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3일 화요일
한봉래 형제님
< 06. 말씀의 순종과 사랑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2-2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사도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보면 말씀을 많이 아는분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사도행전에서 보면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구약성경을 수없이 인용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공회원들이 볼때 사도 베드로는 '학문없는 범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처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학문없는 평번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과 달리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적이 없습니다. 그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공회원들이 알고있는 두번째 사실은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입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말씀을 강조 합니다. 그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약에서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일치 시킵니다. 같은 말씀 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하나님, 신약의 예수님을 일치 시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난것은 말씀으로 거듭난 것이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사랑을 강조 합니다. 로마서 5장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어"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을 희생해서 우리같은 죄인을 구원하실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이렇게 갑니다. 똑같은 건데요. 베드로는 말씀을 강조 합니다. 말씀이 거듭나게 했습니다. 말씀을 따라 성도들을 서로 사랑해야 한다. 거듭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구원간증을 들을때에 "어떤 말씀으로 구원받으셨습니까?" 이렇게 합니다. 말씀이라고 했을때에 그것은 이런거죠.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수많이 알고 있지만, 어느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사용해서 우리 마음을 열고, 확신을 주고 생명을 주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어린 아이 입니다. 이제 성장해 가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말씀으로요.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입니다. 영적인 젖, 어린아이를 영적으로 성장시킬수 있는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장을 방해 하는 것, 죄입니다. 그래서 죄를 버리고, 저희들이 아이를 키울때에 항상 두가지를 하는 것입니다. 씻겨놓고 먹이는 것입니다. 깨끗히 씻겨주고 먹이고 죄를 피하고 말씀과 대치되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 이것이 성장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그는 말씀을 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번째, 교회가 세워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압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말씀대로 하는가?" 입니다. "말씀을 읽는가? 말씀을 아는가?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이 그의 구원여부와 성장 여부와 그가 섬기는 모임의 하나님 답게 이루어지는 것의 결정적인 요소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 전후서에서 사람들은 별 소리를 해도, 베드로가 어부인데 어떻게 이렇게 논리적이며, 구약을 인용하는 성경을 썼는가? 아닐 것이다. 베드로 전후서가 지금도 베드로가 저자가 아니라는 말이 제일 많습니다. 별 소리를 해도 그가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변화 됩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말씀을 사랑했고, 얼마나 말씀에 대해서 익숙하고, 말씀을 놀랍게 사용하고 있는지 베드로 전후서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구약에서 하나 찾고, 신약에서 하나 찾아 보겠습니다. 말씀이 결정적이다라는 예 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삼하6:1-3).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6:6-7).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삼하6:9).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6:12-19).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입니다. 다윗은 모든 역대 왕들의 기준이 됩니다. '다윗처럼 행하였다.' 선한 왕입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나쁜 왕입니다. 기준이 된 왕입니다. 왜 다윗은 그렇게까지 기준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근본적인 이유 하나는 다윗은 자기가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셔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왕으로 이스라엘에게 소개하는 일을 맡은자다.' 이것이 다윗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왕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요." 이렇게 하지요. 사무엘이 기뻐하지 않지요.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께 근심하여 기도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들이 왕을 구한 것은 나를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선치 못해서 그것을 핑계삼아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했을때에 답입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왕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셔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상징이 뭐냐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에 있어야 합니다. 왕궁에, 그 나라의 수도,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현실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그 곳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징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 오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지니까 언약궤를 전쟁 현장으로 이끌어 온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미신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의 통치권자라는 것을 명백하게 모든 백성에게 선포하고 그와같이 실행하려고 하는 다윗의 소원 입니다. 그래서 빼앗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보면 다윗이 드디어 언약궤를 모셔놓고 찬양 합니다. 찬양하는 노래를 보면 "이제 하나님이 여기서 총치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나라의 우리 백성의 왕이 되셨나이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 오려고 할때, 여러 신하들과 의논 합니다. 여기만해도 백성 삼만을 뽑아 간 것이죠. 그래서 대제사장이고, 선지자고 모아놓고 의논 합니다. "언약궤를 모셔오자." 그럴때에 다윗이 제안한 이유, 왜 언약궤가 다윗성에 와야 되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왕때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하자." 이것이 언약궤를 모셔 오려고 하는 핵심적인 이유 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하지 말자. 하나님 뜻대로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자.