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05.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

박이레 2021. 7. 20. 23:42

2019년 5월 24일 금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05_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전11:3-16).

이 시간에는 머리됨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맥도날드 형제님의 책에 보면 첫번째로 하나됨에 대해서 다루셨고요. 두번째로 머리됨을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읽어보셨겠지만 머리됨 항목은 대단히 짧고 영접으로 넘어가셨어요. 그런데 영접은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다음에 다루고 이 시간에는 머리되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저희들이 읽은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머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면서 머리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이 표현을 '머리되심' 실제로 머리라는 것이 아니고 머리의 위치에 있고 머리 역할을 한다라는 거죠. '그런데 어떤것은 머리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신 것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머리와 상응하는 개념은 뭐지요? 머리가 있으면 기본적으로 몸이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라고 했을때에 머리는 몸을 통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머리가 몸에 전부 지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교회가 몸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자동적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제하고 지시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몸인 교회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지역모임에 적용해 보면, 지역모임에서는 '주'라고 부릅니다. 지역교회의 주인되신 주님, 그리고 몸인 교회의 머리되심을 표현합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두셨습니다. 이 머리되심이 교회에만 있는것이 아니고 여러군데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

"만유의 머리심이니다"

여기 보시면 '주'는 하나님으로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머리되심이니다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과 '만유'는 어떻게 다를까요? 만물은 '물'이라고 되어있으니 물건이고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고요. 만유라고 하면 사람이 거기 포함됩니다. 만물에는 사람이 빠지고요. 사람까지 넣어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킬때에 만유라고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모든 존재의 머리시다라고 이렇게 성경이 표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또 우리가 읽은대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2).

여기서는 '그'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여기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었다' 또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 또 하나 '남편이 아내의 머리다'는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또 하나 남편이 아내의 머리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결혼하게 하셔서 남편, 아내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있고 교회도 만드시고 가정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것을 만드실때 머리됨을 쓰셨습니다. 만물에게도 머리됨이 있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도 머리됨이 있고 교회에도 머리됨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머리됨에 대해서 다시 설명을 ㅡㄷ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때, 혹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만드실때에, 그리고 가정을 만드실때에 머리됨이라는 원리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머리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머리됨은 두 대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몸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두 관계를 두셨습니다. 머리는 통제하고 몸은 그와같은 통제를 순종해야 하는 관계를 만드셨습니다. 이쪽이 권위가 있고 이쪽이 순종해야 하는 관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에 둘다 동의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남편과 아내도 권위와 순종에 동의 해야 합니다. 둘다 동의했을때 이 머리됨의 관계가 형성 됩니다. 그렇게 했을때에 그 관계는 조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 받아들여지면 그 관계를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 라고 받아들이면 그 교회가 영적으로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 뜻대로 간다." 하면 이것이 외곡되기 시작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내 머리로 받아들인다. 하면 이 가정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아니 왜 그러느냐? 내가 더 잘났는데 억울하다." 이렇게 하면 이 가정은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 대상이 있고 이 두 대상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 동의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그렇게 하면 이 관계는 평안할 것입니다. 네번째, 그런데 불순종할수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 가운데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말하면 영적인 성장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성경이 특별히 강조하는것은 두군데,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머리됨, 교회에서 머리됨. 이 두가지 영역에서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공격할때 하나님이 만든 관계를 공격해 갑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피조물들 가운데 혹은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 가운데 혹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가정 가운데 이 아름다운 관계가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공격합니다. 사단이 제일먼저 등장하는 장은 창세기 3장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담 하와 사이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 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시하고 나는 그 지시를 따르는 관계라는 것이 인정되고 그것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할수 있냐면,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깨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 것이죠. 첫번째 범죄에서 저희들이 보는것은 뱀이 이야기 합니다. 화와와 뱀의 관계는, 사람이 짐승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다스려야 하는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하와가 거기에 넘어간 것입니다. 남편와 아내 사이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는 아담이 머리 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에게 지시해야 하는데 하와가 먼저 따먹고 아담에게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관계를 완전히 거꾸로 파괴해 버립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하고 하와는 아담에게 주고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한 것을 명백하게 말한 말씀을 어기고 하는.. 이것이 첫번째 범죄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와같은 범죄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과 교회 가운데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5-27).

