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5일 금요일 (정리)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01. 교회의 성경적 정의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2, 개역한글)
여기 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저희들이 기본적인 책을 놓고 교제하려고 합니다. 맥도날드 형제님이 쓰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노만크로포트 형제님이 쓰신 그분의 이름으로 모임이라는 책이 교회를 다루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인정된 일꾼들이 쓴 책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교회의 정의입니다.
첫번째,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교회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정의를 말씀합니다.
'교회, 곧' 이라고 되었습니다. '곧, 교회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교회진리를 정의 할때 제일 첫번째 원칙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제일 많이 하는 오해입니다. 교회하면 건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두번째, 맥도날드 형제님 책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조직을 교회라고 보지 않습니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목사님 밑에 장로들이 있고 그 밑에 집사들이 있고 또 그 밑에 평신도가 있는 조직도가 있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조직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것이 세상에 늘 존재해 왔고 우리도 그렇게 오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근거로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여기 건물에 '대전중구 교회'라고 간판을 쓰면 어떤 문제가 생기지요? 여기는 건물에 '대전중구 교회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에는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교회당'이라고 적습니다. '당'이라는 단어가 한문인데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건물임을 밝힙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는 사람, 성도를 가르키기 때문에, 특별히 건물로 오해하는 분이 많기 때문에 건물에다가 '당'이라는 것을 붙입니다. 영어로는 '홀'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반격 합니다. 예를들면 가정집에 보통 문패가 있습니다. 요즘은 문패가 잘 없지만 예전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문패에는 집 주인의 이름을 씁니다. 사람들이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이와같은 것처럼 교회라는 이름을 붙여도 건물 자체를 교회로 오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교회가 소유한 건물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을 써도 좋다고 하는 것이 흔히 하는 반격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통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세상에서 교회 간다고 하면 항상 건물이 중심이 됩니다. 특히 종교적인 곳에서는 건물을 매우 화려하게 합니다. 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함으로서 건물 자체가 거룩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관한 첫번째 정의입니다.
두번째,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진리 첫 대목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부분을 유의해야 합니다. 조직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들면, 정부 조직이 있고 장관들이 있고 회사에도 조직이 있습니다. 회사같은 경우 사장님, 부장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번째 원칙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할때, '어떻게 할까, 어떤 분을 초청할까, 어린이들을 위해서 휴일에 어떤 야유회를 할까'하는 모든 결정할 때 이것을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의 보기에 좋게 하지 않고 주님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때도, 예를들어 어떤 집회를 할때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집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 관한 첫번째 정의입니다. 건물이 아니고 조직체가 아닙니다.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조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달려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 주님이 주인되시고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추상적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나중에 공부하겠습니다. 교회에 관해서 정의를 내릴때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건물, 조직을 교회라고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교회라는 이 단어에 대해 (고1:2) 신약성경에서 쓰고 있는 원어의 단어를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써있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써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신약성경에서 쓰고 있는 교회의 원어는 '에클레시아' 입니다. 에클레시아의 뜻은 '어디에서 나오라고 불러낸 (거기 있으면 지옥에 가니 빠져 나오라) 무리들'이 교회라는 단어의 원어의 뜻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복음으로 불러낸 무리들입니다. 곧 '불러낸 무리들' 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영어로 번역할때 church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모임에서는 교회를 영어로 옮길때 assembly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영어권에서는 주로 church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church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모임 형제님들이 모임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church라는 단어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assembly라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교회진리를 발견한 분들은 교파도, 성당도, 개신교도 아닌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한글로 '모임'이라는 단어로 씁니다. 제 생각에는 좀더 좋은 단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임하면 무슨 계모임도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두 개의 단어가 통용됩니다. church, assembly, 우리도 교회, 모임을 혼용해서 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교파나 다른 곳과 분류된 교회진리를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 곳이라 하고 싶을 때는 '모임'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교회, 모임이라는 단어가 혼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의 책에는) 신약 성경에 112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그 용례를 보면 전부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단어 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조금 있습니다. 교회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교회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특이하게 그 예가 두 군데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7:38, 개역한글)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19:32, 개역한글)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찌라 (행19:39, 개역한글)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19:41, 개역한글)
32절에 '모인 무리'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인 사람은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전을 옹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교회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39절에 '민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민회에서 결단 할찌라' 우리말로 하면 백성들이 모인 것입니다. 촛불집회 같은 것입니다. 시민들이 모여서 최종결정을 하는 장소 입니다. 그리고 41절에는 '모임'이 나옵니다. 이 세 경우에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다시 이 부분을 보고 정의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전부 '어디에서 불러내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용례를 보면 전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썼습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복음을 듣고 죄용서를 경험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그 모임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나머지는 다 맞는데 특이하게 사용된 곳이 두 군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군데를 통해서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는데 모세가 출애굽을 시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모였다고 해서 광야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무엇이 다릅니까?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신약, 구약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의 주체는 주로 이스라엘이고 신약은 주로 교회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는 분이 있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중요하고 신약은 교회가 중요하니,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으로 오면 교회가 된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같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실패했고 이제 신약시대에서는 이스라엘은 없어졌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신다. 이런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신학에서는 언약신약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대합니다. 