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7. 주님께서 본을 보이셨듯이 용서하고 서로 발을 씻기라 >

박이레 2021. 7. 25. 21:54

2019년 7월 24일 수요일

한봉래 형제님

< 07. 주님께서 본을 보이셨듯이 용서하고 서로 발을 씻기라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17).

시간은 유월절 전날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과 공생애 기간동안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제 이 밤이 새고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그날입니다. 그리고 잠깐, 전체적으로 보면, 요한복음은 1-12장까지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13-17장 까지가 사적인 사역입니다. 제자들하고만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18-19장은 다시 공적인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20-21장은 다시 사적인 사역입니다. 요한복음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날저녁, 마지막날 저녁, 최후의 만찬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그 유월절을 잡수시고 만찬을 제정한 그 날입니다. 그날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성령께서는 기록하셨습니다. 그날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기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그래서 이날 분위기는,

우리는 '그냥 주님께서 유월절을 잡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체포 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으시는구나.' 하는 분위기죠. 저희들이 성경을 읽을때에, 주님 마음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때가 이르렀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우편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 존중받는 자리에 그 능력의 자리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뭘 생각하시냐면 이제 주님이 높아시진다. 낮아지셨지만 이제 높아지실것을 목전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주님 마음에 있었던 생각 입니다.

두번째, 주님은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여기 열두명의 제자와 함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갈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이 자신이 높아지신다고 하는것을 염두해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이 두개가 결합되서 어떤 결과를 산출했느냐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높아지실때에, 그 영광에 들어가셔도 사랑하시며, 제자들이 그와같은 일을 할찌라도 사랑하시며.. 이것이 13장의 설명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떻게하게 될지, 그 사람이 사실 어떤지 모르고 사랑합니다. 모르니까, 사랑합니다. 저희들이 그런 우스개 소리를 하는데요. 제가 말씀을 전하고 다니니까, 어떤 자매님이 저희 자매를 부러워 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형제님과 같이 사는 자매님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 남편되신 형제님이 금방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서 살아봐." 차이가 있는거죠. 우리는 모르고 사랑합니다. 모르고 존경합니다. 주님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누군지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짓을 할지 아십니다. 우리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도 아십니다. 그리고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성경을 통해 아는 사람의 합당한 반응입니다. 어떤일이 벌어져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욥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이유없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루만에 전 재산이 날아가고, 모든 자녀가 죽고, 그래도 욥은 그날 그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 일어난 사건을 보면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앙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는 벌어질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기를 만나고 그런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다가 사고를 만납니다. 그 집이 갑자기 무너져서 죽은 것입니다. 그때에도 욥은 이렇게 믿을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고 사단이 나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할때에 주님께서 왜 나를 내어주셨을까? 자기가 잘못하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책임입니다. "사단이 그럴때에 하나님이 그냥 안된다고 하시면 되는데!" 그냥 넣어가지고 '내가 왜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가?' 라는 순간에도 베드로는 믿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렇게 될 줄을 알고도 사랑하신다." 또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 하십니다.

저희들이 믿는자들인데 성경에서 믿는자는 반드시 그 믿음을 시험합니다. 시험받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시험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인지, 진짜인지, 그 믿음속에 불순물이 섞여져 있지 않은지, 그리고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시험을 반드시 하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어떤 결정을 할때 이런 생각을 하면 참 좋습니다. "주님이 보고 계신다. 내가 어떻게 선택하는지,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 그리고 기대 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 어려운 결정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기대대로 선택한다. 이것이 우리 책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시험하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라." 그때에도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그것을 요구하셔도, 이삭을 내 놀으라고 요구하셔도 그 요구의 동기가 사랑임을 제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믿는자들의 책임 입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이 방에 들어왔을때, 원래 이스라엘에서는 저희들과 관습이 다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집에 들어오게 될때 발을 씻는 것이 관습입니다. 성경에 이런예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식사 초대는 했지만 이 사람이 초대한 집의 주인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올때 입맞추지 않았고 그리고 발을 씻칠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인인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기 대단히 힘들었을텐데, 들어갔다가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면 "너 따위가 어디를 들어오느냐?!" 하는 소리를 들을텐데, 그런데도 주님에 대한 사랑, 주님이 구원해주신 그 은혜의 사랑에 감격해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할때에 저희들과 자세가 다르죠. 의자에 앉아 있지만 쿠션에 기대는 자세지요. 왼쪽 손으로 기대로 오른쪽으로 식사 합니다. 그 주님의 뒤에 가서 그 발에 눈물로 그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때 시몬 바리새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 죄인이 내 발을 눈물로 씻기면 내가 당장 일어나서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네가 어디 감히 나에게, 부정한 죄인이!" 이렇게 할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받은 것이 큰자가 사랑할 것이 더 많으니라." 그래서 발을 씻는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관습입니다.

