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4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 한봉래 형제님
< 09.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 >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요9:1-13).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요9:18-22).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24-33).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5-38).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소경으로 났기 때문에 지금 사회와는 달리 그 당시에 소경으로 태어나면 교육을 받을수 없고 직업을 가질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구걸을 하는 것입니다. 구걸에 대해서 잠깐 보고 이야기를 들어가겠습니다. 성도님들도 구걸하시는 분들을 만나시나요?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그런분들을 자주 만나는데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런분들이 지하철에서 구걸을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보지 않는데, 그런분들을 볼때마다 양심에 많이 괴롭습니다. 신체는 약간 불구거나 어려우신데 도와달라고 하면 안돕기도 어렵고, 돕자니 돈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괴롭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데 성전미문 옆에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구걸하기 위해서 거기 데려다 놓은 겁니다. 왜 거기다 놓느냐 그러면, 사람들이 가장 은혜를 베풀기 쉬운 장소는 성전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때 은혜를 구하는데, 어떤 사람이 은혜를 구하고 그 사람에게 주기가 가장 좋은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분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하면 눈을 안마주칩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안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딱 봅니다. 그래서 앉은뱅이 입장에서는 구걸을 오래하다보면 누가 주는지 압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주는가, 어떤 사람은 절대 안준다. 주로 여자들이 많이 주고..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요한과 베드로와 눈이 딱 마주칩니다. 앉은뱅이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이 줄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외면하고 갑니다. 눈을 안마주칩니다. 없는걸로 치부하고 갑니다. 고통스럽거든요. 주기도 그렇고 안주기도 그렇고 난처합니다. 그래서 이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눈을 안마주칩니다. 그런데 그날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눈을 마주칩니다. 그러니까 아 이건 주겠다 싶은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까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러나 내가 줄수 있는 것이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이것이 구걸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표현된 장면입니다. 눈 마주치기. 그 다음에 요한복음 9장의 이 사람은 소경입니다. 누가 나에게 줄까, 라고 분별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는지도 모릅니다. 어떤사람이 주는지, 안주는지도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가 구걸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장에서 묘사해 보겠습니다. 그는 오늘도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대신 발자국 소리를 듣고 소리에 민감해서 누가 나에게 구걸해 줄까, 하는 이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오고 있는 거죠. 자기를 보고는 그들 사이에 대화가 오갔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사실 그런 이야기 사람 세워놓고하면 안되죠. 지나가서 나중에 하면 모를까, 소경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여간 그도 들었습니다. 자기도 궁금하죠. 나는 왜 소경으로 태어났을까? 정상적인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나. 그가 울부짖지않은적이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가 주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이것은 나쁜거죠. 제자들은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이 이유없이 고난받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전부 뭐라하죠. "죄없이 망한자가 있나 생각해 봐라. 없다. 너에게 뭔가 잘못이 있는것이 아니냐? 그 잘못을 자백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틀린 말입니다. 욥은 그들보다 의인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죠. 욥이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저희들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난은 죄 때문에 일어날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봅니다. 고린도교회 가운데 연약한자가 있고 병든자가 있고 심지어 잠자는 자도 있었습니다. 왜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만찬상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곳에서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는, 어떤 고난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죄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 고난을 주십니다. 예를들면 사도바울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의 육체에 사단의 사자를 허락하셨습니다. 왜요? 사도바울이 죄를 지어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었을까요? 그를 겸손하게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주께 받은 계시가 너무 크므로 자고하여 지지 않도록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도로서 일을 완수 할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를 보존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죄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에 이런 구절들이 있지요. "지금 받는 환난의 경한것이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우리의 삶이 오히려, 보통 이 구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을 소망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땅에 생각들을 놓고 하나님이 가지고 오실 은혜를, 그 영광을 소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하여간 이 소경 거지 입장에서는 중요한 질문을 주님과 제자들 대화에서 들었습니다. "누구 죄 때문에 된 것입니까?" 주님이 대답해 주십니다. 이 대답이, 이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것이지만 그에 관하여, 그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나는 왜 소경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창조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심으로 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의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가 그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일을 하는지 그것을 분명하게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소경으로 만든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낮이니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신 것입니다. "쓸데없는 이론적인 논쟁을 하지말고" 누구 죄냐, 성경에서 보면 부모의 죄는 삼사대까지요. 