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10. 사도요한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됨 >

박이레 2021. 7. 25. 21:55

2019년 7월 25일 목요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 한봉래 형제님

< 10. 사도요한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됨 >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요 20:2).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 21:7).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요 21:20).

잠깐 사도요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구원하실때에 그 이름을 시몬이지만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십니다. 요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한은 이름을 바꾸어 주시지 않았지만, 요한과 야고보가 두리 형제지요.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에게 뭐라고 하는 별명을 붙여주셨냐면 '보아너게' 입니다. 보아너게, 뜻이 뭐냐면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뢰니까, 천둥 번개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저희들이 요한복음에서 느껴지고, 또 요한일서를 보면 사도요한은 보통 사랑의 사도다라고 보여집니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그런데 원래 그런분이 아닙니다. 그의 원래 성품은 아주 칼같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분명하게 화를 내고 하던 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주님과 함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시는 거지요.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가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전 전에 전국에서 모이게 되지요. 모이다보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로, 예루살렘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무리들이 더해지죠. 그러면 쭉 같이 가는거죠. 가다가, 수가 많으니까, 어느 마을에 도착해서 주무셔야 되면 숙소도 마련해야 하고 복잡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니까, 사도요한과 하는 분들이 사마리아에서 주님과 자기들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구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예루살렘 가는 길입니다."하니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숙소제공 불가능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대인 사이에 서로 피차간에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하죠? 그때 요한이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을내려 이 마을을 태워버릴까요?" 이것이 보아너게 입니다. 물론 거기에 좋은 동기가 있을수 있을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가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주님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주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가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아무리 그래도 하늘에서 불을내려 태워버릴까요는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심판하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일이 있었냐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요한이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려면 우리와 함께하라." 함께는 안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쓰지 마라.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쓰느냐?" 이것도 나중에 주님이 책망 하십니다. 그는 잘못된 것을 보면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방향을 잘 못잡아 냈지만, 심지어는 이런일도 있었지요. 이 열정들이 어떻게 경쟁을 일으켜왔냐면,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표현되고, 그러니까 열한 제자들 사이에서도 경쟁심이 있는 것이죠. 요한은 어머니를 동원해서, 주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님 나라가 세워지면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의 좌편 우편에 앉게 하옵소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참 합당치 않은 주님이 들어주지도 않으실거고, 합당치않은 요청을 해서 스스로 무너지는구나 생각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분을 냅니다. 선수를 먼저 쳤네. 이것이 열한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겸손해 집니다. 저희들이 요한복음을 볼때 특징이 무엇이냐면, 사도요한이 열두제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자 네명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이 네명이 핵심 그룹입니다. 저희들이 복음서에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이렇게 열두사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름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첫번째는 무조선 베드로 입니다. 맨 마지막은 무조건 가룟유다 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룹들이 달라집니다. 그리고는 약간 순서가 달라지는데, 항상 그룹이 나눠지고 그 그룹의 인도자의 이름은 항상바뀌지 않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명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세사람만 주님이 데리고 가신 사건이 세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야히로의 딸을 살릴때, 세 사람만 데리고 갔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능력을 사용하실때 갑니다. 변화산상에 세명만 데리고 가십니다. 주님이 장차오실 왕으로서 영광을 드러내실때 세명만 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을때, 이때 세명의 제자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서에 기록이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현장에 있었던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특별히 택함을 받아서 주님을 목격했던 그 독특한 사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베드로와의 차이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렇게 합니다. 자기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바꿉니다. 요한은 이렇게 자기를 설명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다." 이것이 베드로와의 차이 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였다는 표현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섯군데를 제가 찾은 것입니다.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불의를 보고 참을수 없었던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열정이 있었던 요한이 어떻게 그가 참된 사람으로 겸손으로 변화될수 있었는가? 그 결과를 사도요한은 자기를 이렇게 묘사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 떄문에,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내가 변화됬다.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했다는것을 다섯번 기록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 기록은 요한복음 13장입니다. 다락방에서 입니다. 그 다음 요한복음 19장입니다. 십자가 옆에서, 그 다음 요한복음 20장입니다. 무덤에서 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현장에서, 무덤에서 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주님, 갈릴리 바다에서 입니다. 이 다섯번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라고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번의 장소에서 어떤일이 있었을까 하는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요한복음 13장인데요.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는데요. 주님이 열두제자와 함께 유월절을 잡수실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중에 한명이 나를 팔것이다." 