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 엘리야 5. 엘리야의 실패 >
이 시간에는 제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대로 열왕기상, 엘리야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상 19장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 19:1-8).
이제까지 엘리야의 이야기 가운데 굉장히 이상한 대목입니다. 이제까지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엘리야가 갑자기 변화됩니다. 그래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대목을 읽을때,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수 있는가?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은 무엇일까? 이 대목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시 보면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대목을 핵심 단어로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4절에 보시면, 하나님께 "넉넉하오니" 첫번째 발언입니다. '넉넉하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더이상 못하겠습니다, 하는 뜻이죠. 이제까지 주님 일을 감당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저를 죽여주십시요',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세번째, "저는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이 세가지 발런을 합니다. 이 발언이 왜 나왔는가?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가, 대해주시는가 하는 두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넉넉하오니"라는 말은, 엘리야가 이제까지 주님 말씀을 따라 쭉,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잠깐 회고해 보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느냐면, 아합왕 시절에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바알을 숭배하던 지역의 여자입니다. 시집을 와서 나라를 완전히 바알숭배지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다음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온 국민이 바알을 섬기도록 그렇게 나라를 완전히 타락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신명기에 만약 너희들이 우상숭배를 하면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내리겠다.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걸 기도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옵소서. 지금 저희들이 우상을 숭배하니 이들을 징계하셔서 그 고통을 알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가뭄을 내려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랬을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셔서 "네가 왕궁에 가서 말해라." 그래서 그가 아합 왕궁에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숨어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입니다. 가뭄이 징계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선지자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없습니다. 이게 기근입니다. 그래서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합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렙다,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내기를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신이 참 하나님으로 하자,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이 아무리 요란하게 해도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주옵소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제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입증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을때,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온 백성들이 다 모인거죠.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바알 선지자를 체포해라. 도망가지 못하게 해라." 그래서 백성들이 사백명되는 바알 선지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합니다. 엘리야가 이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사백명을 전부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외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면, 아합이 엘리야의 말을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식사를 하십시요."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오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합니다. "내려가세요." 그랬더니 아합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아합왕은 엘리야의 명령을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자, 엘리야의 마음 속에는 이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겠구나. 이제 회개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백성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엘리야의 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기대가 무참히 깨집니다. 그래서 그가 "이제 넉넉합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주님 일 못하겠습니다." 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주님 일이 자기 생각과 달리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 일이 내 생각과 달라질때, 특별히 내 생각과 달리 실패로 보일때,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 동안 애써서 했는데, 그 동안 많은 것을 했는데, 그릿 시냇가에 숨고, 사렙다 과부에게도 숨고, 드디어 삼년 반만에 갈멜산에서 일이 일어나나보다 했는데 자기 생각과 달리 상황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안하려고 하는 겁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이유는 뭐냐면, 갈멜산으로 위대한 승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합왕에게 길이 막힐까 싶으니까 마차를 타고 얼른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요,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아합이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비는 내립니다. 그런데 아합의 마차 앞에 엘리야가 달려 갑니다. 마차와 같은 속도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차 앞을 달려갑니다. 그는 왜 이렇게 달려 갔을까요? 그는 이제 하나님이 갈멜산에서 시작하신 이 부흥이, 이 개혁이, 이 회개가 실제로 왕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궁 앞에 도착했는데요. 아합도 도착했지요. 아합이 왕궁에 들어갑니다. 왕궁 안에는 누가 있느냐? 이세벨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개혁을 완성하려면 이세벨이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합이 이세벨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합이 이세벨에게 들어가고 엘리야는 밖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대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에게 가서 이제 바알 선지자는 다 죽었다. 