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일요일 한봉래 형제님
< 엘리야 4. 엘리야의 도전 >
이 시간에는 제가 엘리야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열왕기상 18장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했던 장면입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왕상 18:1-2).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왕상 18:16-39).
이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임을 갈멜산에서 불로 입증하시는 유명한 내용입니다. 우선 엘리야가 만나는 사람을 보면 첫째 아합왕을 만납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또 바알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이 각각 어떤 대상에게 어떻게 도전했는가 하는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아합왕과 만나는데요. 아합왕이 누구냐 그러면, 그가 3년 반동안 엘리야가 기근을 선포 했기 때문에 엘리야를 찾아서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앞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죠. 그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서 엘리야를 샅샅히 뒤집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를 찾는 이유는 그를 잡아서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웃나라에도 엘리야를 찾고 없으면 그 나라에서 맹세하게 했습니다. 엘리야는 없다. 만약에 엘리야가 여기 있었다면 우리가 벌을 받겠다. 이렇게 하면서 엘리야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왕에게 가라고 하신거죠. 그랬을때, 엘리야의 마음을 살펴보면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는 왕입니다. 그 왕을 만나야 합니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만나야 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다른 예를 잠깐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모세가 80세에 애굽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시고 "내가 너를 애굽으로 다시 보낸다. 네가 가서 내 백성을 건져내라." 이와 같은 임무를 맡았을때 모세가 바로에게 가야 합니다. 바로가 누구냐 그러면, 그가 40년 전에 도망갔던 바로왕 입니다. 40년 전에 그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듣고 출애굽을 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도망갔던 그 바로왕에게 모세가 다시 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일이 또 있었던 경우가 신약으로 오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왕들 앞에서 간증을 해야 합니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간증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 그는 그 당시에 잔인한 왕이었던 네로 앞에 서서, 그가 로마로 압송이 되어서 그 당시 황제인 네로 앞에서 그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왕 앞에 서야 합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죠. 저희들도 왕은 아니지만 저희들이 두려워하거나 저희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직장 상사 앞에서, 면접을 본다든지, 여러가지 세상에 있어서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 앞에 내가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 마음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엘리야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합왕을 만나러 갑니다. 가는 이유가 뭐냐?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느냐? 저희들이 이제 계속 확인하는 거죠. 나의 안전은 어디에 있느냐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으면 안전해 보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가 잘 되니까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거기게 곡식을 모아서 집어놓고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평안하라. 안심하라. 이제 먹을 것이 잔뜩 놓였으니 이제 내가 내가 안전하고 평안하게 내 삶을 즐길 수 있겠다." 라고 싶을때, 누가복음 12장에 나와 있죠. 하나님이 그 영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너를 취할 터이니 너의 쌓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가진 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여러가지 근거들에 있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왕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은, 그냥 무모하게 가면 안되는 거죠. 하나님이 그를 보냈기 때문에, 나를 보낸 하나님이 나의 안전을 책임질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가 담대하게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항상, 이런 면에서 내가 나의 생명을, 나의 삶의 평안을 어디서 구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것에서, 세상에서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 이런 면을 저희들이 자문해 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아합왕과 엘리야가 만났습니다. 만나니까 아합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여" 이렇게 하는 거죠. 왜 이스라엘을 괴롭혔냐고 말하느냐면 엘리야가 "내 말이 없으면 이스라엘 땅에 우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말한 후부터 이 땅에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당신이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게 해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당신이 고통의 원인 제공자다." 이렇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야가 다시 교정하죠.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꼭 엘리야의 말 때문에 기근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엘리야가 왜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아합왕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다시 말하죠.