두번째, 에베소서 5장 25-27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다 라고 했을때, 그 머리여야 하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 첫번째 이유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머리됨을 인정하면 사랑받는 위치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만약 머리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사랑안에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번째 이유는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교회의 머리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사랑과 희생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 십니다. 세번째 이유는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26절) 예를들면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시고 교회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모인 교회에 계속 말씀을 공급하셔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면 교회가 거룩해 집니다. 첫번째는 사랑 가운데 있고, 두번째는 희생을 근거로, 세번째는 교회를 세상과 구분되게 하십니다. 거룩이라는 뜻은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차별이 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와보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세성에는 볼수 없는 곳이었다." 이것이 교회여야 합니다. "세상에 살다가 교회로 와보니, 왜 여기는 이렇게 다른가?" 라고 하여야 합니다. 거룩이라고 하는것은 이렇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높은 사람이 주관한다면, 여기는 높은 사람이 섬기는 곳이구나." 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살라고 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자기를 희생하라고 하는 구나."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 세번째 자격입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 입니다. 27절,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는 교회를 사랑하셨고요.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말씀으로 교회를 세상과 다른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가 영광스럽게 변화되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 같으신 분이므로 그분은 교회의 머리되실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분을 교회의 머리로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할때 이 놀라운 축복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거부하면 이와같은 관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로 다시 가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너울 문제 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이고 영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존재 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질을 사용하시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첫번째 침례에서 물을 쓰십니다. 교회는 영적인 관계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질적인 것을 사용해서 영적인 것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뭐냐면 침례인데요. 침례 받은 때에 물에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꼭 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다른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말을 하는것을 들었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 지대에서는 어디로 들어가느냐? 모래로 들어가면 안되느냐?" 안됩니다. 모래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지정해 놓았습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에 나도같이 죽었습니다." 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주님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는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게서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나도 새 생명으로 세로운 피조물로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침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회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라고 하는 물질 첫번째가 물입니다.

두번째, 세번째가 떡과 잔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물질로 표현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떡과 잔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일날 떡과 잔(포도주)을 놓고 주님을 기억 합니다. 그거 없이도 기억할수 있는데 주님께서 물질을 주셨어요. 떡과 잔입니다.

네번째, 다섯번째가 머리털과 너울 입니다. 남자들은 머리를 잛게 깎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매들은 머리를 길게하고 너울을 씁니다. 이렇게 해서 총 다섯개가 영적인 교회에 하나님이 표현하시는 물질적 표현 다섯개 입니다. 이 외에는 없습니다. 이 다섯개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럼 너울에 대해서 다시 고린도전서에 와서 보겠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저희들이 모일때마다 남자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쓰지 않고 자매들은 긴 머리를 하고 너울을 씁니다. 그 이유 입니다. 성경에 보면, 본, 모형, 그림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주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것이 어린양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로 어린양을 잡아 죽인것은 사실상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그림자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을 타입이라고도 하고 그림자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전부 미래의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것이고요.

그리고 신약에 와서 이런것들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심볼입니다. 물이라든지, 떡이라든지 잔이라든지, 이런것들은 전부 미래의 것이 아니고 과거에 일어난 것들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 있는 이것들은 전부 상징(심볼)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구약과 반대로 이미 일어난 것을 상징 합니다. 떡은 이천년전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베들레헴에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을 상징 합니다. 그리고 잔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 흘리신 피 입니다. 그런데 잔은 특별히 죽임당한 피, 흘려진 피 입니다. 유월절 같은 경우에도 피를 문에 발라야 하죠. 유월절을 보면 양을 잡아서 그 피가 뿌려지면 안됩니다. 그 피를 반드시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이 잔은 포도주가 아니고 '흘려진 피'를 말합니다. 그 다음 긴머리, 짧은 머리, 너울을 쓰고 안쓰고 하는 것은 전부 과거를 가리키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그림자라 부르고 하나는 상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이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이 상징은, 남자들이 짧게하고 안쓰는것은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냥 저희들이 남자들은 머리 짧게 하고 안쓰고 앉아 있으면 되는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영적인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합니다. 남자들이 안쓰는것은 이것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남자들이 안 쓰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이 집회에서는 하나님 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십니다." 라는것을 표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안쓰고 짧게 깎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두번째, 여자들이 머리를 길게하고 너울을 쓰는것은 그와같은 형식을 취할뿐만 아니라 예를들면, 조금 이상한 비유지만 예를 들어보면 떡과 잔을 놓고 감사 드리는데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을 얘기하지 않고 다른감사를 한다면 예배시간에 떡과 잔을 놓는것이 의미가 없지요. 그러듯이 자매들이 긴 머리를 하고 너울을 썼으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임에서는, 이 집회에서는 사람은 영광을 가려야 합니다. 사람이 나타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만 나타나고 사람은 전부 엎드려야 합니다." 라고 하는 진리를 자매님들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있는 그 집회에서 실질적인 내용이 어떻게 되어야 하냐면 사람은 낮아져야 하며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전11:10).

