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02. 교회의 비유들 (1) >

박이레 2021. 7. 20. 23:40

2019년 2월 15일 금요일(정리)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02. 교회의 비유들_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하나님의 성전 >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3:14-16, 개역한글)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두 명입니다. 디도와 디모데 입니다. 두 사람이 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전도자입니다. 그가 전도함으로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 일에 헌신한 일꾼들도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도바울과 함께한 사람은 단 두 명, 디모데와 디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디모데와 디도를 믿음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디모데전서의 배경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가 네개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옥중 서신'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쓴 편지입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갑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처음 통과하다가 므리바라고 하는 곳에서 물이 없어 반석을 칩니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가데스 바네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불순종합니다. 정탐꾼을 보냈는데 열두 명 중 10명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고 두 명은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세대들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하시고 1세대들은 다 죽습니다. 20세 이상으로 계수되었던 성인 남녀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2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 세대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또 맛사에 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아 물을 내라." 고 말하면 반석에서 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쳐버립니다. 반석은 주님이심을 우리가 압니다. 반석이 맞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번 일어났지만 영원한 일입니다. 십자가는 한번 있었지만 이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두번 반석을 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입구의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바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세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기를 여러번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기가 인도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인도자를 세우셔야 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죽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쓴 성경이 신명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한 이야기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두번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부터 있었던 일을 다시 회고해 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명기가 모세 오경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대신 하나님께서 영적인 유익을 준 책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이 구약의 신명기와 신약에 있는 옥중 서신을 많이 대조합니다. 우리 생각에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잘 전하는 일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교회진리를 직접 받아서 실행하고 있는 일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 감옥에 5년간 갇히게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일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않고 그를 감옥에 있게 하셨습니다. 지금 영혼들은 죽어가고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야 하는 절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일꾼된 사도바울을 감옥에 넣습니다. 그리고 우리 후대들을 위해서 네개의 서신을 쓰게 하십니다. 모세가 후대를 위해서 신명기를 쓴 것처럼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네개의 서신을 씁니다.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5년간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재판을 받습니다. 다른 왕 예수가 있다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납니다. 그 후에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와 만나 그동안 돌볼 수 없었던 지역모임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둡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알렉산더와 후메내오라는 사람을 출교시킵니다. 사도바울의 1,2,3차 전도여행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사도바울이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여러 지역을 방문했지만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박해해서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가장 짧게 머문 곳이 데살로니가라고 추측해봅니다. 그가 데살로니가에 세 안식일을 머무는 동안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씁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든든히 세워집니다. 사도바울이 한달간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세워집니다. 그 다음 사도바울이 가장 오래 머문 도시는 고린도 입니다. 1년 6개월을 머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래 머물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3년 동안 머문 교회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데살로니가에 한달간 머물며 교회를 세웠으니 3년간 머문 에베소에서는 36개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년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큰 사랑과 관심으로 교회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예언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이리가 들어올 것이며 너희 가운데도 잘못된 일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되고 감옥에 갇혀 5년 후에 풀려납니다. 그리고 에베소를 방문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언했던 대로 에베소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인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에서 알렉산더와 후메내오를 징계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사도바울이 방문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가야하고 고린도 교회도 가야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두고 자신은 떠나갑니다. 디모데에게 이렇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기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돌아다니다 보니 에베소 교회에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가지 못하고 대신 편지를 쓴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방금 읽은대로 디모데전서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4,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다른 지역모임을 순회하면서 모임들이 문제가 없고 평안하게 있다면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교회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만일내가 지체하면" 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의 마음 속에 못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게 되면 디모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이와같이 해달라고 쓴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여기서 '너'는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디모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의 목적입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표현합니다. 15절에서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모임을 세가지 비유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입니다.

