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04. 지역 교회(모임)의 특징 >

박이레 2021. 7. 20. 23:41

2019년 5월 6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04_지역 교회(모임)의 특징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1:2).

1절은 고린도전서를 쓴 분들입니다. 바울과 소스데네 두 사람이 썼고요. 사실은 사도바울이 쓴 것이지만 소스데네가 함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스데네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도인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함께 있는 동역자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그 다음 2절은 수신자 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입니다. 그 성도들을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은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지역모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지역모임에서 특정한 시대에 모이고 있는 성도들을 지역모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던 성도들인데 이 성도들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여졌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릅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특별한 성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해서 그런일이 벌어졌느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들이 주님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고 하는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 입니다. 주님은 자기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주시는 거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래서 의롭게 된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는 또 한가지, 이 서신을 받는 사람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뿐이 아닙니다. 이 서신은 고린도 교회에만 주어진 서신이 아닙니다. 각처에서, 그 당시에 여러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여러지역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우리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우리와 똑같이 우리와 동일하게 똑같은 믿음과 진리를 따라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입니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은모든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의 내용을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준 것이다." 라고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예를들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너울이 나오는데 "너울은 고린도 교회에만 준 것이다." 라고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고린도 성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쓴다고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대목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라고하는 것은 고린도전서의 1장 2절을 감안하지 않은 표현 입니다. "여자들은 잠잠하라."라는 말도 고린도 교회가 유난히 유별나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해석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하면 하나님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잠깐 지역교회에 관한 맥도날드 형제님이 지역모임의 특징에 대해서 하신 것 몇가지만 보겠습니다.

첫번째, 지역교회에 대한 정의 입니다. 지역모임은 몸인 교회와 차이가 있습니다. 몸인 교회는 모든 시대에 모든 지역, 지역과 상관없이, 인종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몸 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부터(오순절부터) 데살로니가 4장 23절, 휴거때까지 은혜의 시대에, 혹은 성령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한번도 동시에 만난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이땅에서 실현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모일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돌아가신 성도님도 계시고, 아직 안태어나신 분도 계시고, 또 한곳에서 모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몸은 한번도 이 땅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교회는 지역모임입니다. 예를들면 고린도 교회은 고린도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있는 모임이고,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하면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서 그때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했던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되겠지요. 그래서 지역모임의 특징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모인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몸인 교회는 하나인데 지역모임은 여러개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했을때 저희들이 어디서 끌어내냐면 교회가 비유적으로 나와 있는데, 등대 입니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1:11-13).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도요한에게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라." 라고 불러 주십니다. 이 일곱교회가 각 지역교회 입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모이는 교회, 서머나 지역에서 모이는 교회..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런데 이 일곱 교회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일곱 금 촛대" 금 촛대가 있었고 그 촛대 '사이에'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가운데 입니다. 주님은 항상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항상 핵심적인 자리에 주인이신 자리에 머리되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운데 놓고 일곱개의 금으로 된 촛대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또 저희들이 서신서를 보면 빌립보 교회에 서신을 보내고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서신을 보내는데 어떤 서신은 다른 지역교회와 함께 읽도록 보내집니다. 예를들면 고린도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졌지만 모든 지역모임이 보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사도바울 당시에 있었던 모든 교회들이 둘러 봅니다. 고린도전서는 순회서신입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6).

