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엘리야

엘리야 7. 엘리야의 사역의 변화, 엘리사를 부름

박이레 2022. 3. 24. 16:55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 엘리야 07. 엘리야의 사역의 변화, 엘리사를 부름 >

이 시간에는 제가 엘리야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열왕기상 19장 엘리사를 임명하는, 엘리사를 따르게 하는 그 대목인데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스토리 전개상 19장 13절부터 읽어드리겠습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왕상 19:13-21).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을 하다가 그가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기를 원한, 주님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셔서 사용하시는 장면입니다.
잠깐 저희들에게 적용해보면요, 저희들이 구원받은 후에 예배 드리고, 주님 섬기는 거죠. 예배로 섬기고, 교회에서 한 지체로 섬기고, 또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았고, 그러니까 새 생명이 있고, 또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기쁨으로 섬기는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세상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늘 막아섭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상이 동원할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주님 섬기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자기 자신의 기대입니다. 여기 엘리야처럼, 내가 생각할때 주님을 섬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렇게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기대와 전혀 반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가지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상황이 반대하고 내적으로는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이유로 낙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거죠. '주님을 섬기는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도 들어오게 됩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분명하죠. 엘리야는 이렇게 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어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입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걸 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이 입증이 되면 상황이 달라질거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세벨이 살아서 왕궁의 권력을 쥐고 있고, 그리고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고, 이걸 보고 엘리야가 실망한 거죠. 그럼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되니,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되느냐? 하고싶지 않다. 이렇게 된거죠. 이렇게 되었을때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방법이 늘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니까 호렙산에 오게 한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굴 어귀에서 말씀하신 거죠. "왜 여기 있느냐?"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 섰을때에, 내 관점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 섰을때에 회복이 됩니다. 말씀이 주어지고 우리가 어떤 각도에서 이 일을 봐야 되느냐? 이것이 이 난관이, 어려움이, 반대가 당연한거 아니냐? 이런 관점, 아니 세상이 이렇게 반대가 심하다니? 이게 아니고 주님을 섬기면 상황이 잘 되리라고,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고, 성도들을 섬기면 성도들이 변화되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래서 교회는 풍성해지고,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 복음을 전했더니 어려움이 오고, 성도를 섬겼더니 오해받고, 이런 일이 있을때에,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왜 이와 같은 일을 주시는지, 그 의도를 알고 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이제 엘리야에게 일어나는 거죠. 그 다음에 두번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엘리야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일을 맡깁니다. "너는 돌아가라" 이제까지 왔던 길, 잘못된 길이니까 돌아서 가야한다. 그래서 세 사람을 세우게 하는 거죠. 아람왕으로는 하사엘을 세우고, 그 다음에 북이스라엘 왕으로는 예후를 세우고, 그 다음에 선지자로는 엘리사를 세우고, 이 일을 시킵니다. 그래서 다시요. 우리가 감정적으로 흔들렸을때, 아무것도 하기 싫다. 못하겠다. 라고 하는 감정이 섰을때, 요즘 쉽게 말하면, 우울증, 또는 실망, 이런 일이 생겼을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 앉아서 슬픔으로 낙심스러운 생각을 하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이 실망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 사람을 세워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일반적으로 저희들이 배워야되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 일에 대한 어떤 회의나 어려움이 생겼을때 항상 하나님 앞에 서야된다. 주님이 모르시지 않는다. 이게 내가 생각할때 실망스러운 것이 주님의 계획이었다, 이렇게 나오고, 그 다음에 계속적으로 주님이 부탁하신, 주님이 주신 일들을 감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잠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엘리야의 사역은, 저희들이 나중에 보면 엘리야의 사역이 뭘로 바뀌었느냐면,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는 그런 사역이 아니고, 사람 보기에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것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바꿔낸 것은 하나님의 작은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 불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제 배워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말씀해주시는 작은 소리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제 엘리야는 이 사역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엘리사에게, 자기 다음 후대, 자기 다음 세대죠. 자기 다음 세대 엘리사에게 개인적으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가르침으로 그를 변화시키는, 이게 엘리야의 사역의 변화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희들이 볼수 있는 것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 같으면 엘리야가 이런 소리를 하면 그를 잘라버립니다. 못하겠다고 죽겠다고 하니까 배제시키죠.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부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다시 사용합니다. 성경에 그런 예들이 많이 있죠. 우선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더니 도망가버립니다. 요나를 어떻게 하죠? 하나님은 요나 이외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가 없으면 그 일을 못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서셔 그를 큰 물고기 뱃속으로 집어넣어 버립니다. 요나가 회개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사오며"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라고 그가 회개합니다. 그러자 그를 다시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하시고 니느웨에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부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게 사람과의 차이죠. 그 다음에 대표적인 예가 마가입니다. 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할때 마가를 수종자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1차 저녿여행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도중에 힘드니까 돌아가버립니다. 그래서 이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나중에 갈라서게 됩니다. 2차 전도 여행 때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 바울은 안된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서, 어려움이 생긴거죠. 그런데 이 마가가 누구냐 그러면 마가복음을 쓴 마가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해서 주님의 생애를 기록하게 합니다. 복음서를 쓰게 합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제 그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일이 필요하지요. 특별히 베드로를 통해서 마가가 다시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마가복음을 쓴거죠. 그 다음에 저희들이 잘 아는 케이스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합니다. 그것이 작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버리시나요? 아닙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확인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을때, 하나님께서 "네 양을 치라"라고 그를 변함없이 사도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2장까지 주로 베드로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부른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 같으면 능히 버렸어야 되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는다.
