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엘리야

< 엘리야 1.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 >

박이레 2021. 7. 20. 23:34

< 엘리야 1.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 > 한봉래 형제님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1-16).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엘리야에 관한 건데요. 잠깐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배경을 보면 열왕기상 17장 바로 앞을 보면, 16장에 보면 아합이 왕이 되었고 왕비가 이세벨이고 그녀가 시집을 오면서, 그러니까 아합은 이방 결혼을 한 것이죠. 시집을 오면서 자기나라 종교인 바알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국가가 원래 출발부터 나빴지만, 그래서 이 북이스라엘에는 단 한명의 선한 왕이 안나옵니다. 전부 악한 왕입니다. 그 중에서 아합이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이르러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면 첫번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바알에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바꿔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들을 출애굽 시키고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이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을 바알로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예배가 바뀌고요. 두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이 두가지가 아주 절정에 달합니다. 그래서 이방신을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합니다. 17장 바로앞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때, 첫번째 장애물이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이 여리고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 일곱번, 열세번 돌아서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이 성은 다시 세워져서는 안된다." 만약 이 성을 누군가가 세우면 성을 세우는 공사를 세우는 공사를 할 때에 그의 첫째아들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이 완공 될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한 예언입니다. 물론 한 100-200년 떨어진 이야기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성을 세웁니다. 이제 처음 터를 닦는 공사를 할때에 아들이 죽습니다. 공사를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완공 합니다. 그리고 막내아들이 죽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여리고성을 건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을, 아들이 죽는다고 한 이 무서운 말씀을 무시하면서까지 여리고성을 지어야 했던 그 사람의 생각은, 그리고 그 사람을 지지하고 그와같은 공사를 계속 강행하게 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16장에 나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을 말해 줍니다. 예배가 엉망이었다. 예배가 변질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적인 상황은, 두번째 영적인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럼 그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느냐? 아니요,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열왕기를 쭉 읽다보면 오바댜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100명을 숨겨 줍니다. 그래서 100명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할때에 "칠천명이 남아있다."하십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 북이스라엘에 7,100명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예배를 바꿔버린 이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었나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왕이 공식적으로 바알을 도입하고 지지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핍박하거나 추방시켜 버리고, 라고하는 이 상황속에서, 그래서 이 상황을 쭉 보면 어떻게 느껴지느냐면, 이제 북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상황은 되돌릴수 없다. 왕이 우상을 지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침묵하고, 이제 상황은 바알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라고 생각되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이제 그럼 끝인가? 정말 끝장인가? 라고 할때 하나님이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름이 엘리야 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그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열왕기상에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입니다. 그에게는,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이 살아있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했을 때에 그 유월절 재앙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건너서, 이렇게 오게 한 이 하나님이, 옛날 이야기다. 옛날에 그런일이 있었지. 지금은요? 지금 이 우상이 팽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론입니다. 자기의 삶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 하나님이 살아있다. 어디서요? 자기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신명기 11장에 의하면 성도님들도 잘 아시는 구절이시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면 좋거니와 만약에 거기서 우상을 섬기면, 내가 하늘을 닫아버릴 것이다. 너희들에게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죠? 회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은 읽고 넘어가고 있었지만, 엘리야가 이 말씀을 붇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면 우리 땅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하나님 그 약속대로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고 기근이 들게 하옵소서."라고 그가 기도합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첫번째 기도고, 그러면 저희들이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우리의 삶에 살아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붇들고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 지금 한국 땅에, 한국에 있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모임에, 예배가 무시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경시되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이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붇들고 "주님 저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우리 모임의 예배 시간이 하나님께 받음직한 예배시간이 될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들이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할때 하나님 저희들을 징계하옵소서. 저희들이 예배 아닌 다른것에 마음이 갈때, 저희들의 상황을 징계하시고 그것에서 돌이키도록 저희들에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때, 그들이 왜 그렇게 바알을 숭배 했을까요? 그들이 왜 여리고를 세웠을까요? 여리고는 제가 보기에는,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신도시입니다. 주택이 없다고 하니까, 새로운 곳에, 여리고는 살기 좋은 곳이거든요. 여리고가 종려나무의 땅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나무들이 번성해 있는 곳입니다. 