 

이제, '교회가 무엇인가' 를 살펴볼 때 특별히 교회에 관한 비유를 통해서 교회의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비유는 어려운 의미를 쉽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하나님의 교회는 마치 집과 같다." 라는 식의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비유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것에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세가지 개념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집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성경에서 어떤 개념이 나오면, 예를들어 집이라고 했을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 생각해봅니다. 이때 저희들이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집에 대해서 사람마다 여러가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집'하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불행하게 큰 사람은 집을 싫어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을 포근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대입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집은 우리 개념과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집'이라고 했을때 이것이 주는 느낌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찾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전에는 성경 공부를 할때, '하나님의 집' 하면 관주가 달려있고 '집'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 어디에 써있는지 표시되어 있는 관주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집'이 나온 구절이 모두 나옵니다. 그것을 찾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쓴 것인데 우리에게는 여전히 비유가 어렵습니다.

 

이때,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인 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집에 관한 기본 느낌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찾았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창세기 22장입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그 사랑이 사랑의 원형입니다. 두번째로 나온 사랑은 창세기 24장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한 사랑의 기본 개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에 대한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28:17, 개역한글)

 

우리나라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전' 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로는 house of God, '하나님의 집' 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처음 나온 곳은 창세기 28장 입니다. 창세기 28장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가집으로 가는 길의 내용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가 되었는 줄 착각하고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인척 하고 그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사실을 에서가 알고 야곱을 죽이려 하자 리브가가 이렇게 합니다. "네가 잠시 외갓집에 가 있어라. 형의 화가 풀리면 내가 다시 너를 부르겠다." 그렇게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간 야곱은 20년만에 돌아옵니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를 다시는 보지 못합니다. 리브가는 정직하게 행하지 않고 속인 벌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나가는 첫날, 날이 어두워져서 돌베개를 하고 그가 잡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고 약속하십니다. 그때 그가 주님을 뵙고나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첫번째 하나님의 집과 관련된 느낌은 '두렵도다'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 하면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 마음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첫번째 감각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은 마음대로 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함부로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이라는 개념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에 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안밖을 출입하는 곳입니다. 하늘의 문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을 열면 하늘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쓰면 안됩니다. 그 문은 우리들이 경험한 문입니다. 실제로 문에 대해서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다시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언급하신것이 마태복음 16장, 18장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개역한글)

 

'음부의 권세'는 영어로 gate of hell 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 입니다. 문이라는 것은 열면 출입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문이 사용된 곳을 창세기에서 봅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서 소돔으로 들어 갑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돔을 '향해서' 텐트를 칩니다. 그리고 소돔에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소돔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롯이 차츰차츰 타락해가는 과정입니다. 소돔 성문에 롯이 나옵니다. 또 보아스가 룻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때 그는 성문으로 갔습니다. 곧 성경에서 문(성문)은 통치 장소 입니다. 우리로 치면 국회의사당이고 대법원이고 청와대입니다. 그곳은 그 도시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곳입니다. 대표자들이 모여 그 도시의 문제들을 최종 결정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 을 우리나라 성경은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지옥의 힘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를 흔들어 공격해보자.' 라고 지옥이 결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것을 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가지고 창세기의 야곱에게로 가보겠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곧 하늘의 문은 하늘이 통치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이 결정하는 장소, 이것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 주님이 다스리는 곳이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주님의 통치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모임에 올때, 특별히 주일 날 형제들에게 복장을 갖추고 오도록 요구합니다. 자매들은 치마를 입도록 합니다. 그러면 이런 반발을 듣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시는데 옷을 꼭 그렇게 입어야 합니까?" 혹은, "직장에서 왔는데 옷을 갈아 입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해해 주십시요." 라고 합니다. 그것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일 당신이 청와대에서 초청을 받았다면, 대통령이 당신을 초청해서 당신이 대통령 앞으로 간다면 당신은 그 복장을 하고 가겠습니까?" 혹은, "당신이 존경하는 분을 만나거나 결혼식에 참석하는데 대충하고 가겠습니까?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복장에 신경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지역교회에 올때 우리는 성도들을 만나러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누구인가요? 온 천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분 앞에 오는 것입니다. 이분이 얼마나 높고 영광스러운 분인가요! 이분보다 영광스런운 분은 없고 이분보다 더 존경을 표시할 분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분이 계신 공식적인 자리에 가는 우리의 복장이 합당해야 함을 이런 구절들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하나 말씀 드리면 집회에 늦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늦는 것은 저희들이 이해합니다. 오늘만 무슨 일이 있어서, 교통이 문제가 되어서 늦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많이 늦지 않습니다. 10분, 20분 늦는데 항상 늦습니다. 습관적으로 늦습니다. 그런 경우는 지적합니다. 습관인 경우에는 고쳐야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에 저희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늦는 경우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교파에 있을때는 다들 집회시작 30분전에 앉아 있습니다. 교파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분도 있지만 상당수가 종교인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습니다. 제가 강서교회에서 첫번째 모임 생활을 할 때 7시 30분에 집회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임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제 경험으로 7시 반에 오기 시작합니다. 7시 반에 모두 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7시 반에 오고, 또 그때부터 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그런 것을 불평하니 어떤 형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10분은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10분을 기다리면 7시 40분입니다. 그런데 7시 40분에도 제자리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회가 7시 40분에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고쳐 보려고 7시 40분이 되면 찬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그것을 고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포모임을 개척하면서 7시 30분에 집회가 시작되도록 애썼고 대부분의 성도가 와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습관적인 문제부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 이 집회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 하면, '두렵도다' 하는 마음, '조심해야 한다' 는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지역모임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청와대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장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보일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은혜 가운데 인도해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저희들이 첫번째로 찾은 것이 창세기 28장입니다. 집은 하늘의 문이며 문은 통치 장소입니다. 두번째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4:17, 개역한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집을 언급하는 대목을 보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라는 개념이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한다' 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것들을 교정하시는데 교회부터 고치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나중에 고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똑바로 서야 하나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 하나님의 교회에 잘못된 것을 책망하시고 교정을 요구하시고 그리고 나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움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은 잘못해도 놔두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합당하게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성경말씀을 두 군데 창세기 28장, 베드로전서 4장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잘못을 고쳐 나가시는 장소입니다.

