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등대, 주님, 별 >

박이레 2021. 7. 20. 23:37

2017년 8월 20일 일요일 오전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등대, 주님, 별 >

제가 이번에 미주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매년 7월 넷째주에 뉴욕 플러싱 모임의 수양회에 참석하는것이 이 방문의 주 목적입니다.
그러면서 미주 지역에 살고있는 한인 성도님들을 만나서 격려합니다.
하와이에는 와이나이라고 하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는 성도 가정이 세가정, 그리고 한인 자매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 자매님께서 계시록을 궁금해 하셔서 하와이에 방문했을때 계시록을 준비했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 가운데 계시록에 대한 말씀이 있어서 계시록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1-3, 개역한글)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17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1:13-20, 개역한글)

내용을 살펴보면, 요한계시록 1장은 1-3절까지가 서론입니다.
이때 사도요한이 본것이 세가지입니다. 1.주님을 봅니다. 2. 일곱 금 등대(촛대)를 봅니다. 3. 별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이것을 보았을때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 밤을 밝히는 등대가 7개가 있었고 그 등대사이에 주님이 계셨고 주님은 오른손에 별을 쥐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서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사도입니다. 그는 밧모섬에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1:9, 개역한글)

이는 로마로 치면 교도소입니다. 죄수들을 가둘 교도소입니다. 밧모라는 섬에 로마의 죄수로 유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으면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요한 계시록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성경을 쓴 상당수의 기자들이 핍박속에서 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서신을 씁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가지 입니다.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쓸때 사도바울은 임박한 죽음을 압니다. 이제 그는 곧 죽을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쓴 서신입니다.
베드로전,후서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가 쓴 서신입니다.

구약으로 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를 생각할수 있습니다.
모세는 불순종함으로 가나안땅에 못들어갑니다. 그가 반석을 두번 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여러번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멀리서 가나안땅을 봅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출애굽 2세대 들에게 다시한번 경고하고 기억하게하는 내용이 신명기 입니다.

이와같이 핍박의 시기에, 고난받는 시기에 성경이 쓰여졌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 맞는가?' '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사도요한이 갇히게 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로마는 황제 제도로 바꾸고 황제를 숭배하도록 바뀌던 시대입니다.
저희로 치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사람이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으면 체포되거나 죽습니다.
그럼 우리 마음에는 이런생각이 듭니다. '체포되거나 죽으면서까지도 거부해야 하는가?'

사도요한이 모임의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황제숭배의 압력을 가합니다. 그가 그것을 거부하면 밧모섬에 유배되고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이 섬기는 모임과 성도들은 사도요한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차라리 살아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것이 낫지 않는가?'

우리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박한 이 시기에 '교회진리를 실행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를들면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구도자들이 복음보다 너울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왜 너울을 쓰는가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복음시간에만은 너울을 벗자고 합니다. 복음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간증을 드리자면 제가 종로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을때, 쉬는 시간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으면 교회 다니는 학원 선생님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합니다.

"선생님 어디 교회를 다니시나요?"

"집 옆에 나오는 조그만 교회에 나갑니다."

"교파가 어디신가요?"

"없습니다."

그럼 듣는사람은 이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목사는 누구십니까?"

"저희교회는 목사가 없습니다."

그럼 더이상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단인것이 확정된 것입니다. 물론, 자기들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진리는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속할수 없습니다.

장로교는 켈빈에게로라 하는것이고 침례교는 웨슬리에게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켈빈과 웨슬리를 존경합니다. 모두 존경할만한 앞선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를 존경하지만 바울에게, 베드로에게 속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고 말을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세상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렇게 전파된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저가 글을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주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펴고 글을 읽으셨습니다. 그 당시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바벨론 포로를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에서 보면 에스라가 성경을 펴고 사람들이 일어나고 앉습니다. 그리고 레위사람들이 그 성경을 번역해 줍니다. 그들은 70년만에 자기 언어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읽기 위해서는 특별히 히브리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성경을 펴서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와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을 가르칠 권한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권한이 없어보입니다. 사람에게서 가르칠수 있는 자격증을 딴적이 없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칠려면 대제사장이나 바리세인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가르치십니까?"
그들이 그렇게 물었을때 주님께서 대답했습니다.