이것이 '권세아래 있는 표' 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고요. 그래서 자매님들의 너울은, 우리 모임은 그리스도의 머리됨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권세아래 있는 것이니까, 우리 모임은, 우리 집회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순종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 입니다. 이것이 너울을 쓰는 이유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다섯개의 물질을 통해서 영적인 것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가 그냥 물에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이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고 이제 내가 죽었고 그리고 주님의 부활이 그냥 이론이 아니고 나의 새로운 생명이고 그것을 나타내듯이 저희들의 너울과 긴 머리가 실질적으로 그와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머리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그와같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너울도 쓰고 형제님들은 머리를 짧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형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형식에 걸맞게 어떤 내용을 우리가 갖춰야 할까요?

그래서 저희들이 교회진리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실질적으로 저희들의 집회에서 그리고 저희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어떻게 드러나느냐하면요.

첫번째, 교회의 모든 행동(활동)은 주님이 지시하신대로 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보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영접을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에 들어오려고 하면 그 영접을 성경에서 말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한대로 영접합니다. 두번째는 출교 입니다. 교회에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싫다고 해서 내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는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에 어떤 사람은 징계하라, 받으라고 되어 있으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세번째는 집회 입니다. 교회의 성도님들이 모여서 "우리가 이러이러한 집회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회는 해라. 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집회는 모였을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것도 구체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 되심'과 '머리되심'의 약간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이 두가지가 약간 유사한데요. 영어로 하면 주 되심은 '로드쉽' 그리고 머리되심 하면 '헤드쉽'이라고 부릅니다. 차이가 뭐나면, 주 되심은 구원받은 사람만 가능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것을 로드쉽이라고 합니다. 머리됨은 만물에게 다 있습니다. 머리되심은 주되심보다 훨씬 범위가 넓습니다. 그리고 머리됨은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 되심은 권위 순종의 관계라면 머리되심은 머리가 몸을 돌봐줍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훨씬 친밀한 것을 나타내고 거기에 사랑과 보호가 들어가 있는 개념이 헤드쉽 입니다. 이러한 약간의 차이가 있고요.

그 다음 적용해 보겠습니다. 이 적용은 맥도날드 형제님이 말해 놓으신 것인데요. 우리가 속한 모임이 예수님을 머리로 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어떤 교회의 본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땅에 있는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하는것이 헤드쉽의 적용쪽입니다. 그래서 맥도날드 형제님은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 간단한 말을 실제로 이것을 이루어 내려면 많은 성령의 능력과 성도들의 기도와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론적으로는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이루어 내는데는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그러나 다시 주님 말씀을 살피고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비교를 하느냐면, 비판하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파와 비교하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교파에는 노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노회라는 것이 있고 전국적으로는 총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도 잘못하면 그렇게 될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지역별로 장로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장로 모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노회고 하나는 총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하워드 반즈 형제님이라고 10년전에 오시고 할때, 호남지역에 장로 모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형제님께 "거기 참석하시겠습니까? 장로 모임인데 한번 구경하실래요?" 하고 했습니다. 그때 첫번째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장로들만 왜 따로 모이느냐?" 굉장히 그와같은 집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당연히 모이나 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역적으로 장로들이 모이고.. 그와같이 모일때에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느냐면, 이것이 어려운 점인데요. 지역교회의 독립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장로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 사항이 각 지역모임에 통보가 되고 지역교회가 그 결정사항을 따라야 하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교파 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지역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다 하는 진리가 훼손 됩니다. 그래서 그런것을 하지 않도록, 서로가 필요가 있어서 만날수도 있고 돕기 위해서 만날수도 있고 이렇게 교제할수 있지만 거기서 결정되는 사항이 지역교회에 알려지고 지역교회는 그 결정사항을 따라야 하는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들이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그런 집회들이 문제가 될수 있습니다.

