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박이레 2021. 7. 25. 21:55

2019년 7월 24일 뉴욕플러싱 수양회 / 한봉래 형제님

< 0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19).

여기 일곱명의 제자들이 갈릴리에 고기 잡으러 가는 장면입니다. 일곱명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요. 다섯명의 이름을 대고 있습니다. 베드로, 나다나엘, 도마.. 이렇게 다섯명의 이름을 대고 있습니다. 아마 이 다섯명이 언급된 곳은 요한복음에서 2장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이 사람들이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명의 이름은 대지 않았습니다. 어떤 제자들, 가룟유다를 빼놓고 나머지 제자들의 이름을 대도 되거든요. 여기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도 아닌데 두명의 이름을 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왜 두사람을 익명으로 처리 하셨는가? 많은 형제님들이 이렇게 이해 합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 집어 넣도록 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없는 두명의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 제자라고 생각하고 갈릴리 바다로, 주님이 나타나신 세번째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시기 전에,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실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삼일만에 부활한다." 그리고 제자들과 어디서 만나자고 했냐면 "갈릴리에서 너희를 만나리라." 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신 이유는 유월절 지키려고 온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왔는데 유월절 양이신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특별히 있어야 될 곳이 없습니다. 그들이 최후에 유월절을 먹고 만찬을 제정하신 것도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비밀리에 잡아준 방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때 어디로 가야 하냐면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갈리리로 가지 않습니다. 첫째날,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주에, 그 다음주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한번, 두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갈릴리 바다에서 세번째 나타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공적으로 제자들이 다 모여 있는곳에 나타나신 것은 이 세번으로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갈릴리로 갔냐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떤 소문이, 어떤 가짜 뉴스가 퍼져 있느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 그리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하는 가짜 뉴스가 퍼져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만약에 정말로 받아들인다면 제자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못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야한다." 그리고 저희들이 마태복음에 보면 갈릴리 산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첫째주, 둘째주를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갈릴리로 움직입니다. 그 다음에 갈릴리에 있으면서 약간 이상한 것은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것이 40일간 이땅에 계시지요. 부활하고 40일간 이 땅에 계시고 승천하시고 열흘만에 성령께서 오십니다. 이 사십일간 주님께서 몇번 제자들에게 나타났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공식적으로 누구에게 나타났고라고 하죠. 그런데 이때 주님이 나타나신 모습은 굉장히 제자들로서는 이상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는데 주님이 벽을 통과해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지십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그리고 자주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40일동안 매일 나타나신게 아닙니다. 첫번째 주일날 주님 부활하신 주일날 나타나셨지요. 그 다음 주중에 안나타나시고 그 다음주 주일에 나타나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갈릴리로 왔지만 주님이 언제 나타나실지 알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지만 어디가서 주님을 만날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일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전부 저희들과 같이 일상적인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계실때는 모든 필요를 주님이 채우셨지만 이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직업으로 "고기 잡으러 가자." 그래서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그 바다는 그들이 배와 그물과 부모를 버려두고 좇았던때 그대로 거기 있습니다. 그 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잡습니다. 그리고 한마리도 못잡습니다. 이것이 기적 입니다. 한마리도 못잡았다. 이것이 기적적인 것입니다. 그럴수가 없는 겁니다. 저희들이 이것을 읽으면 금방 이렇게 이해합니다. 누가복음 5장과 유사하다. 그들이 누가복음 5장에서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깊은데로" 깊은데로 가려면, 호수가는 깊지 않습니다. 깊은데로 가려면 배를 호수 중앙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는거죠. 그물이 찢어졌죠. 그들이 그물을 거둘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부를실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 고기가 한 마리도 안잡혔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고기가 한마리도 안잡힙니다. 그럼 이것은 갈아야 합니다. 그런데 감각이 안살아나서 한 마리도 못잡고 생각한 겁니다. 포기한다. 더 이상 그물 던질 힘도 없고 안된다. 못잡는다. 생각하고 돌아가자. 그렇게 그물을 거두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배를 원래 띄웠던 자리로 오고 있을때쯤 해안가에 한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얘들아" 누굽니까? 자기들을 얘들이라고 부를수 있는 사람, 그분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고기가 있느냐?" 배에서 고기는 생선이라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있느냐, 잡았느냐? "없습니다." 이제도 주님인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피곤해서 돌아오고 있는 일곱명의 제자들에게 다시 깊은데로 가라고 안하십니다. 이번에는 "오른편에 던지라." 그래서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특이하게 굵은 고기만 잡혔습니다. 고기라는 것이 잡다보면 잔챙이에서부터 큰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고기들이 잡히는거죠. 그러나 아닙니다. 굵은 고기만 153마리가 잡힙니다. 이렇게 됬을때에 주님이라고 알아본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이 맨 먼저 알아봤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것도 너무 늦게 안 것이라고 생각 되어집니다. 그랬을때 행동하는것은 베드로 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기위해서 겉옷을 벗고 있다가 이제 일을 해야 하니까 주님이라 그러니까 옷을 딱 입습니다. 그리고 이때 해안가에서 배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50칸쯤 된다고 했으니까 보통 100m정도, 물이 얕으니까 베드로가 바로 배에서 뛰어 내려서 주님께 걸어 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베드로는 이미 주님과의 교제가 회복된 상태 입니다. 이미 회복되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미 베드로를 사적으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베드로의 관계는 회복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라 했을때에 베드로가 망설이지 아니하고 주님께 나갑니다. 관계가 회복된 상태 입니다. 배를 나둬 버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배를 끌고 해안가로 옵니다. 와보니까 숯불이 있고, 숯불이죠.