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성경이 말하는 교회_몸된 교회 >

박이레 2021. 7. 20. 23:38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오후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성경이 말하는 교회_몸된 교회 >

이 시간에도 교회에 관한 말씀을 이어서 살피고자 합니다.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5-27, 개역한글)

어제는 지역모임에 관련된 비유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몸 된, 우주적인 교회에 관한 비유들을 살피고자 합니다.
서론적으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26절에 보면 교회는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에는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새로 계시되고 발표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 처음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 교회를 주로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은 교회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 다녀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대조할 때 사용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후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 됩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이 땅에 속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땅에 속한 축복들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 나라들의 머리가 되고 들어가도, 나와도 복을 얻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땅에 속한 축복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에 관한 축복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스리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되고 교회의 중심지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게 됩니다.

또 다른 비교를 보겠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개역한글)

<산 새사람>

이것은 교회를 아담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지만 아담은 실패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예수님께서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산 새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이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 하십니다. 곧 통치자 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으셨습니다.

1.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2. 통치자(왕)으로 지으셨습니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이 세 가지의 하나님의 명령을 다 어깁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지으신 이유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옳지 못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이루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결혼한 자매가 형제를 영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와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도록 도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불순종 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실패 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모든 동물은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아담과 하와때에 이미 이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뱀이 하와를 꾀고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순서가 뱀->하와->아담입니다. 사람은 동물을 다스려야지 동물의 말에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영이 십니다. 그리고 천사도 영입니다. 그리고 짐승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적인 존재가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짐승들은 영이 없기에 죽으면 그대로 끝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을 가지고 있으며 짐승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주 독특한 존재입니다. 육체는 죽어도 영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것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말을 합니다. 아담은 자기에게 나아온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은 특징 중 하나입니다.
또한 사람은 사랑 합니다. 짐승들은 짝짓기를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찾아와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되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 되려고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도 실패합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를 셋으로 나눕니다. 유대인, 이방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인종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구원받으면 하나가 됩니다.

두번째, 교회는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천사를 판단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세상을 통치하실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함께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세번째, 교회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습니다.
교회는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네가 하나님이 되라"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의 특징 첫번째는 교회가 이방과 유대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세상의 문화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이방인의 문화나 유대인의 문화나 경험이 교회에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특징 두번째는 교회가 통치자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결정을 다 하고 교회에 통보하면 안됩니다. 물론, 교회가 성도들 각자의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개개인의 직장을 정할 때에, 그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특정한 ‘어떤 직장을 가져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라고 분별 되는대로 교회가 통치하고 교회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사 가는 것도 자기의 상황에 맞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이사에 대한 기도제목을 내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에 이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 갈때 교회를 먼저 보고 그곳에 교회가 있는가를 보고 이사 갑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경험이 많으신 교회의 인도자들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통치를 받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경험했던 인도자들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짐승들이 사람에게 불순종합니다
요새 짐승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명령에 따라 짐승은 사람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 참된 질서가 주님에게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느 방향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물고기들이 죽을 것을 알고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이와 같이 짐승의 왕인 것이 사람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통치 하실때에 이것은 다 회복될 것입니다.

세번쨰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세가지가 있습니다. 육신, 세상, 사단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교회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듯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도록 세상과 사단과 육신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과 싸워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세가지를 의미합니다.
1.   세상이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2.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곳입니다.
3.   교회가 징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교회가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 이것은 교회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교회도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게 이러한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담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아담은 실패 했지만 교회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단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뵐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주님을 뵙는 곳이 공중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자는 사단이지만 사단에게 승리한 승리자로서 공중에서 주님을 뵐 것입니다.

이것이 새사람 했을 때 주고 있는 이미지 입니다.

이후로, 세가지만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디모데전서는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는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서신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여기서 교회를 ‘하나님의 처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입니다.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세번째를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개역한글)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신부> 입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특징들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처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독특한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기 백성들로 불러낸 무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성막, 지성소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에 있는 성전이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십니다.
성경에 이와 같은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특별히 벧엘에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 하십니다.
마태복음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보호 하신다 라고 하는 확신과 평안을 갖는 곳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완전한 구원입니다. 내가 다시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구원이 취소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갑니다
그 당시 왕의 앞에 나갈 때에는 그 얼굴에 수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왕에 대한 잘못된 음모에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다 훼파된 소식에 마음에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얼굴의 수색을 보고 왜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순간의 시간에 하나님께 왕이 자기를 용납하여 자기를 예루살렘에 보내 성벽을 수리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주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을 기도하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일을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명령 합니다.

이 일을 교회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하나님께 모두 맡긴 대표적인 예가 요나 입니다. 그가 불순종해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돌이킴을,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요나를 토해내게 합니다.
그가 어떤 잘못된 상황 속에 있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상황이 있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 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쓴 내용을 보면, 그가 체포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평가하는 평가는 시대마다 다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세상이 교회와 상종하지 못하지만 칭송합니다.
또 사도행전 7장에서는 세상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사도바울을 또한 네로 황제가 체포합니다. 로마가 국가적인 권력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체포되었을 때에 사도바울의 편에 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으나>

사도바울과 함께 일했던 동역자들이지만 사도바울이 잡히자 모두 사도바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으나 주께서 내 곁에 서 계심은> <주께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모두가 나를 버릴찌라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주의 강건케 하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주는 처소의 의미 입니다.

두번째로 교회는 몸입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몸이 명령에 순종하려면 모든 지체가 성장해야 합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1-15,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우는 데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인도자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삼천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 사도행전 1장에 110명의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그 앞에는 반드시 인도자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인도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자는 전도자와 교사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1, 개역한글)

목자와 교사, 이것은 한 사람입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진 교사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각 지역모임에 전도자와 교사가 다 있으면 좋습니다만 보통 그렇지 못해서 교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성도는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 봉사를 합니다.
성장하지 않고 봉사할 수 없습니다.