그래서 어떤 서신들은 순회서신입니다. 이 서신 자체가 돌아다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전후서만 받는것이 아닙니다. 다른 서신도 함께 읽습니다. 저희들은 성경이 완성된 시기에 삽니다. 고린도서도 있고 갈라디아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 읽습니다.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휴 합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그런데도 각 지역에 있는데, 이 지역교회는 또 독립되어 있습니다. 하나되면서, 서로 교제하면서 독립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예를들면 고린도전서 5장에 음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가 그 음행한 형제를 출교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그 출교는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자기들이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출교 시키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역모임은 서로 교제 하면서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들이 참 어려운 대목인데요. 다시한번 말씀 드리면, 저희들이 균형을 잡하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죄 용서의 근원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저녿자들을 보내 주시고 그리고 그 전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은혜로 전해진 복음을 믿는 것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말씀의 '이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해석을 달리하는분이 계십니다. "믿음도 은혜다." 이 말이 아예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관점은, 은혜와 믿음을 따로 말할때는(물론 믿음도 은혜에 속함을 말할 필요가 없지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했기 때문에 은혜와 믿음 두개가 구원에 필요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때에 그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가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이 메세지를 하나님이 저에게 하시는 놀라운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라고 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믿든지 안 믿든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다." 라고 하는것은 틀린 것입니다. 믿는자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 하시고, 구원방법 입니다. 누구를 구원 하시느냐? 믿는자를 구원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은혜요, 구원하는 사람은 믿는 자입니다. 이 부분은 저희들이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두개가 항상 모순되지 않고 충돌하지 않고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또 하나 보겠습니다. 주님은 어떠신 분이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에게서는 은혱와 진리가 충돌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진리 입니다. 다시 우리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사랑과 진리 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 두개가 우리는 자꾸 모순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안되는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분이 이렇게 말하면 저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분이 그 사랑이라는 개념속에 진리를 타협시키고 있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너무 까다롭게 한다. 그냥 사랑으로 하지."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람들이 이해하는 사랑 말고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합시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사랑이 없는것 같아요." 이 사랑을 사용해서 진리를 훼손 시키면 성경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포모임에 있으면서 과거에 맨날 했던 소리인데요. 지역모임에 있으면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우리 모임은 사랑이 없어." 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실제로 우리 지역모임에서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든지, 자기 일을 돌봐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표현을 그렇게 표현 합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가라고. 사랑이 있는 교회에 가시라고요. 아닙니다. 만약에 사랑을 그런식으로 표현하고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하면 동의 할수 없습니다. 성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리 입니다. 사랑이 진리를 훼손하는 쪽으로, 진리를 약화 시키는 사랑으로 가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진리를 말하는데 진리를 말할때에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교회를 가리키는 건데요. 교회가 성장해야 합니다. 어디까지요? 주님까지 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모순 없이, 주님이 그런사람일뿐 아니라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완벽하지 않지만 그와같은 수준에 이르러야하고 그 수준을 목표로 해야 하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 이것을 진리로 바꾸겠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하여" 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바꾸면, 킹제임스로 보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 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 이것이 주님을 닮은 모습 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할때,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럼 뭐가 사랑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저희들이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제시하거나 실행하거나 이 진리를 드러낼때 그 마음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 목표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분리여서서 아닙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저희들이 잘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가 같이 가야 합니다. 모순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훼손하면 안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동기가 상실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교회간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지역모임간에 서로 교제 합니다. 그러나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렵거든요. 지역모임이 독립되어 있음을 강조하면 "우리가 결정하면 된다. 다른 교회가 무슨 간섭이냐?"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제를 포기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모든 지역모임이 성경대로 하면 서로 교제 됩니다. 똑같거든요. 그런데 어떤 지역모임이 이상하게 행동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과 다르거나 일반적으로 모임에서 해 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때 그제와서 "독립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냐?" 라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런 독립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항상 균형 잡혀 있어야 합니다. 교제하면서 독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교제에 장애를 주거나 교제라는 이름으로 독립성을 해치거나 하는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미묘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둘이 충돌 된다고 볼때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주님 은혜를 기다리고 어떤 것이 참으로 두 모순될수밖에 없는 요소를 하나로 해 낼수 있는건가, 이것은 주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렇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지역모임은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 집니다. 다른 지역모임에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책임지는 독립성,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했을때에 피차간에 평안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지역모임의 중요한 원칙들입니다.

그 다음에 맥도날드 형제님이 제시하신 지역모임의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제님은 몇가지를 대셨는데요. 첫번째, 불신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5:12-13).