"침례요한이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 대답하면 대답해주겠다"

주님께서 나도 나사렛에서 살때 옆에 대제사장 친척이 있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유일한 권한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권한이 성경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도 19세기에 형제운동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속한 유명한 사람이 조지 뮬러가 있고 다비가 있다 하는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장로교와 똑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이 되지 않으려고 너울 벗거나, 교단이 있고, 전국에 이백 몇개가 있다 하는것은 전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핍박의 시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핍박의 시대에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교회진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황제숭배를 할때 향을 피우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속을 아신다'
교회와 구도자를 위해서 잠시 이렇게 함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일곱개의 교회를 보여주십니다.
핍박의 시기에, 목숨이 왔다갔다하고 모이는 것이 어려운 이 시기에 교회진리를 꼭 실행해야 하는가? 하는 이런 생각들이 드는 시기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늘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기도를 해도 왜 하나님은 응답지 않으실까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와있습니다.
또 우리가 볼때, 신실한, 믿을만한 사람은 왜 일찍 죽는가? 순교자들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진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이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1:1, 개역한글)

사도요한이 쓴것이 요한복음이 있고 요한 서신서가 있고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믿고 구원받으라고 되어 있고 요한서신서는 사랑을 말하고 계시록은 소망을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개역한글)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는 책입니다.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타냈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선언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1:3, 개역한글)

요한일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똑같이 되어 있습니다. <선언하다> 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계시입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서는 믿는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다 선언합니다. 그것을 듣고, 믿는사람과 안믿는 사람이 나오고 순종하는 사람과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1:1, 개역한글)

계시는 모든사람에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이는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입니다. 이는 받는사람들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모든사람들이 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반드시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는사람을 상정하고 계시하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5-16,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는가를 말합니다.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구원받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할지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 그는 택함을 받고 부름받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속에 나타낸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계시는 반드시 받을 사람을 정해놓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누구나 읽고 그 중에서 은혜로 깨닫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계획된 서신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3, 개역한글)

말씀을 읽는자는 단수 입니다. 듣는자는 복수 입니다. <듣는자들> 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교회서신 입니다.

저희들이 현대문명에 살고 있어서 모든 성도님들이 성경을 한권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책이라는 것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강단에서 어떤 형제가 두루마리 서신을 읽고 나머지 성도들이 그것을 들었습니다. 읽는자, 듣는자는 교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요한계시록이 낭독되고 그 말씀의 뜻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그것을 듣는자들이 복된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기록된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됩니다.
듣고 이해하는자들이 복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요한계시록은 주로 예언입니다. 이 기록된 것들을 순종하는 사람이 복됩니다.

디모데후서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자기 생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추가 합니다.
<이 면류관은 주의 오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

우리가 죽던지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과 일치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둡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가치관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충동하고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것은 주님앞에서 인정될 것으로, 이 세상에서 인정될 것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아는 사람이 그 방향을 따라 오늘 이 삶에서 일치하게 그방향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을 보면, 성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개역한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시매 -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성막을 치니> 라는 뜻입니다. 성막이 주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는 <나는 문이니> 문으로 말씀하십니다. 성막 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서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거니와 썪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알의 밀이라고 하십니다. 곧, 소제입니다.

성막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것이 번제단, 놋단입니다.
여기서 다섯개의 제사가 다 드려집니다. 그 중에서 소제를 드리는것이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한알의 밀알로 비유하셔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것은 성막에서 물두멍입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가 성소로 들어갑니다. 진설병과 촛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진설병이며, 빛이시며, 주님을 통해서 기도되어야 할것을 14장부터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지성소입니다.
요한복음 구조가 성막의 틀을따라 쭉 이어져 갑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 입니다.
금 등대가 있는데 이것은 성막에 있는 등대와 마찬가지 입니다.
계시록 4장, 5장에 보면 보좌가 나옵니다. 보좌는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전이 나옵니다.
성막과 관련되어서 요한계시록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1장에서 사도요한이 계시록에서 본것은 세개입니다. 처음본것은 주님입니다. 그리고 금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의 경륜 중에서 교회가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가 완성되어야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이스라엘이 완성되고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보셔야 합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교회를 위해서 직장을 내려놓은적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돈벌수 있는 좋은 기회를 버린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내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버린적이 있습니까?