거기다가 집을 짓고 택지를 조성하고 분양하면 어마어마한 이익이 남는 장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는 전부, 대부분의 경우에 그 배후에 돈이, 물질입니다. 현실적인 이익입니다. 그것을 좆아가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래서 엘리야는 열심히 특심했다고 스스로 표현합니다. 엘리야의 열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자기나라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싶다고하는 열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그것을 보고 싶다고 하는 그 열심이 특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땅에 비를 그쳐 주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 하십니다. 안나와 있습니다만, 아마 하나님께서 이랬을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성경을 근거로, 말씀을 근거로 하는 너의 기도를 내가 들어주겠다. 이제 왕궁에 가서 선언해라."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기 시작하시냐면, 엘리야가 왕궁에 가서 아합왕에게 선언합니다. 이때부터 기근이 시작됩니다. "네가 가서 선언해라. 아합왕에게 알려라.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근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응답하실뿐 아니라 이렇게까지 응답해 주십니다. "네가 다시 기도하면 그때 비가 다시 내릴것이다." 그래서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엘리야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응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기도 응답을 받고 아합왕 앞에 갑니다. 아합왕 앞에 가서 하는 말이 나와 있는데요. 이 말이 어떤 형제님은 이렇게 표현하시더라고요. 선지자들이 했던 여러가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짧은 하나님의 말씀, 가장 짧습니다. "내 말이 없으면 우로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장입니다. 이 말을 하고 그칩니다. 그런데 그 짧은 그 문장의 능력은 굉장합니다. 하늘을 닫아버립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3년 6개월동안 닫아버립니다. 비가오지 않을뿐 아니라 이슬도 맻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왕궁 앞에 가서 악한 왕 아합에게 선언합니다.

그리고났을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가서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릿 시냇가에 다서 숨으라."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엘리야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왕 앞에 와서 "내 말이 없으면, 내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죠. 그렇게 표현 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이 땅에 비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합왕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실제로 자연현상을 좌지우지할수 있었던 사람,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왜 비가 오지 안온대요? 이상하지요. 이슬도 없어요. 그리고 시내는 말라가고 왜 이렇게 된 대요?" 라고 했을때, 전부 엘리야 때문이다. "엘리야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말하지 않으면 이 현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라고 전부 말하게 됬습니다. 이 아합왕 앞에서 짧은 메세지를 했던 엘리야는 이제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유명하게 된, 갑자기 유명하게 된 이 사람을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합니다. 사람 앞에서 유명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다시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재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지않고 일을 하면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일한 것 뿐입니다. 이제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그 다음 명령,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용하시려고 하는 최종 목적지는 갈멜산에서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명을 모아놓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 부르고 그들 앞에서 어떤 신이 참 하나님인지 입증해 내는 것, 이것이 엘리야의 최종 목적지 입니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첫번째 걸음입니다. 엘리야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에서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배우지 않고 일을하면, 하나님의 일도 틀어지고 본인도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교회사에서 그와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작은 일이지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이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할때, 그와같은 일을 한 후에 반드시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가서 다시 점검을 받고 그 다음 과정을 하나님 앞에 다시 지시받고 해야 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들을 보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구원받자마자 복음 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아라비아에서 3년을 있어야 합니다. 아라비아에 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40세에 주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시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이 그를 80세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만 함께 있는 경험이 꼭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고 주님 일을 하기 전에 그는 어릴적부터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하나님 사이에서 교제했던 이 기간이 사람 앞에서 일할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릿 시냇가로 가고요. 그릿 시냇가에 있었더니 비가 오지 않으니 시내가 점점 말라갑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다시 말씀을 주시기를, 이게 제가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내용인데요, "사르밧으로 가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갑니다. 여기서 잠깐 살펴 보면요, 사르밧이라고 하는 곳은 이방 땅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이방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방 땅으로 가라고 할까요? 두번째, 사르밧이라고 하는 것은 이방 지역 중에서도, 시돈의 사르밧이라고 했는데요. 시돈이라고 하는곳이 바알신이 원래 생겨난 지역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그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이방 땅으로 가라고 할까? 두번째, 왜 바알의 본거지로 보낼까? 세번째, 하나님이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르밧에 있는 어떤 과부가 있는데, 과부가 너를 먹여 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음식을 대고 숙소를 제공하고 하는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부니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명칭입니다. 나중에 보면 자기 먹을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과부가 너를 공궤할 것이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저희들이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렇게 되도,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엘리야가 어디서 공궤를 받아야 하죠? 이스라엘 땅에서 공궤를 받아야죠. 그리고 그를 누가 공궤해야 하죠? 