 

다시 디모데전서 3장으로 오겠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교회에 관한 두번째 비유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교회인데 살아계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심판하시고 말씀하시고 교정하시는 하나님,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움직이고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수3:10, 개역한글)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17:26, 개역한글)

 

'살아계신 하나님' 이라는 개념을 구약에서 두 군데 찾아 봤습니다. 첫번째는 여호수아, 두번째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때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족속을 우리가 반드시 쫓아낼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지리도 잘 알고, 높은 성벽을 쌓고, 방어무기가 있을찌라도 우리가 이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고, 40년동안 광야 생활도 했고, 가나안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고, 직업도 목축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깁니다. 객관적인 조건이나 상황은 이스라엘이 열세지만 이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저들이 섬기는 신은 죽은 우상이다. 그들의 신들이 진짜로 도울 수 없다. 우리 하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약속을 이루신다. 그래서 우리가 이긴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쓴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골리앗을 보겠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게 "너희들과 우리들 중에 대표를 뽑아서 일대일 대결하고 진쪽이 이긴쪽의 종이 되자" 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3미터 가까이 되는 거인이고 무기가 엄청나며 갑옷으로 온 몸을 둘렀습니다. 또 그는 어릴적부터 전쟁을 위해서 키워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골리앗과 대결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갑니다. 다윗이 나가면서 한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 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거대해도, 그는 높은 성벽, 가나안 족속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커도 그의 신은 죽은 우상입니다.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입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누가 이길까요? 우리가 이깁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아주 초라했습니다. 많은 수가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최대의 신전,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는 남성명사이고 여성으로 하면 다이아나입니다. 그 신전은 어마어마한 신전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초라한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만약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아데미 신전이 골리앗이고 에베소 교회가 다윗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이깁니다. "그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를 세워봐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작아보여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지 알려주심으로 우리에게 승리가 있고 궁극적인 영광이 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임 생활은 종교인들의 교회, 예를들면 성당이나 절이나 교파와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교파를 부러워 하고 교파의 것을 따라가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국에 있는 우리 모임 중에 제일 큰 모임도 세상에 있는 모든 교파 중에 제일 작습니다. 교파에서 하는 것을 모임이 따라가는 것만큼 자기를 패배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교파를 따라가는 것은 패배로 가는 첩경입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몇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학생집회를 할때,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학생집회를 하려면 장소 대여비, 식비 등 비용이 듭니다. 그래서 대략적인 예산이 나옵니다. 모임에서 하는 집회의 비용에 대해 회비제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회비제는 "1인당 얼마의 돈이 드니 회비를 내고 참석하십시요." 라고 하는 것인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계산법입니다. 세상에서도 집회를 하면 비용이 들고 회비를 각자 부담해서 참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애로사항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집회를 계획해 공문을 보내면 이렇게 물어 옵니다. "그래도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일인당 얼마쯤 비용이 듭니까?" 이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을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자나면 마포모임에서 책임질 것이고 만약 책임지지 못하면 학생집회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집회나 어떤 행사를 꼭 계속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필요는 어마어마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학생집회를 하면서 그동안 변화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2박 3일간 재미없어 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이나 말씀을 듣지 아이들은 어렵지 않겠느냐" 고 합니다. 그래서 이벤트 같은 것을 자체적으로 했습니다. 발표회나 연극도 하고, 학생들 자체적으로 운동도 하는 활동을 초창기 집회때는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운동을 하고나면 다음 시간은 완전히 좁니다. 운동하고 밥을 먹었으니 그 다음 복음집회는 완전히 졸아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한 것입니다. "재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딱 안오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든다. 다시는 안가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들이 안오면 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회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원칙입니다. 그래서 학생집회에서 이것, 저것을 빼니 프로그램에는 완전히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지루해 합니다. 나중에는 저에게도 여러 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형제 자매님들이 오셔서 "아이들을 보냈더니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한소리로 듣고 한소리로 흘립니다. 