여기보면 교회는 선이 분명 합니다. 외인이 있고 교중사람이 있습니다. 외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중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이 분명해야 합니다. 누가 성도고, 누구는 아니고 라고 하는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대통령이어도 구원받지 않으면 교회안에 못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영향력이 있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 할찌라도 분명한 구원의 분별이 없으면 모임안에 못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그가 구원이 분명하면 우리는 형제로 영접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분명해야 합니다. 불신자와 성도가 분명한 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룰까요? 구원분별을 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구원을 분별하고 교회적으로, 순서가 이렇게 되지요. 어떤 분이 복음을 듣고 자기가 믿었다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내가 믿으면 됬지." 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으로 입증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100% 분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고백의 내용이 성경적인 원칙과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사람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구원간증을 했는데요. 구원간증은 맨날해야 합니다. 구원간증을 어색해 하거나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간증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는 건데요. 자기를 말하는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구원간증이 이런식으로 표현되면 좋습니다. 복음을 듣고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라기 보다, 제가 어떤분의 구원간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참으로 감사 합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찾아 내셨습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듯이 저를 찾아 오시고 마침내 저를 발견하셨습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이런식의 표현이 참으로 맞는 것이죠. "이제 내가 천국간다."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해서 내가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 은혜가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간증을 맨날해야 하고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온유하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베드로전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대답해야 합니다. 전도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냐면요, 예를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계속 지키면 자녀들이 묻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계속 하는 거예요?"그러면 부모가 대답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계속 구원 받으라고 도전 하지만,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자녀들이 물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삶을 보고, 부모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자녀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묻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이 질문하고 있지 않으면 부모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사니까요. 질문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딴 집과 달리 우리집만 보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복음 전하는 것도 이렇게 갑니다. 우리는 사는 행동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니까 사람들이 비난 합니다. "에이, 같이 못놀 사람이네." 이런 사람이 있고, 그는 구원 못받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준비된 영혼 입니다. 고넬료같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때 어렵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씀 하십시요." 라고 고넬료가 하지요. 베드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령이 임해 버립니다.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을 다 하기 전에 죄용서까지 설명했는데 성령이 임해 버립니다. 준비된 영혼을 만나는 것이죠. 어떨때에 준비된 영혼을 만나냐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묻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행동 합니까? 그리고 당신이 그리 행동하는것이 소망 때문임을 내가 압니다." 그래서 그 소망의 이유를 물어 봅니다. 그러면 온유함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일반적인 원칙 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아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런것이 많아야 합니다. 주로 이렇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서도 자녀들이 묻고 대답하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만 더 말씀 드리면 복음 전할때에 복음을 누가 전해야 하냐 하면, 안믿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교회로 데려오려고 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가기 싫은 곳이거든요. 교회로 가기 쉽지 않습니다. 데려오려고 하면 안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를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임이 진짜다. 뭐 이런것도 아니고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분인지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하지요? 본인이 전해야 합니다. 본인들이 살고 본인들이 말씀을 알고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주님을 제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교회를 한번도 안다니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천국에 갑니다. 교회는 어떤사람이 오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왜요? 의롭게 된 사람이 주님을 닮기 위해서 오는 곳이 교회 입니다. 물론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에 복음을 보존하고 있고 복음을 제시하는 곳이죠. 그렇지만 복음 자체는 각 성도님들이 전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전하다가 잘 안되지요. 그러면 기도하고 복음집회에 초청하고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1차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여간, 교회는 어떤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를 개인이 주관적으로 먼저 확신하고 교회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성경을 근거로 분별해 줍니다. 교회가 인정한다고 구원이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구원이 아닌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따라 분별합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들어오는 사람과 교회밖의 사람이 분명해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성도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교회는 무엇이 구원인지, 무엇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고있고 그것을 유지하고 그 간증을 분별해 낼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지요.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신것을 믿습니까?" "천국에 갈수 있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 간증을 근거로 침례를 주고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그가 믿고 있는바가 성경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혹은 성경이 말하는 필수적인 내용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그렇게 믿고 그 믿음이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입니다. 앞에부분은 로마서 이고요. 이 둘은 모순되면 안됩니다. 이 둘은 같이가야 합니다. 죽은 믿음, 이론적인 믿음은 안됩니다. 지식적으로 있고 머리속에 있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고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믿음 입니다. 그런데 부를길이 없으니 믿음이라고 불렀지만 죽은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살아있는 믿음의 예를 든 것이죠. 