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9절 / 마포모임, 20년

박이레 2026. 4. 17. 22:53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9절 / 마포모임, 20년

- 박성호 형제님 사회 : 오늘 살펴본 말씀은 요한일서 1장 9절인데요. 제가 몇 구절 읽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오늘 말씀은 1장 9절인데요.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이 있는 부분이 있고 또 사회를 준비하면서 괴로웠던 옛날 일도 떠오르기도 하고 또 착잡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러면서 또 다시 한번 바른 교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좀 서두가 길어질 수 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1장 9절은 1장 8절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인데요. 8절에서의 거짓된 모습과 9절에서의 참된 모습이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뜻은 이제 하나님과의 계속 전반적으로 저희가 사귐의 조건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자백'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백이라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그것을 피한다면 하나님과 교제를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백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 관계에 있는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사귐의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자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정의를 본다면 이제 문자적으로는 재판관이 선고를 내릴 때 그대로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나의 죄를 빛 가운데 드러냈을 때, 피하거나 변명하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구약에 사무엘하 12장 13절에 이제 나단에 질책할 때에 다윗이 아무런 변명과 부인 없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나쁜 예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자백의 예로는 이제 아담이 있습니다. 아담이 변명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뭐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예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자백을 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또 한번 보겠습니다. 장원 20장 27절에 보면 이제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죄를 범하게 됐을 때 그 마음 가운데 양심에 불이 켜집니다. 그리고 성도가 서로 성장하고 성화되면 될수록 양심이 더욱더 커지게 되는데요. 이런 양심이 있다라는 것은, 양심이 이제 발동해서 죄를 지적하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올바르게 지금 성화가 되어가고 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런 올바른 교리 가운데 있다면, 예전에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조차도 더욱더 예민해져서 어두운 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백의 대상에 대해서 본다면요. 이 자백은 다윗이 고백하기를 시편 51편 4절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거는 분명히 밧세바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졌지만 '주님께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자백해야 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뭐 선교단체라든지, 그런 데서 이 자백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도리어 나타내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가 크고 크면 클수록 그걸 얘기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더욱더 크기 때문에, 그것을 이 자백이라는 행위가 그런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것들의 부작용은 뭐냐면, 그걸 듣는 사람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말미암아서 자백을 한 사람에 대하여 편견과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백을 한 사람이 자백을 한 이후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면,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자기 죄를 자백할 때 자기가 더욱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거를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요. 물론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죄를 다른 사람한테게 졌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직접적인 자백의 대상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자백하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시편 32편 3절, 4절에서 나와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자백을 하지 않았을 때의 상태가 영혼이 메말라 있는 것인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자백하지 않고 있는 죄악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그 샘물의 구멍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백을 한다면 마치 우리가 괴롭게 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를 그러한 무거운 죄책감과 영혼의 목마름에서 자유케하고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왜 자백을 해야 되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면, 시편 51편 17절의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라고 하나님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위해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저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러한 자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시고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이러한 자백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가 독생자의 희생을 근거로 한 거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대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해서 마치 우리가 자백을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는데요. 용서의 어떤 근거가 우리의 자백의 행위에 있다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그러한 용서의 주도권이 저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 용서에 대한 어떤 합당한 반응일 뿐인 것입니다. 저의 자백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졌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올바른 자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도 않았는데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해서 이러한 성화의 수단으로 이 자백이라는 것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영원한 속죄의 복음을 모르는 경우이죠. 지난 시간에도 나왔지만 또 저의 경험과 또 많은 성도님들의 경험을 통하여서 교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런 잘못된 기도, 그러한 잘못된 자백에 대해서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도회에 나와서 집회에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눈물로써 부르짖는 그러한 잘못들, 저 같은 경우는 이제 어렸을 때 꼭 자기 전에 죄를 다 고백을 하고 용서해 달라고 했는데, 안 그러면은 주님께서 저가 자고 있는 동안에 재림하셨을 때 미처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어서 휴거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던 그런 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잘못된 자백이 처음 죄를 지은 그것부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 지은 죄까지 고백하는 것, 이것이 잘못된 또한 자백의 한 예인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죄를 적은 종이를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산에서 날리기도 하고, 강물에 종이배를 만들어 떠내려 보내기도 하고, 또 촛불에 태우기도 하고, 이러한 것을 마치 자백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지금도 가끔씩 교파 교인들을 만나고 하는데요. 