또 하나 관습은 어디서 알수 있느냐면, 나발하고 아비가일이 있을때, 다윗이 양 깎는날 뭔가를 요구 했는데, 나발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누구관대, 요새 주인 떠나는 종들이 많다. 너도 그 중에 하나가 아니냐?" 다윗이 나발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아비가일이 다윗앞에 갑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저는 다윗의 종의 발을 씻길 여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표현 합니다. 자신을 낮추되, 자신의 낮아짐을 표현하는 것이 발을 씻기는 종입니다. 다윗의 종의 발을 씻기는, 발을 씻긴다고 하는것은 관습적이며 종이 하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이 그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나는 그분의 신들메를 풀수도 없는자다." 신들메를 푼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발을 씻기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신을 벗어야죠. 그 다음에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나는 발을 씻길수 있는 종도 안된다." 이것이 침례요한의 대답 입니다.

제자들은 그방에 들어오면서 다 보고 있었지요. 물이 있었고 대야가 있었고 수건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식사하기 전에 발을 씻기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서 하십니다. 주님께서 일어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난처하게 되었다. 내가 했어야 하는건데.. 우리가 안하니까 주님이 하시는구나.'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발을 씻기실때에 아무말도 못하고 있을때에 베드로 앞에 왔을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이 어찌 제발을 씻기겠습니까?" 이건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종이 하는 것입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을 하실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합니다. 베드로가 상식적으로 맞는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영적으로 틀려 있습니다. 왜지요? 주님은 자기를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죠? 십자가에 죽으려고 하십니다. 그보다 더 낮아져서 부끄러운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그 죽음을 죽으려고 하십니다. 지금 이 발을 씻기는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낮아짐을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이 하려는 일을 잘 안다는 듯이 "안됩니다."라고 하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안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내가 너보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다. 내가 상황에 몰려서 하는일이 아니다. 이 일이 무슨 일이고 왜 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알고 한다."

성경은 항상 이렇게 저희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다 이해할수 없지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보다 낫다. 이것이 성경의 흐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맥박처럼 뛰어오르는 원칙들입니다. 이렇게하면 베드로가 물러나야 합니다. "내가 무슨일을 하는지 안다. 네가 모른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는 훗날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물러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안물러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이렇게까지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시는 것을 거부하면 만약,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무엇을 애기하죠? 십자가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한 것인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이렇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씻기지 않으면 너와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것은 물론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받을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상관있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기업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의 분깃이라고 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들이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목욕하여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얻고, 그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을 사는 동안 세가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적 세가지죠. 첫번째 사단입니다. 사단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우리의 육신입니다. 아직 몸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몸을 통해서 여러가지 유혹들이 들어옵니다. 그랬을때 몸을 어떻게 다룰것인지 성경의 원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때,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지, 세상과 어떻게 분리될 것인지, 이것을 성경이 다 말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주님 오실때까지 살아가는 생애동안, 이 세가지 적들이 우리를 공격해 오고 우리가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다시 발을 씻고 하나님의 교제가 방해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실패하면 무엇을 잃어버리느냐? 어떤 부분에서 손해를 보게 되냐? 상급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특징이죠. 양쪽 극단으로 갑니다. 안된다고 그랬다가 이제는 "주님 그러면 머리도 씻겨주시고 손도 씻겨 주십시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정말 깨끗해지고 싶은 신체 부위는 머리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좀 안들게 해주십시요. 생각을 깨끗하게 해 주십시요. 손, 주님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할때, 제가 자꾸 실수하고 또 온전치 못하게 섬겨서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주님께서 씻을 필요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안된다고 하다가 씻쳐 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그렇습니다. "주님, 목숨을 걸 지언정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해놓고 "나는 그 사람 모른다." 물론, 저희들이 여러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만, 주님이 물위를 걸어오실때 "주시거든 나를 오라 하소서." 그리고 인간중에 유일하게 물위를 걸었던 사람 입니다. 물 위를 걸어갑니다. 안전한 배를 떠나 바람이 부는 물 위로 거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또 파도를 보고 빠집니다. 항상 이와같은 특징이 있고, 그것이 저희들이고, 그래서 저희들이 베드로를 보면서, 베드로가 아니라 우리를 보고, 베드로의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앞에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다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행한 것을 아느냐?" 아까는 베드로에게 훗날 알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래서 이 두개가 다릅니다.