라합, 아브라함 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구원받았는가,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믿을때에 구원받았습니다. 창세기 15장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 하셨을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이 대목, 창세기 15장을 끌아와서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언제 구원받았다고 하느냐면 창세기 22장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에 그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두가지를 봅니다. 그가 성경적으로 말씀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를 봅니다. 두번째, 그 믿음의 고백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가? 이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구원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인터넷에서 박진영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진영이 복음을 전하고 한대요. 그래서 박진영의 구원간증이 있더라고요. 누군가가 그 박진영의 구원간증을 뽑아서 주었습니다. "구원받은것 같아요." 저는 "조금 기다려보자. 교리적으로 맞는것 같은데 박진영이 그 이상한 짓을 그만둬야 한다. 세상 노래 그만둬야 한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수 없습니다. 한 입으로 사랑을, 세상의 사랑을 찬양하고 주님을 찬양할수 없습니다. 저는 그가 직업을 그만둬야 진짜 믿는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까다로워서가 아니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가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를 영접하고, 그리고 구원은 출발 입니다. 구원은 완성 아닙니다. 이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갓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 입니다. 아기 입니다. 이제부터 뭐해야 하지요? 아기는 두가지를 해줍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아기에게 하는것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먹여줍니다. 젖을 주지요. 두번째, 깨끗하게 씻겨 줍니다. 두가지 부모님이 해 줍니다. 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저희들이 두가지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수 있는지, 세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말씀을 공부 합니다. 두번째, 씻겨 줍니다. 죄로부터 분리 시킵니다. 그래서 발을 씻기고 세상에 살면서 어긋나는 것을 계속 더러운 것에서 자기를 절결하게 보호하는 작업, 이 두가지를 계속 해주는 것입니다. 모임이 이것을 해 줘야 합니다. 그랬을때 이 갓난아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처럼 복되고 기쁜일이 없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맥도날드 형제님은 지역모임의 특징으로 첫번째, 불신자와 분리되어 있다. 두번째, 예배드린다 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 교파에서는 예배를 설교 들을때 마음이 감동이 되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느냐?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을 때려 주느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따로 있습니다. 떡과 잔을 놓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떡은 하나님이신 주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나타냅니다. 잔은 그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나타냅니다. 떡과 잔을 놓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거죠. 그런데 주님을 기억할때 그냥 기억할수가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고 기억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찬양하지 않고 기억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기억하면서 밋밋할수 없습니다. " 아유-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네요." 이렇게 될수 없습니다. 이 기이한 하나님의 은혜, 사람이 생각할수 없는 은혜, 그 은혜에 감탄하고 찬송하고 이것이 예배의 요소들입니다. 주님을 기억할때 우리 마음속에 생기는 놀라운 감정들, 이것들을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형제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감사 드리고, 자매님들은 잠잠하게 감사드리고 그리고 떡과 잔은 한떡과 잔을 나누면서 기억합니다. 한떡은, 우리가 한떡에 참여함으로 하나인 것입니다. 한잔에 참여했다고 하는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단 한번이지만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잔을 나눌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인데 떡을 나눌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단순하게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는, 제가 알기로 모임 외에 예배드리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도 다 예배지만, 좀더 성경적으로 좀더 주님이 말씀하신 세부사항을 순종해가는 예배를 드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 형제들이 참여한다든지, 예배의 내용이 주님이어야 한다든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란다든지 하는 이런쪽으로 조금 더 성경적으로 예배가 성숙해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첫번째 불신자와 분리 되어야 한다. 두번째 예배가 있어야 한다. 세번째 말씀에 순종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세번째, 이 부분은 성경을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3).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세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라. 모임은 이것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 말씀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어고, 이 문장의 내용은 뭐다 라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가르치는 것, 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해야 하는 것인지 해석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적용하는 것입니다. 세가지를 합니다. 말씀은 이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은 무슨 뜻인지 설명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은 이 세가지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뜻을 설명하고 그 다음 그렇게 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모임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네번째로 주님 이름으로 모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뭐 저희들이 잘 아는 마태복음 18장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 맥도날드 형제님께서 가르치신것을 보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몸인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나 몸인 교회에 속한 사람은 모임에 속해야 합니다. 사람을 나눌때에 이렇게 나눌수 있습니다. 몸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몸에 속하고 지역모임에 속한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몸에는 속했는데 지역모임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모임 아니고 교파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로 이루어지고 말씀을 읽을때에 이루어지고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빛을 비추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고 모임에 안들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모임 생활하다가 실족해서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럼에도 그분들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분들은 모임 생활을 하지 않아도 하늘나라에 갑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속해 있으면서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 몸에는 속했는데 모임에는 안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굉장히 비극적입니다.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과 모임에 다 속해야 하지요. 세번째 사람이 있습니다. 몸에는 안 속했는데 모임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실은 구원받지 않았는데 간증을 쫙 하고 모임생활을 잘 합니다. 그러나 몸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못갈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 속해 있다고 전부 천국에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몸에 속하지 않아놓고 모임에 속한 사람, 몸에 속해놓고 모임에 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몸과 모임 두군데에 다 속한 사람.

