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엘리야

< 엘리야 2.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 >

박이레 2021. 7. 20. 23:36

< 엘리야 2.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 >  한봉래 형제님

 

 

제가 방문할때마다 엘리야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 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왕상 17:17-24).

 

다시 잠깐만 지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다섯번째 왕입니다. 아합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커다란 죄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드리지 않고 바알을 예배드리도록 바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게 한거죠. 이것이 아합이 범한 커다란 죄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징계하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왕이 그렇게 하니까, 다 왕을 따라서 바알을 숭배합니다. 그런데 이때 바알을 숭배하지 않는사람,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발견하시고 그를 사용하셔서 그 시대의 잘못된 우상 숭배에 대해서 경고하고 도전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가르치는 내용이 엘리야 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왜 사용하시느냐 하면, 엘리야의 특징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그는, 이와같은 일이 있을때,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을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가 성경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신명기에 나와 있죠. "만약에 너희들이 우상을 숭배하면 내가 그 땅에서 비를 내리지 않는 기근을 주겠다. 기근으로 징계하겠다. 그래서 너희를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신명기 말씀을 그가 개인적으로 읽고, "하나님 이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그가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개인적으로 기도한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공적인 사역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래서 그가 아합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포합니다. "이제 내 말이 없으면 기근이 이 땅에 있을 것입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요.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셨느냐면, 그렇게 선포한 후에 그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에 숨게하셨습니다.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엘리야로 하여금 세상과 분뢰되게 하십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홀로 하나님과 지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을때, 이 우상숭배를 하는 사회, 그들의 삶, 그들의 생각, 그들의 풍조에서 떨어져, 분리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게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를 있게하신 하나님의 의도 입니다. 세상을 책망한 사람은, 세상의 죄를 지적한 사람은, 그 자신의 삶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자기는 잘못됬다고 지적하고, 그리고 또 똑같이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릿 시냇가로 보내는 데요.

그 다음에 두번째는 사렙다 과부의 집으로 보냈는데요. 이 부분에서는 다시 이런 관점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것인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당대를 봤을때, 그 당대 이스라엘에, 이것이 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의 설명입니다. 그 당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을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그와같은 사람이 한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말하면, 내 말을 듣고 순종할 것이다라고 생각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디 있었느냐? 이방 땅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없고, 이방에, 사렙다라고 하는 지역에, 그것이 시돈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방입니다. 그 이방 땅에 살고 있는 가난한 과부에게서 하나님은 믿음의 싹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그리로 보냅니다.