많은 성도님들이 이런 희생을 한적이 있는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 희생을 언제하셨습니까?
최근에 해본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을때에 그런 희생을 했습니다. 이단 소리를 들어가며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한이 본것은 세개 입니다. 주님을 보고 교회를 보고 별을 보았습니다.
이 세개를 성막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풀어보겠습니다.

촛대보다 등대라는 번역이 합당한 번역이라고 하는것은 등대가 기름을 넣고 불을 피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촛대는 자기몸을 태우며 불을 피우지만 등대는 기름이 떨어지면 불이 꺼져버립니다. 그래서 등대가 교회의 이미지에 더 맞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고 등대가 있고 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막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성막에 있는 것들은 전부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이건 향단이건 언약궤건 전부 주님을 상징합니다.

<금등대> 입니다.
금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신성입니다.

성막은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여러기구들입니다. 언약궤, 등불, 물두멍, 다 주님입니다. 단은 주님의 십자가이고 물두멍은 구원받은 성도가 이땅에서 생기는 죄를 주님앞에 다시 자백하는 것입니다.
진설병은 주님을 먹어야 하고, 촛대 주님이 빛이십니다. 기도할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주님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성막은 전부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막이 그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분인가가 나타나있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기구 들이 있고 그것을 덮고 있고 제사장이 하는 기능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1. 구원의 진리가 있습니다.
2. 교회진리가 있습니다.
3. 예언이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진리들입니다. 이 진리들을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에 오면 복음을 들을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오면 구원받은후에 하나님이 왜 교회를 세웠고 교회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교회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될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교회가 실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별입니다.

우선 교회가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담아야 한다고 했을때, 첫번째로 보겠습니다.
지역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시고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때는 목표가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성도들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도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방인의 교회> 라고 합니다. 이방인들로 주로 이루어져서 그런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는 부분을 몇가지 보겠습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1:4-5, 개역한글)

데살로니가에 사도바울인 3주 안식일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잠깐 교리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것을 이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보통 장로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을 구원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로교의 교리인데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기로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선택하는것은 전부 개인적인것이 없습니다.
로마서에  '에서를 선택'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민족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로마서 9-11장을 이스라엘을 다루는 이야기 입니다. 개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선택하는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석하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안맞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하나님을 구원하기로 어떤 사람을 작정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것은 단 두가지 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하십니다. 구원안하기로 선택하신적이 없습니다. 모두 복주기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은 전부 축복과만 관련됩니다.
모든 이방 민족에게 복주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선택한것은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너희를 선택한> 이것에 단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고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선택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6, 개역한글)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되고 세워집니다. 그리고 아볼로가 후에 와서 그 교회를 세워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아볼로를 세우셨을찌라도, 그리고 세웠으므로 우리가 존경하는것이 마땅하지만 생명과 관련해서는 하나님밖에 근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교회를 생각할때, 교회가 금 등대인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세워가시는 것을 강조하는 측면입니다.

달리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주님도 하늘에 계십니다. 세상은 주님도 하나님도 볼수 없습니다. 세상은 유일하게 교회만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두운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의 빛이고 우리도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금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두번째로, 금 등대 사이에 주님이 계십니다.
이 금등대는 성막에 있는것과는 다릅니다. 성막에 있는 촛대는 하나에서 여섯개의 줄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있는 등대는 일곱개의 독립된 등대가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독립적입니다. 지역교회는 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지역교회가 다른 지역교회에 간섭하거나 명령할수 없습니다.
그랬을때, 모습을 보면 등대는 전부 주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 등대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 예배의 중심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내용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틀린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내용이 주님이 누군가, 어떤분인가, 무엇을 하셨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물론 틀린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떻게 혜택을 얻었는가가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것 모든것이 주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을 의식하면 어려워집니다. 구도자들을 어려워해서 복음에서 죄를 빼버립니다. 그래서 회개가 복음에서 빠집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안 들으면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내가 꺼림이 없이 다 전했노라>

사도바울은 사람의 낯을 보지 않습니다.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면책합니다.
하나님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중요합니다.