그것을 고려하고, 가능하면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럴수 있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갖고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집회에서 섬기시는 형제님들에 대해 현직 교사는 제외합니다. 그분들은 학생들을 잘 압니다. "중학생은 40분, 고등학생은 50분간 수업을 하기에 40분이상 말씀을 전하면 안됩니다." 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40분 수업, 10분 휴식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렇게 결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이것을 왜 하는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세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면 교회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그 길이 성공의 길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으로 성공의 길이라고 믿으면서 그 길을 가지만 실상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에 반복되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임에서 일할때, 예를들어 주일학교에서 달란트 시장을 합니다. 달란트를 나눠주고 돈처럼 물건을 사게 합니다. 또 주일학교에서 상을 줍니다. 부탁하건대 이것을 하지 않길 바랍니다. "일등하는 사람에게 상주는 것을 하지 말라. 그것은 세상이 잘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등한 사람에게 상주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외적인 결과를 평가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못하는 사람, 못난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 사람들이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주님께서 세상의 약한 자와 미련한 자를 들어서 세상의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는데 모임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모임에서 암송대회를 하는데 암송은 믿음 좋은 사람이 잘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 좋은 사람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송을 잘하는 사람에게 상주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실행에서 기도하고 우리가 전부는 못할찌라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고, 세상과 다르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포모임에서 3월 10일에 모여서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까지도 교회가 하면 달라야 합니다. 기본 원칙이 달라야 합니다. 운동할 때도 잘하는 사람들은 실력대로 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운동모임에 가서 하면 됩니다. 모임에서 함께 등산을 갈때도 그렇습니다. 등산을 잘하는 분이 앞에 서면 항상 문제가 됩니다. 자기가 잘하기 때문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임에서 하는 것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두 다윗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워 떨면서 아무도 싸우러 나가지 못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무능력하고 상대방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해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도 세상과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마포모임에서 재작년에 교회건물을 사고 은행 융자를 내고 그것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얼마를 갚았습니다. 재작년에 교회재정을 보면 헌금이 얼마 들어왔고 빚을 얼마 갚았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빚을 하나도 못갚았습니다. 그래서 재정을 맡은 형제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합니다. "재작년에는 얼마를 갚았는데 왜 작년에는 하나도 갚지 못했는가?" 이유는 뻔합니다. 한봉래 형제님이 집회를 너무 많이 해서입니다. 외국에서 초청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갚아야 할 돈이 집회비용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에 제가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재정을 쓸때, 일반적으로는 수입을 보고 지출을 합니다. 수입을 고려해서 지출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삶에서 따르는 기준입니다. 성도님들은 수입에 따라 지출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면 가정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제 주위에는 알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 박용수 형제입니다. 조금만 뭐를 쓰려고 하면 "형제님, 그것은 비쌉니다." 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알뜰하게 써야 합니다. 모두가 주님 돈이고, 내 돈이 아니기에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도들이 주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그것을 귀중히 알고 소중히 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출원칙은 이렇습니다. 교회는 수입을 보고 지출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지출을 결정하고 수입에 대해 기도합니다. "주님 이 일이 주님 앞에서 필요합니까?", "이 일이 필요하면 주님께서 공급해 주십시요." 그리고 주님께서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분별을 잘못한 것입니다. 누군가 욕심을 부렸거나 주님의 뜻이 아닌데 주님의 뜻이라고 우긴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왜 그와같이 분별했는가?', '주님 뜻인가? 자기 뜻인가?' 돌이켜보고 다시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임을 향한 주님의 뜻은 어디까지인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 지출이 있을 때에 항상 아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일꾼들은 현재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가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항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16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기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주 기본적인 것을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기본은 무엇입니까? 기본은 16절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의 비밀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경건의 비밀은 주님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고, 주님으로 기뻐하는 곳입니다.

