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1절

박이레 2026. 6. 16. 22:46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1절 / 마포모임, 20년

- 사회자 형제님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요한일서 2장을 같이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까지 1장을 저희가 공부를 했고요. 2장 1절을 오늘 저희가 같이 살펴볼 텐데요. 2장 1절은 1장 10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장 저희가 지난번에 묵상했던 것들을 이어서 교제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2장 1절부터 6절까지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1-6).

오늘은 2장 1절을 같이 살펴볼 건데요. 먼저 2장에 대한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2장은 저희에게 주신 계명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리, 계명을 지킬것을 말씀라고 있고요. 주님의 자녀로써 사랑을 실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반절에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나오고요. 그리고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들, 계명을 올바로 알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이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8절 이하에는 거짓 선생에 대한 경계에 대한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어떻게 행해야 되고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할것인지에 대한 교훈의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그래서 2장 전체적인 내용들에 대한 내용을 나눠주셔도 좋을 것 같고요. 첫 시작이니까, 그리고 오늘은 1절에 대한 말씀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같이 교제하신 내용들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1절 다시 읽고 다시 교제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예, 형제님들 묵상하신 내용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예,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 라고 친숙한 그런 호칭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하는데요. 죄에 대한 인정과 또 그에 대한 자백, 용서가 기록된 1장의 내용을 근거로 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또 악용하는 그러한 사례들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죄용서가 그렇게 쉽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 라는 그릇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는 건데요. 그러나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거죠. 어떤 성도라 하더라도 무한하고 영원한 용서를 받은 사실을 이용하여 죄를 짓는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씀을 분석하고 자기 주장이 맞다고 여긴다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고 죄 가운데 지낸다면, 쉽게 말해 죄 가운데서라도 평안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용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들이 범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목적으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요. 죄가 들어갈 여지가 삶 가운데서 '허용치 말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불완전한 육신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는 완전하다.", "흠없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멀리하지만, 미워하지만, 자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러나 성도들이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제와 또 화목 제물이 지어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아직은 이 땅에서는 그런 상태이지만,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대언자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없다, 또 의롭다, 이렇게 칭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언자이신 주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또 저희들이 더 안전한 것입니다. 이 율법으로는 마땅히 심판을 받아 죽음에 이르러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죄를 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닌, 재판장 앞에서가 아닌, 은혜 안에서 우리를 위해 용서를 기뻐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신 주님께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과 또 주님의 성품, 또 주님의 그 인격을 통해서 그 이루신 사역을 통해서 저희들을 지키시는 근거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한 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위의 집값을 온전히 치르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두 번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주님의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들에게 죄값이 부여되지 않는 것임을 이 1절 말씀이 또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주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그 십자가의 사역을 근거로 우리가 죄 없음을 변호하신다는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죄를 반드시 미워하여야만, 죄를 우리 땅 가운데서 허용치 말아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임을 또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사역을 떠올리셔야 되는 거죠.
저희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우리가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가 하는 것을 항상 새길 때, 죄에 대해서 분명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이렇게 여겨진 것입니다. 1절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주님께서 또 어떻게 저희들을 위해 변호하시는지를 분명하게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보겠습니다. 

- 형제님 1 : 네, 1절이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흠정역에서 보게 될 때 이것이 정확히 "나의 어린 자녀들아" 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어린 자녀들아" 라는 표현이 유한일서에서 자주 쓰이고 있는데요. 2장에서는 3번 쓰이고, 3장에서 1번, 5장에서 1번, 그래서 총 7번 쓰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가 요한일서에서 이제 사도 요한께서 성도들을 부르시는, 지칭하는 단어들을 살펴볼 때 "사랑하는 자들아"가 총 5번 쓰이고 있고요. 그리고 "형제들아"라고 하는 것이 2번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부를 때 마치 가족에게 말하듯이, 특별히 이 부분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부르듯이' 이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 부분은 막 거듭난 자녀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 '대언자',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연자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대언자의 의미를 살펴볼 때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요. 곁에 있도록, '특별히 곁에서 돕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단어 의미가 있고, 또한 판사 앞에서 죄를 변호하는 법정대리인, '변호사'의 의미가 있고, 또한 '중재자', '중보자'라는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의로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대언자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라는 단어로 쓰 이고 있습니다. 저희가 요한복음 16장 7절 8절을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죄를 짓게 될 때 이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제 저희의 죄를 책망하고, 그 이 '책망'이라는 단어가 '드러내고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끄시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게 이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리의 죄를 자백할 때도 이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빛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니라." 그래서 성령께서 저희를 위해서 그 탄식으로 저희를 중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백하게 될 때 하늘에서는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변호의 근거는 바로 다음 절에 있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친히 우리 주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음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볼 때, 맥도날드 형제님 주석에도 나와 있지만 그분은 우리의 죄를 범할 때에도 "우리의 아버지"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저희 아버지시며,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1장에서 살펴본 대로 "미쁘시고 의로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죄를 범하게 될 때 삼위의 하나님께서 모두 개입하시고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서 감사가 되었습니다. 