그 다음에 이건 불신자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두번째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흔히 이야기 하잖아요. 이 은혜의 시대에, 복음을 거절한 사람이 이제 주님 공중에 오시면 교회는 휴거되고 복음을 들었던 사람인데 7년 환난을 지나면서 믿게 되느냐?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만한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부르실 때에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해야 합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다음에 반응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해서 강퍅해집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더욱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주님의 순종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계속해서 악화되는 길을 걷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잠깐 엘리야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바알을 숭배하는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혹은 아합왕에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그 일을 그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때, 자기의 예상과 완전히 달리 되었을때, 그는 이제 못하겠다. 하나님께 "저를 이 일에서 빼주십시요." 이렇게 한거죠. 그런데 이런 일과 관련해서 저희들이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를 잠깐 생각해 보면요.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장인이, 이드로라는 장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이드로가 보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가 일을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와서 물어보려고 줄을 서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고 혼자 너무 바쁜 거예요. 그래서 이드로가 이렇게 제안합니다. 모세에게, "그렇게 하지 말고 천부장을 세우고 백부장을 세우고 십부장을 세우십시요. 그래서 우선 십부장이 해결하게 하고 십부장이 해결할 수 없으면 백부장에게 오게 하고, 백부장도 해결할 수 없으면, 다시 천부장에게 오게 하고, 천부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만 모세 당신이 처리하면 일이 쉽게 되지 않느냐?" 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저희들이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주님 일을 하는데 너무 바쁜 거예요. 해야 될 일이 많은 거죠. 예를 들면, 직장일도 해야하고, 가정에서 자녀도 돌봐야 되고, 모임 일도 복잡한 일이 많이 있고, 그러니까 너무 바쁜 거예요. 혼자, 내가 어떻게 이것을 혼자 다 처리하냐? 그래서 혼자 쩔쩔매고 이드로가 제안한 거죠. "다 혼자 하지 말고 나눠서 하자." 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그런식으로 처리합니다. 그래서 이드로의 제안에 대해서 그럴수도 있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제 개인적으로는요, 반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잘 처리하느냐가 아니고, 뭘 봐야 하느냐면 이것이 모세의 부르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모세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어떤 일이 있을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뭐냐면, 하나님이 이 일을 나로 하라고 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으면 바쁜 가운데서도 계속 기도하고 주님이 이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묻지 않고 이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계속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가이샤라 모임에 들렀는데, 가이사랴 모임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성령의 감동함으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된다.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 사도바울에게 올라가지 말라, 이렇게 충고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하지요? 아가보가 예언을 합니다. 올라가면 사도바울이 체포될 것이다, 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예언을 해 주신 거죠. 하나님이 예언을 해 주신 이유를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올라가면 어려움이 생기니까, 그것을 알려주신 이유는 올라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의 분별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는 어려움을 피하라는 의도가 아니고, 어려움을 준비하고 각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루살렘으로 가야 된다, 하는 뜻으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하죠. "나는 결박뿐만 아니라 내 죽기를 각오하였노라." 이게 사도바울의 말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했느냐면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확신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내가 가고 싶어서나, 혹은 내가 세운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불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나는 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내 목숨이,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는다. 이게 사도바울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로 내가 부름받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가 가장 중요한것입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하는 거죠. 지금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이렇게 일을 시키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이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 여부는 주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어도, 그렇게 많이 복음을 전해도 구원을 안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지역모임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름 받은 것입니다. 섬겼더니 결과가 막 좋게 나타났다. 섬겼더니 열매가 생겼다.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열매가 생겼을때,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내가 잘해서 그런 일이 생긴걸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열매를 주신것은 주님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계속 은사를 따라 섬겼는데, 그렇다고 해서 유익한 결과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되죠? "해봐야 표도 안나고 이게 아닌가봐." 이렇게 할 일이 아니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나는 부르심에 책임있게 해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벗어났기 때문에 엘리야가 실망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원칙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박뿐 아니라 죽기를 각오한다. 그리고 그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체포됩니다. 그리고 그가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는 사도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를 로마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대와 달리, 죄수로 보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유인으로, 선교사로 가고 싶었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그를 죄수로 보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방을 얻습니다. 셋집을 얻는거죠. 그런데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되 금하는 자가 없더라" 입니다. 사도바울은 비록 죄수가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다 그를 만나고, 사도바울이 자유인으로 있는것과 다름 없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데 방해가 없었다, 입니다. 왜죠? 