으셨습니까? 이것을 박희준 형제님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두번째, 비두니아 입니다. 비두니아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동역자들이 비두니아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복음 전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하실지를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사람이 정하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로 가고 싶었습니다. 안됩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못합니다. 그럼 어디로 가지요? 9절을 보면 마게도냐로 갈수 있습니다. 어디서 전할 것인지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때 어느지역에 가면 성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이렇지요. 중국은 지금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 생각 입니다. "너는 중국으로 가라, 일본으로 가라, 한국으로 가라" 하는 것은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그래서 어디로 선교사로 갈때에 성령께서 어떻게 그 지역으로 인도했는지 그 간증이 있고 그 간증이 평안을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가지 선교 나가시는 간증을 읽어보면서 정말 주님께서 보내셨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이 정말 성경적으로 지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 다음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마게도냐의 첫번째 성의 이름은 빌립보입니다.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이유가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갑니다. 그런데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마게도냐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만 있느냐하면 강가에 여자들만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어떻게 됬지요? 매를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빌립보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지요?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3주 있다가 또 쫓겨 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지요? 베뢰아로 갑니다. 그런데 베뢰아에서도 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마게도냐로 불렀는데 마게도냐에서의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이 여기다. 이땅이다. 여기서 전해라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사도바울의 사역을 보면 곤란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인도하셨는가 하는 것은 환경을 가지고 분별할수 없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게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되고 열매가 있고 뭔가 풀리고 하는것이 성령의 인도의 증거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의 증거일수 있지만 아닐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너무 확정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것은 교회의 정책을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성도들의 삶의 원리를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의 인도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 지역도,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는 성령께서 정하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희들이 시간이 되면 또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저희들은 괭장히 잘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중국의 황도 모임에 갔을때에 어떤 형제님이 이렇게 통역을 통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고 난 후에 "형제님 성령의 인도는 어떻게 받나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경험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라고 질문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성령의 인도라고 하는 미묘한 것을 분명하게 전달할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통역하시는 형제님이 "형제님은 아직 어려서 모릅니다." 하고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을 하면 되나.. 어려워서 모를 것인가? 구원받으면 그때부터 성령님게서 계시는 것인데.. 하는 그런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가, 이것은 제가 학생집회에서 한번 다룬적이 있습니다.
두번째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가라고 하는 것을 저희들이 성경을 통해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못하면 주관적인 감정적인 것으로 오해할수 있습니다. 느낌으로,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은 성령님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체 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예배시간을 저희들이 정해 놓았습니다. 대전중구 모임의 경우 10시 반에서 11시 반까지 입니다. 떡은 11시 20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보통 반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데 시간을 그렇게 정해 놓으면 되는가?" 저는 이렇게까지 비난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말씀 전하는 일꾼들이 자기 시간을 확보하려고 떡을 일찍 들어간다." 괭장하게 말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보통 예배가 10시 20분에는 드려져야 하지요. 그런데 보통 덕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떤분이 떡에 안들어가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늦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분은 비난합니다. "왜 정해진 약속 시간인데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족분은 이렇게 받아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그때 예배드리라고 감동을 주셨는데 시간을 정해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냐?" 이 말에 대해서 동의 하십니까? 사람들이 시간을 정한 것과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해주셔서 내 마음에 감사드릴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길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게 했습니다. 문제입니까? 문제 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감정적인 것이라고 오해하니까 이런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말씀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하는 분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한시간을 해야 하는데 감동이 되서 두시간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분이 "아니 약속된 시간이 있는데 왜 그렇게 길게 하십니까?" 라고 했더니 "아니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이렇게 말씀을 전하라고 감동을 주셔서 했습니다." 라고 하면 동의하면 안됩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
성령님이 우리를 감동하면 그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끌어가시기 때문에 내가 저항할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성령은 예언하는자가 절제할수 있게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절제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절제된 시간안에 할 이야기를 다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감사를 끝내게 하는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너무 감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길게 하셨나 보다 라고 이해할수 있지만 그것을 주장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저희가 정확하게 보고 합당하게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몸에 대해서 했고요. 그리스도가 머리이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몸의 하나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가에 대한 원칙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과 일치를 훼손 시키지 않을수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저희 각자가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각자가 자기에게 합당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교회에서 하시는 일을 나중에 더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인 제사장, 그리고 순회 교사나 순회전도자와 지역모임의 복수장로, 이 두가지 인도자들의 인도를 받는다는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맥도날드 형제님은 이 일곱가지를 한챕터 한챕터 설명하시는 것으로 그 책이 쭉 나갑니다. 우선 이 정도로 하고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 몸과 모임을 구분하는 것들을 다음시간에 공부하겠습니다. 말씀을 이상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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