맹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진리를 계속 살펴보면서 무엇이 다르며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제일 큰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땅에 속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이 땅에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시대에 잘 순종하면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다릅니다. 교회는 땅의 축복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 말고도 사도바울, 베드로의 생애를 보면 비참합니다. 결국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순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께 교회가 순종하면 교회는 땅에 있는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축북의 내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축복을 받고 교회는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면 사업도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땅의 복을 받으면 좋을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상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잘 순종했더니 잘 사는 분도 나오고 잘 순종했지만 어려운 분들도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순종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교회는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공중에서 주님이 칭찬하시고 영적인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따로 불러내었습니다. 교회라는 단어의 뜻은 어디에서 불러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 용례에 광야교회가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불렀으니 이스라엘과 교회는 같은것이 아니냐 하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두번째를 보면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 아데미 신전을 위해 모인 사람들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스토리를 보면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에베소로 갑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하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우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고대에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을수 있었을까 신기해 하는 건물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아데미 신전에서는 은으로 신전 모형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아데미 신전에서 그것을 만들어 돈을 벌던 사람들이 돈이 벌리지 않고 자기 직업이 무시 당했다고 모여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그들의 직업을, 그리고 아데미 신전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이 모이는데 그것을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어디에서 불러낸 무리입니다. 에베소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에베소 사람들 중에 특별히 아데미 신전에 열심이 있고 아데미 신을 기꺼이 옹호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을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낸 이스라엘 무리도 에클레시아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아데미 신전의 열심당원들을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교회를 보겠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다가 지옥가는 사람들, 죄인인지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죄가 어떻게 용서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러냈습니다. 그렇게 불려져서 하나님께로 온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교회는 첫번째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불러낸 사람입니다. 그다음, 광야라든지, 에베소를 통해서 알 수 있는것은, 그들은 불러내져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누가 불렀는지,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불러 모여졌는지 아는 사람 입니다. 모였는데 모여서 뭘하는지 모르면 안됩니다. 예를들어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왜 모여 있는지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모른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어디에서 불러 냈을지라도 자기를 누가 불러냈는지, 불러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가 어디에서 어디로 부름 받았는지, 하나님이 왜 부르셨는지, 나를 불러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아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 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관한 성경적인 정의 입니다.
저희들도 교회라는 단어와 모임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쓸 것입니다. 특별히 모임이라는 단어를 쓸때는 교파와 분리해서 말씀대로 시행하고자 하는 교회를 지칭하고자 할때 모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교회의 이름에 대해서 하나만 더 적용해 보고 가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와있는 교회가 몇 개입니까? 사도바울이 일곱개의 교회에 서신서를 씁니다. 신약성경은 사복음서가 있고, 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이 있습니다. 그 다음 로마서가 나옵니다. 이것은 서신서입니다. 사도바울이 교회에 서신을 씁니다. 몇 개의 교회에 서신을 쓰냐면 7개의 교회에 서신을 씁니다. 7이라는 숫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7개로 완벽하게 씁니다. 교회에 필요한 내용을 쓴 일곱개의 서신서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는 다 도시 이름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는 도시가 아닙니다. 예를들면 대전이라는 도시가 아니고 충정남도 같은 도 지역을 말합니다. 곧,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쓴 서신 입니다. 성경에서 교회 이름을 어떻게 지으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낱낱히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둘 수 없으리라" 어떻게 말하면 과장법 같지만 사실입니다. 주님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영원토록 다해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은 이렇게해라 저것은 저렇게 해라라고 낱낱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면 그 말씀에는 원리가 다 숨겨져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그 지역이름을 따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으니 고린도 교회 입니다. 에베소에 있으니 에베소 교회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전중구에 있으니 대전중구 교회입니다. 요즘 고덕동 모임이 하남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건물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지만 그 주소가 나옵니다. 주소를 보니 풍산동입니다. 풍산교회라고 하려고 했더니, 제일 유명한 개 중에 진도개와 풍산개가 있습니다. 어감이 나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어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적인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모임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고 한국모임에서 교회당의 이름을 지을때, 예를들어 '광주 동부'교회 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동부라는 지역 이름이 어디 있나요? 그 동네의 이름을 따야 합니다. 동부, 서부, 북부 그리고 나중에는 중앙교회가 나옵니다. 중앙교회가 나오면 제일교회가 나와야 합니다. 항상 그런식으로 교파가 발전되어 갑니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이런 것은 합당치 않고 자기가 속한 지역이름을 따는 것이 합당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이름들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기본 원리들이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자꾸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것을 깨는 것입니다. 사람의 편리대로 사람보기에 좋은 것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고 성경에서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가 우리의 기준입니다. 그 초심, 처음에 품었던 마음, 그 첫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다음 두번째로 가보겠습니다. 교회에 관한 정의 뿐만 아니라 구원, 거룩, 순종, 징계에 대한 정의를 할때, 첫번째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봅니다. 그리고 두번째 방법이 이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이 어디인지 보는 것입니다.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의 책을 보면 '첫 언급의 법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그곳은 그 단어를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문맥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그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사용되고 있는 곳을 보아야 합니다. 그럼 사랑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언급한 곳은 창세기 2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때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옵니다. 두번째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 나올까요? 창세기 24장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얻고 사랑하였다" 입니다. 제가 이 대목을 언급하면서 항상 청년 형제, 자매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삼는 것이 아니고 아내로 삼고 사랑했다' 입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제가 항상 청년 형제 자매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전 받아야 할 제목입니다.