그리고 바알은 진짜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하나님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이세벨이 "할 수 없네요. 선지자들도 다 죽고 나는 힘도 없네요. 그렇게 해야지 별수 없겠어요." 이렇게 대화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밖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아합이 뭐하라고 보고를 하느냐면, 엘리야의 행한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바알 선지자를 죽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가 문제냐, 여러번 저희들이 지적하는데요. 아합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을 영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말했어야 정답이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종 엘리야를 사용해서 자신의 하나님 됨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을 죽였다. 이렇게 말해야 이게 정답입니다. 이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그렇게 설명을 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합니다. 엘리야가 한 것입니다. 이거 엘리야가 한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그러면 이세벨이 설득을 당하느냐? 아닙니다. 이세벨이 여전이 아합에게 설득당하지 않고 말합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 그가 내가 믿는 바알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를 죽여버리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하느냐면, 아합과 이세벨 둘다 왕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합이 나오든지, 이세벨이 나오든지 해야죠. 그런데 안나오고 어떻게 하느냐면, "사자를 보내어" 종을 보내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세벨 말씀이 24시간 안에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했을때, 이게 엘리야의 기대와 다른 것입니다. 엘리야의 생각과 달리, 그가 3년 반동안 수고 했던 모든 역사가,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입증된 이 놀라운 역사가 순식간에 이세벨이 변화되지 않음으로, 아합이 이세벨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순식간에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랬을때, 저희들이 3절에 보면 맨날 성경을 보면서 주의했던 것이죠. "형편을 보고" 그가 뭘 보는 것이죠? 상황을 보고,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상황을 보고 그 다음에 "그 생명을 위하여" 자기가 살려고, 자기를 위해서, 이 두가지가 실패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결정적인 실패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그가 "이제 넉넉하오니" 주님 이제 할만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 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그가 낙심과 실망한 표현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생각과 상황이 달리 전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과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가 실패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두번째 발언을 보겠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그가 죽기를 바라는데요. 하나님께 죽여주십시요, 이렇게 한 건데요. 이 대목은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는 이세벨에 의해서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이 죽이면 완전히 상황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가 바알 선지자를 다 죽였는데, 이세벨이 다시 엘리야를 죽여버리면 이제까지 했던 일들은 다 허무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손에 의해서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여주십시요. 이렇게 한 거죠. 이것은 최상의 해석을 제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이상하게도 이 사건 이후로 이세벨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말은 허풍입니다. 저희들이 딱 생각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24시간 안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가 왕궁 문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24시간 안에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이면 됩니다. 엘리야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안에 죽이겠다고 해서 엘리야를 도망치게 합니다. 도망갈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할 이유가 없죠. 이세벨이 엘리야를 정말 죽이고 싶었다면 지금 당장 왕궁에 있는 군사들을 불러서, 밖에 서서 내가 나올 것을, 혹은 아합왕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야를 체포해 와라, 그리고 그를 죽여라, 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하루 안에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위협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이세벨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저희들이 영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부흥이 시작 됐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할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히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닙니다. 사생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셔서 삼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으로 온 징계입니다. 돌이키기 위해서 죄에 대한 고통이 있는 거고요. 그 다음 두번째, 하나님을 시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시인해서 백성들이 바알 선지자들을 잡고 죽이는 것을 보고, 이렇게해서 드디어 부흥이 시작됩니다. 이 부흥을 도중에 무산시키려면 뭘 하면 되냐면 항상 인도자의 간증을 훼손하면 됩니다. 이 부흥을 일으킨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사람, 이 사람의 말과 삶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어떻게 무너뜨리느냐? 엘리야가 도망가버립니다. 그는 여기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했듯이,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 앞에서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시고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입증해야 합니다. 이게 간증입니다. 이 간증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단이 이세벨을 사용해서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항상 위대한 부흥은 그 부흥을 처음 시작하고 말씀을 제시하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렇게 우리가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사람의 간증을 무너뜨리면 부흥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것과 이세벨의 죽음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증해 는것과 이게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실패합니다.