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내가 아니고 당신과 당신의 집이, 당신의 집은 왕가죠. 북이스라엘의 왕가가 오므리 왕가가, 오므리의 조속, 아합이 그 아들이죠. "당신의 가문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렇게 교정을 하는데요. 이 대목에서 잠깐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비난을 받는데요. 비난 받는 것은 사람들이 죄인이 된 이후로 사람들의 습성입니다. 첫번째로 자기가 잘못해놓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그 예를 처음에 보면 창세기 3장에 선악과를 먹을 후에 사람들이 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어떻게 대답하죠? "하와 때문입니다. 하와가 줘서 먹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그가 먹은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됬다는 비난을 받을 때에 그 핑계를 하와에게 대는 것입니다. 하와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 왜 먹었느냐?" "제가 속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가야지요. 그런데 뭐라고 말하지요? "뱀 때문입니다." 전부 하와나 뱀에게 핑계를 대고 있지만 다시 말하면 전부 하나님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하와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와를 비난 하는 것은 하와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게 됩니다. 하와의 경우에는 분명하죠. 뱀 때문이다. 뱀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선택한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를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의 삶에서도 만만찮게 나타납니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했는데도,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고쳐내야 하는 일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환경에게 자꾸 돌림으로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합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온 것은,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그가 이세벨과 결혼하여 이세벨이 가지고 온 우상 바알을 이스라엘에 도입시키고, 사마리아 이스라엘의 수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잘못을 엘리야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인류의 역사에,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이 박혀 있느냐면 고라 자손이 있죠. 유명한 이야기죠.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고라 자손을 따로 모이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이들이 재판해 달라고 합니다. 그랬을 떄 하나님꼐써 땅을 열고 고라 자손을 전부 죽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권위에, 그러니까 고라 자손은 레위 족속이죠. 그래서 섬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레위 족속은 뭣보다 낮냐면, 아론이 제사장이고 레위 족속들이 그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주신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제사장의 직분을 구합니다. 민수기를 보시면 그와 같은 일이 나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있는 일인데요. 그러고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어떻게 비난하냐면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 동족을 죽였다." 이렇게 비난합니다. 고라 자손이 자신들이 선택한 잘못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는데 이게 고라 자손의 죄 때문이 아니고 모세 당신이 죽인 것이다. 이렇게 비난합니다. 이것이 민수기에 있었던 일이죠. 그래서 항상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모임에서도 그렇지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다 우리가 다, 각각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말씀을 이해하거나 실행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회개하거나 고쳐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항상 핑계를 댑니다. 누구 때문이다. 누가 이런 일을 해가지고 이런 슬픈 일이 우리 가운데 생겼다. 이래가지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자신이, 우리가 다 온전치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각각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과 기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했던 것을 자책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항상 꼭 아합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느냐면 압살롬이 반역을 합니다. 그것은 물론 다윗의 범죄 때문입니다. 밧세바와의 범죄 때문에 아들 네명이 죽지요. 그 중에서 압살롬이 반역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도망갑니다. 그렇게 다윗이 도망가고 있을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합니다. 사울왕이 첫번째 왕가였고 두번째가 다윗이 왕이 된 거죠. 다윗은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세번이나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시므이가 이렇게 공격합니다. "네가 오늘날 네 아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고 네가 왕궁을 떠나 도망가는 것은 네가 사울 집안을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라고 시므이가 저주합니다. 그때 옆에 있던 군인들이, 옆에 있던 다윗의 부하가, 저 사람이 감히 왕의 신세가 이렇게 떨어졌다고, 과거에는 말로 못하던 것이, 이제 다윗의 신세가 이렇게 되니까 함부로 말하는 거죠 "제가 가서 저 사람을 죽여서 그 입을 막아버리겠습니다." 다윗이 그때 참습니다. "나눠라. 저 사람이 나를 저렇게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 사람의 입을 빌어서 나를 책망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고 시므이를 놔둡니다.