-이병호 형제님 :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사도 요한께서 노사도로서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 깊은 그런 애정과 사랑의 호칭으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제 죄에 대해서 1장에서 우리가 다루었고,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앞서서 교제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외로우시고, 또 우리 주님의 보혈로 이 죄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니까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의 구원이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1장에서 죄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또 주님과 그런 복된 교제 가운데 부르심을 받았고 그 가운데 있는데, 이런 교제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우리가 이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야 된다. 죄를 범치 않아야 된다. 이제 이런 부분을 말을 해주고, 그런데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표현을 하므로 우리가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1장에서 교제가 우리가 되어진 것처럼, 우리의 신분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시고, 또 이런 부분들을 말을 해주면서, 하지만 "누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늘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또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이제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이제 대언자의 의미에 대해서 앞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요한복음 14장에서 그 '보혜사'라는 단어가 이제 대언자라는 의미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주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주님 자신이 보혜사이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이제 보혜사가 두 분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이제 성령님이 보혜사로 계시고, 또 하늘에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주님께서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를 돕고 계시고, 또 변호해 주시는 것들을 이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언자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우리를 그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데, '의로우신 방법'으로 인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냥 뭐 감정적으로, 또는 어떤 그런 편파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의롭게, 이제 그 근거는 2절에 이제 교제가 되어지겠지만, 주님께서 그런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주셨고, 주님께서 그런 죄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그런 대언자로서 있는 것은 주님의 현재 사역이죠. 과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그런 해결해 주셨고, 현재 우리의 대언자로서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그런 아버지와의 그런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이제 대언자로 계시다. 
이제 이런 부분들을 생각할 때 계속 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죄는 참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이 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또 우리가 평생을 싸워야 될 죄인데, 되게 강력한 그런 적이고 또 그런 부분인데, 사도바울도 구원받은 후에 로마서 7장에서 이 죄를 생각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런 탄식할 정도로 죄가 참 강력한 존재를 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제 우리 주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시고, 또 우리 죄를 모두 담당하셨고, 또 지금도 우리의 대언자로서 의로우신 주님께서 이렇게 일하고 계시고, 죄도 강하지만 이런 1절 말씀을 봤을 때 그 무한하신 주님, 또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이 훨씬 강하고 그 안에서 모든 죄 문제가 지금도 해결되어질 수가 있고, 또 우리가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런 아버지와 관계가 언제든지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감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교제된 대로 1절과 2절은 이제 아버지와의 교제가 계속될 수 있도록 하시는 근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 사도가 1장 5절부터 10절까지 이것을 쓴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는 표현에서도 몇 가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그래서 '죄를 범할 때'라고 하지 않고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안 돼 있고, "누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죄를 범하면"이라는 단어의 시제는 '부정과거 시제'로서 현재형이 아니라 어떤 이례적인 사건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살펴보면, 죄를 범하는 것은 일반적이나 자연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계시지 않고 '특별한 상황'들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죄를 범치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함에도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만일 너희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해서 자기를 여기서 구분시키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러한 죄를 범하는 가운데 들어갈 수 있을 때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음을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앞에서 있다"라고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는 '대언자'가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 "아버지 앞에서"라는 표현은 1장 2절에도 나온 바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심바 된 자니라" 여기 "아버지와 함께"가 '아버지 앞에서'라는 단어입니다. 성육신 이전에 영원전부터 주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계신 분이셨고, 또한 이제도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께서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언자는 이제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 하늘에서는 아버지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대언자가 있다"라고 돼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있을 것이오, 이렇게 돼 있지 않고 이미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만일 누가 죄를 고백하면 대언자가 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누가 죄를 범하면 이미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항상 대언자로 계시는 분입니다. 항상 그 자리에 '이미 계시고' 이제 누가 죄를 범하면, 그가 아직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백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대언자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 대해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22장 31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내 형제를 굳게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제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이미 주님은 그를 위해서 아버지 앞에서 말씀하고 계셨고,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죄를 범하였을 때, 주님을 부인하였을 때, 사단은 청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형제를 참소하는 자로 활동하고있습니다. 그러한 참소에 대해서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앞에 말씀하시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을 기억하게 하셔서 그 죄를 깨닫게 하시고 자백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언자가 우리에게 이미 있다라는 사실은 이제 우리에게 참으로 얼마나 감사가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자백했을 때 대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백 이전에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이미 대언자로 계신 주님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 주님께서 대언하시는 활동은 '의로우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제됐듯이 아버지께서 의로우셔서 의롭게 용서하시듯이 주님도 2절에 나와 있는 주님의 화목제물을 근거로 해서 의롭게 대언하시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됩니다. 그분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 사람이시며 또한 '그리스도',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로 계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가 됩니다. 