예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주인으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죄수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다 찾아오고, 아주 중 죄인입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죄인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감시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아무런 자유가 없는것 같죠.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사도바울이 자유롭게 전파했더라.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기이한 일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와 역사를 참으로 통치하고 있는 분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주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만 묻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하라고 하셨는가? 하라고 하셨다면, 그것만 확인되면 하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교만해지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도 않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하나님이 부르시는데요. 엘리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데요. 우선 그가 뭐하고 있었느냐면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두겨리 소니까, 한 겨리가 두마리, 그러니까 스물네마리의 소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죠. 그를 엘리야가 휴계자로 삼는, 몇가지 특징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그는 농부입니다. 농부인데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세상적으로 인정받거나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같으면 택하지 않을 사람을 하나님은 택해서 자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연약하고 미련하고 그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세워가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중에서도 당대에 유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마태는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세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태를 부르셔서 마태복음, 복음서를 쓰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부름받을수 있는 사람 아닙니다. 바리새인이고,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그를 구원하셔서 위대한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늘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사도 중에 상당수가 어부입니다. 어부나 농부는 세상에서 그렇게 인정받을만한 직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재능과 세상의 성공과 하나님의 일하고는 무관하다. 이 원칙을 보이는거죠. 예를들면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울때에 사무엘이 가죠. 하나님께서 이새의 집에 가서 아들 가운데 한명을 왕으로 세워라. 그래서 사무엘이 갑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장남 엘리압을 보니까 하나님이 택하시만한 사람이네, 그때 이런 성경 말씀이 있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 이 중심은 안타깝게도 사람의 눈에는 안보입니다. 하나님만이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버지도 이제 아들들 다 모아 놓으십시요, 그랬는데 다윗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하기에도 얘는 안와도 된다. 지금 양들을 쳐야 하니까, 자기들은 계속 먹고 살아야 되니까. 양을 치는 사람은 필요하니까, 다윗 네가 양을 쳐라. 그래서 사무엘이 "이게 답니까?" "한명 있긴 한데요." "데려오십시요."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는 원칙입니다. 이게 분명하게 드러날때가 있고 아닐때가 있지만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시고 사람의 눈에는 귀히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이게 엘리사를 택한, 엘리사가 농사를 짓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가 뭐하고 있었느냐 하면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건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느냐면,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렸지요. 그 다음에 두번째, 삼년 반이나 비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시자, 뭐가 가능하죠? 이제 농사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비가 내렸을때 밭을 가는 것입니다. 이제 농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곡식을 심어야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신약으로 오면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시면, 비가 드디어 왔네가 아니고, 이제 농사를 지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들을 지혜롭게,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죠. "시간을 구속하라" 우리가 주님을 섬길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도 전하고, 이런 것들은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시간이 있어서 하는게 아닙니다. 누구나 24시간입니다. 다 바쁩니다. 일은 다 있지요. 그런데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다른 시간을 희생하고, 잠을 줄이고, 그리고 어떻게든지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주님을 섬길수 있는 일들은 필수적이므로 어떻게듡 해내고, 그래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제가 간증을, 제가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요. 20년 전인가, 어떤 청년 형제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청년 형제가 있었어요. "저는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안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염러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저는 그것 안합니다. 그리고 저는 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 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청년 형제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 다들 먹고 살려고 사회에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 형제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드리겠다고 하네. 그러니까 좀 귀히 보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결국 그 형제가 주님 못섬겼어요.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해놓고, 그것은 그의 열정이지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부르실때까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을 감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같은 경우에도 세관에 있을때 주님이 부르시죠. 그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다 어부로서 고기잡고 있을때 주님이 부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실때까지 가정에서, 사회에서, 겸손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고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세번째입니다. 엘리야 외투를 던지는데요. 엘리야의 외투는 유명하지요. 이걸로 승천한 후에 요단강도 가르고 그랬는데요. 침례요한도 낙타 털옷을 입고 했었죠. 이게 선지자들의 복장이죠. 선지자라고 하는 직무를 상징하는 옷인데요. 그 옷을 던졌는데, 그 당시에 보면은, 나중에 보면 선지 생도들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있고 엘리사가 있고, 생도들이 있어서 같이 주님 일을 하고 주님 배우고 섬기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하나님은 엘리야의 선지 생도 중에서 선지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세우느냐? 엘리야의 선지 생도가 아닌, 엘리사를 택합니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뭘 되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을 세웁니다. 그래서 함부로, 그런 어떤 전문적인, 주님 일을 할수 있는 것들을 가서 배우고 그래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불러야 된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와 있고요.