이 대목에서 실제로 중요한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 직장에서의 삶, 세상에서의 삶에서의 간증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교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고, 세상 앞에서 우리의 삶이, 교회 앞에서 배운 말씀 대로, 그리고 예배드린 그 내용대로 실제 삶에서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이제 자기 형편을 보고, 자기 생명을 위하여, 이와 같이 했을때에, 이제까지 엘리야가 어떻게 한 사람이냐면 이제까지 엘리야는 말씀대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릿 시냇가로 가라, 말씀이 임합니다. 그가 말씀대로 갑니다. 사르밧으로 가라, 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갈멜로 올라가라, 갑니다. 그리고 그는 도중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그가 어떻게 했지요?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바알을 숭배하자 그는 어떻게 했지요? 말씀이 그대로 일어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두가지 사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런데요. 말씀과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말씀을 순종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허풍을 떨때, 그가 뭘 안했으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갑니다. 이제까지 그는 말씀 없이는 안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이 없는데도 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이 위기에 그가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때, 그 죽은 아들을 데리고 침상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그 기도는 어디로 버리고 그는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가 죽고자 했던 것은 두가지 잘못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요, 그가 하나님 앞에 죽여달라고 하는데요. 정말 그는 죽고 싶었을까요? 죽고 싶었다면 그는 이렇게 멀리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그리고 이스르엘 왕궁에서 어디로 도망가느냐면 유다로 도망갑니다. 남쪽 유다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가면 살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맨 끝에까지 갑니다. 브엘세바, 단에서 브엘세바, 보통 이렇게 이스라엘의 경계를 말하죠. 북쪽이 단이고 남쪽 경계가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가장 남쪽까지 내려간 겁니다. 우리로치면 제주도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들어갑니다. 광야로, 그는 죽기를 원한 걸까요? 살고자 하는 걸까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를 죽여주십시요." 라고 하는 말은 그의 혼란을 나타냅니다. "넉넉하오니" 그의 실망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죽기를 구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죽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행동이 모순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가겠습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자기는 하나님이 사용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있었고 아브라함이 있었고, 그 이후에 이삭, 야곱,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쭉 있는 거죠. "그 하나님의 사람들보다 낫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실패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지요. 그런데 어떤 실패를 하죠? 포도원해서 포도를 재배해서 포도주를 먹고 벌거벗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윗, 위대한 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입니다. 그래도 실패가 있습니다. 밧세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온전히 순종하고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분, 우리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말하는 거죠. "제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가 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주님 일 그만두겠습니다. 나중에 보면요,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고 그는 새로운 사역을 계속합니다. 최소한 십년이상 살면서 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게 열왕기하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그는 죽기를 구하지만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해주시냐면, 그는 죽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특권을 주십니다. 그는 자기가 앞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결함있는 하나님의 사람과 똑같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특별대우 합니다. 저희들이 언제 알수 있으냐면, 변화산에, 주님이 변화될때 두명이 나옵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제 모세와 엘리야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수 있는데요. 교회로 적용해 보자면 모세는 주님 공중에 오시게 될때, 죽은 성도들을 타나냅니다. 모세는 죽습니다. 엘리야는 그때 살아있는 성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보통 성경이 이렇게 말하죠. 율법과 선지자, 율법을 대표하는 것은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를 대표하는 것은 엘리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높이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는 나는 별볼일 없는, 나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엘리야, 그는 변화산에 나타나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주님과 함께 말했던 그래서 구약에서 두명 뽑아낼때, 모세와 함께 뽑혔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하고 있는 세 마디는 다 틀린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주님 일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이제 죽고 싶습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조상보다 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조상 가운데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그를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실패한 것입니다. 자기 기대와 자기 생각과 주님 일이 일치하지 않을때, 그가 실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볼때 실패처럼 보이는 주님의 일이 놀라운 영광으로 바뀔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실패를 허락하십니다. 의도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르심이 조금 다른데요.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웃시아 왕이 죽어버리니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강성했던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 걱정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보좌를 보여줍니다. 웃시야는 죽어도, 유다를 통치하는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그 보좌에 스랍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광경을 이사야가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전히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하는 이 소식을 누가 우리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꼬, 하고 세분 하나님께서 의논하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그래서 주님이 이사야를 보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내느냐? "너는 백성들에게 가서 말해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하라." 그런데 백성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십니다.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루터기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남은 자를, 모든 역사와 모든 시대에 하나님을 보는 남은 자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소수의 남은 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한다해도, 사람이 통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부름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부름을 생각해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예언을 눈물로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부름이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가 쓴 이사야서 53장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훗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자기 생각, 그래서 이세벨이 지금 죽지 않고, 아합이 이세벨을 제압하고 나라를 다시 하나님을 숭배하는 나라로 바꿔야 하는데, 못난 아합이 여전히 이세벨 믿에서 바알 선지자 다 죽었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 입증이 되었는데도, 이세벨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실패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서 그 다음에 20장을 가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왜 이렇게 인도하시는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을때, 그가 실패합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냐면 그가 로넴나무 밑에 앉아서 첫번째, 그가 잡니다. 엘리야는 자도 주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자고 있는 엘리야를 계속해서 보십니다. 그리고 천사를 보내서 그를 깨우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떡과 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걸 먹고 엘리야가 또 한번 잡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충분히 잤다 싶을 때에 다시 천사를 보내서 깨웁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떡과 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두끼를 먹습니다. 마치 그릿 시냇가에서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물어온 음식을 먹듯이, 두끼를 다시 먹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렙으로 가라." 이렇게 말하시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가지를 하십니다. 첫번째, 그를 먹이십니다. 육체적으로 보양하십니다. 육체를 잘 보존하게 하시고 두번째,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먹이는 것은, 어떤 기적이냐면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21장에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갔다가 한마리도 못잡고 왔을때, 다시 오른편에 던지라고 해서 고기를 잡고 제자들이 뭍에 올라왔을때, 주님께서 숯불에 떡과 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인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먼저 채워야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육체의 필요를 일단 채워주시고요. 그런데 여기서 어떤 기적이냐면, 이제까지의 기적은 그가 그릿 시냇가에서 본 기적이나 사렙다 과부에서 본 기적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를 먹이셨습니다. 아침에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지고 오고, 저녁에도 가져오고, 이것이 그릿 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계속 일어났습니다. 사렙다 과부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적을 봤고요.