이사람의 죄면 그가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태어날떄부터 소경인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론을 전개 시키지 말고, 주님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자.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자. 이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여간 이 소경은 자기가 왜 소경으로 태어났는지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괜찮은가요? 그럴수 있다고요? 소경이 되어도 좋은건가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하나님이 누구며 무엇을 하시는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 생애를 사용하신다. 그런데 나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 일을 하신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게 이 소경의 경우 도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렇게 말하다가.. 발자국이 들립니다. 한분이, 아마 예수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는 긴장된 상태로 그분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침을 뱉으셨습니다. 약간 난처해 졌습니다. 왜 침을 뱉으시나? 그런데 더이상 어떤 생각을 전개시키기 전에 주님이 진흙을 두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주님은 아무 설명을 안하셨습니다. 씻으면 나을것이라 말씀 안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은 가버렸습니다. 이제 이 소경은 어떻게 할까요? 이 이해할수 없는 행동, 하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갔다 붙였으니 더 안보이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갔는지, 아니면 어째거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있을수는 없는거죠. 그렇게 구걸할수는 없는거죠. 그래서 자기의 상황 때문에 실로암 연못에 갔는지.. 그리고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었을때 놀라운 것은 눈이 보인다는 거였습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물을 자기가 항상 손으로 그 감각을 익히고 항상 필수로 여겼던 그 물이 바로 이런것입니다. 기적은 아무도 없을때 일어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때 그가 실로암 연못에 있을때 그때, 일어납니다. 그것은 아마 그에게 잊을수 없는 날일 것입니다. 눈이 보인다는 거죠. 그동안 보지않고 감각했던 많은 물질들을, 길거리를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씻으면 나을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장소에 한번 와 봤을 것입니다. 주님은 없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가족에게 가야지요. 그래서 그가 마을을 돌아다닙니다. 어머니에게 가고 부모에게 가고 사람들이 그를 봅니다. "저게 그 소경 거지가 맞나?" 생각을 합니다. 맞는거 같은데 아닌거 같기도 하고, "맞네"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야 틀리네.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사람이네. 그는 눈을 뜨고 있지 않나?" "아니야 눈을 떴어도 소경 거지가 맞아." 물어보면 되는데 자기들끼리 논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 합니다. "내가 소경 거지 그 사람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했느냐?"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라고 하는 분이 눈에 진흙을 바르시더니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고 내가 그 말대로 했더니 보이게 되었다." 간단한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두번째 질문합니다. "그럼 그사람이 어디 있느냐?" 모르죠. 어디 있는지. 주님은 의도적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가 무슨 큰 죄를 진 것처럼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 앞으로 끌고 갑니다. 왜요? 고쳐주고 가버리셨는데 뭐가 문제지요? 요한복음 9장의 분위기는 이렇게 갑니다. 사람들은 이 소경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확인합니다. "네가 그 사람이 맞느냐?" 그래서 다시 부모에게 확인 합니다."이 사람이 소경이던 네 아들이 맞느냐?" 부모가 "맞습니다." 합니다. 이 사람을 두번째 불러서 다시 확인합니다. "너 확실히 소경 거지였다가 지금 눈 뜬것이 맞느냐?" 이 사람이 기가막혀서 말합니다. "아니 왜 또 묻습니까? 혹시 예수님 믿으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화가 나서 "그 사람은 죄인이다." 그래서 첫번째 의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토록 부인할까요? 일어난 사실인데, 팩트 입니다. 부인할수 없는, 지금 검증 가능한 팩트 입니다. 그런데 왜 부인할까요? 주님께서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데요. 심지어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하늘로 올리워가고요. 엘리야도 불병거 타고 승천하는 어려가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경 거지가 이런 발언을 합니다. 이것이 기이한 것입니다. "내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소경이 눈 떴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경 어느곳에서도, 예를들면 여러가지 기적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소경이 눈뜬것은 없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기적을 행하고 엘리야가 기적을 행하고 여러가지 기적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은 없습니다. 소경이 눈뜨게 한 것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들도 많은 기적을 행합니다. 주님이 친히 가시려고 하는곳에 가실수 없으니까 주님이 가지신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어서 대신 보내셨습니다. 그들도 소경을 눈뜨게 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눈 뜨게 하는것은 메시아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게 걸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경은 내가 소경인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부인할수 있는가? 이 확실한 현실을, 그리고 내가 아는것은 내가 보고 있다고 하는 현실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찾아가서 묻습니다. "인자를 믿느냐?" "누구십니까? 믿겠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눈을 뜨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서 몇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35장 5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35장은 메시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 저희들이 주일학교에서 많이 부르는 사막에 꽃이 피고 어린양과 사자들과 함께 뛰노는 그 천년왕국을 노래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35:5).
이것이 천년왕국, 메시아의 통치하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메시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42장을 보면 "내가 붇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그리고 여로와의 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2절에 보면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3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에 대해서 인용된 구절이지요. 그리고 6절에 다시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사29:18-19).