성경에 나온 첫번째 사랑의 단어가 나오는 곳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사랑의 원형입니다. 두번째는 이삭이 리브가를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 이것이 성경의 사랑에 대한 정의입니다.
교회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사용된 곳은 마태복음 16장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두번째로 사용된 곳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면 교회가 어떤 문맥으로 등장하는지, 이것이 교회에 관한 성경적인 이미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개역한글)
성경 흐름을 보겠습니다. 13절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이것은 가이사랴 지방에서 있었던 입니다. 가이사는 로마황제의 이름입니다. 로마의 최초황제 이름은 시저 입니다. 로마는 집단 지도체제를 채택합니다. 원로원이라는 복수의 지도자들이 정치를 하는데 그 집단 지도체제를 폐해버리고 한사람이 지배하는 체제를 확립합니다. 그가 시저입니다.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공격합니다. 그는 그 강을 건너면 안됩니다. 자기 군대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원래 밖에 있었던 장군인데 반역해서 로마의 정치 체제를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황제가 됩니다. 시저라는 표현은 영어식 표현이고 유럽에서는 가이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가이사랴 빌립보' 입니다. 그럼 빌립보는 누구입니까?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그 다음 세계 제국이 그리스(헬라)입니다. 여기서 유명한 사람이 알렉산더입니다. 헬라의 왕은 알렉산더입니다. 그가 세계를 정복하고 31살에 죽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20대에 왕위에 올라가서 30세까지 그 당시 알려진 세계를 다 정복합니다. 그리고 이 알렉산더의 아버지의 이름이 빌립(필립)입니다. 그래서 '가이샤라 빌립보' 라면 그들이 알기로 그 당시에 알려진 최고의 정복자 두 사람을 기억하는 곳입니다. 곧 로마황제 가이사와 알렉산더 대왕을 기억하는 도시입니다. 나중에 보면 고대의 왕들이 나라를 정복하면 그 정복한 도시에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세웁니다. 예를들면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이 이집트에 있는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을 점령해 새 도시를 만들고 이름을 안렉산드리아라 붙입니다. 그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 남은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리고 유대땅에 로마황제와 알렉산더 대제를 기념하는 도시가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정복자들을 기념하는 도시에서 주님께서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사대성인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틀린 말입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번째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은 나를 그렇게 봐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베드로가 가장 많이, 가장 먼저 대답하고 질문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초대교회의 인도자가 됩니다. 그래서 모임에서는 어떤 사람이 인도자가 되냐면, 틀려도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많이 틀립니다. 주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면서 혼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르면 물어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제일 많이 묻습니다.
학교 다닐때 선생님들이 질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서 질문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알수가 없습니다.
한 시대에 세상을 호령했고 세상의 주인이라 했던 로마황제와 알렉산더를 기억하는 도시, 그 도시에서 주님께서 물어보십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잘 대답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칭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힘으로 안것이 아니고 이것을 알게하신 이는 내 아버지다."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것이 내가 영리했기 때문에, 내가 진지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하지만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십니다. 이 반석에 대해서 카톨릭에서 이상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반석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교회의 정의는 세상에 있다가 불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부터 완성될 때까지 사단은 여러가지로 많은 공격을 하겠지만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세상의 공격에도 살아남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첫번째 언급입니다. 교회가 첫번째로 쓰여진 장소를 가지고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어떤 배경에서 등장시키고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주인입니다. 이 역사의 주인은, 인생의 주인은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관해서 두번째로 나온 곳이 마태복음 18장입니다.