그 다음에 네번째,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가정에 가서, 집에가서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따라가겠습니다, 하죠.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57-62).

여기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첫번째로 나오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와라." 그랬더니 그가 먼저 아버지 장사하겠다, 하고요. 이 사람도 안되는 거죠. 그 다음에 세번째 사람은 주님을 좇겠지만 가족과 먼저 작별하게 해달라 합니다. 물론 엘리사는 세번째 경우와 다릅니다. 여기 나와있는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 하소서" 주님이 쟁기잡고 뒤 돌아보면 안된다, 라고 하는 이 사람과 엘리사가 안 말은 다릅니다. 그래서 뭐가 다르냐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우선 주님을 따를때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요. 첫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부르심이 없는데, 따르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놀라운 분이기 때문이죠. 놀라운 기적도 행하시고 놀라운 말씀도 하시고 해서, 주님을 좋아한 거죠. 그래서 주님을 따르겠다 했을때, 주님이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이 대가를 계산해봐야 된다. 이 대가를 고려해야 된다. 나를 따르면 이게 필요하다. 그러면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아주 막말로 표현하면 짐승들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고 했을때에 그가 마음에 결정해야 합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면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받고 수치스럽고 라고 하는 삶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고 주님이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니까 이와 같은 것을 자문해보는 거죠. 정말로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인정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도 주님을 따르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한거죠. 그런데 주님을 따르다가 자꾸 세상과 부딧칠때 우리 마음이 약해지니까, 다시 한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영적인 하늘로 가는 길을 가고 있다. 그 다음에 두번째나 세번째 사람이 마찬가지인데요. 뭐가 문제냐 하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라고 했을때, 주님이 아버지 장례식 참석을 반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례식 참석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이 문제인데요. 59절에 보면 "나로 먼저" 우선순위가 다른 것입니다. 장례식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우선순위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장례식에서도 주님의 제자답게, 다른 사람처럼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고 다시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장례식에 참석해야 되죠.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거기가 우리 인생의 종착지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죽음 앞에 심각해 질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주님을 생각할수 있는,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래서 장례식 참석을 반대하신 것이 아니고 "나로 먼저" 그래서 많은 형제님들이 이 부분을 장례식을 참석하겠는 뜻이 아니고 앞에 사람이 보니까, 주님을 따라가면 세상에서는 헐벗고 가난하게 살것 같으니까, 두번째 사람은 이렇게 제안한 겁니다. "저희 아버지가 돈이 있으신데, 제가 아버지 밑에서 잘 섬기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면 유산을 받아서 이 유산을 주님을 위해서 쓰면서, 또 내가 주님의 제자의 일에 도움이 되도록 쓰고가면 안될까요?"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반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엘리사처럼 한 거죠. 나는 "나로 먼저" 우선순위가 자기 가족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뒤를 돌아본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누가 내 형제요, 내 모친이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래서 가족을 돌보지 말라, 가족에 대해서 무관심해라는 것이 아니고, 가족은 사랑하고 돌봐야죠. 친족을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서는 주님과 주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 그의 최고 우선순위여야 합니다. 이 우선순위를 기억하면서 돌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들을 살피실 것이다. 주님이 이 내 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줘야 하고, 이 가족들에게 놀라운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해줘야 하고, 그래서 영적인 도움을 줘야하는 이와 같은 분명한 관계로 적립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나로 먼저" 이게 '나 먼저'입니다. '주님 먼저'가 아니고 '나 먼저' 이게 항상 주님을 따르는 길에 어려움이 되는거죠. 저희들은 주님 우선으로 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들어섰습니다. 들어섰는데, 첫사랑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길로 오면서도 자꾸 이런 것들이 변함없이 우리를 마음을 약화시키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중지하게 하고 우선순위를 바꿔내게 하고 하려고 하는 상황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열왕기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여기 엘리사가 "나로" 여기 엘리사는 '먼저'가 없습니다. 먼저는 주님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 정중하게 말씀드리고 이제 자기가 그와 같은 가정 내에서 일을 할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이제 주님 일에 나서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오겠다. 