이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입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시146:8).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구절은 성경 기록에 의하면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주님만 하신다. 주님이 다섯명의 눈을 뜨게 한 기록이 성경에 나옵니다. 주님만 하십니다. 이런 예를 하나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소개 했지요.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런데 침례요한이 감옥에 갇힙니다. 왜 갇혔죠? 헤롯왕이 잘못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가 공개적으로 왕을 책망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감옥에 주님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면회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처럼 잘못된 왕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메시아라고 소개했는데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 두명을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물어오라고, 답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정확하게, 그때 마침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가서 보고들은대로 말해라."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이사야는 침례요한이 자기 정체성을 사람들이 누구냐 그랬을때 대답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냐?" "아니다. 나는 신들메를 풀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냐?" 그는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그는 이사야서에 익숙합니다. 그 이사야서 35장 5절을 주님께서 인용 하십니다. "소경의 눈이 뜬다고 침례 요한에게 가서 말해라." 이게 주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증거 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하는것은 그리스도 한분 외에는 불가능 합니다. 모든 다른 병은 누가 가능해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것은 주님만이 하실수 있습니다. 왜요? 영적인 비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입니다. 우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슨일을 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경이 눈 뜬 사실을 사람들은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입니다. 이 소경이 눈 뜬 사실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소경이었던 사람인데" "아닌데"라고 논쟁이 있습니다. 감출수가 없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이 소경이 눈 뜬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지요? 영적인 소경인 나를 눈을떠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9장의 하나님께서 그를 소경으로 태어나게하신 이유 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그게 복음의 삶입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니라." 그런데 나같은 죄인중에 괴수를 구원하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왜요? 이와같은 죄인도 구원받았다. 여러분은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하는 샘플로 사도가 거기 서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부인할수밖에 없는 상황속에 있는 성도들을 굳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딱 하나 입니다. 핵심이 이것입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입니다. '실로암' 어디서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뜰수 있을까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합니다. 실로암 못이 뭐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보냄을 받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분이 세상의 빛이므로 그분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바라볼때 우리의 영적인 소경이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이 눈을 뜬다고 하는 이 영적 진리를 세상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를 날때부터 소경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 소경은 그 생애를 통해서 자기가 눈을 떴다. 사람들이 "어떻게 눈을 떴지?" 맨날 이야기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떴느냐?" 간답합니다. 실로암 못에 갔다. 구원받는 것은 단순합니다. 어디가서 구원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분이 누군가를 알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어떤일을 하셨는가를 알고 믿을때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는 우리는 우리 생애에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그냥 우연히 태어났는가? 태어났으니 잘 살아보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불행이라 할찌라도, 소경이라고 하는 불행한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광경 속에서 태어난 것,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믿는 가정에 태어났으면 복음을 들을수 있도록 어릴때부터 그의 마음이 세상 이론이 아니라 복음으로 가득차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상황과 조건과 관계없이 조건은 나빠도 하나님은 부르시는 자를 불러 구원하신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어떤 조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혹시 주님을 믿지 아니하셨습니까? "나는 왜 이러냐? 나는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 못믿겠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셔야 믿겠다. 아닙니다. 이 소경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나의 인생을 사용해서 구원이 이런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수 있다면, 주님 감사합니다. 이게 소경이 한 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입니다. 성도님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거기보면 '우리'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자"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까? 자기일을 하고 계십니까? 자기를 위해 살고 계십니까?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안하고 게으르게 살고 계십니까? 이것이 소경 거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눈 뜬것은 숨길수 없습니다. 구원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빛은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지 않을수 없습니다. 다른사람들이 인식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참된 변화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빛이 내 마음에 비춰서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을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이것이, 이 구원이 나의 삶을 바꾸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세상이 그 구원의 영광을 보고 함께 그 구원의 길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가 소경인것을 알게 하시고 그 소경이 눈 뜨는 방법도 알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책임과 결단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소경인 것을 시인하고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조건이고 이제 실로암 못으로 가야 합니다. 이상한 명령이지만, 갑자기 진흙을 바르고 이렇게 했지만, 침을 밷으시고 하셨지만 실로암 못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씻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놀라운 광명 속으로 원만한 광명 속으로, 점점 밝아지는 광명 속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고 다 함께 주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원하고 또 기도합니다.
'플러싱 모임 수양회 > 2019년 여름 수양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말씀 : 요한복음 3장, 거듭남 > (0) | 2021.07.25 |
---|---|
< 10. 사도요한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됨 > (0) | 2021.07.25 |
< 0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0) | 2021.07.25 |
< 07. 주님께서 본을 보이셨듯이 용서하고 서로 발을 씻기라 > (0) | 2021.07.25 |
< 06. 말씀의 순종과 사랑 > (0) | 2021.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