그래서 몸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임에 속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완벽한 모임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 이와같은 특징을 나타내는 모임에 들어가야 한다는것이 맥도날드 형제님의 가르침 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임에 들어야 할까요? 어차피 모든 모임은 문제가 있고 그런데요. 그래도 어떤 모임에 들어가야 할까 했을때 이 모임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모임에 들어가야 합니다. 형제님께서 일곱개를 말씀 하십니다.

첫번째 지역모임이 몸이 하나다. 한 몸 진리를 나타내야 한다. 두번째 주님이 머리되신다. 세번째 우리 모두는 지체다. 네번째 성령께서 인도하셔야 한다. 다섯번째 거룩해야 한다. 여섯번째 은사대로 섬겨야 한다. 일곱번째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어야 한다. 이 일곱진리를 드러내는 모임에 가야 한다는 것이 형제님의 분별 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저희들이 다루는 것은 한 몸이다. 입니다. 이것은 주로 그 교회의 명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1:12).

고린도 성도들이 한 지역교회 내에서 이와같은 분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이죠. 모임이 이렇게 분리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나는 바울이 좋다."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이렇게 된 것이죠. 이것은 합당치 않은 거지요. 이것을 적용하면 어떤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켈빈이 좋다." 이것이 장로교 입니다. 어떤 교회는 "나는 웨슬리가 좋다. 웨슬리의 가르침이 좋아 보인다." 이것이 감리교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교회들은 전부 약식 세례를 줍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회가 하나 나왔지요. "우리는 성경대로 침례를 주는 교회다." 라고 하면서 침례교회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웨슬리를 따르는 분들 중에 일부 아시아 지역에만 떨어져 나와서 성결교회를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교파들이 나누어져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는 다 성경을 어긴 것입니다. 예를들면 웨슬리는 죽으면서 이렇게 유언 합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따로 모이지 마십시요." 이것이 그의 유언입니다.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모여 버립니다. 자기들의 인도자가 했던 말을 어기면서 합니다. 왜요? 인도자의 가르침을 실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교파는 전부, 예를들면 부처님이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유언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죽자마자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뜻이고 그래서 분파가 생깁니다. 분파가 생기는 것은 전부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 때문입니다. 진리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사람의 책임을 강조하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분이고 또 한분은 은혜를 강조하신 분이 동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웨슬리에게 물어봅니다. 두 사람이 강조점이 다르고 이해가 다르니 행동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물어봅니다. "당신은 당신과 견해가 다른 저분이 하늘나라에 당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웨슬리가 대답합니다. "나는 그분과 같이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전부 그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웨슬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은 너무 훌륭해서 내가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볼수 있는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이론이 달라도, 성경의 한 부분을, 나는 이 부분을 강조하지만 저분이 말하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다른길을 가더라도 그분에 대한 존경과 그분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그렇게 했는데 나머지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서로 비난하고 그렇게 된 것이죠.