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 그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이것이 다윗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하나님께 묻자 그래서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어떻게 모셔올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극이 벌어집니다. 보면 언약궤를 모셔오는데요.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운반을 하냐면 수레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실수 입니다. 수레를 왜 썼을까요? 수레는 누가 쓴 거냐 하냐면, 수레는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이 전쟁에서 이겨서 근 언약궤를 자기들의 신상앞에 가져다놓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이것은 단지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지키실때에 다곤신을 엎드리게 만들고 신상의 목을 잘라 버리고 그래도 못알아 듣는 블레셋 사람들을 독종으로 치시고 그리고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때에 그들을 죽이시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광을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은 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리고 이 영광을 찬양하고 이 영광안에 있기를 즐거워하는 백성이 아닌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언약궤를 수레에 실고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요. 그 당시로 보자면 운반할때에, 언약궤가 무거웠기에 운반하기에 가장 최신식 이동기구가 수레 입니다. 그리고 소가 끄는거죠.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자기의 영광을 그들 가운데 여러번 나타 내셨어도, 계속 의심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건가, 아니면 우연인가?" 그래서 "새끼가 있는 소를 끌고 앞으로 직진하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 소들이 뒤 돌아보고 안 가려고 하면 새끼가 뒤에 있으니까, 이것이 본능입니다. 짐승들의 본능이 만약에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것이 아니다. 우연이다. 그런데 짐승들의 본능을 제어하고 그들이 바로 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것이다." 라고 했던 그 사람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했습니다. 수레 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씁니다. 이상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참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외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운반수단이 그렇게 중요하냐, 이렇게 할수도 있는거지." 하고 생각할수도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을 동원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쭉 잘오면 좋은데, 어디쯤 왔을때 갑자기 소들이 뛰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많고 소들이 흥분한 거죠. 소리는 나고 하니까 뛰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이때, 어떻게해야 하죠? 이 언약궤를 떨어지지 않게, 언약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또 나무로 만든건데 찌그러지거나 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웃사가 붙듭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죽이십니다. 왜죠? 선한 의도인데요. 하나님을 위해서 한건데요? 이 배후에 전부 뭐가 있느냐면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 입니다.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어떻게 이동할지, 언약궤는 출애굽 한 이후에 광야에서 모세가 만듭니다. 모세를 통해서 만드셨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린 헌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꼐획하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함께 임재하시는 상징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동 했습니다. 광야에서 이동해 왔습니다. 어떻게 이동해 왔지요? 레위 자손이 어깨로 매고 이동했던 것입니다. 레위 자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어깨로 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궤의 모든 규격과 재료를 명령하신 하나님이, 그 언약궤의 이동 방법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에 대해서 이와같은 명령이 있었습니다. "(안을 들여다) 보거나 만지지 말라. 만지면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요? 만지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일이 벌어졌을까요? "언약궤는 레위 지파의 어깨로 매야 한다."는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좋은 목표를 이루려 하였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 시작한 일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을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스라엘에게 웃사를 죽이심으로 하나님은 입증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지키신다." 입니다. 사람의 도움없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자가 은혜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내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한번 실수 해서 언약궤가 다윗성에 못 옵니다. 잠간 오벳에돔의 집에 놓고, 하나님이 오기를 원하신다 하는것을 이해하고, 그때 어떤일이 벌어지느냐면, 말씀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한가지, 제가 사무엘하 6장을 읽었는데요. '왜 블레셋 방식으로 수레를 사용했을까?' 하는 방식에 대해서 한가지 추측해볼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무엘하 6장 전에, 바로 그 전에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이 위대한 승리를 거둡니다. 블레셋을 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6장으로 넘어 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짐작해 볼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아니하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 당시 최고의 운송수단인 수레를 사용한 이유의 하나로 그가 승리했을때, 마음이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우리편에 계시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강해졌을때, 그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그래서 사무엘하 5장의 승리와 연결되서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은 수레를 써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역대상 13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수레로 운반하는 결정을 하기전에, 다윗이 이것을 혼자하지 않고 의논 합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대상13:1-4).
이 일은 수레를 쓰기 전입니다. 그리고 수레를 썼을때, 그와같은 승리에 도취했을 가능성이 있고요. 두번째는 제사장과 레위사람에게 물어 봅니다. "우리가 모셔 오려고 한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언약궤를 늘 이동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놓치면 이 사람들이 말해 줬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우리더러 하나님께서 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책임있는 사람이 책임있게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다음 다윗이 두번째로, 이번에는 다윗은 실수에서 배웁니다. 다시 말씀을 살핍니다. "뭐가 잘못 됬느냐?" 어디로 가지요? 말씀으로 갑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알아 냅니다. "레위사람이 어깨에 매야 한다." 그래서 다시 어깨에 매고 이제 이 하나님의 언약과를 다윗성으로 드디어 운반해 옵니다.