또 하나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출교문제 입니다. 어떤 지역모임에서 어떤 성도님을 출교를 했어요. 그럼 이것을 전국적으로 공문을 보냅니다. "어느 지역모임에서 이 사람을 출교 했으니 교제하지 마십시요. 혹시 당신 지역모임에 간다해도 받지 마십시요." 아마 이러한 의도 같은데요. 그리고 이 지역모임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으니 알리고 기도부탁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이런 의도일 것입니다. 이렇게하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해야 하냐면, 어떤 지역모임에서 어떤 분을 출교하게 되면 그 분을 그냥 징계 합니다. 그리고 다른지역교회에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형모 형제님 설명에 의하면 지역교회는 한 가정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한 가정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자녀가 말을 안들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할수 없이 때렸다든지 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가정에 이야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징계를 하면 그 지역교회가 징계를 하고 다른 지역모임에 알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다른 모임에 가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수 있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거서를 씁니다. 천거서를 안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지역모임은 천거서가 없는 사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천거서가 없으면 안되는 거죠. 여기를 방문하려면 기도하고 예를들면 결혼식이 있어서, 혹은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 그런일이 급작스럽게 생기지 않고 대부분은 미리 알려지고 하기 때문에 지역모임에서 기도하고 형제님들에게서 천거서를 받아서 오는것이 일반적이고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에는 전화로 천거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징계는 지역모임에서 하고 다른 지역모임은 천거서가 없으면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그와같은 문제들이 해결 된다고 교회진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면요. 중국에 있는 여러 지역모임을 돕고 있는데요. 그 중에 마포모임은 연길쪽을 주로 돕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재남모임 인데요. 재남모임의 형제님께서 최근에 한국에도 오셨지요. 한국모임을 돌아보고 가셨는데요. 재남모임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냐면, 그분에 계신 어떤분이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구원받고 돌아가셨습니다. 또 그쪽에 있는 어떤분이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또 구원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재남지역에 자연스럽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게 되고 한국모임과 관련 있으니까 같이 이야기 하다가 모이게 되고 그래서 재남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주로 말씀을 맏아서 일하시는 형제님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교회로 모이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헌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형제님의 불만을 이야기 하면, 중국은 애가 하나밖에 없으니 아이를 대단히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가 감기만 걸려도 어머니 자매님이 교회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형제님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모임을 소중히 여기고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 가야지,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사업상의 문제가 있다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님의 마음이 상했어요. 그래서 자꾸 이렇게 성경을 보기 시작한 거예요. "왜 이런일이 생기는가?" 그 형제님이 생각할때,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하다고 가르치니까 자꾸 이런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까,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잖아요. 그래서 느슨해진다. 그래서 이 형제님이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구원받았을찌라도 똑바로 살지 않으면, 모임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수 있다." 저는 심정은 이해가 가요. 오죽하면 그렇게 가르쳤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성도님들이 모임을 등한히 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거고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변화 시킬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한번 구원받은 것이 영원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경과 달리 가르치면 안되죠.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도 잘 안나오던 성도님들이 "성경에는 그렇게 안되 있는데요?" 하면서 논란이 되어서 그것이 저희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아무리 속상해도 그렇게하면 구원이 아니다. 라고 하면 안되고 당신이 어떤 구원을 받았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는데 그렇게 사십니까? 라고 가야지 구원이 아니다 쪽으로 가면 안됩니다."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듣고 계속 구원을 잃어버릴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심각해 졌습니다.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국 재남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와 독립되어 있다. 한국에 있는 교회가 왜 간섭하느냐? 우리는 우리길을 간다." 독립을 이렇게 써먹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독립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 지역모임이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른 지역교회가 독립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가 결정한대로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독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평안을 끼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역교회가 독립되어 있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써먹을때 옳은 의도로 써야 합니다. 자기들이 책임지고 짐 질때에 독립을 이야기 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싶을때에 독립을 끌어다 쓰는것은 성경을 외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를 위해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재남모임의 그 형제님은 "한국모임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결정한대로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되었을때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포모임에서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기도제목은 이렇습니다. 첫번째, 그 형제님이 말씀 앞에서 회개하도록 기도했습니다. 형제님이 잘못되어 있고 말씀과 어긋나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을 이용해서 그것이 자기의 권리인 것처럼 자기의 잘못을 옹호하는 쪽으로 성경을 외곡하고 있다.

두번째 기도제목은 재남모임의 어떤 형제가, 지금까지는 잠자고 있었을찌라도 모임이 이렇게까지 흔들리고 잘못됨으로 가므로 그 중에 어떤 형제가 분연히 일어나서 그 형제님에게 "형제님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 않습니까?" 라고 반대할수 있는 형제가 일어나도록 기도했습니다.