 

그 다음 15절,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첫째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교회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혹은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으로 알려 주신 것, 계시해 주신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의 '기둥과 터' 가 교회라고 했습니다. 기둥은 이 진리를 선전하는 자리입니다.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광고판입니다. 과거의 고대 건축물의 기둥은 광고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선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터는 기둥의 받침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보존하는 곳입니다. 진리가 공격 받을 때 그 진리가 외곡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그 진리를 지켜내는 곳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복음과 교회진리를 정확하게 전해주고 복음과 교회진리가 변질되지 않도록 실제로 지켜내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가면 성경적인 복음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 교회에 가면 교회진리를 실행하고 있다." 교회진리를 틀림없이 구분하고 분별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를 생각할때 생각나는 사람 중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셨을때,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분주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마리아가 얄미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섬기는 일을 하다보면 자매님들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떤 자매 하나가 말씀 듣는다고 혼자 나가서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들으면 얄밉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적용합니다. 모임에서 애찬준비를 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포모임에는 아예 애찬이 없습니다. 애찬 준비하기 위해서 예배를 빠지는 것, 애찬준비를 하려고 예배 시간에도 눈감고 음식 생각을 하는 것,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말씀을 듣지 않고 부엌에 가서 있는 것, 이것이 마르다입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십니다. 밥 좀 늦게 먹고 좀 나쁜 음식 먹으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인 것이 먹기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잘 먹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모임에서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듣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고 그후 마리아는 주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유월절 엿새전에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붓습니다. 그때 반대한 사람이 나옵니다. 가룟유다입니다. 그런데 또 주님께서 마리아의 편을 듭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거니와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나의 장사를 위하여 부었느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주님의 무덤에 향유를 준비한 여자들은 다 잘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무덤에 베다니 마리아는 가지 않습니다. 부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조차 다 실족하여 넘어지고 주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영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할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님이건 자매님이건 말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는 전문가이고 교양인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선가 결함을 드러냅니다. 그런 일을 볼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말씀에 착념하여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교회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익숙해지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항상 문제를 안고 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에서 저희들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시편 119편입니다. 시편 19편에서 다윗이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입의 꿀보다 답니다." 이렇게 느끼고 있습니까? 정말 말씀을 읽으면서 꿀보다 달다고 느끼고 있는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10분이라도 틈이나면 성경을 봐야 합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눈을 붙이고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경을 잠깐이라도 보고 오늘 아침에 읽었던 말씀, 주일날 교회에서 선포되었던 말씀을 다시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번 드린 간증입니다. 제가 선교단체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받은 훈련은 아침에 일어나면 QT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직장에 갑니다. 직장에 가서 수업을 하고 잠시 쉽니다. 그리고나서 생각해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QT를 했는데 무슨 내용을 묵상했지?' 라고 생각하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매일 공부하는 사람인데 무엇을 기억하는 것에는 전문가인데, 이상하게 아침에 읽은 성경은 생각이 안납니다. 그래서 "왜 이러지?" 하며 마음에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그래서 읽은 성경을 다시 봤습니다. 이런 작업들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것을 괴로워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눈으로 스쳐버리고 마음판에 박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말씀이 나의 하루를 인도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씀이 하루동안 저와 함께 하도록 해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것을 해야 합니다. 잠깐 시간 나면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삶에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이것이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우리가 교회의 지체라고 했을때 나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할때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끝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진리가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교파에 있을때 많이 경험했던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 뒤에 '어서 돌아오오' 같은 찬송가를 피아노로 쳐줍니다. 혹은 성악가를 세워 찬송을 부르게 합니다. 굉장히 호소력이 있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마음을 열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사람은 손을 듣고 앞으로 나오십시요.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다 눈을 감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은 손을 드십시요.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나님만이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정확하게 전하고 그후에 믿고 안믿고는 복음을 들은 사람의 선택입니다.