이것이 교회진리의 기본적인 구절입니다. (마18:20, 행2:41-42)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개역한글)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특별히 세계 최대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은 교회가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입니다. 십만이라는 교인이 있습니다. 장로교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은 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감리교 쪽에서도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거나 세번째 안에 들어가는 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 관한 두번째 정의입니다. 주님이 계셔야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사람도 많고 헌금도 많아서 많은 일을 합니다. 병원도 세우고 신문사도 세우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곳에 계신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 성도수가 몇명인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너무 신경쓰면 안됩니다. 물론 저희들의 기도는 대전중구 모임에 많은 성도님들이 오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기준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가에 대해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 구원받는 성도 수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몫을 다했는가에 있습니다. 교회도 "주님이 계신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두 세 사람'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교회입니다. 세상에 있다가 복음으로 부름받아 누가 자기를 불렀는지 왜 불렀는지 알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두 세 사람입니다.
교회에 여러가지 이유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위로받기 위해서 옵니다. 세상은 힘들고 차갑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따뜻함을 느끼려고 옵니다. 이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목적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가서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교파에서는 사람도 많고 하니 좋은 물건을 돌리고 써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라는 것은 주님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오는 것은 주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을 느끼십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대로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을 영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숙제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주님의 임재 앞에 오고 영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세상에서 돈 버는 것보다 좋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을 누리는 것보다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임에 모일때에 몸이 매우 피곤합니다. 저희들 가운데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쉬이 없습니다. 교회에 오면 세상에서 못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직장 생활하다 겨우 시간내서 모임에 옵니다. 그래서 모임에 오면 몸이 매우 피곤합니다. 그래서 올때마다 '교회에 안갈까' 하는 생각들이 대단히 많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모임에 옵니다. 몸은 당연히 모임에 왔다가 집에 가면 더 피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이 오길 잘했다는 것을 주님 앞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주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러 오는 것입니다.
오가와 형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일날 성도님들을 집에 다 보내고 교회당에 있는데 한 성도가 늦게 교회당에 와서 어떤 자리에 앉고 또 가서 다른 자리에 가서 앉더랍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가와 형제님이 가서 물어보았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 특유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그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어도 그 집회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님의 자리에 앉아보는 것입니다. 그 형제님의 입장이 되어서 '그 형제님이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들으셨겠구나', 또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형제님의 자리에도 앉아보고 '이 형제님이 여기서 또 이렇게 하셨겠지' 하고 가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못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그 행동보다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사모하고 내가 현실적으로 참석하지 못했을지라도 가기 전에 들러서 느껴보고 가는 모습이 일본 오가와 형제님의 모임의 분위기인 것입니다. 그 모임의 수준이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가와 형제님이 그렇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가와 형제님의 간증이 그것입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승진해서 사장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발령을 받았습니다. 형제님이 오사카 지역인데 승진을 하면서 오사카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은 것입니다. 형제님이 고민하다가 사표를 냈습니다. 그곳에 사장으로 발령을 받더라도 나는 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임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나서 형제님께서 모임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십니다. 이러한 헌신, "주님이 가장 소중하다. 주님이 나의 전부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기를 기뻐하고, 주님 앞에 모이기를 즐기고, 피곤할지라도 모이고, 손해볼지라도 모이고, 이런 분위기가 되어 있을때 지역모임이 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대전 중구모임의 지체로서 사모하고 집회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것이 저희들이 교회의 정의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대목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 불러낸 무리' 입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목적으로 불러낸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저희들이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관한 첫번째 언급은 마태복음 16장에, 두번째 언급은 마태복음 18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처음) 몸인 교회, 18장은 (두번째) 지역모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몸인 교회가 있고 지역모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에 관한 원칙입니다. 몇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왜 마태복음에만 나올까 하는 것입니다. 사복음서가 있지만 교회를 언급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 뿐입니다. 왜 마태복음에만 교회가 나오고 누가, 마가, 요한복음에는 왜 교회를 언급하지 않을까 이런 것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것은 아니지만 복음서의 특징, 교회의 정의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몸된 교회에 속한 사람과 지역모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지만 지역모임에는 안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않고 지역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몸인 교회와 지역모임의 차이는 무엇이며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나중에 교회에 관한 여러 원칙들을 생각해 보면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가의 강도입니다. 그가 구원받았지만 그는 교회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헌금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봉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낙원에 갑니다. 교회는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갑니까?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실까요? 천국과 관계없이 천국갈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과 관련된 생각들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이 계속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저희 지역모임이 그와 같은 것을 이루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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