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성경이 말하는 교회_지역교회 >

박이레 2021. 7. 20. 23:38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성경이 말하는 교회_지역교회 >

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22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수11:21-23, 개역한글)

이 말씀의 장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장면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열두지파에게 분배합니다. 그 땅에 전쟁이 그칩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세 곳, 가사,가드,아스돗에는 가나안 사람이 약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을 남김없이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이 세곳에 가나안인을 약간 남겨 둡니다.
그리고 이 세군데서 이스라엘은 반격을 당합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삿16:1, 개역한글)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삿16:4, 개역한글)

이 가사에서 드릴라 라고 하는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힘센 사람 삼손에게 그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는지 질문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삼상17:4, 개역한글)

골리앗은 저희가 잘 아는 블레셋 장군 입니다. 그는 가드 출신입니다. 가드는 여호수아가 남겨둔 곳 중 하나 입니다.
그 곳에서 세월이 지나면 이스라엘을 도전하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힘의 근원을 뭍는 사람이 나오고 두번째에는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제 아스돗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삼상5:1, 개역한글)

아스돗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지고 언약궤를 빼앗긴 곳입니다. 그리고 아스돗은 블레셋의 수도 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드, 가사, 아스돗 세 곳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곳에서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호수아는 왜 이 세 지역을 진멸하지 않고 그냥 놔 두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저희들이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가 인도자가 되어 가나안 정복전쟁을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첫번째 여리고성 을 무너 뜨리고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 땅을 분배합니다.
여리고가 가나안의 가장 강한 땅이었습니다. 그 땅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손 대지 않고 정복했습니다. 가나안 안에서 감히 이스라엘에 저항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마음만 먹었으면 모든 가나안인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두었습니다.
그는 "이 정도는 남아 있어도 별 문제 없다." 라고 판단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기준은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러한 인간의 판단이 틀렸음을 이스라엘의 역사가 입증 합니다.

두번째 측면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유월절을 제정하실때, 사망의 천사가 그 밤을 지나면서 초태생을 모두 죽일때에 살아남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그대로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엄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멸하라."
그런데 이번엔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대충 지킵니다. 세 군데를 놔두고 정복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다 압니다.

우리가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를 압니다.
남 유다에 앗수르가 공격해 옵니다. 앗수르 왕은 "내가 말을 준다해도 너희는 그 말을 타고 공격할 군대가 없다"라고 이스라엘을 모독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이 보낸 편지를 하나님의 전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날 저녁 앗수르 군대 18만이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 전부 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모릅니다. 거듭남을 모르고 성령의 내주를 모르고 성령의 인도를 모릅니다.

그런데 드릴라가 삼손에게 뭍습니다. "당신의 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삼손은 자기가 나실인이기 때문이라고 대답 합니다. 결국 삼손은 눈이 뽑히고 짐승이 굴리는 멧돌을 굴려야 하는 치욕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수단입니다. 최종목적은 그들이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누리고 복된 삶을 사는것이 그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출애굽은 굉장히 큰 사건이지만 사실은 출발에 불과 합니다.

구원도 매우 놀랍고 복된 사건이지만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출애굽 할때는 말씀에 잘 순종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임도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것을 성경을 잘 보고 따라 갑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항상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예배드릴것인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길은 하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예배 드리는 길은 다양하고 다니는 교회는 다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서 감동적인 설교를 받고 그 마음에 뜨거움이 일어나면 예배드린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고 하신 분이 구원받은 후에 성도의 삶은 다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관해서 다양한 것과 여러가지를 허락해 버립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에게 있던 문제 입니다.

모세는 엄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필요 없다고 놔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불순종은 반드시 댓가를 지불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엄중한 역사입니다.

마포모임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천거해 온 분들의 구원 간증을 들어보면 어렵습니다. "언제 원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씀으로 구원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잔을 돌리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세 언약이니>

새 언약, 이 새 언약은 마음판에 세겨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이처럼 분명하게 구원받은 말씀이 분명히 마음판에 세겨지는 것처럼 교회도 분명해야 합니다.

수년전 제가 벤쿠버에 갔을 때 어떤 형제님이 간증 했습니다.
간증의 제목은 '나는 왜 모임에 있는가?' 입니다. 서양 같은 경우에는 복음이 있는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은 매우 크고 유리한 장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은 그런교회들 말고 작은 모임에 있는 형제님의 간증 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모임에 내가 왜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왜 여기 있는가?'