그러면 어딘가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올바른 자백을 하는 사람이, 그럴지 모르겠는데 거의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이러한 온전한 속죄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자백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또 다 어떤 잘못을 범하냐면 이 구절에 대해서 거짓된 교사들은 '처음 구원받을 때의 모습이다'라고 합니다.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그 이후로 어떠한 자백도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이제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저희 모임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포교회와 교제하는 어떤 분께서 이렇게 얘기를 하셨죠. 그리고 하신 말씀 중에 어떤 게 있냐면, "죄 가운데 뒹굴고 있어도 평안해야 된다." 이런 말도 하셨죠. 그런 말들에 미혹돼서 청년들이 파당을 짓게 되고 출교를 당하였던 그러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이 영원한 속죄를 강조한 나머지 지나치게 나가서 신자가 더 이상 죄와 상관없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과 상태에 대한 무지인 것인데요. 요한일서 1장 9절은 상태에 대한 얘기고,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그런 자백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들처럼 잘못을 계속 범해서 자백을 하지 않는다면, 제가 앞서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 안전장치가 이제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이 무뎌지게 되고, 화인 맞게 되고, 성령이 침묵하게 됨으로써, 그가 죄를 점점 더 짓게 돼서 결국 세상 사람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여부도 불분명하게 되고, 만약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구원이 정말 거짓일 가능성이 굉장히 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최근에 자기가 이러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하지만 교회사를 보면 이미 이와 비슷한 주장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러한 영향 가운데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이렇게 해서 영향을 미쳤던 교회사의 유명한 사람들 예를 좀 들어보면 '존 웨슬리'가 있습니다. 형제님들도 잘 아실 텐데요. 존 웨슬리가 주장한 것들이 대표적인 게 '완전성화론'인데 그가 한 말이 모든 죄를 근절시키는 순간적인 변화의 순간이 있는데, 이것을 완전한 성화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했고, 죄가 우리 본성에서 근절될 수 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만약 그의 가르침대로라면 성화가 된 사람은 자백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존 웨슬리는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잘 아시는 토마스 아캠피스, 마담 비용이라든지, 페넬롱, 이런 영향을 받아서 또 자기가 잘못된 영향을 후대에 미쳤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존 폭스' 같은 퀘이커 교도인 것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의 글을 보면 내면의 빛을 추구했는데요. 근세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정의를 하면, 그다음에 또 영향을 준 사람이 잘못된 영향을 준 사람들이 '구세군'입니다. 잘 아시죠. 그리고 캐직 사경이라든지, 제시펜, 루이스, 앤드류, 머리, 워치만 리가 있습니다. 아레이, 토레이, 저희가 이런 사람들의 책을 볼 때 그 가르침이 존 웨슬리에게서 나온 것이 굉장히 많다라는 것을 안 상태에서 비판적으로 봐야 되고, 사실은 보지 않는 게 사실은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구세군에 대해서는 이제 저희 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있습니다. '아이언사이드' 형제님이 초기에 구세군에서 이제 경험한 것을 적어놓은 책이 있는데요. '거룩, 진실과 거짓'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잘못된 성화론에 대해서 잘 나와 있고, 이 사람들은 자백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선천적인 죄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아담의 수준으로 바뀌었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죄가 없는 거죠.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러다 보니까 공상이죠. 이것은 공상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여기다가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위선을 하게 되는 거죠. 아니면 거룩의 수준을 낮춰서, 낮추고 낮추고, 낮춰서, 계속 자기가 그런 거룩한 자로 있다라고 이렇게 여기게 된다든지, 아니면 계속 실패하다가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영향을 받았냐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찰스 핀입니다. 이 사람 아주 유명한 분이죠. 이 사람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마서 7장의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경험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이제 교회사적으로 이제 이 자백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죄와 칭의와 성화와 이런 거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되면, 그 이후에 그 삶이 굉장히 안 좋은 그런 영향 가운데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특히 이제 요한일서 이 부분, 이 부분을 아주 조심스럽게, 또 신중하게 살펴봐야 될 그런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가 서두를 마쳤고요. 여러 성도님드, 형제님들도 준비하신 교제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9절 말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 형제님 1 : 네, 9절 말씀은 자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자백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좀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7절에 보면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와 함께 사귐이 있다"라고 했고, 우리 죄를 다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 저희가 사귐을 갖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여기 7절에 나온 "이 모든 죄에서"라고 하면 '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9절에 "죄를 자백하면" 또는 또 8절에도 나온 "죄가 없다라고 하면" 이건 '죄 행위'에 대한 언급이라고 저희가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난번에 교제를 했는데 저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죄가 없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보실 때 죄에서 깨끗하다고 인정함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고요. 그래서 다윗의 예를 들었었는데, 관련해서 시편 32편 말씀에 보면 일전에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셨을 때 깨끗한 자로 죄가 가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육신이 있고, 죄의 본성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죄의 행위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끊어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귐을 갖기 위해서 저에게 복을 주시고 창조를 하셨는데 그러한 교제가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저희가 죄를 자복하고 사귐의 회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2편 5절에 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악을 사셨나이다" 라고 자백함으로 인해서 사귐이 회복되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요한복음 13장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이 발을 씻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목욕을 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 보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가려움을 받기는 했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라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씻을 것이냐, 깨끗하게 할 것이냐, 관련해서는 에베소서 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래서 저희가 말씀에 비춰서 저희의 죄를 자복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죄를 깨끗하게 하고, 또 거룩한 삶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 전효진 형제님 : 네, 형제님들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 9절의 이 '자백과 용서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회자 형제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죄를 자백하며 산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해서 죄에 사로잡힌 종의 삶을 살고 있는 거라면서, 따라서 여기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고백이다.