이스라엘의 부유한 자가 그를 위해서 숙소를 제공하고 먹을 제공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방으로 보냅니다. 과부에게서 공궤를 받게 하십니다. 항상 저희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배치되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버립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죽었는데 그 피가 온 세상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걸림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고 하나님이 이끄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야말로, 오늘도 방금 전에 드린 것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탄하고 탄복하고 찬양해야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임무가 무엇이냐 하면, 예배를 외곡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삶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임무입니다. 이 임무를 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여기 사르밧의 한 과부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딱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상해도 순종합니다.왕궁으로 보내신 하나님이, 갑자기 사람은 흔적조차 찾을수 없는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합니다. 왕궁과 굉장히 차이가 있죠. 그가 갑니다. 그 다음에 다시 "사르밧으로 가라." 갑니다. 아무 말 안하고 갑니다. 이것이 말씀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사람의 태도입니다. 자기가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 남을 가르칠수 있겠습니까? 그가 먼저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르밧으로 가는데요. 갔는데 거기서 과부를 어떻게 만났지요? 주님이 공궤하라고 명령한 여자를 어떻게 찾을수 있을까요?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찾냐면, 이것이 생각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아서 이삭의 아내될 사람, 리브가를 찾아서 가지요. 그런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니까 성문에 앉아서 기도 하지요. "하나님 제가 어떤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물을 줄 뿐만아니라 내 낙타에게도 물을 주면 그 여자가 주님이 택하신 여자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죠. 여기서도 엘리야가 시험을 해 봅니다. 어떤 여자에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창세기 24장에서 일어났었고, 여기서 일어나고, 또 요한복음 4장에서 일어납니다. 주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그러죠.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하여간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얼 요구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이 없어서, 필요해서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 여자가 물을 뜨러 갑니다. 가는데 다시 더 이야기 합니다. "물만 가져다 주지 말고 빵을 조금 가져다 주십시요." 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그러니까 이 여자는 아직 하나님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지시를 받았냐면, "나의 선지자가 올 것이다. 너는 그 사람에게 떡을 주고 숙소를 제공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실제로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할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이 이렇게 나오지요. "당신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나는 당신에게 줄 떡이 없다. 떡이 있으면 주겠으나, 마지막 떡이 있는데 이것은 나와 아들이 먹고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저희들은 두가지를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이 여자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공통적으로 죄인들 입니다. 그 죄가 이 여자에게는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있느냐면, 마지막으로 이것을 먹고 죽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과부에게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소중한 존재일 것입니다. 물론 모든 어머니가 아들을 소중히 여기겠지만 과부는 남편도 없어지고, 이제 아들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소중히 여기는 아들이지요. 그런데 이제 살수가 없습니다. 먹을게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소위 최후의 만찬을 먹고 죽어야 합니다. 죽을때에 누가 먼저 죽어야죠? 그녀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들 먹이고, 마지막 끼니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먹이고, 남는 것 있으면 내가 먹고 죽겠다 해야 맞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나와 아들"이라고 순서가 분명합니다. 자기가 먼저 먹고, 죄인들 입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을 위해서 희생하지만 변함없이 자기가 주인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죄인들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것을 엘리야가 바꿔내야 합니다. 이제 이 여자는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되고 '나의 하나님' 입니다. 나에게 나타나서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선지자를 보낼 테니까, 이상한 하나님이죠. 자기 먹을것도 없는데 "내가 선지자를 보낼 테니까, 그 사람을 먹이라."라고 이상하게 말한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그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이 여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훗날 우상에게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자로 바꾸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르밧 과부에게 먼저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먼저 한 사람을 돕고, 어떻게 도울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돌아서는지, 이것을 그가 경험한 다음, 이제 그가 갈멜산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맏기신 일을 감당할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저희들도 적용해 보면, 저희들도 사람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자녀들, 부모님, 사랑하는 가족, 친족, 도와줘야 합니다. 달리 돕는게 아니고, 다른 것으로도 물론 도와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믿도록, 그리고 모든 죄인들이 갖고있는 그 이기심을 버리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기심이 왜 왔느냐면요,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런일이 벌어지죠. 다 아시는대로, 뱀이 찾아와서 "선악과를 먹으라.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냐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것이 선 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사람들은 이렇게 됩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선 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선악과로 하여금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자기가 기준입니다. 요즘에 뉴스에서 자꾸 나오는 것이 그런거잖아요. 내로남불, 자기가 하면 괜찮고 다른사람이 하면 문제가 되고, 그런데 저희들이 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이와같은 것들이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믿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재조정 하는 것, 이게 성도들의 책임이죠.