세번째 기도제목은 만약 첫번째도 안일어나고 두번째도 안일어나면 잠시 기다리다가 마포모임은 더이상 재남교제와 교제하지 않는다고 통보한다는 것입니다. 통보하는 이유는 이것 입니다. 자기들이 교회의 독립을 내세워서 그동안 함께 교제하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했던 외부 모임이 그 가르침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는 사실을 그 지역에 분명히 알리고자 하는것이 의도 였습니다.

세가지를 했는데 지금까지 교제가 안된 상태로 있고 그리고 이 형제님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르다고 느끼고 있는 두 가정이 따로 나와서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쪽을 가서 도우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 구절로 써서는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에 있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설명하고 풀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않고 자기가 먼저 견해를 갖고, 성도님들이 그러지요. 주님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고 할때 성경을 가지고 분별하지요. 그런데 자기가 어느쪽으로 마음을 정해 놓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할래." 이번에 누구와 결혼할래, 혹은 안할래. 라고 정해놓고 성경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구절을 찾아내는것은 매우 쉰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머리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시를 수행하는 팔과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이 저희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 되어 집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1:12).

이것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부인하는 발언들 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우리는 사람에게 속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이 교회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꾼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에게" 이것도 맞지 않는 표현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11:2).

'내가' 사도바울입니다. '너희에게'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여 준대로' 사도바울은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했다.' '내가 주님께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 계시 그대로고린도 교회에 전해주었다.'고 하는 것이 세개가 나옵니다. 첫번째가 너울입니다. 두번째가 23절을 보시죠.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11:23).

사도바울이 만찬에 대해서 열두사도들에게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들은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런데 그 이야기를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바울에게 또 계시 하십니다. 그래서 이 계시가 분명한 하나님의 뜻임을 어떻게 알수 있냐면 사도들이 두 종류의 사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계실때에 주님을 따랐던 열두 사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바울을 다시 택하셔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이땅에 계실때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그가 그때부터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주님 지상에 계실때에 사도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이 두사람이 언제 만나냐면 3년후에 만납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이 만나서 서로 주님께 받은 것을 교제 합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이 확인 합니다. 우리가 같은 주님에게서 말씀을 받았구나 나.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는 사도라고 인정하고 교제의 악수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라보고 우리는 이렇게 믿습니다. "과연 복음의 내용이나 너울이나 이런 것들은 주님이 주신 계시가 맞다."는 것입니다. 서로 배워서 입을 맞춘것이 아닙니다. 이 두사람은 전혀 만난적도 없지만 똑같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세상 어디를 가도 저희들이 만난적이 없는데 거기서 예배 드리는 모습, 거기서 주님을 섬기시는 모습이 우리와 똑같은 것은 우리가 성경대로 하고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전하여 준것 첫번째가 너울이고 두번째가 만찬 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여기 똑같은 표현을 세번째로 씁니다. "내가 받을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세번째는 복음 입니다.

복음과 만찬과 너울 세가지가 사도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받아 교회에게 전해준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너울의 문제가 형식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써도되고 안써도 되는 문제가 아니고 고린도의 문화가 아니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담겨 있는, 그리고 그것을 상징화 시켜서 교회가 그 상징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교제할때마다 보게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이 교제할때마다 자매님들이 쓴 너울을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그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는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내야 한다. 사람은 낮아져야 한다." 이것을 본인만이 느낄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분명한 시각적인 상징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울을 쓰고 사람을 높이고 하는것은 완전히 안맞는 것이죠.

세가지를 말했고요. 이 교회진리는 11장부터 쭉 나옵니다. 그래서 14장 즈음에가서 끝나는데요.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전14:37).

이제까지 쭉 해온 이야기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순되는 것입니다. 머리도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여러가지 축복들, 에베소서에서 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세상과 구분되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주님앞에 세울 것이다. 라고하는 이 말씀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그와같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저희들이 기억해야 하는것이 '머리됨'입니다. 머리됨은 다시 구체적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영접, 징계, 집회형태' 어떤 집회를 하고 그 집회는 어떤식으로 할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런것들을 저희들이 모임에서 계속 순종해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진리 입니다. 이것을 계속 순종해 갈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들이, 축복들이 이루어 질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계속 저희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저희들이 배운대로 성경에 써진대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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