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직도 죄에 매여 살고 있느냐? 우리는 죄 문제를 다 끝내고 평안함 가운데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던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은 말하는 거죠. 아직 육신을 잇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그런 죄악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양심은 아는 겁니다. 어쩌다 허물이 행동으로 드러나거나, 또 아니면 마음속에 옛 본성인 음란이나, 시기, 미움, 탐심,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였었나, 아직도 이 육체 가운데 이러한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사실로 인해서 죄의 송사가 있다면 그 양심은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빛이신 거죠. 그 앞에 그래서 아직까지는 불완전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완전하다' 하는 것은 이게 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신분적으로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지만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는 가운데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태적으로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허물이 있다면 반드시 주님 앞에 나와서 자백을 해야 되는 절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 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십자가 보혈은 언제나 효력이 있는 거죠. 그 사실 가운데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증받고, 이렇게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시편 말씀을 이렇게 인용한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잠시 교제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그 다윗이 그 범죄함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밝히 드러낼 때, 모든 것을 깨끗이 하신 그 주님의 사역과 그 성품을 근거로 저희들이 화평한 관계를 지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크게 방탕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에 속한 이들은 어둠의 일을 반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안에에 자기를 비춰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들을 용서하기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심을 이 말씀을 통해서 또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의 성품대로 또 자백한 자들을 또 기쁘게 맞이하시는 이 말씀을,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을 더욱더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그런 말씀이라고 또 여겨집니다. 이상입니다.

- 조재훈 형제님 : 2장 12절 말씀과 한번 비교를 해보면요. 2장 12절에서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사함을 얻은 것'은 '완료형'으로 돼 있습니다. 2장 12절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죄가 사함을 얻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 흘리신 것을 근거로 하여 이제 그것을 믿었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고,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사법적인 용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받는 죄 사함입니다.
이제 1장 9절에서는 여기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제 구원받은 자녀들이 이제 그 죄를 자백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서 '죄를 사하신 것'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은 형제님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아버지가 대상이고, 또 우리 죄 해서 이것은 '죄들'이라고 해서 '구체적인 죄들'입니다. 그래서 뭉뚱그려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빛 가운데 있는 자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에게 붙여주신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죄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교제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도 동일하게 그것에 대해서 죄라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또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것임을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죄들을 깨닫게 하실 때 그것을 감추려 하거나, 또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고 그 전부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교제된 대로 고백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관대하거나 자비를 베풀어서 용서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관대하시거나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고 돼 있지 않고,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그것만이 고백한 자의 양심에 확신을 줄 수가 있는데, 미쁘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근거해서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의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성품에 일치하게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흘리신 피를 근거로 하여서, 또한 이제 이런 약속에 근거하여서, 항상 그 말씀대로 정당하게 우리의 잘못들을 용서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용서함은 의로운 용서이기 때문에, 또 변치 않는 용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히 하신다"라고 약속돼 있습니다. 그런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불의해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돼 있는데, 깨끗하게 한 거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부정한 자가 깨끗함을 입어서 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이 듭니다. 형제님 교제하셨듯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이제 복된 사귐 가운데 그 즐거움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이 듭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는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불의해서 떠나게 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사귐의 즐거움 가운데 회복시키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 형제님 2 : 이 부분에서 '자백'이라는 단어를 저희가 살펴보게 될 때 요한일서에서 자백이라는 단어가 이외에도 다른 구절들에서 쓰이는데요. 요한일서 2장 23절에서는 "아들을 부인하는 자와 아들을 시인하는 자"가 나오는데 이 '시인하는 자'의 '시인'이라는 단어로 쓰였고, 또한 요한일서 4장 2절,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 그리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한 영", 해서 여기서 또 '시인'의 단어로 쓰였고 요한일서 4장 15절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해서 여기서 또 '시인'이라는 단어로 쓰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살펴볼 때 불신자와 신자를 구분하는, 거짓교사와 성도를 구분하는 때에 자백, 시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그가 신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지속적이고 계속적인 시인, 자백을 가리킨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이 말씀과 관련해서 요한복음 13장을 살펴보게 되는데요. 