믿음이 뭐냐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데요. 믿음이 뭐냐고 하면, 그 과부는 어떤 형편이었느냐면, 기근이 심하고 하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비가 내리지 않고 곡식이 자라지 못하죠. 곡식이 없으니까, 당연히 먹을것이 없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먹을게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드는데, 밀가루도 마지막 밀가루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빵을 한조각 만들수 있는 양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기름도 조금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요. 아들과 나하고 이것 가지고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 그와같은 상황입니다. 이와같이 상황이 굉장히 안좋은 상황인데, 엘리야가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 먹고 죽으려고 만든, 이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떡을 만들되,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와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 떡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그리고 나중에 네가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 그와같은 믿음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쪽에서는 뭘 선택하는 거냐면, 눈에 보이는, 내 손에 잡힌 음식을 내려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확실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음식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먹을수 있습니다. 이거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떡을 나한테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져가면 자기는 못먹는 거죠. 먹고 죽으려고 하는 마지막 음식, 못먹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려버렸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기근 내내 하나님이 너희를 먹일 것이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항상 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붇들 것이냐, 사람의 이성과 사람의 감각으로 보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붇들 것이냐, 사람의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약속을 믿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현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려고 할 것이냐, 이 세상은 잠시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또 천국과 지옥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용서하셨다고 하는 이 말씀을 붇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갈것이냐, 지금 당장 내 앞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돈도 벌어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이 현실을 붇들 것이냐, 하는 이 선택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렙다 과부가 놀랍게도 마지막 먹을 음식을 내놓고, 엘리야에게 줘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제 하나님께서 기근 내내 너와 그 아들을 먹이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붇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기근 내내 그들에게 통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엘리야의 삶의 쭉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은, 그렇게 바깥에서는 기근이고 난리죠. 그런데 이 가정은, 믿음의 가정은, 이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밀가루가 오늘 먹을만큼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어제 써버렸는데, 사람이 체워넣지 않았는데, 채워놓을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떡을 만들수 있는 밀가루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알맞은 기름도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늘 씁니다. 그러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면, 다시 밀가루가 채워져 있고, 일용할 양식, 오늘 하루 먹을것이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실현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삽니다. 이게 사렙다 과부의 집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와 엘리야와 그리고 아들 세명이 살았던 모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있으니까, 날마다 주님 기적을 경험하고, 주님 찬양하고 주님 의지하고 그렇게 사니까, 이 삶이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고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가정에도 불행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들이 갑자기 병이 걸렸습니다. 낫겠지 그랬는데 병이 심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손쓸 사이도 없이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와같은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돌고고 계신 가운데, 왜 병과 죽음이 찾아왔을까요? 그리고 다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우리들의 삶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건이 일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지, 이것을 다시 하나님께 가지고 올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할지, 아니면 인간적인 세상적인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으로 처리할 것인지, 믿음으로 이 사건을 대할 것인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믿는자를 반드시 시험합니다. 누가 믿는다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믿음이 실제 삶에서 진실되게 나타날 것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상황을 딱 주십니다. 그리고 정말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과부의 경우에 아들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홀로 키우는 아들, 자기의 소망이고 자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때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렙다 과부는 이 시험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하냐면, 이게 모든 사람이 하는 건데요. 첫번째,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불행한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합니다.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여기에 찾아오셨습니까? 굉장히 나쁜 말이죠. 엘리야 때문에 이제까지 죽지 않고 산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마지막 먹고 죽겠다고 한날,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매일매일 기적을 경험하며, 그런데 이 일이 생기면, 불행한 일이 생기면 엘리야를 비난합니다. 이게 인류의 역사에서 매일 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일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불행한 일만 생기면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과부가 그렇게 합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여기를 찾아오셨습니까?"  그 다음에 두번째 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할뿐만 아니라 자책합니다. 자기를 비난합니다. 그 내용이 뭔지 성경에 안나와 있습니다만, 이 아들을 낳기 위해서, 이 아들과 연관되서, 이 과부의 마음속에 뭔가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 아들을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남에게 말할수 없는, 뭔가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기고, 노출시키지 않고, 그냥 잘 지내오기를 바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입니다. 그때, 이것 때문에 그랬나, 내가 과거에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내 아들을 죽이셨나, 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늘 하는 겁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자기 잘못을 찾아내거나, 그래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돌봄을 경험하는 가운데도 벌어지고 있는 실패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이 시험을 통과 합니다. 갑자기 자기가 살던 집에서 아들이 죽어버리고 그리고 자기를 접대해주던 과부가 자기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때 놀라운 것은 엘리야가 함께 비난하거나, 이 일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자기를 방어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이 과부를 이해합니다. 그의 마음을 동정합니다. 그래서 그가 온유하게 이 일을 처리해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엘리야에게 지금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같은 인격적인 연단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성숙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비난할때, 이유없이 비난할때, 잘못하지 않았는데 책임을 나에게 물을때, 그때 "아니, 내가 언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과부는 이렇게 아들이 죽자, 그 죽은 아들을 자기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품은 죽은 사람을 살려낼수 없는 품입니다. 그저 안타까움만 표현되고 있는 그녀의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달라." 그래서 아이를 받아서 가지고 갑니다.