하나는 발을 씻긴다고 하는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그들은 아직 모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 할것입니다. 그때 알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아느냐?" 하셨을때, 이것은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인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 이 사실을 알지 않느냐?"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본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너희도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서도 했는데" 그리고 주님이 주님으로서 하신일은 항상 제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대속을 위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본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일을 "나는 못하겠다." 하면 자기를 주님보다 높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수 업는것입니다. 주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할수없는 발언입니다. 그럼 저희들에게 오면 저희들도 저희 가운데 발을 서로 씻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는, 주님의 가르침 중에서 이 가르침은 교회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을 놓고 말씀하실때 교회의 사도들로써 그들이 교회를 세우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가 세워지고 한것을 내다보며 하신 말씀이고요. 마태복음 24-25장은 보통 감람사 감화다. 라고 하는 메세지는 제자를 이스라엘의 남은자로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서로 발을 씻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발을 씻긴다고 하는것은 성도들 사이, 지역모임 안에서, 모든 지역모임 안에서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수준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건 저희들이 금방 떠올릴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용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용서 받았는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정말 그게 참된 거라면, 그의 실질적이고 그의 생명이라면 그는 형제 자매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갚을 의도 없이 돈을 빌려 갔어도 세상법정에 고소하지 않고 용서할수 있습니다. "내가 용서받은것이 어떤건데.." 주기도문에 이렇게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한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십자가 전입니다. 십자가 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용서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완벽하게 용서하셨습니까? 다시는 기억지 않는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임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의심할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는가?" 그 다음에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물로씻어" 주님께서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의식의 일환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어떻게하냐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임 가운데,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강단에서 말씀이 전해지기도 하고, 또 성도들이 교제할때, 말씀을 나누기도 하고 혹은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에 읽었던 말씀들이 자기 마음에 어떻게 감동이 되었는가를 나눔으로 서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입니다. 서로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정직하게 교제하여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두번째 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입니다. 제가 서양에 와 보면 말씀하고 잠깐 쉴때 간식들이 많이 있죠. 그것을 뭐라고 부르냐면 '리플레쉬 먼트'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성경에서 리플레쉬라는 단어가 육체를 위해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사용된 단어들이 있습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전16:17-18).

"시원케 하였으니" 아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사도바울을 만나러 와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랬을때 사도바울의 마음이 리플레쉬 된 것입니다. 마치 저희들이 목이 마르다가 혹은 집회의 말씀을 긴장해서 듣다가 잠시가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쪼코렛을 먹거나 해서 다시 재충전이 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집둥할수 있게 되고, 이렇게 된 것처럼 사도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듣고 괴로워 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일이 있는가?"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들이 찾아와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말씀을 직접 인용했는지, 아니면 말씀의 정신을 따라 교제 했는지, 교제 했을때, 그 마음이 시원케 되었다. 이것이 발을 씻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영적인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영적인 기대와 기도로 다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소망을 갖게했던 것입니다. 다시 몇개 더 보겠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몬1:7).