- 이기범 형제님 : 2장 1절을 이렇게 1장 10절하고 한번 이제 연결해서 또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저희가 지난 이제 몇 주 동안 이렇게 5절부터 10절까지를 교제를 했습니다. 그 영지주의자들은 특징 자체가 물질과 비물질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8절, 10절을 보게 되면 영지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저희가 5절, 7절, 9절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저희가 대조해서 이제 볼 수가 있는데, 10절에서 그 영지주의자들은 사실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의 자녀들"은 이제 사도 요한이 이제 "나의 자녀들"이라고 이렇게 따뜻하게 이제 불러주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은 10절에 있는 영지주의자과 다르게 죄를 갖다가 범치 않는 것입니다. 죄를 범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죄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이고요. 많은 형제님들이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 나오는데 제가 이제 특별히 교제하고 싶은 것은 그 "앞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아까 형제님께서도 교제해 주신 것처럼 1장 2절에도 "이는 아버지와 함께"라고 돼 있습니다. 이 "함께"와 "앞에서"가 같은 단어인데요. 지난번에 저희가 1장 2절을 교제할 때 이것을 이렇게 함께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 '함께'라는 것이 단순히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장 2절에 보면 이게 사실 그 '함께', 그러니까 '향하고 있다'라는 것이 이 사귐에 있어서의 어떤 그 사귐의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향하여 1장 2절에서 보게 되면, 이 아버지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교제 가운데, 사귐 가운데 함께 향하여 계셨습니다. 그런데 2장 1절을 보게 되면 "아버지를 향하여" 이것은 이제 사귐과 교제를 갖다가 드러내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냐라고 했을 때, 바로 '대언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님 간의 사귐과 교제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뭐 2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을 이제 화목 제물로써, 그 대언자로서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데, 저희를 위한 대언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1장 2절과 2장 1절을 보게 될 때, 2장 1절에서 더욱더 감사가 되는 것은 아버지를 향하여 우리 주님이 계시는 것은 2장 1장 2절과 동일하지만, 2장 1절에서는 저희를 위한 대언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감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의로우신"에 대해서 교제를 해보게 되면, 저희가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또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이십니다. 의로신 분이시라는 거고요. 그다음에 영지주의자들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면 10절에 영지주의자들은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충격이 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과 비물질을 나누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고, 비물질적인 것은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사람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지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저희에게 대언자의 자격으로서 있으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저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이상입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요한사도께서는 이제 이 구절에서 권면하시고, 또 위로를 하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권면하시는 거고요. 두 번째는 위로하시고 있는데요. 어린 신자가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서 요한 사도께서는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어떤 건지에 대해서 저희가 이 구절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이제 요한 사도께서 "죄를 범치 말라"라고 하셨고, 둘째는 또 죄를 범하더라도 "대언자가 있다"라는 얘기를 하셨음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이 두 부분이 어린 신자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생길 수 있는 두 가지 위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앞서서 1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죄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하고, 또 잘못된 태도를 보일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범한 다음에 정죄감에 빠지고 절망과 낙심에 빠지는 그런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위험은 하나님과 신자 간의 사귐을 방해하고, 기쁨을 빼앗고, 낙심에 빠지게 하는 그런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 있어서 사단은 죄에 대해서 어린 신자들을 미혹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1장에 거짓 교사들이 또 교회사를 통해서 완전주의라든지, 이런 것들이 어떤 위험성을 계속 보였는지 저희가 살펴봤고요. 그래서 이제 미혹하는 거죠. 그래서 "네가 짓는 게 죄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한다든지,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전혀 죄와 상관이 없다." 