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했던 그 숯불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한번 더 말씀하십니다.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와라." 싱싱한 생선, 아침입니다. 중요한 스토리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침을 먹이십니다. 아침을 안드시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침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을 먹이시고 요구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이들을 먹이고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큰 스토리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분이 주신 줄 앎으로 당신이 누구냐라고 감히 묻는자가 없었더라" 이상한 표현이죠. 주님입니까? 주님 맞습니다. 그런데 왜 묻고싶죠? 왜 아닌것 같아 보이죠? 다시 보겠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주님이 부활하셨을때 제일먼저 주님 부활을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입니다. 그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입니다. 물론 주님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시신을 내가 찾기 전에는 나는 무덤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단호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천사를 보고 말씀대로 다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를 찾아가 주십니다. 떠나지 않을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라 부릅니다. 주님이 오셔서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해도 소용 없지요. 동산지기인줄 압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십니다. "마리아야" 그때 주님인줄 압니다. 그랬을때,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주님을 잡습니다. 이제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거죠. 그때 주님께서 "놓아라.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주님께서 놓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셨을때 제자들의 기대는 이제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같이 3년동안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계셔주실것이라고 기대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3년간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40일간은 조금 표현하자면 이유식 기간 입니다. 나타나신 것은 이유식입니다. 밥은 못먹고, 그래서 주님이 과거처럼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몰랐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주님이 맞아요. 그런데 정말 주님일까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한번 행동으로 주님이 하시는 행동으로 조반을 먹이시고 하는 이런 행동을 통해서, 과거의 주님과 똑같은 행동을 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각인 시킵니다. 저희들식으로 하자면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다. 뭔가 이상하지만 이 하시는 걸 보면, 우리에게 저번에도 떡을 떼어 식사를 주시던 주님 맞다. 그 주님이다. 그래서 그 주님을 인식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면,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주님께서는 배안에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배를 띄웠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해안가에 사람들을 놓고 베드로 배를 빌려서 약간 띄우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주님께서는 배를 빌린 값을 치루십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잡았지만 가서 고기를 잡아라. 고기를 잡았을때 베드로의 반응이 뭐였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디게 하리라." 누가복음 5장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같은 배 안에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들은 배안에 있고 주님은 해안가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21장이 끝나고나면 사도행전 1장이 나가고 나면 주님은 이제 하늘에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땅에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5장의 주님이 요한복음 21장의 주님이고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도 동일한 주님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각인 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누가복음 5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자가 되려면, 복음을 증거하려면, 죄인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전하려면 베드로는 자기가 먼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님앞에 서 있는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때에, 특별히 구원간증을 들을때에 그런 대목이 많은데요. 사람을 구원받도록 하는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첫번째가 두려움 입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무서움 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번 수양회 기간 동안에 굉장히 자주 인용된 구절이 "네 눈이 범죄하거든 빼어 버리라" 이 구절이 자주 나왔습니다. "네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 이것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구원받는 요소중에 하나가 휴거에 대해서 듣는거죠. 그런데 어느날 부모님이 예상과 달리 안계시면 그 자녀들에게 맨 먼저 드는 생각은 '휴거 하셨나? 그럼 나는 남은거네. 그리고나면 이제 환난속에 나는 남겨진 거구나.' 이런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그로 하여금 구원을 추구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구원받게 만드는 두번째 요소는 베드로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덕입니다. 주님이 어떤분인지를 알때에 구원받습니다. 그분의 은혜, 그분의 능력, 그분의 겸손하심, 그분의 희생, 이것을 알기 때문에,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영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전도자로서 경험해야 하는것은 죄인이며 두려움입니다. 이제 두번째 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들을 교회의 인도자로 교회의 목자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교회의 목자가 되려면 뭐가 필요하냐,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이 세번 부르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교회에서 섬길수 있는 중요한 동기가 무엇이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주님의 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동기가 그렇게 섬기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어보셨는데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베드로를 공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사적으로 회복시키셨고 공적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저희들이 잘 아는것이지만 이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당연히 아닙니다라고 대답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쩔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자기가 무시했던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 안합니다. 도망만 갔지요. 그런데 자기는 주님을 세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죄입니다. 그럴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사랑한다고 어떻게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대답하지요.