"평안함을 얻었으니" 평안함, 이것이 리플래쉬로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모임의 일꾼이었을것입니다. 그 집에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도망가버렸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돈도 조금 훔쳐가지고 멀리 도망 갔습니다. 어디로 도망가야하죠? 대도시로 가야 합니다. 숨어살수 있습니다. 로마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로 그가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를 섬겨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허락 없이는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를 형제로 대우해 달라. 나는 그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섬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부탁을 하는 편지 입니다. 여기에 용서와 이런 주제들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무익했으나 이제는 유익하고.." 이런 주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로, 사도바울은 빌레몬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면, 그가 성도들을 새롭게 만드는, 다시한번 헌신하게 만드는, 다시한번 영적으로 회복되게 만드는 형제였었다. 이것이 그가 가진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평안하게 오네시모를 편지와 함께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순종할 것을 내가 믿노라." 내가 뭘 말하면 그 말을 들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그보다 더 할 형제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선케 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해주는 형제에게 기대하는 바 입니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딤후1:16-17).

"유쾌케 하고" 이것이 리플레쉬 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황제가 네로가 되고 그는 처영당할 것입니다. 분위기는 굉장히 달라져 있습니다. 빌립보서와 굉장히 달라져 있습니다. 그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일꾼들이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 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사도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그래서 세상에서 여러가지 비방과 조롱이 있을때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영광인것을 그는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면회를 가서 유쾌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유쾌하게 했던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즐거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본과 그것을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따라갈때에 겪는 여러가지 고통 속에서 흔들릴때 다시 분명하게 그 길을 걸을수 있도록 그 마음을 다잡고 위로하고 함께 그 길을 가도록 권면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일이 있어도 내 마음으로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 용서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구체화 될 것인가는 두번째 문제 입니다. 놔두고 내 마음으로는 어떤 이유로든 용서해야 합니다. 나에게 어떻게 말했었고..

두번째, 말씀 교제를 통해서 서로 쉴때에, 말씀 시간에 모임에서 개인교제할때, 말씀으로. 이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때에 갑자기 내 마음속에 '저것을 내가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이와같은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때, 또 어떤 성도의 교제를 들을때에 '아 주님이 저 성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들을때 우리 가운데 발 씻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새롭게하는, 마음을 다잡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동안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고 성도의 교제가 없으면 우리는 끝까지 주님앞에 달려갈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주위에 내가 연약하고 다른 생각을 할때마다 우연인지 하나님의 손길로 찾아와서 나를 유쾌케 해주는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굳게 갈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성도님들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딤전5:10).

두 종류의 과부가 있습니다. 참 과부가 있고.. 모임안에 홀로되신 자매님들이 계시죠. 그런데 모임이 그런 과부에 대해서는 일단 가족들이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비공식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원해서 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공식적으로 도와야하는 과부가 있습니다. 이것이 참 과부 입니다. 이 과부는 풀 타임 워커처럼 돕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과부의 조건들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그래서 성도들의 발을 씻겼다고 하는것은 문자적인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대야에 물을 떠서 씻겨줬다는 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하기 힘든, 냄새나는 발을, 그 못생긴 발을 기거이 겸손하게 낮아져서 자신을 희생하여 섬겼던 일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모임 가운데 누구나 하기싫은데, 자기를 낮추고 희생해야만 할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상하지만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누군가 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모임 가운데.. 이것은 어떤 건물을 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도 해야 합니다. 요즘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집회때 소리 지르고 그래서 다가가고 싶지 않지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다가가서 사랑으로 섬기고 기도하고.. 그래도 안되지요. 평생을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일들을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감당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날 스스로 발을 씻기 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보았느냐?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서 발을 씻겼다. 너희가 그렇게하는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무슨 복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발을 씻기라고 말씀하셨다고하는, 그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주님의 제자로서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와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복된 사람입니다. 어떤 복인가요? 그는 이렇게 확신할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 제자다." 쉽게 표현하면,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 "나는 주님 가신길을 뒤따라 가고 있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복은 없는 것입니다. 로또가 복이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어떤것이 축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가 주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처럼 고귀한 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이 왜 필요하지요? 그 확신이 있을때에 그는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갈 것입니다. 더욱 주님을 닮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더욱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보다 큰 복은 없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진리에 순종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예가 나와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길을 가고 저희들이 섬기는 모임이 이와같이 발을 씻기는, 용서하고 말씀으로 씻기고 영적인 교제로 새로운 힘을 얻으며, 우리 가운데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있어서, 우리 모임이 발을 씻기는 모임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인것을 이 길끝에 영광의 주님이 기다리시는 것을 소망 가운데 살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