이런 거짓 가르침을 통해서 죄 기준을 낮추고, 또 변명하게 하고, 또 합리화하게 하고, 부인하게 하고, 타협하게 하고, 이러한 미혹 가운데 이끕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교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단은 어떻게 미혹을 하느냐, 어린 신자들이 연약해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때 그를 죄인이라고 송사를 하고, 평안을 잃게 만들고, 심지어는 구원에 대한 확신마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이러한 죄를 짓고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죄를 지었는데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러한 너를 과연 하나님 용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희가 그러한 정죄라든지, 낙심 가운데 있을 때 정말 아버지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간구를 해야 되는데 그 양심에 찔려서 어떻게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나의 필요를 들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 교제가 필요한 순간에 교제를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경우 모두 하나님과 규제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인데요. 어린 신자가 아직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면, 이러한 사단의 미혹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장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고 죄를 용납할 수 없는 분이시면서도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저희가 앞에서 계속 선생님들께서 얘기했던 것처럼 변호자이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썼는데요. '예수'라는 말을 먼저 쓰심으로써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고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휼하셨다라는, 그러한 변호자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고 그러하게 우리를 변호할 수 있을 만큼 합당하신 분이다. 그런데 이제 이 변호자는 의로우신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 변호사가 어떠한 이제 기지를 발휘하고, 이렇게 조작하고, 막 술책을 부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재판에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목 제물로서의 그러한 근거를 가지고, 그러한 의로움을 가지고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은 이제 항상 사실 어떻게 보면, 이해하시고 들으십시오. 공정하지 않은 재판인 것입니다. 엄밀하게 어떻게 말한다면, 당연히 재판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재판을 하기 전에 판결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승산이 얼마 있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그런데 이 재판은 이미 이제 결론이 나 있는 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너무나도 유리하고 분명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이제 편파적인 재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에서"라는 말이 있는데요. 저 형제님들이 잘 설명하셨듯이 이 말은 이제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바로 아주 가까이서 서로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바로 앞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같은 마음으로 재판장과 변호사가 같은 편인 거예요. 이제 같은 심정이고, 같은 결과를 가지고 있고, 이게 하나님께서 '그래 한번 이 변호사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 그리고 한번 판단해 볼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용서를 다 하셨고, 변호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이미 작정을 하신 상태이고, 이 둘은 이미 한 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신자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고,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김영권 형제님 : 네, 2장 1절에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만약에 이 말씀에 대해서 처음 듣는 분이라면, 또 요한일서를 같이 저희와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던 분이라면,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이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문맥상 좀 다른 측면으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죄를 갖게 되면 저희가 복음을 증거할 때, 또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간다.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만 이렇게 설명을 한다면, 맞는 말이죠.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가죠. 천국에 가지 못하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짚고 죄를 해결해야 된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게 되면 거룩하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는 이 생애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될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보혜사이신 성경님께서,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죄가 없이 할 수 없고, 또 이것을 뭔가 나의 공로로, 나의 행위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으로, 의로우신 예수님으로서는 이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약간 좀 복음적인 내용을 한번 이렇게 짚어보았고요.