물론 사람을 배려하는것이 나쁘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것은 주님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간증을 들었습니다.
뉴욕 수양회에 갔는데 어떤 자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뉴욕 수양회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말씀을 듣습니다. 하루종일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매우 피곤합니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약을 맡은 자매님께 누군가 와서 약을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피곤해서 "아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자매가 지적했습니다. "자매님 그렇게 말하면 안되요. 은사를 감사함으로 사용해야지요."

"아 싫은것이 아니고 피곤해서 좀.." 이라고 말하니 또 변명한다고 했답니다.
이러한 권면이 모임안에서 가능해야 합니다. 모임안에서 이러한 권면이 가능해야 합니다. 모임안에서 싫어할까봐 말을 못하고 말씀을 어긋내는것까지도 말을 못합니다.

교회는 주님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도전받는것이 이런것들입니다.
이것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교회는 계속 어려워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만 비추고 주님에게만 책임이 있는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주 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섬세하게 구분합니다.
머리라고 할때는 몸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지역모임과 관련해서는 주 입니다.

그리고 머리되신 주님과 주되신 주님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살피고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고 주님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주님께서 머리가 되서셔 교회를 보양하십니다. 이것이 주되심과 머리되심 입니다.

성령과 관련해서, 교회가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아버지하나님, 주 하나님, 성령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님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요?
등대는 기름이 부어져야 빛이 켜집니다. 기름이 없으면 불은 꺼집니다. 교회가 아무리 진리를 가지고 있고 안다고 해도 성령께서 인도하시지 않으면 빛을 발할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근심케말고> <성령을 소멸치말고> <성령충만을 받으라>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인도하실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틀림없이 약속대로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때 100% 뜻대로 인도하십시오 라고 하는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케하는것은, 성령님께서 가장싫어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기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라고 하는것은 죄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생긴 죄입니다. 사단이 <내가 내가>를 일곱번했습니다.
<내가 북극집회에 올라가서...>

우리 모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그러나 내뜻대로 하면 안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내 뜻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근심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소멸되는것은 주로 교회적입니다.
예배시간에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해서 지금 예배드려라, 지금 기도해라 지금 사회를 봐라, 혹은 지금 말씀을 교제하라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인도하시는데 그것을 내가 하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를 책임감 있게 합당하게 쓰지 않는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시키는것은 죄를 지을때입니다.
이 둘을 피하고 성령이 인도하심에 순종할때 성령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막에서 언약궤, 등대 들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을 실제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때 중요한것이 별입니다.
이 별에 대해서 형제님들이 여러가지로 해석하셨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의 인도자들로 해석합니다.
교회가 여러 진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진리를 실행하고 예언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의 인도자들이 책임을 가지고 실행해야 합니다.

인도자들이 타락하면 교회가 넘어갑니다.
인도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저희들이 보통 두가지말을 합니다.
교회는 인도자의 수준 위로 못올라갑니다. 그래서 인도자들이 그 교회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인도자들의 책임입니다.
역으로 성도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인도자를 가질 뿐입니다. 피차간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순환해가며 서로 가는 것입니다.

인도자들이 성도들을 길러내고 성도들이 인도자들을 배출해내는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그렇습니다.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어야 하는때에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가 40세에 바로의 공주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이스라엘과 능욕받기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가 되는것 하나만을 할수없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노예된 이스라엘과 고난받는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무엘도 그렇습니다. 그시대에 하나님의 희귀했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나고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사람으로 자라갑니다.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더라>

한사람이 이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사람의 배후에 부모들이 있는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진리는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면 왜 이와같은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는가? 하나님은 왜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는가? 이 모든 의문에 요한계시록이 대답해 줍니다.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1:5-7, 개역한글)

<내가 새롭게 하노라>

<이말은 참되니 기록하라>

하나님이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실것입니다.
교회진리가 실행된 아름다움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실것입니다. 순교한 위대한 목적이 있음을, 그들의 순교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으로 갚으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의로운지를 반드시 입증하실것입니다.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라. 이것이 계시록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