이 대목에서 저희들이 역으로 적용해 보면, 저희들은 이렇게 하죠. 저희들의 가정에서는 자매님들이 돕는 배필입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형제님들이 교제하고 나면, 그 교제의 내용이라든지 태도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매님들이 잘 듣고 충고하는 것이죠. 이번에는 말씀 시간이 어땠다든지, 내용이 어땠다든지, 마찬가지죠. 예배 시간에 형제님들이 감사드리는 일에 대해서 자매님들이 집에 가서 이번 감사에 대해서 참 감사한 일이 지만 이런 면이 들렸다. 교제하고 형제들이 그것을 잘 듣고 바꾸고 하죠. 그래서 돕는 배필입니다. 영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죠. 그렇게 자매가 뭐에 대해서 말을 하면 이것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안받는 형제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 받는 거죠. 그리고 조금 더 확대하면 모임 안에서 저희들이 모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지역 모임의 비유 중의 하나가 몸입니다. 몸인 교회와는 다른데요. 몸이라는 비유를 써서 지역모임을 설명하는데요. 누구는 입이고 누구는 손이고 누구는 발이죠. 그래서 지역 모임 안에서 어떤 지체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은사를 사용했을때, 그것을 다른 지체들이 보고 충고합니다. "형제님 섬기는 것 너무 감사한데, 이렇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죠. 이것을 안받으면 문제가 되는 거죠. 돕는 배필, 다른 지체들의 자기에 대한 어떤 충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서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통로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내 생각은 이렇다, 하고 가면 이게 어려워 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충고를, 혹은 같은 지역모임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지체들의 충고를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다윗처럼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그때 그 비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 모른다. 이게 다윗이 한 행동입니다. 이게 아합과 얼마나 대조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조금 마음이 아플찌라도 그와 같은 소리를 들을 때에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고 온전하게 만들고, 주님을 닳아가게 만드려고 하는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면 그는 다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는 더 이상 변화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합왕과 관련된, 그리고 또 하나 보면 이런 말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비난하고 핍박하고 미워하거든 너희는 기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사용한 모든 선지자들이 이렇게 비난 받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비난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치고 비난 받지 않은 사람이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를 비난한다면, 물론 저희들의 잘못으로 비난을 받으면 안되겠지요. 그것까지 포함하면 안되지만 내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데, 주님의 뜻을 순종하고 있는데 비난받으면 기뻐하라. 그 비난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이런 예가 생각이 나는데요. 저희들이 모임 초기에 항상 이단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으로 되는 첫번째 이유가 목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목사 없는 교회가 어디있습니까, 세상에? 신학 대학을 나오지 않고 설교를 한다는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믿지 않는 분들이 볼때에, 그래서 당연히 이단시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뭐가 없었느냐 하면, 교단이 없습니다. 장로교나, 뭐가 있어야 하죠. 장로교든지 침례교든지, 있어야 하는데 교단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시 했습니다. 그랬을때, 세상이 알지 못해서, 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섬기기 때문에 목사를 인정하지 않고 말씀에 교파가 없기 때문에 교단을 만들지 않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바울에게" 이것 다 주님께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볼로에게" 다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난을 받을 때에, 이 비난을 영광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 비난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어떻게든지 이와 같은 비난을 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하는게 우리도 신학교 비슷한 것을 만들고, 거기가서 졸업장을 받고, 우리도 형제 교단이라고 하는, 우리도 형제교회다. 이런 식의 교단을 만들고, 우리도 전국에 이백몇개나 교회가 있고, 이렇게 대응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라고 비난 했을때, 그 비난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첫번째 이유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주님께서 피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칙은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죄 없는 주님의 피가 흘려짐으로 그것을 믿는 자들의 죄가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첫번째 이유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베드로전서 2장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본받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걸으신 그 길이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우리가 아직도 세상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주님을 배척한 세상 가운데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주님을 따라갈때에 저희들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두번째 이유가 뭐냐? 믿는 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본은 보이신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이 그런 면에서 엘리야와 아합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하는 논쟁을 했을때에 받을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으로 가기 전에 아합왕을 만납니다. 하나 더 말씀 드리면 아합왕을 만나서 엘리야가 제안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여" 라고 했는데 엘리야가 "당신이 괴롭힌거다." 이렇게 하고 "갈멜산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모아라." 이렇게 제안합니다. 아합왕은 아마도 엘리야를, 드디어 삼년동안 잡으려고 추적해 왔는데 못 잡았던 엘리야가 제발로 걸어서 자기 앞에 와 있습니다. 죽이고 싶죠.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안합니다. "갈멜산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으십시요."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성도님들이 아합왕과 엘리야 사이의 대화를 보시면, 원래는 누가 높죠? 왕이 높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보고 있는 이 성경도 열왕기상인데요. 이 열왕기라고 하는 것은 왕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그 이후에 있었던 여러 왕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왕기를 기록하다가 선지자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선지자의 대표적인 사람인데요. 선지자가, 엘리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의 초점은 왕이 아니고 선지자에게 옮겨갑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것은 왕 아닙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아합왕과 엘리야가 이야기하면 왕이 높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 엘리야가 높습니다. 