엘리야가 동의합니다. "돌아가라" 부모님에게 가라, 그리고 다시 와라.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느냐? 나는 너에게 하나님께서 너를 선지자로 불렀다는 것만을 말한 것이다. 이제 이 선지자로 부름받은 이것을 네가 받아들이고,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네 몫이다. 나는 주님이 하라고 한 일만 한거다. 너를 세우라고 해서 너를 세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외투를 던진것 뿐이다. 너를 선지자로 부른것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 너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게 엘리야가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엘리사가 겨리는 다 살라버리고 소 두마리를 잡아서 고기를 백성들에게 주고 한거죠. 이 대목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죠. 다윗이 범죄해서 천사가 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죠. 여기를 하나님의 성전 터로 쓰는데, 그때 보면, 거기 타작마당의 소를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면, 타작마당은 이제 더 이상 타작마당의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 이제 이곳은 하나님께 드린 곳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그 기구를 불살라버린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더이상 밭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부르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수종들다, 이것을 잠깐 보겠습니다. 엘리사에 대해서 열왕기하를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면서 어떤 일을 했느냐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왕하 3:11).

엘리사를 설명하는데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수종들더라가 엘리야를 섬긴 것입니다. 그가 세수할때, 그 세숫물, 요즘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그 당시에 섬기는 형태 중에 하나입니다. 침례요한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다." 그 당시에 섬기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형제님들이, 이 열왕기하 3장까지 엘리사가 엘리야를 몇년동안 섬겼느냐? 이 기간을 뉴베리 같은 혈제님에 의하면 10년으로 봅니다. 그가 10년간 엘리야 밑에서 그를 섬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느냐? 겸손한 사람,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을 부르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이름을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엘리사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섬깁니다. 이것이 엘리사입니다. 그 다음에 "사밧의 아들" 인데요. 사밧은, 뜻이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후의 우리의 삶을, 공중에서 주님 오실때에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이 상 주시고 우리의 섬김이 불타지 아니하고, 우리가 섬긴 것들이 불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인정되기를 원하는 사람, 이 사람이 섬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벨므홀라', 이것은 장소인데요. 아벨므홀라라고 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사밧이고 자신은 엘리사입니다. 이 이름을 설명하는 건데요. 아벨므홀라는 '춤추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춤은 취미생활입니다. 여가 활동입니다. 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 일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감사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 이 사람이 섬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사역합니다. 기근을 주기도 하고,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엘리사의 사역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사역을 나중에 보면, 엘리사는 백성 전체를 사역하지 않고 백성들은 이제 놔둡니다. 상대를 하지 않고 남은 자를 상대로 일합니다. 이 부분은 저희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또 "이기는 자는"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도 네개의 세계로 나눠집니다. 처음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 그래서 전체 성도들을 대상으로 성령님이 말하십니다. 그런데 후에 가면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지러다" 이기는 자 쪽이 앞에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전체를 놓고 일하시다가, 전체 사람들이 말을 안들으니까, 그 다음에 특별히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믿는 자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한해서 사역을 하십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교회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보통 당대에 다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기는 자들이 나옵니다. 남은 자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순종으로, 일반적인 교회의 성도들의 삶과 다른 수준의 삶으로 나와야 된다. 이것이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넘어가는 시대, 이제 모든 백성을 향햐여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남은 자들에게만 일하시는, 그리고 엘리사를 그 사람들과 관련해서 사역하시는, 이 하나님의 경륜 앞에 서서 저희들이 더욱 경건하게, 더욱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대로 주님을 섬길수 있는 교훈을 받을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엘리사를 택하시고, 또 엘리야의 어떤 낙심, 이런 것을 통해서 오늘날 저희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중요한 원리를 말씀해 주시고 이것을 저희의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