두번째, 주님께서 물어보십니다. 다른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그냥 주님과 베드로 두 관계 입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첫번째 질문에 사랑한다고 말한것은 아마 베드로가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그때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렇게 얘기했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이동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때 주님의 눈을 보고 나가서 그가 웁니다. 자기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 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상황에서 그는 울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대답한 거죠. 두번째,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때 베드로가 대답할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는데 "평안하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주님은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평안을 근거로 그는 대답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세번째 질문은 성도님들이 아시는데요. 그 사랑이 진짜냐? 그 사랑은 부인하지 않을거냐? 그 사랑도 상황이 어떻게 되면, 부인했듯이 또 사라지는거 아니냐? 라는 의도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랑은 제가 만들어낸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마음속에 두신 사랑입니다. 그때마다 어린양을 먹이라 그렇게 된 것이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번이나 부르신 것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시고 처음에는 이해할수 없었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먼저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까지 어떻게 했느냐면 첫번째,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것이 나쁜것 아닙니다. 두번째, 다른 제자들과 경쟁하면서 내가 더 사랑한다고 하고 다녔습니다. 세번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빼서 주님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사랑이 표현된 방식들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의 나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지 말고 그런 방법으로 나타내지 말고 이렇게 나타내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주님이 질문하신 의도 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전체로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 영광을 떠나 그 수치스러운 죽음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만약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고린도전서 입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해다오. 하는 것입니다. 지역모임 안에서 지역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들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서. 이와같은 형태로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물어보신 의도 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한가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첫번째 교회가 에베소 교회 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강력하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촛대를 옮기리라" 촟대를 옮겨버리면 그것이 교회겠습니까? 주님은 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여러가지 장점이 많은 교회에 대해서, 분별력이 있고 진리를 가르치고 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촟대를 옮기시겠다고 책망하셨을까요? 이유가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 첫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웁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때에 세웁니다. 그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첫사랑을 표현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19:19).

이것이 사랑이 표현된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우상이 많았던 곳이죠. 아시아 일대에 아데미 신전이 유명했던, 유명한 관광지 입니다. 그 신전 모형을 만들어서 팔아서 수익이 많았던 부요한 도시 입니다. 그런데 그 우상의 도시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말도 안되는 마술책들, 우상숭배 책들이 있는것 그것을 모아서 태워버립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은 5만이니까 그 값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마어마한 값이니다. 이렇게 하면 안될까요? 유명한 책방, 그 책방에 중고책으로 팔면 안될까요? 아니 개인적으로 쓰자는게 아니고 그래가지고 교회에 헌금하면 되지 않나요? 그렇게 안했습니다. 태워버렸습니다. 단호합니다. 아깝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처음에 그랬는데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합리적인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첫사랑입니다.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갔던 것들을 전부 모조리 태워버립니다. 이것만 태웠겠습니까? 마술책 아닌것은 나뒀겠습니까? 마술책 태울때에 그들 삶의 변화가 어땠겠습니까? 책만 태우고 똑같이 살았겠습니까? 그 다음에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다시는 못볼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는 장면을 보면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배에 같이 타고 전송 합니다. 예루살렘에 왜 가지요?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있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하고 자기 목숨을 거는 이 사도바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울고 했던 것이 에베소 교회의 사랑입니다. 또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16:8-9).

고린도전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쓴 편지 입니다. 그는 에베소에 머물고자 합니다. 이유가 뭐냐? 복음의 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이 역사하실때 사단도 일합니다. 복음의 문이 열려있고 대적하는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면 전도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가 수많은 반대 속에서 전도했던 것입니다. 핍박을 무릅쓰고 고난 속에서 전도 했습니다. 편안하게 전도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사랑이 마술책을 태워버린 것이죠. 사도바울을 위하여 울어준 것, 복음을 증거한 것, 그리고 에베소서 1장 3절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는 것" 땅에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기뻐했던 것, 이런 것들이 에베소 교회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게 무너져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촟대를 옮기리라" 저희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 사랑을 표현했었습니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물론 상황이 달라지고 성숙도가 달라지니까, 그 표현 방법이 달라지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점검해봐야 합니다. 사랑이 식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님 앞에서 이런 말씀을 세기고자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말고 우리가 사랑할수 있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그 사랑이 지역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는 것으로 말씀으로 먹이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라. 이게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부탁하신 내용 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름없는 두명의 제자들을, 우리를 놓고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 순종할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