주님은 너희중에 한명이라고 하고 구체적으로 이름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가룟유다인데, 그리고 제자들은 아무도 가룟유다가 팔자 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주님을 팔려고 나갈때에도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명절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일을, 그가 돈궤를 맡았으니 그가 하려고 가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모릅니다. 주님이 가룟유다 본인에게는 알립니다. "네가 나를 팔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제자에게는 안알려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 이 사람의 문제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가룟유다가 거듭나지도 않았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고 있음을, 주님은 압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답답해서 자기가 물어보기는 그렇고 요한에게 눈짓을 하고 요한이 물어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요한에게 알려 주십니다. 가룟유다인것을 알려주십니다. 요한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 어떤 사랑을 입었는가? 누가 배반할 것인지 알려주셨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 거죠? 누가 하나님의 은혜에, 왜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는지를 압니다. 가룟유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가룟유다의 문제점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너희중에 하나가 나를 팔것이다." 하셨더니, 제자들이 전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시면 "주님 혹시 접니까?" 제자들이 두려워서, 주님을 배반하는 일을 자기가 하고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그 가운데 있고싶지 않습니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인 받고 싶었습니다. "주님 접니까?" 쭉 이야기 했을때, 물었을때, 열한명이 똑같이 물으니까, 가룟유다는 어떻게 하죠? 그때 가룟유다가 회개할수 있는 좋은 기회 입니다. "주님 접니다. 제가 은 30에 주님을 팔기로 대제사장과 약속했습니다. 주님은 모든것을 아십니다. 주님 저를 살려주세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가 돌이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 입니다. 주님이 그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너희중에 한명이 나를 판다고 왜 이야기 하셨겠습니까? 제자들에게 이런일이 있어도, 회의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주님이 직접 선택하셨는데 사도들인데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그것이 아니고 주님은 처음부터 알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해할수 없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변함없이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주님이 미리 말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그 일이 닥쳤을때, 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이 미리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유다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놓쳤습니다. 왜요? 첫번째가 자존심 때문입니다. 다른사람이 다 물으니까, 자기도 위선적으로 똑같이 묻습니다. "접니까?" 주님이 알지요. 다른 사도들은 전부 "주님 접니까?" 라고 묻고 가룟유다는 "랍비여 접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정체가 탄로납니다. 그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랍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부른 칭호 입니다. 밤에, 어둠 속에서, 어둠속에 있는 사람, 자기가 천국에 갈수 있다 생각하고 확인 받으러 왔던 니고데모의 발언 입니다. "랍비여" 주님이 이렇게 물어보셨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믿지 않는사람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주님의 그 위엄 앞에서 선지자고, 예레미야고, 그분이 우셨기 때문에, 항상 슬픔의 사람이셨죠. 예레미야입니다. 그분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의 말씀을 전하셨죠. 침례 요한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미치지 못한 발언입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거죠. 가룟유다는 자신의 죄를, 자신이 행한 일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번째인거죠. 그 다음 두번째 문제는 저희들이 요한복음 12장에서 알수 있는거죠. 그가 돈을 사랑했습니다. 돈 궤를 맏고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한번에 우버릴때, 그 돈을,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것이 낫지 않느냐는 말을 통해, 사실은 자기가 그 돈을 가져갈수 있었다고 하는 그 마음의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느니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 사랑이 뭐냐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 나아오는데 실패할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룟유다같은 나쁜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속에 다 있는 모습 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주님 혹시 저인가요?" 라고 질문한 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뭐냐면, 그것을 씻을수 있는 밤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때에 어떤 자세를 취하시냐면요. 다 같이 앉아있었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녁먹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씻기를 시작하시매" 약간 상징적으로 해석 합니다. 저녁을 잡수신던 자리는 저녁은 주님의 죽음입니다. 주님이 유월절을 잡수셨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양이십니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벗으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실때, 주님의 무덤에 그 세마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씻기 셨습니다. 이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사역은 주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변함없이 이 제자들을,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살기에, 그들이 육신이 있기에, 사단이 그들에게 속삭이기에, 그들 가운데 있는 연약함들을, 죄악들을 변함없이 씻겨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내가 어떠한 죄가 있는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고 그 죄를 씻을수 있는 다락방에서, 하늘에 계신 주님과 교제할수 있는, 씻을수 있는 복된 원칙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은혜를 입고, 하나님이 발을 씻겨주시는, 그 주님이 내 발을 씻겨주시는 그 사역을 발을 내밀고 정결함을 입고 변화됨을 입고 이 과정들을 통해서 그가 드디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십자가에서 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도 요한은 자기 자신을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다"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첫번째, 우리의 모든죄를 용서받는 장소 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주님께서 대신 죽는 죽음을 죽으신 그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가 보았는가, 십자가를 경험 했는가, 중요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했을뿐만 아니라 또 하나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어머니이니라." 십자가가 하는 두번째 변화는 동일한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찌어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을때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찌어다" 또 주님이 부활하시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일러나. 내가 너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게 간다고 일러라." 예수님만이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부릅니다. 저희들이 놀랍게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부릅니다. 저희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 이렇게 기록하죠. "아비들아, 자녀들아, 청년들아"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족은 이렇게 구성 됩니다. 아버지가 있고 아이가 있고 청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람임을 그가 압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가족을 이루는 새로운 관계속으로 들어갑니다. 