잠깐 한가지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서 교제를 하게 하신 후에, 가정에서  그를 연단시켜 가십니다. 가정 생활이 참 중요합니다. 밖에서는 잘 하는데, 집에서는 허물이 없잖아요. 다 아내고, 식구들이고 합니다. 집에서는 화도 내고, 함부로 말도하고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연단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길러 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냐면, 엘리야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건이 있을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실까?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늘 상황이 벌어지면 하나님이 왜 이상황을 허락하셨는가? 내가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시는가, 라고 했을때,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엘리야는 자기 은사가 뭐냐고 하면, 자기가 왜 쓰임받기 시작 했냐면,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자, 말씀을 살피고, 그와같은 일이 있을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찾아내고, "하나님이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늘 잘하고 늘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던 그 은사대로 나는 이 일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냐면, 다락으로 간다고 했는데, 다락은 자기가 살던 방입니다. 아마 구조에 대해서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락이라고 했으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옥탑방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붕이 평평하고요. 그래서 지붕에 다시 방을 하나 만든 것입니다. 우리로 하면 옥탑방이고, 영어로 하면 펜트 하우스입니다. 요즘에 많이 tv에 나오는 펜트 하우스입니다. 맨 윗층, 맨위에 있는 방입니다. 그리고 아마 집에 들어가는 입구가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부와 아이가 살고, 엘리야는 입구가 다릅니다. 집 바깥에서  직접 옥상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삽니다. 이렇게 해야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고, 엘리야가 혼자있기 때문에 이것이 여러가지 덕이 안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다락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어디다 놓느냐 하면, 침상입니다. 침상은 뭐하는 곳이냐, 저희들이 가끔 영화같은 것을 보면, 침대에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전에 어떻게 하느냐? 무릎을 꿇고, 침대 위에 성경이나 올려놓고,  그리고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침상이 뭐하는 곳이냐? 기도했던 곳입니다. 매일매일 기도했던 사람, 기도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내가 말씀대로 기도 했더니, 기근을 내리시고 이제 내가 기도하면 다시 비를 내리실 하나님, 그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나는 어떤 일이 생길때마다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엘리야의 자기이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항상 그가 기도했었던, 늘 친밀하게 골방에서 기도했던 그리 데려가서  그 침대에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입니다. 그가 죽은 아이 위에 자기 몸을 포개는 일을 세번 합니다. 이건 나중에 보면 신약성경에 오면 유두고가, 창문에 있다가 떨어져서 죽어버렸지요. 삼층이니까 떨어져서 충격으로 죽었지요. 사도바울이 살려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똑같이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인데요. 첫번째 해석 해보겠습니다. 자기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 죽은 아이와 똑같습니다. 자기는 이 아이를 살려낼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제가 어떻게 살립니까? 하나님 저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능한 인간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능력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세번 했다고 하는 것은 3이라는 숫자는 부활과도 관련된 숫자이지만, 우선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하죠? 응답 받을때까지, 이루어 질때까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보면 뭘 기도하냐면 첫번째 보면, "하나님, 왜 내가 기거하는 이 과부의 집에 이와같은 재앙을 내리셨나이까." 라고 말하는데요. 20절에 나와있는 이 부분은 과부가 엘리야에게 했던 비난입니다. 그 비난을 엘리야가 다시한번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기근이 끝날때까지 엘리야를 접대하도록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서 그 집에 재앙을 내리거나, 또 그녀가 비록, 과거에 잘못한 것이 있다 할찌라도 그것을 다시 기억하셔서 처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요."