이제부터 엘리야가 말하면 왕이 듣습니다. "올라가십시요." 그 다음에 나중에 "내려가십시요." 전부 엘리야가 주도합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이, 주권자들이 바꿔지는 유명한 대목입니다. 하여간, 아합왕은 엘리야를 죽이고 싶었을 겁니다. 죽일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희들은 잠언의 그런 구절을, 왕의 마음은, 왕은 사람 중에서 강 실력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 왕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왕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 결국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보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엘리야가 말하니까 아합이 좋다고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받아들인데는 바알 선지자가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도 많고, 그와 같은 계산이 깔려 있겠지만 어쨋거나 하나님께서 아합왕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엘리야를 죽이지 않고,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엘리야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입니다. 갈멜산에 오는데요. 아세라 선지자들은 안오고 바알 선지자만 옵니다.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명이 왔고요. 그 다음에 소식을 전했으니 백성들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합왕이 있고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렇게 있는데 이번에는 엘리야가 거기 온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가운데에 머뭇머뭇 하겠느냐? 여기서 정하자.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라가라. 그리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순종하자." 이렇게 제안합니다.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 겠느냐?" 이 대목은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알만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은 뭐냐면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엘리야가 반대합니다.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 바알을 섬기면 하나님 못섬긴다. 하나님 섬기면 바알을 못섬긴다. 선택해야 한다. 이것을 엘리야가 강요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런 대목 앞에서 저희들이 다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알이라는 우상을 따르지는 않지만, 구약은 간단하죠. 바알신이 있고 그런데요. 지금 신약으로 와서는 바알이, 우상이라고 하는것이 굉장히 교묘한 형태로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우상이 뭐냐, 그러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아끼는 것입니다. 내 자녀일수도 있고 내 부모님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있고 내 아내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하나님보다 더, 당연히 자녀를 사랑해야죠. 사랑하고 가르치고 애정을 기울여야 하죠. 그런데 이것이 잘못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성실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간증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그것이 우상이 될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모임에서 학생들하고 성경공부를 할때, 요즘은 마포 모임은 못 모이니까 그런 것을 하지 못합니다만, 성경 공부를 할때, 어떤 학생에게 물어봅니다. "네가 복음을 다 들었으니까, 네가 죄인인 것과 그 죄로 인해서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대신 그 심판을 십자가에서 받으셨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자에게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수 있고"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 다 아는데 왜 안믿느냐? 다 전했는데," 그랬을 때 어떤 학생이 용감하게 정직하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 마음대로 못살거 같아서 못믿겠다. 굉장히 정직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초등학교 꼬마가 뭐 해보고 싶은게, 어른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자기 보기에는 그건 굉장한 겁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입니다. 게임일수도 있고 친구들하고 노는 것일수도 있고 그런게 있는 거죠. 사람들이 구원받고자 합니다. 어떤 구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구원받으려고 하세요. 그런데 뭘 안하려고 하느냐, 죄를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명백한 죄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오지 않는 자는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도하시는 분들도,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뭐냐?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나쁜 습관들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둘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만 택해야 한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알이 하나님 같으면 바알을 섬겨라.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요구조건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래서 하나님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참 좋습니다. 우상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와 거래합니다. 우상은 전부 내가 원하지만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대신 이루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전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왜 만들었느냐? 내가 할수 없는 것을 그 신이 대신 해준다고 믿고 만든 신들입니다. 그래서 우상 섬기기는 아주 좋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니까요. 대신 내가 우상에게 뭔가를 갖다 주는 겁니다. 우상이 원하는 것을 갖다주고 대신 그토록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독일 소설에 그런게 있습니다. 파우스트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날 사단을 만납니다. 거래합니다. 어떻게 거래하느냐면, 사단이 이렇게 제안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겠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죽을때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간다." 파우스트가 그 거래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삽니다. 젊고 유능하고 능력있고 이런 삶을 삽니다. 대신 죽을 때 그는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제안에 다 동의 합니다. 다 사인하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저희들이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 하나님을 정말 섬긴다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구원받은 성도다, 해놓고 명백하게 기록된 말씀을 어기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에게 엘리야가 하는 말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이 산에서 동일하게 송아지 두마리를 가져와서 각각 한마리씩 가져갑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를 죽여서 각을 뜹니다.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를 태울 수 있는 나무를 놓고 거기서 불을 피웁니다. 그러면 번제가 되는거죠. 그런데 불은 신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바알은 바알신에게서, 그리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야 합니다. 이 제안에 동의합니다. 