 

전도자들은 열매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복음집회에 갔는데 몇명이 구원받았다." 이것처럼 나쁜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씀을 전했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냈는가가 끝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저희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 많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높아져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왜 많은 열매를 주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할 것은 충성스럽게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했는가 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성경대로 전하고 기도하고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올 수 있도록 여러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지만 그 사람들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영적이지 않은 관계는 반드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반드시 영적인 관계로만 교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것이 섞여서 들어오면 나중에 그것이 우리를 굉장히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붙들고 진리를 높이고 진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예배당을 지으면 빈 공터에 농구장을 만들어서 언제든지 동네 아이들이 농구를 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농구하는데 꼭 끼어서는 잠깐 기도하자고 합니다. 또 농구가 끝나면 잠깐 교회에 들어가서 복음을 들어보자고 합니다. 이것은 미끼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자가 없다." 주님이 하신 말씀 입니다. "내게 오는 자를 아무도 내가 내어쫓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지 않고 우리가 막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보통 이러한 방법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믿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믿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미안해서 성의를 봐서라도 믿어줘야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마포모임에서 누가 말했습니다. "마포모임에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무료과외를 합시다." 그래서 망원동 일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영어, 수학을 가르쳐주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하자고 합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는 사람 중에 영어를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모아 무료로 영어도 가르쳐주고 복음도 전하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관계없이 영어를 못한는 사람들을 순전하게 도와주는 것은 찬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 도와줘 놓고는 "복음 좀 들어주세요."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과 원리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이 정말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행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머지는 못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이 세가지 비유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계획하고 계시고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고 계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해내지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깨닫고 가지고 있는 문제를 수정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패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몇명이나 모일지, 어떤 사람이 모일지는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가서 듣는 것은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입니다. '성공했구나' 하는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결과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정말로 말씀에 순종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건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성전은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모든 형제님들은 예배시간에 감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매님들은 너울을 쓰고 잠잠합니다. 그런데 형제님들까지 잠잠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자매님들은 입을 열지 않으니까 준비없이 와도 됩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은 더 어렵습니다. 형제는 드러나기 때문에 예배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믿음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자매님들은 안해도 아무도 모릅니다. 토요일 저녁에 예배를 준비했는지 안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매님들은 말하지 않을지라도 주님에 대한 감사,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묵상하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것을 대신 말해주는 형제가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런 동시적인 섭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침묵이 흐를때, 그 시간을 너무 어색해하지 말고 놔둬야 합니다. 예를들면 한형제가 감사하고 그 다음 감사까지 시간이 비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비면 빈대로 두어야 합니다. 어색해하면서 시간을 채울 요량으로 찬송을 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한 것을 고치려고 인위적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예배시간이 주님께 합당하게 드려지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히브리서 13장에 예배는 만찬에 참석해서 감사드리는 것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 예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그 일주일간 예배드린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와서 감사드리고 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과 저희들의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의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위선인 것입니다.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