저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하여간 교파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교파를 만들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만들죠. "당신들은 누굽니까?" 이렇게 물으면 설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설명이 안되니까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기를 브레들린 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형제모임 아닙니다. 그렇게하면 형제모임이 아닌 많은 다른 구원받은 사람을 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사도행전 2장부터 데살로니가전서 4장까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우리가 다 하늘에서 형제고 자매다라는 진리는 어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모임 바깥에도 구원이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거부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믿는자들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는가?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인 교회와 지역모임이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몸인 교회는 똑같습니다. 거기는 한번 들어가면 출교되는 것이 없고요. 거기는 남녀 차별이 없고 인종적인 차별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 입니다. 그러나 지역모임에서는 다릅니다. 지역모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는 발언하고 여자는 잠잠합니다. 몸인 교회에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몸인교회는 징계가 없습니다. 몸인 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성령이 직접 인도하십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몸은 완벽한 교회 입니다. 그런데 지역모임은 아닙니다. 지역모임은 장로들이 인도 합니다. 사람들이 인도 합니다. 사람들이 분별 합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는 오류가 가능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아니, 모임이 뭐 이래?" 모임은 그렇습니다. 연약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모임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계속 변해가고 더 배워가고 더 성숙해 갈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진리들을 붇들고 그것을 실행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역모임에서는 징계도 있습니다. 지역 모임이 어떻게 하느냐면 모든 성도를 받지 않습니다. 맥도날드 형제님이 그 부분을 조금 이상하게 표현하셨는데요. 우리는 모든 성도를 다 받지 않습니다. 영접 절차가 있습니다. 그분이 올바른 교리대로 믿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두번째, 그분의 삶에 문제는 없는가를 봐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안받습니다. 그가 이상한 교리를 주장하면 받을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알고 실행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야 합니다.

어떤분이 제가 영국에 갔을때에 한국 형제님이 영국에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분이 모임에 안계시더라고요. 모임으로 오라고 하는데 길리란드 형제님이 "모임으로 자꾸 오라고 하지 마라." 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는 거기 갔으니까, 옛날에 한국 모임 초기에 계셨던 분이니까 "영국에서 모임으로 들어가야지 침례교에 왜 있느냐?" 했습니다. 그런데 길리란드 형제님이 "모임으로 오라고 권하지 마라." 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면, 복음을 전할때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한대요. 물론 복음을 전할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죠. 그런데 그분의 주장은, '반드시' 부활을 언급하지 않은 복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죠. 그것을 주장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모임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들어오면 맨날 그것을 주장해서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한국에 돌아오니 모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들어와서 길리란드 형제님이 예측한대로 그 모임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접할때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매번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동의하고 모임 안에서 그와같이 주장하지 마십시요."라고 그것을 동의하고 들어와야 합니다. 동의하지 않고 수가 적으니까, 사랑이니까 받았다가 어렵습니다. 안받습니다.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역모임의 영접원칙 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 입니다. 지역 모임 사이의 교제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성경에서 보면 지역 모임들이 어떻게 교제하게 되냐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교회가 적으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돕기 위해서 바나바를 파송 합니다. 이렇게 지역교회는 영적인 도움으로 교제가 시작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이 드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헌금을 보냅니다. 이것이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 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들어와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디옥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모여서 교리 논쟁을 합니다. "누가 이렇게 가르쳤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인정된 일꾼 입니까?" 질문 합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서 우리가 믿는바와 달리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합의서를 씁니다. '우리는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 다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믿는 이방인 성도들이 네가지를 절제해 주십시요.' 이것이 지역모인간의 교제 입니다. 지역모임간의 교제는 어떻게 되냐면 서로 영적인 필요와 방문자들을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보내주셔서 그들 가운데 합당한 관계를 맺게 하실때 맞는 것입니다. 지역모임의 교제는 "우리가 누구와 교제한다." 그러면서 이름적인 교회와는 쭉 교제하고 누구하고는 안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를 주장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누구의 필요를 보게하고 도울수 있게하고 영적인 도움을 받았은즉 또 그들에 관해서 기도하고 필요를 함께 채우고 그와같이 지역모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저희들이 믿고있는 지역모임간의 교제의 원칙들입니다.

지역모임간의 일치와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면 말씀에 순종할때 입니다. 서로 하나되자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지킵니다. 성령이 어떻게 하나되게 하셨느냐, 동일한 말씀으로 동일한 구원을 경험하고 동일한 교회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실행해 내려고 할때 우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교회진리를 어긋내고 구원의 원칙을 깨고 또 지역모임간의 교제의 원형들을 무시해가고 이렇게 할때 하나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것을 지킬 책임이 있습니다. 이 면에서 저희들이 말씀을 이해하고 실행해 나갈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