그때, 첫번째 다윗이 한것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기뻐서 춤을 춥니다. 춤추는 것은 저희들이 적용할수 없습니다만, 이것은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쁨은 무엇 입니까? 자기가 왕이 되어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왕으로서 결정하고 선택하고 싸우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 드디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때 보람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고..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 하셔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 그것보다 더 기쁜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 앞에서 춤을 추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갈입니다. "왜 저렇게 왕이 되어서, 옷이 다 벗겨지고, 이게 무슨 시정잡배처럼.." 미갈이 원하는 것은 자기남편 다윗이 세상 왕처럼 왕복을 입고 그 위엄과 권위와 화려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사울에게서 좋은 본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왕은 어떤 왕인지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다윗에게 와서 배웠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육신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다윗은 제사를 드립니다. 어떤 제사를 드리냐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항상 예배 입니다. 우리들같은 연약하고 패역한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우리를 변함없이 통치하기 위해서 오시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한 후에 우리를 약속한 그 영광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잘못할때마다 신실히 징계 하시며, 우리가 잘 할때마다 우리를 격려 하셔서, 마침내 그 약속에 이르게 하시는 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도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다 자기 몫을 즐기는,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 줍니다. 그날 백성들이 고기와 떡을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가정에서 식구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언약궤가 드디어 우리성에 오셨다. 다윗왕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우리도 기쁘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신 이 영광스러운 사실을 즐거워 하자."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이 이것을 대화하면서 그날 저녁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것을 관통해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말씀대로 해야한다. 말씀대로 하지 않을때에 슬픔과 재앙이 있다. 말씀을 살피고 순종했을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교제가 있고 온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날이 있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6:1).
구태여는 번역을 이렇게 했습니다만, 더 적합한 번역으로는 '감히'라는 단어 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2-11).
고린도 교회의 문제죠.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하는 교회 입니다. 지식이 많고 은사가 있었고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표현 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이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부끄럽게 하신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초반의 논쟁 입니다. 그 지혜는 어떻게 사용되느냐면, 그들 가운데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이렇게 한 거죠. 뿐만 아니라, 그 성도들 사이의 교제 가운데 아마.. 조금 추측을 해보겠습니다. 아마 누가 어떤 성도에게 돈을 빌렸을 것입니다. 갚을 능력도 의도도 없는데 돈을 빌렸을 것입니다. 빌려준 분은 이제 억울하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형제인 줄 알고 빌려 주었으니 나중에 당연히 갚아줄줄 알고 빌려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갚을 능력도 없고 갚을 의도도 없이 가져간 것입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정 합니다. 세상 법정에 세워서 그가 가진, 내가 잃어버린 돈을 반드시 되찾겠다. 했을때 그가, 세상 법정을 사용하려고 했을때 그가 '감히'그렇게 한 것입니다. 감히 할수 없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어떻게 사도바울이 이 문제에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되느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할것 같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의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 우리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언제 심판하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입니다. 신랑이 주님이십니다. 공중에 오실 것입니다. 공중에서 혼인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올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주님이 왕이십니다. 우리는 뭐죠? 왕의 아내 입니다. 거기있는 천년왕국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심판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관한 말씀 입니다. "교회가 뭐냐?" 하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게 창조된 것은 천사 입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이 천사가 부리는 종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낸 종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도들을 제대로 섬겼는지 심판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뭐라고 말하는지와 우리의 행동이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세상에서 교양있게 행동하고 세상보다 더 훌륭하게 행동하고, 또 도덕적으로 선택하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말씀에서 우리를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에서 수준을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씻음받은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씻음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쳐졌습니다. 씻은 것, 거룩한 것, 여기서 거룩함은 구분된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영광으로 불러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십자가의 피로 씻기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따로 구분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하나님이 이렇게 높이셨습니다.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형제간 일을, 형제들 간의 소소한 일을, 이 세상에 속한일을 해결할 지혜로운자가 하나도 없느냐?" 입니다. 그 지혜로운 고린도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있고 모든 구변에 부족함이 없는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바울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성경 지식은 이 실질적인 문제에 어떻게 사용되는가?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운데 지혜가 없거든 후히 주시고 꾸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형제간에 문제가 있을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어디 구석에 나와있는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있고 은사가 있는 고린도 교회가.. 왜요? 말씀을 모르는 이유는, 그런경우에 어떤말씀을 적용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기 신분을 놓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염두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맞게 실질적으로 살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핵심적인 것은 말씀이다. 말씀이 거듭나게 하고 말씀이 성장시키고 말씀이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말씀이 있으면 진리를 순종하여 깨끗하게 했은 즉, 사랑 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부터 시작해서 말씀으로 옵니다. 베드로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갑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믿음에 덕을 절제를 지식을..." 이렇게 하죠. 이게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믿음은 이미 갖고 있는 거죠. 그리고 어디로 가냐? 하면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강조하고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 반드시 형제를 깨끗하고 순수하게 사랑하게 된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랐습니다. 특별히 공부한 적이 없고, 그러나 주님과 함꼐 동행할때, 주님과 같이 늘 있을때에, 주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럴리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말씀에 주목 합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이 결정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을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말씀에 유의하라. 말씀에 서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성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한번 실패했을찌라도 다시한번 말씀을 살피고 순종할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물론 미갈과 같은 반대자들이 있을찌라도, 그러나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그날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함께 교제하는 복된 시간이 함께 주어졌던 것입니다. 저희들에게도 이와같은 은혜가 있기를 원하고 주님앞에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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