어떻게 엘리야가 돕느냐 하면, 엘리야는 두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번째,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비가 내릴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두가지 입니다. 어떻게 돕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돕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떡을 만들어서 먹고 죽으려고 하는 것인데, 엘리야가 요구합니다. "그 마지막 떡을 맨 먼저 나를 위해서 만들어라." 그러니까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한 요구 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요구 입니다. 먹고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 떡으로 나를 위하여" 이것은 엘리야를 위하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죠.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저희들로 치면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저희들이 신약에서 명백하게 아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요구합니다. "조그만한 가루, 조금남은 기름으로 나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 오라. 그리고 남는 것으로 너와 아들이 먹으라."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꿀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려고 하면 제일먼저 사람에게 드는것이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지? 마지막 남은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나면 아무것도 없잖아. 먹고 죽으려고 해도 먹을것도 없네."가 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죽는거 한끼 안먹고 죽으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서 두려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입니다.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께 나의 삶을 온전히 맏기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죽이든 살리든, 그게 어떤 모습이 되건 주님 알아서 하옵소서." 라고 맏기면 그가 놀라은 은혜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해야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제일먼저 두려워 하지 말라인데요. 이것은 여러번 말한 건데요, 다시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다른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두려운 분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내 인생을 낱낱히 아시는 하나님, 내 마음의 동기까지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자는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으니까 그와같은 백보좌 싶판대에 서지 않을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두려울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여러번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심판하는 데가 아니고 상 주는 곳입니다. 기본적인 원치기이 상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눈물을 알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영원한 것으로, 하늘에 속한 것으로 보상하시는 곳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입니다. 어째거나 그리스도인이 가장 우선순위 1번으로 놔야 하는것, 주님이 그날 뭐라고 하실 것인가? 이제 우선순위를 바꿔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가 아니고, 지금 현실적으로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가 아니고, 그날 주님 앞에서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 그날 주님이 뭐라고 하실 것인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이 음성을 들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인가? 그래서 무엇이 가장 두려운 것인가? 두려워 하지 말라,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의 평가, 가난, 질병, 이런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물론 두려운 것이죠. 그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때의 평가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와, 그리고 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때,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냉정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좁은길, 좁은문을 통해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돕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물론 두가지를 합니다. 두가가 있는데요. 저희들이 구원받는 것은 두가지 입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하나님은 두가지 쪽에서 일을 하시는 데요. 예를들면 사렙다 과부에게도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엘리야에게도 이야기 하셔서 이 두사람이 만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그런 예가 어디 있느냐면 고넬료가 구원받을 때에 그런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전에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구원을 못받습니다. 복음이 꼭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는, 베드로가 식사하기 전에 시장해서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데 하나님이 환상을 세번 보입니다. "잡아 먹으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래서 베드로를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납니다. 또 그런 경우가, 사도바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어서 집에 있는데, 하나님이 아나니야를 통해서 가서 안수해서 눈뜨게 해라.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신 목표, 이방인의 사도 이런 이야기를 아나니야에게 줍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도 환상을 보여줍니다. 아나니야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또 그런 예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다. 광야로 갔을때에 마침 에디오피아 내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디오피아 내시가 어디를 읽고 있었느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읽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빌립이 가서 그 이사야 53장부터 시작해서 주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렙다 과부를 준비시키시고, 그런데 사렙다 과부는 반드시 엘리야의 말을 통해서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 쪽에서는 이 불신자를, 하나님의 말씀하셨지만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기이한 일들 입니다.

다시 말씀을 마쳐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적용해 보고요. 첫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구원받을때만 살아있었고, 지금은 그냥 성경속에 기록된 하나님인가? 나의 삶 속에 하나님 말씀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열심이 있는가? 첫번째 질문이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 질문은, 나는 다른 사람을 돕고 있는가? 입니다. 구도자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에게 필요한 말씀을, 그것이 굉장히 잔인한 요구라고 할찌라도 마지막 먹고 죽을 떡, 그것을 나에게 가지고 오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 교회와 관련해서 이야기 해보면 이렇게 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주님이 세우라고 하신 지역교회를 세우고 있는가?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가 말씀에 나와있는 지역교회와 같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고 기도하고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 돕고 있는가? 이게 열왕기상 17장 앞 대목에서 저희들이 받을수 있는 교훈 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도와주시고 저희들이 주님앞에 기도로 이와같은 도전을 받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해서 주님앞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주님께 칭찬받는 저희들이 될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