구원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말하면서 교회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구원이 하나이듯이 교회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교회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입니다. 예배는 무엇인지, 집회는 어떤 것인지, 성령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14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15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16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17 또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감독자와 공장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18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9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대하34:14-19, 개역한글)

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대하34:29-32, 개역한글)

역대하는 36장에서 끝납니다. 34장에 나온 요시아 왕은 바벨론 포로 되기 직전의 왕입니다. 또한 요시아 왕은 마지막으로 남유다에 나온 선한 왕입니다.
그때에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특이한 것은 헌금함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지갑이 열리지 않으면 그 믿음이 열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기 위해서는 물질이 실제적으로 사용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부터 모세가 말하기를, 왕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옆에두고 항상 읽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율법책이 왕에게 없을 뿐 아니라 율법책 자체가 없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게 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곧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어떠한 악을 저질렀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한번이 아닙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카톨릭이 국교였습니다. 교황이 베드로 성당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당을 짓기위한 돈을 벌기위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 있는 가족을 연옥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하면서 팔았습니다. 지옥에 있는자를 천국으로 보낼수 있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한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분연히 일어나 죄 용서는 면죄부로 받지 않음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천주교에서 파면 당합니다.

그 시대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잃어버려진 시대임을 알수 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말씀을 잃버린 시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면죄부를 샀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항상 말씀을 잃어 버렸습니다.
요시아 왕때만이 아닙니다. 요시아 왕이 율법책을 보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우리로 치면 가장 기본적인 구원을 분별하고 죄 용서를 받았는가를 분별하는것과 같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1:3, 개역한글)

사도행전 2장부터 교회가 시작 합니다.
디모데전 후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사역 부분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에 있는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 교회에 사도바울이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

이것은 그 시대에,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사건을 우리가 기억해 보면 우리는 그때를 '암흑 중세시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때만이 암흑이 아닙니다.
요시아 시대도 암흑이었습니다. 그때는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입니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은 무엇을 하였나요?

그때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있는 때,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1-2, 개역한글)

말씀이 아닌 것을 가르치지 말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3, 개역한글)

사람들이 말씀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듣고자 하는 말만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환경 속에서 "너는 말씀만 전하라"라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살아있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와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2:6, 개역한글)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 첫번째 세워진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가 떠난 후의 교회의 모습을 대표 합니다. 그 교회에 첫번째로 일어나는 것이 니골라 당입니다. 니골라의 뜻은 백성들을 지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성직제도 입니다. 교회에서 성직자와 일반 교인을 나눕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를 '형제'라 하시고 '제사장'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닌 성직제도로 분리해 버립니다.

저희 모임으로 돌아와서 저희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구원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주신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까?

말씀을 잃어버린 첫번째 이유는 "교회는 다양함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했던 분들의 모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했던 분들이 내세운 모토는 1. 오직 믿음 2. 오직 성경입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을 한다는것 자체가 당시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비유를 듭니다.

비유는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역교회의 비유 몇가지를 살피겠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 관한 첫번째 비유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집이라는것에 대한 우리들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성도들이 '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도입하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집을 찾아봐야 합니다.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28:16-17, 개역한글)

<하나님의 전>
올바른 번역은 하나님의 집 입니다.

벧엘의 뜻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이 '집' 입니다.

여기나온 하나님의 전이 디모데전서 3장에 나온 하나님의 집과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야곱은 "내가 알지 못했구나"라고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도 어떻게 행할지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에서 어떻게 행할지를 배우는 곳입니다.

두번째는 문입니다. 집에는 문이 있습니다.
롯을 보면 그는 소돔성의 성문에 앉았습니다. 그는 소돔성의 법관이었습니다. 고대시대 성문은 항상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문에 하나님의 권위외 통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또한 하늘의 문은 하나님의 통치 장소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개역한글)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 나는것을 행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겸손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알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집에가면 부모님이 계시고 자녀들이 있습니다. 동생이 잘못하면 동생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실때엔 동생을 때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규칙이 가정집에도 있습니다.