이 대목은 항상 저희들이 보는대로  부활을 기도한 최초의 기도입니다. 부활에 대한 최초의 기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사람을 놓고, "하나님, 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십시요." 라고 한 첫번째 기도입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어떻게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할수 있었을까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이 역사상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최초로, 죽은 아이를 놓고 하나님 살려 주십시요. 이게 어떻게 나왔을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면요, 저희들이 성경에서 나아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 집에, 나아만도 이방인이죠. 나아만 장군 집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계집아이가 있었죠. 나아만이 놀라운 사람이지만, 전쟁에서 이긴 영웅이지만 문둥병에 걸려 있습니다. 문둥병은, 그리고 당시 의술로는 치유 불가능한 병입니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가, 이 작은 여자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사에게 가면 병을 고칠수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병은 아무도 못고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앞에 가면 나을수 있다.' 또 성경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거절했어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간에 그대로 해 주세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번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주님께서 뭔가 이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고, 해결해 주실것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살려내실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데 이게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고, 산을 바다로 옮기라 하니까, 아무 산이나 대둔산 저리 가라,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엘리야는 어떤 근거로 기도 했을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렙다 과부의 집에 가면, 내가 명해서 사렙다 과부로 하여금, 기근이 끝날때까지 너를 먹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기근이  끝나고 아합 왕에게 갈멜로 가는거죠. 이게 갈멜로 가기전 마지막 일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끝날때까지 이 집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 있는데 이집 아들이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집에 계속 있을수 있겠습니까? 아들을 잃어버린 슬픈 어머니에게서 계속적으로 접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라고 그는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기근이 끝날때까지 제가 여기 있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요." 라고 그가 담대하게 기도합니다. 그래서 항상 엘리야는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번, 하나님은 시험하십니다. 그 사렙다 과부의 집에 아들이 죽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이 사건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인지를 보고 계십니다. 혹은,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고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렙다 과부는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못미치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대로 이 죽은 아이를 놓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아이가 살아나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제 제가 인류 최초로 하나님 앞에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게 엘리야에게 일어난 놀라운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행동을, 이와같은 믿음의 선택을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잠깐 더 보시면요, 하나님께서 사렙다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서, 그곳에서 기근이 끝날때까지 거하도록 하신 의도를 다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면요, 바알신은, 저희들에게는 애매한 부분인데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알신이라고 하는 신은, 뭘 관장하는 신이냐면, 이 신이 비를 내리는 신입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고 있는데, 하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해버렸습니다. 이우가 뭐냐? 바알이 진짜 신이 아니다. 바알은 가짜다. 비를 주관하는 분은 바알이 아니고 나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를 주관하고요. 그리고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때, 비가 내려야 곡식이 잘 자랍니다. 그래서 음식, 곡식과 이런 것들을 관장하는 신이 바알신입니다. 그래서 바알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산다. 식물들이 자라고 우리가 추수를 해서 먹고 산다. 이 덕이 다 바알 덕분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온통 그렇게 가고 있는 것이죠. 그 다음에 나중에 보면,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신이 진짜 신이라고 하자 할때에, 바알 선지자들이 오케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바알신에게 불을 내리도록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바알이 두번째로 관장하는 것이 불입니다. 그래서 비를 관장하고, 불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관장하는 것이 뭐냐면, 비가 내려서 그걸로 많은 곡식들이 자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풍요롭게 먹고, 그 다음에 이것이 뭐와 연관되냐면 자녀들을 출산하는 신입니다. 그래서 바알을 숭배하면 풍성한 추수를 얻을수 있고, 추수가 풍성해 지니까 자녀들도 많이 잘 나아서 키울수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 곡식이라고 하는 것은 비만 와서는 안됩니다. 곡식은 또 한번 뜨거운 태양으로 잘 익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알신이 하는것입니다. 비, 그 다음에 태양, 그리고 출산, 이런 것들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다 공격합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자에게 비가 안내립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에서 하늘에서 불이 못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그 땅의 자녀를 죽입니다. 자녀들이 잘 자라고, 많이 자라고 하는것이 바알이 해준다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뭐라고 약속을 해도 그것은 다 거짓이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을 주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뿐이다. 이게 지금 엘리야 사건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결인 것입니다. 누가 신이냐?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사렙다라고 하는 지역은 바알신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있는 지독하게 가난한 과부를 먹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뭐죠? 바알은 자기 백성 못먹인다 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님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방땅,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까지 먹인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이 선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에 있는 가난한 과부도 기적으로 먹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자기 백성을 얼마나 풍성하게 먹이시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세지인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좋은 것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내 능력으로, 내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이죠.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좋은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순종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게 지금 엘리야 사건에서 저희들이 배울수 있는 교훈들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다른 교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는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과부가 말했는데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여러번 이야기 합니다.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시는 제사드릴 것이 없는, 다시는 죄를 위하여 어떤것도 할 필요가 없는 십자가의 완전한 용서입니다. 그래서 이 사렙다 과부의 잘못된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역으로 십자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리의 죄를 낱낱히 기억하시고, 언젠가 우리의 삶에서 그것에 대해서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상들이 그렇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 잘못 때문에 어떤 처벌을 받게 하고, 그래서 항상 죄의식 속에서 살고, 항상 두려움 속에 살게 만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옮기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께 옮기시고 처벌하셨습니다. 우리를 처벌한게 아니고 예수님을 처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는 두번 다시 죄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때문에 그것이 생각나고 그것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나의 양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개인적인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생각을 조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렙다 과부집에 갑자기 아이가 죽은 사건이 일어난 교훈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가정생활을 통해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미묘한 감정들이 있고, 서로 미묘하게 섞여져 있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아이가 죽어버리고, 그리고 과부가 갑자기 자기를 비난했을때, 온유하게 자기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께 위대하게 기도했던 사람, 그가 기도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매일 기적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매일 아침마다 밀가루가 채워지고, 아침마다 기름이 채워지는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말씀, 이 두가지를 근거로 그가 위대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요." 그리고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말할찌라도 그것을 다 듣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약속에 근거한 기도를 하늘에서 이루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이 엘리야의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들도 엘리야처럼,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을 알아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에 맞게 행동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희들이 될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비록, 불행한 사건이라 할찌라도 그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저희들 가운데 계속 있기를 주님앞에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