하지만 여기 문맥상으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나의 자녀들"이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인데 또 죄를 짓게 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언급을 하시면서 그 죄를 해결해야 하고, 만약 죄가 있는 상태로 하나님과 교제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씀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또 주님과 참된 교제 안에 있을 수 없는 불행한 그런 결과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구원받았을지라도 그럼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또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 죄를 해결하고 와야 한다는 것을 여기 요한 사도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구원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의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떤 행위로, 자신이 어떻게 노력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구원받았을 때 경험했던 그 구원의 모습을 우리 주님으로 통해 이루게 된다는 것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모두 다 경험이 있으시지만 구원받았을 때 저희의 행위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이 사실을 믿고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참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넘어지고 참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서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렇게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 받았을 때에도, 또 성도로서 참 어려운 관계에 있을 때에도, 저희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부분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 있는데요. 특별히 "이것을" 뭔가를 봤을 때 구체적으로는 앞에 나온 1장의 5절부터 10절의 내용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내용을 쓴 것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요한일서 1장의 이 부분을 보고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만 한 말이다." 아니면 "구원 받은 사람이 이제 그의 죄가 다 깨끗이 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짓는 것은 죄가 아니다." 뭐 이런 식으로 사도가 원래 의도한 바와 다른 결론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제 그들이 이 1장 내용을 가지고 다른 결론을 낸다면 그것은 모두 틀린 것이고, 우리가 단호히 거절해야 되는 내용인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분명히 이것을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 내용들이 어떻게 이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는가, 그것을 격려하는가, 사람들이 이 내용을 보고 표면적으로 보고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한다거나 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제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고 있고, 또 하나님이 그 거룩한 분이 어둠과 얼마나 섞일 수 없는지, 그 조금 어둠이 조금도 없는 분, 죄를 조금도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인지를 분명하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냥 놔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처리돼야 되고, 처리돼야 되는 것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을 또한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죄를 깨끗이 씻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대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아는 ,이런 사실을 진리를 아는 사람은 죄를 범치 않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로 욥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 대해서 증거하신 것인데,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모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기록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정말 마땅히 두려워해야 될 자로 아는 사람은, 그분이 빛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모든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욥은 항상 성결케 하고, 그리고 희생제사를 드리고, 심지어 모르고 혹시나 했을 죄까지도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걸 요한일서 1장으로 보면 자백을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요.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또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처리하는 방법을 제공하신 분도 아는 그 욥은 계속해서 모든 악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정말 경건한 모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서 "나의 자녀들아" 라고 사도는 시작을 하고 있는데요. 요한서신서에서, 이제 요한일서에서 많이 사용이 되었고, 그리고 특이한 것은 요한복음서에서 한번, 이제 갈라디아서에서도 있는데요. 이제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서에 보면 요한복음 13장에 주님이 제자들한테 "소자들아" '나의 작은 자녀들아' 이렇게 부르신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요한복음 13장은 이제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때 이제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말씀하시고, 또한 베드로도 실족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자들아"라고 이제 애정을 담아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보혜사를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잠시 떠나지만 다시 올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소자들아"라고 불렀을 때에 그들에게 곧 닥쳐올 그 시험과 어려움이 있지만, 이제 그것을 주님께서 대비해 놓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표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도 그런 부분을 볼 수가 있겠는데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베드로는 '내가 구원받은 게 맞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시험에 빠진, 실족한, 이제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또 사도는 여기서 이제 이 이야기를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제 여기서 "아버지 앞"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제 그리스도인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인들,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는 그 신분이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요한일서의 언어로 하자면, 저는 이제 요한일서에서 그 '사귐'을 특별히 구원을 나타내는 사도 요한이 특별히 사용한 그런 용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 구원뿐만 아니라 거기에 많은 특권이 들어가 있는 그런 표현인데요. 그가 죄를 범했지만 그가 그 구원을, 그 사귐을,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것은 그의 구원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귐이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물론 그가 다시 자백하고 그 사귐의 기쁨을 회복해야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는, 이제 앞에 형제님도 말씀해 주셨지마는, 이제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죄를 지은 사람 편에서 뭘 해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이미 그 사귐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근거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앞에 말씀해 주시지만 이게 이제 이절에 나와 있는 "아버지와 함께" 대언자가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이 장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와 함께 교제하고 계시는 대언자, 그리고 그 대언자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의로심을 보고 우리의 사귐을 계속 영원토록 가지고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고요. 재판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시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사귐을 원하시고 우리가 사귐의 기쁨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그분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사귐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비록 이름이 대언자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신다는 뜻이지만, 그분이 어떤 말을 해서라기보다는 그분의 존재 자체가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그 사귐을 계속 나눌 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셔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모든 사역을 완전히 이루신 분임을 또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귐은 바로 그 아버지와 함께 교제하고 계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대언자로 인해서 계속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앞서서 많은 형제님들이 교제를 해 주셨는데요. 