이번에 있는 기적은 그가 두끼를 먹습니다. 두끼먹고 사십일을 갑니다. 두끼 먹었으니까, 하루 먹은거죠. 하루 식사해서 하루 걸어가면 되죠. 그런데 사십일 동안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기적을 주님이 행하십니다. 주님은 물질을 주실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물질을 공급해 주실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우리 내적인 힘을 계속해서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엘리야에게 경험하게 합니다. 엘리야의 마음과 엘리야의 생각과 엘리야의 계획을 바꾸기 위해서 속에서 그를 힘주시는 사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두번째 하나님 앞에 섭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게 사람들에게 의논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이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교제를 통해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면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는 문제는 뭐냐면, 아합왕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아합왕은 계속 이세벨에게 휘둘립니다.북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합왕이 아닙니다. 누구냐면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인도력은 남자가 가져야 합니다. 그 당시, 지금은 세속 국가니까 상관 없고요. 대통령이 여자가 되도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왕이 힘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이세벨에게 잡혀 있고요. 가정에서도 남편들이 방향을 잘 정해야 합니다. 영적인 방향을 정하고 영적인 말씀을 공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이걸 못하니까 할수 없이 다른 경우가 나오는데요. 하여간 원칙적으로, 그리고 기본적으로, 형제들이 주님 앞에서 이 일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기도하고, 이게 실패 했을때 항상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영적이지도 않은데 우격다짐하고 이런 뜻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인격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에서 말씀을 제공하고 이와 같은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저희들이 받을수 있는 교훈이고요.
그 다음 두번째는, 사람은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약할수 있습니다. 강한 곳이 약합니다. 이제까지 엘리야처럼 담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왕에게 나타났습니다. 왕궁에 가서 "내 말이 없으면 우로가 없다." 이렇게 하니까 아합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을 온통 뒤집니다. 이스라엘만 뒤지는 것이 아니고, 이웃 나라까지 뒤져서 엘리야가 없다는 맹세를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보이라." 그가 갑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이 면에 있어서는 강점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넘어집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체포 당시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 이러던 사람이 여자 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합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던 그가, 물론 장소가 달라졌지만 대제사장의 집뜰에 있는 여종이 물어봅니다. "당신도 그 사람 제자죠?" 부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다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모세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뭐냐 그러면, 민수기에 나오는데요. 모세에 대한 성경의 평가, 그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입니다.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 원망할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입니다. 백성들과 논쟁하지 않고 백성들이 자기를 공격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 땅에 못갑니다. 왜요? 한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반석을 향하여 말을 해라, 그런데 반석을 두번 쳐버립니다. 왜요? 그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고 쳐버립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못가는데, 그 사람을 평가되기를 온유하다, 이렇게 평가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점에서 넘어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저희들이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만은 괜찮다. 딴것은 몰라도, 이것에서는 안넘어지다고 하는 점에서 넘어집니다. 이게 엘리야를 통하여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저희들이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다, 입니다. 우리의 행한대로 우리를 갚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만 할래요. 할때도, 그래 그만해라. 하나님이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계속 임무를 부여하시는 하나님. 죽고 싶어요, 할때 죽게하지 않고 승천 시키시는 하나님. 나는 일반 하나님의 종들과 똑같습니다. 할때, 그를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높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이게 저희들이 믿는 주님입니다. 이 주님을 우리가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과 다를때, 하나님을 오히려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신뢰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몫으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가운데, 누구는 손이고, 누구는 발이고, 우리는 다 지체일 뿐입니다. 눈이 손더러, 손이 발더러 뭐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은 또, 나는 왜 발인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의도대로 주신 것이고 그것은 단순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그 앞에 만족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셔서 저희들이 이 시대에, 또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말씀을 따라 평안하게 섬기고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높이고, 이 영광스러운 주님을 더욱 찬양하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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