모임의 형제 자매도,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도로 봐야 합니다.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봐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비유하신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성전은 구약에 성막, 성전 두개가 있었습니다.
성막은 뜰과 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합쳐서 부르는 단어가 있고 지성소만을 따로 부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 성전이라는 단어를 지성소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성소휘장을 찢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또한 성전이 주는 두번째 이미지는 거룩한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용납되지 않는 곳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가다가 죽어렸습니다.
1년에 한차례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만 용서될 수 있던곳이 지성소입니다.

신약시대로 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 죄를 지면 그 죄에 대한 징계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9, 개역한글)

하나님의 밭을 먼저 보겠습니다.
밭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서 식물이 자라 식물이 열매를 맻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열매는(결과는) 우리 몫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전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 어떻게든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변화가 없다면 문제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오랜만에 보면 훌쩍 커 있습니다.
이번에 뉴욕에 가 보았을때도, 정나라 형제님의 다비가 저보다 키가 커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영적으로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적인 성장 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열매 입니다. 그의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개역한글)

모임은 반드시 영혼들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비유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농사를 짓는데 수고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세우는데는 수고가 필요 합니다. 희생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함께 아파하고 울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임이 그렇게 하고 있나요?
우리 모임이 하나님의 집인가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신 곳인가요? 마땅이 영적으로 행동하고 있나요?
그리고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죄가 용납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와같은 말씀들을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그냥 교회는 와서 집회하다 가는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에는 번역이 집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집은 사실 빌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건물'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나무나 짚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교회는 그 터와 맞아야 합니다.
터가 그 건물의 모양과 크기를 다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1, 개역한글)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개역한글)

주님께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반석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의 흐름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틀리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최고로 좋게 얘기해도 사대 성인입니다.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개역한글)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흐름상 가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 하실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지혜로운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드러내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알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개역한글)

베드로는 은혜로 주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18절이 나옵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아버지,아드님 성령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분이 아들 하나님, 예수님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으로 알고 경배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어릴적에 성전에 가셨을 때 시므온이 엎드려 경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년전에 역사적으로 사셨던 인물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분입니다. 또한 이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을 고백할수 있는 것이 '이 반석'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여기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2:42, 개역한글)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반석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실제로 교회가 세워져서 지역교회가 활동했을때, 이 반석은 교회 생활로 42절처럼 드러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무엇을 하셨는가가 주제 입니다.
교제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모여 교제 합니다.

예를 들면, 마포모임에서는 토요일에 모여 청년집회 성경공부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그런데 이 교제의 중심은 반드시 주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앞에서 전파된 말씀을 우리가 모임생활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룰수 있는가를 교제하는 것이 교제 입니다.

교제는 요한일서에 있는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함께하는것이 교제입니다.
주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이 지역모임에서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 교제 입니다.
교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우리가 처한 환경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세번째, 떡을 떼는것은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시고 그 수치스러운 고통을 받으셨는지, 나를 위하여 나의 죄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대속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떡을 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기도 입니다.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고 한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래서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라고 마치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가 교회의 터입니다. 이 네가지를 하지 않으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주께서 사도를 12명 세우셨습니다. 사도는 다수입니다. 그렇기에 사도의 가르침은 한사람의 가르침을 받는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12명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주일에 요한복음을 공부하면 요한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공부하면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배웁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원칙을 배웁니다.

그런데 각 사도의 가르침을 모순으로 받아서 오해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울의 밀이 젛게 느껴져서 "나는 바울이 더 좋다."라고 하면 잘못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순없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고린도전서로 돌아겠습니다.
교회는 건축물입니다. 터를 보았습니다. 이제 그 위에 세우는 재료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3:12, 개역한글)

금,은,보석은 매우 크기가 작습니다. 나무,풀,짚은 부피가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보다 질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작은 섬김으로 섬기는것이 중요합니다.

두번째로 나무, 풀, 짚은 모두 지상에서 얻어낸 것입니다. 금,은,보석은 모두 지하에서 얻어낸 것입니다.
곧,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섬길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것으로 섬길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을 것인지 사람 앞에서 인정받을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관한 말씀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구원에 관해서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저희들이 자녀들이 구원받도록 도울때에 분명한 말씀을 원칙으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도 분명한 말씀을 원칙으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외모를 하나님 앞에 합당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밭입니다.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방법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만찬 예배를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바라며 평안과 확신 속에서 이와같이 걸어가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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