마리아가 어머니입니다. 자기는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그가 경험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넣어 주셨다. 이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섬기고 이와같은 삶을 통해서 그가 변화되 갑니다. 세번째 무덤에서죠. 무덤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있었는데, 주님 십자가 돌아가시고 같이 있었는데, 주일날 아침에 여자들이 와서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둘이 듣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큰일이다 싶어서 예수님의 무덤에 가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때에 요한이 먼저 도착하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나중에 와서 안에 먼저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에 대해서, 베드로는 들어가서 봅니다. 거기보면 뭐가 있냐면, 예수님의 수건과 세마포가 놓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합니다. "보고 이상히 여기더라" 이상한 일이다. 시신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세마포는 이렇게 있는 것일까? 이게 베드로 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그날 무덤가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 주님의 부활을 믿을수 있었다 입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는 부정적인 이유 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은혜 입니다. 부활입니다. 죄가 용서되었을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 4장에 주님이 내어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실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새 생명을 가지고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보라 이전것을 지나갔으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음을 입증할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주님이 죄 없으신 분이기에 사망이 주를 건드릴수 없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확인시킬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명으로, 하늘에 계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이땅에 살지만 계속 주님의 의로움을 가지고 살수 있는자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무덤가에서 부활을 믿고 그것을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가 자기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걸을수 있도록, 이제 더이상 하늘에서 불을내려 태워버리려고 하지 않는, 오히려 그를 긍휼히 여기고, 어떤 사람이 우리쪽에 속하지 않으면 "너는 예수님 이름을 쓰지마라" 하지 않고, 주님 마음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참으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권면하고, 이와같은 사도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갈릴리 바다에서 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은 십자가가 나오고요. 20장에서 부활이 나옵니다. 21장에서 뭐가 나오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에베소서 순서입니다. 승천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는데요. 이것이 우리로서는 어떤 측면이냐면, 21장은 뭐냐면 은사를 주십니다. 임무를 주시는 것이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21장에서 그들을 양을 치는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그는 "주님의 사랑을 입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이렇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임무속으로 부름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기를 잡았는데,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잡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임무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저희들이 늘 생각하는 것이만요, 주님의 직업은-좀 이상하지만-목수의 아들이십니다. 물고기를 잡는것은 이 사람들이 전문가입니다. 물고기는 어릴적부터 잡아왔고 어디서 어떻게 잡는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해도 안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무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임무는 어떻게 수행하느냐? 우리 능력으로 이루어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내 지혜를 내려놓고,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주님, 물고기를 제가 더 잘 아는데요. 갈릴리 바다는 내가 주님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요." 이렇게 말하지 않고 말씀을 의지하여 밤새도록 잡아도 없었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내렸을때,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사용되는 결과를, 사람이 해서, 그 사람이 수고해서 얻어낼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수 없고 이루어낼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현장에서, 우리의 인생을 값있게 만들이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때,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제자다." 마지막으로 나를 따르라 했을때 베드로가 따라갔지요. 사도요한도 따라 갑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물어봅니다. 이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신올때까지 그를 둔다해도 너는 상관말고 나를 따르라" 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비교하지 않고 각각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온전하게 평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상대적 평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야고보를 일찍 순교 시켰습니다. 베드로를 주님이 세번 열쇠를 주셔서 천국열쇠로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밧모섬에서 늙을때까지 고난을 받습니다. "내가 그를 다시올때가지 둔다해도" 이 말은 실제로 그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에게 계시록을 쓰게 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 공중뿐만 아니라 지상재림을 하실때, 이 세상에 있을 일들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왜 변화될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랑을 입었기 때문이다." 무슨 사랑이요? 인간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여러 반대와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계시록은 진리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는 다락방에서, 십자가 옆에서, 무덤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임무를 부여하고, 계시록을 쓰면서 그가 변화됩니다. 그는 보아너게가 아닙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도 놀랍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보면 압니다. 사랑은 희생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희생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요한이 변화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다락방에서, 십자가에서, 무덤 곁에서, 부활의 갈릴리에서 그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교훈을 그가 배우고 살아갈때 그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아너게를 사랑의 사도로 바꾸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또한 사랑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따라갈때에 우리도 놀랍게 변화시킬 주님을 기대 합니다. 그 기대와 기도속에서 저희가 모여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제가 주님이 누구신가 였습니다. 어떠한 분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이것이 그 주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말씀, 수양회를 통해서 저희를 바꾸시고 영광을 취하시고 저희와 저희 가정와 모임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고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