조금 안 된 부분만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계속 "나의 자녀들아" 이 표현이 인제 믿는 자들을 부르는, 특별히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믿는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표현입니다. 저희가 아마 2장 13절 이하에서도 공부를 할 것 같은데요. 12절에 똑같은 단어, "자녀들아" 있고요. 그다음에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그래서 아비, 청년, 아이들, 이 세 사람을 다 포함하는 단어가 "나의 자녀들아"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작은 아이들아', "소자들아" 앞서 형제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믿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그 애정을 담아서, 그들이 무슨 진짜 영적으로 어리다든지, 신체적으로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아이들아"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그 주님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신자들을 향해서 "나의 소자들아"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정말 주님의 이러한 사랑과 애정 가운데 있을 때 정말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요한일서 전체 주제인 것처럼 성도들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찾아보시면 요한복음 13장 33절 이하에 "서로 사랑하라 그래야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이와 같이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이제 여기 "누가 죄를 범하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게 조금 설명을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시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한일서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아까도 형제님께서 "만일 누가" 이런 단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여기 보면 3장 6절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3장 9절,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이제 이 말씀하고 이제 저희들이 혼돈하기가 쉽습니다. 3장 6절, 9절에 있는 단어는 그 범죄하다라는 단어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습관적으로, 혹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혹은 그의 삶 자체의 특징이 죄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결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고, 저희들이 베드로후서에서 배운 것처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희들이 마음에 둬야 될 것 같고요. 결코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 죄가 아버지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걸 즐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했을 때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5절부터 계속 공부해 온 대로 빛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저희들이 해야 될 책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7절에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저희들이 빛 가운데서 거해야 되는 거고요. 두 번째로는 9절에서 '자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7절에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 모든 죄에서 깨끗히 하실 것이요." 그 2천 년 전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여전히 유효하도록 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의 피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요. 두번째 실제로는 9절에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2장 1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저희들에게 제공해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늘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임없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보혜사, 또는 대언자에 대해서 문자적인 뜻이 '곁에서 돕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한 대상을 곁에서 돕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이 보혜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곁에서 제자들을 영적으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믿는 자들 안에 거하면서 믿는 자들 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우리를 곁에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다음에도 보혜사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보혜사라고 번역하지 않고 '대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대언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하늘에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서 대언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 주님의 그 사역을 근거로, 이 절에 기록된 그 사역과 주님의 인격, 그 의로심을 근거로 그 성도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일을 하시고 여전히 아버지와 성도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교제가 가능하도록 대언자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금 두 분의 대언자가 계십니다. 저희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또 하늘에 보혜사가 계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성령님이 계시고 아버지 앞에서 저희들의 대언자가 계시는 것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1절에서 저희들은 그 3가지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을, 우리가 연약해서 죄를 짓게 된다는 걸 아십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지은 성도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마는, 단 한 번도 죄를 즐기거나 죄를 용납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단 한 번의 죄도,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게 하나님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번째는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제 그 원인이 이제 세 가지죠. 이렇게 육신, 세상, 사단, 그랬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제 이 3가지 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도들이 점진적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 그다음에 이제 실패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죄에 빠진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고, 아까 나왔습니다마는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장치를 두고 계신다. 이게 인제 이거 말해 놓고요.
그다음에 이제 계속 나왔는데요. '하나님' 그러면 항상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고, '아버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면 이건 '가족적인 문제'입니다. 가족의 문제로 다루고 계신다. 그런 면이 강조돼 있는 표현 같고요. 또 하나는 이제까지는 이제 전부 주어가 "우리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우리' 속에는 사도요한도 들어가 있고, 구원받은 성도도 들어가 있고, 심지어는 거짓 교사들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1장에서 나온 것들은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2장부터는 뭐가 나오냐면 "누가" 그렇게 돼 있습니까? 누가 영어로 하면 '애니맨'입니다. 애니원, '누군가가' 여기서부터는 이제 개인적인 적용입니다. 1장에 있는 보편적 진리를 들은 사람들이 이제 이 '진리를 자기 삶 속에서 그 진리대로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장에서 나와 있는 어떤 주 변화라고 보여집니다.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을 말해왔습니다. 그건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다음에 2장에서는 교제를 유지하는 자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의 특징, 그게 순종과 사랑으로 일단 2장에서는 표현돼 있습니다. 이게 이제 2장 1절의 의미라고 보여집니다. 네, 이상입니다. 

- 사회자 형제님 : 네, 교제에 참여해 주신 형제님들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2장 1절까지 교제한 것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