서양에 가면 몸을 써야 하는 힘든 교회 일들도 나이 많은 성도님들이 합니다.
그 이유는 봉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원칙은 봉사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하지 않고 돈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성장해야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성장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 어떤 종이 밭에 가서 일하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내 식사 시중을 먼저 들고 그 다음에 네가 식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은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성장한 것입니다.

다 섬기고도 더 섬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았기에 자기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먼저 성장해야 합니다. 반드시 말씀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성도들이 은사를 따라 섬길 때만 교회가 세워집니다. 몇 사람이 열심히 은사를 따라 섬긴다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시아 왕이 율법책을 발견해 옷을 찟고 했을 때 거기 아홉번이나 나오는 단어가 '모두' 입니다. 모두가 해야 합니다.
‘나 하나님쯤이야’ 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 때문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교회의 첫번째 특징은 13절의 '하나됨'입니다.
같은 가르침 속에서 공감하는 하나됨이 있습니다.
두번째, 14절의 '분별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해 낼 줄 압니다.
세번째, 15절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모임생활을 하고 있나요? 이러한 것을 기도하고 실행해 내야 합니다.

그럼, 세번째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개역한글)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했기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질문하십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를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실 때에 처음 질문은 사랑을 아가페로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 합니다.

주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아가페사랑은 희생적이고 의지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필레오는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두번째 아가페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모두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세번째에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어보십니다.
“나를 아가페 사랑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그 말을 들었을때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에 순차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나요?
그 사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교회에 있는 어린양을 먹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첫번째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양을 먹이는 은사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 은사와 직분대로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도 여러가지 단계가 있기 때문에 설명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 사람들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너무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열심으로 특심 하여’ 했습니다. 이것은 다 넘어질 수 있는 조건 들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40세때 이스라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심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인이었기 때문에 바로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공주의 양자로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애굽의 노예된, 말하는 가축 취급을 받는 이스라엘의 편에 섭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때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 관대 이 일을 하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섬겨갈 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도 여기서 걸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질문에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실제로 부딪쳐보자, 주님처럼 자기가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실체를 인정한 베드로의 대답을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일을 먼저 합니다. 바로 주님을 위해 희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을 쓰라리게 경험하고 그것을 인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합니다.

“네 사랑이 너의 기대 이하 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베드로에게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큰 양을 먹이지 못합니다.

강단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어린아이,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실수해도 교정이 가능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저는 그가 열매가 있는가를 봅니다.

지금까지 열매가 없었는데 앞으로 열매를 맺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임은 입증된 사람을 쓰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다시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대답은 어린양이 아니라 큰 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먹이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치는 것입니다.
곧, 튼튼한 양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살피고 그들을 경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돌이킨 이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쓰라린 실패가 다른 사람에게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실패했다”, “내가 이렇게 해서 문제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좋은 권고가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받기도 좋고 자신도 낮아집니다.

주님께서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두번째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수준을 낮춰서 세번째로 질문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필레오) 하느냐?”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물으신 그 물음은 베드로의 필레오의 사랑을 “정말 네가 필레오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의심하는 것처럼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이 나에게 있음을 베드로는 필레오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는 항상 일을 처리할 때 급한 것부터 처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선 순위에 따라 일을 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렙다 과부가 밀가루 조금과 마지막 기름 조금 남은 것을 먹고 죽으려고 할때에 엘리야가 와서 그것을 자기에게 먼저 달라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것을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마지막 남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가끔은 하나님의 요구가 우리가 듣기에 너무한 요구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그 말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 가루와 기름이 가뭄이 끝나기까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경적인 우선순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하라고 하신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했을 때에야 장성한 양을 먹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자가 없으되,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디모데를 보낸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왜 자기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디모데는 그 모든 일을 다 놓고 빌립보 교회를 방문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나와 함께 된 주의 일꾼’이니 귀히 받으라고 말하고 ‘나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장성한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지역모임에 대한 비유들에서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밭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들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이 비유들에는 명백한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몸인 교회 안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의 특징이 나타나야 합니다.
첫번째가 새 사람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교회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사람이 있습니다. 이 새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첫번째 몸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입은 육체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전부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한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주님께서 머리로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두번째 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머리를 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몸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몸이 자라가는 이유는 통치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몸은 항상 통치와 관련됩니다. 머리의 뜻을 실행해내는 몸입니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그리스도인, 교회, 몸입니다.

세번째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사랑은, 교회에 있는 어린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양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성한 양을 말씀으로 가르쳐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학교에서 훈련이 필요 합니다. 모세처럼 40년 미디안 광야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는 17년간 핍박과 낮아짐과 겸손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구원받고 3년간 아라비아에 갑니다. 그곳에서 교회진리를 배우고 교회진리에 대해서 계시를 받고 섬긴 후에 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학교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기 전에 나의 여러가지 일상적인 삶들에서 반드시 시험 하실 것입니다.
누구는 직장문제, 결혼문제, 현실적인 선택에서 시험하십니다. 그때에 내 맘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 하십니다. 그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쓰시지만 인격이 맞게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은사를 사용 할 수 없습니다. 인격이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은사를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은사를 쓰게 됩니다. 은사가 다른 사람의 유익으로 가지 않게 됩니다. 몸을 세우는  게 아니라 자기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섬긴 이후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충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물론, 땅의 축복을 주시면 감사한 일입니다만 우리의 축복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 기준으로 자기를 정확하게 살피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낮추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두 번에 거쳐서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들이 이와 같은 교회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원칙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우리 모임이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실수하고 낙담한다 할찌라도 다시 힘을 내어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일을 끊임없이 해내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힘을 주시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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