똑같이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송아지 각을 뜨고, 위에서, 불을 내리는 그 신이 참 하나님으로 하자. 동의합니다. 왜 동의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불로 나타나는 대목들이 많이 있죠. 예를들면 다윗, 솔로몬, 아브라함, 전부 불로 제물에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역사적으로 있은 일이니까 문제가 없고요. 바알은 어떻게 했느냐? 사단이 그렇게 한 적이 있느냐 하면, 사단이 하는 것이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냥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사단도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내린 경험이 있고 사던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바알신이 무슨 신이냐면, 풍요의 신인데요. 이게 불의 신입니다. 태양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을 통제하는 것은 바알이다. 바알의 전공 영역입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가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바알이 불의 신인데 불을 내리는 것이 마땅한 거죠.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거죠. 그 다음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잠깐 보면 가짜는, 종교의 특징입니다. 사단이 하는 것은 항상 모방합니다. 똑같습니다. 송아지가 있고 나무가 있고 불이 내립니다. 내릴 수 있다고 본 거죠. 사단도 하나님의 일을 항상 모방합니다.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신약에서는 이것이 가라집니다. 가라지를 심는 것입니다. 진짜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들에게도 송아지가 있고 그들에게도 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불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 하나님입니다. 모든게 있습니다. 종교는 모든 게 있는데 뭐가 없느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특징을 보면 그들은 어떤 의식을 행합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막으신 거죠. 그러니까 그들이 뭘 하느냐면 "그들이 뛰놀더라" 라고 하는데요, 이것을 약간 다른 말로 바꾸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걸로는 '워십 댄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춤이 있고요. 그 다음에 그들이 큰 소리를 부릅니다. 이것이 뭐나면 음악입니다. 악기를 사용해서, 예를 들면 락 음악을 사용해서 굉장히 사람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춤이 있고 음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경에는 "진언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방언입니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입니다. 예언하는 말들로, 영어로는 prophesied로 되어 있습니다. 늘 종교가 가지고 있는게, 아주 아름다운 음악,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음악,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춤, 동작들입니다. 그리고 방언, 이와 같은 것들이 가짜 종교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전부 영적인 것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음악이 아니라 내적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하나님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주님 앞에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을 전부 가짜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엘리야는 아주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엘리야가 하는 것만 잠깐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합니다. "가까이 오라" 이렇게 합니다.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종교는 속임수를 쓰지 않습니다. 비밀이 없습니다. 누구나 명백하게 와서 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와서 다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온다고 하는 두번째 특징은 참 복음은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계급이 없습니다. 그쪽은 바알 선지지와 바알을 섬기는 신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계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말합니다. "가까이 오라." 계급이 없습니다. 동일한 형제들입니다. 다만 은사를 따라 섬길뿐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는 단을 쌓을때 돌을 열두돌을 쓰는데요. 부흥은 항상 원래대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적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했던 그 처음부터 들은 복음, 사도행전 2장부터 했었던 그 교회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다시 돌리는 거고요. 그리고 세번째는 도랑을 파는 것입니다. 도랑을 파는 것은 물을 부어버린 건데요. 다시 말해서 제물과 나무과 돌로 된 단에도 전부 물을 세번이나 부어버립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수 없다. 사람은 물에 잔뜩 젖은 이 제물을 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태우시면 명백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는데요. 사람으로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수 있느니라. 이 원리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물에 젖어 있는, 이게 불이 탈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모든 것들을 태워버립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뭐냐하면,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잘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것을 드러내기 원하는 기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인 것을 드러내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킬수 있다. 사람은 얼마나 멀리 갔어도 항상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 이 세가지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기도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보면 뭐가 생각이 나느냐면 주기도문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는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여기 엘리야가 하고 있는 기도가 동일한 내용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다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은 왕 앞에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따라, 주님이 원하는 목표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삶을 사는가? 왕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 세상에서 믿기 때문에 내 잘못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경으로 비난 받을때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면서 실질적인 삶에서 그것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가짜들, 모방하는 것들이 아니고 저희들이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참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고 있는가? 또 이 섬김과 봉사와 이 모든 것들이 정말로 주님께서 능력을 베푸시고 또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그래서 저희들은 낮아지는 그와 같은 섬김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엘리야의 삶을 통해서 점검해보고 주님께서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은혜 가운데 성경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모임이 계속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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