베드로가 주님께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다른 것도 씻겨 씻어주옵소서." 하였을 때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주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미 목욕한 목욕했다는 것은 이 과거에 씻었고 그 효력이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그래서 영원한 그 속죄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나 이 발을 신는다는 것은 몸의 일부를 신는다는 의미로서 중간중간 더러워지는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을 씻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지역은 매우 모래 먼지가 많은 지역이어서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그 손과 발을 씻었고, 특히 이제 손님이 오셨을 때 그 집의 가장 천한 종이 신들매를 벗겨주고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저희가 침례 요한이 했던 "나는 그 신들매도 벗기는데 합당하지 않다."라고 했던 그 부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저희의 발을 신으시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감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이 항상 집에 와서 손과 발을 씻었듯이, 이것은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저희가 저의 죄로 말미암아 저의 양심이 찔리고 하나님과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있을 때 항상 주님께 저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이제 "우리가 죄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제 앞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것은 이제 하나님을 대상으로 이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요. 상대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것도 이제 '사귐'이라고 보게 됩니다. 이제 요한일서 1장에서는 이 사귐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계속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는 것도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귀는 것도, 우리가 서로 사귀는 거지만 이것도 역시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케 하는" 그런 효력 가운데서 참된 화평을 누리고 있을 때에 그것도 역시 이제 사귐을 누리고있는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귐에 또 한 가지가 여기 나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 자백은 이제 하나님이 빛지심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빚 가운데 자기가 지금 이미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귀고 있는 모습이 이 자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요. 여러 교파 교회에서 자백을 해야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생명이 있고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이 사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귐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제 시편, 51편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제 하나님께서 흠없는 제물만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온전치 못한 제사는 받지 않으시죠. 그런데 이것은 유일하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상한 것'이라고 말이 되어집니다. 우리의 심령, 정말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통회하는 심령, 이것은 이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그 제사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귐으로 사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빚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요.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대상이 있는 것을 살펴봤고, 두 번째로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용이라는 것이 자백을 한다는 것이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내용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동일하게 자신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시인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진리가 말하는 것, 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을 동일하게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동일하게 같은 내용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그 내용이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는 그 죄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그냥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계속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여기에는 그 '바라는 것'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 바라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제 뭘 바라냐면 두 가지를 이제 바라는 것인데요. 한 가지 첫 번째로는 이제 죄용서, 이제 죄가 사해지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되는 것, 이 두 가지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용서라고 하는 것은 앞에 2장에 나와 있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법적인, 단번에 영혼이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받는 법적인 죄용서가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용소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께 받는 가족의 용서, 아버지의 용서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근심하게 한 그런 죄에 대해서 사함을 받고 온전히 아버지와의 사귐 가운데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그런 죄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 용서는 우리가 했던 것에 대해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거고요. 그리고 우리가 자백할 때 이것에 대한 회복에 대한 바램을 가지고 자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또한 우리가 과거에 했던 잘못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시는 그것을 하기를 원치 않는 그런 마음으로 또 이 자백을 하게 됩니다. 정말 아버지가 싫어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그것을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을 바라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제 대상과 내용이 있고 또한 회복에 대한 기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는 이제 '회복의 근거'가 이 자백에는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 또 말씀해 주셨지만 이제 우리의 자백에 근거해서 이 회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이제 원문을 보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하신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이 하신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 근거가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대로,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온전한 희생,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근거하여 외롭게 우리를 회복하시는 것이 우리의 회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 결과가 실제적으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이 자백을 함으로써 이제 사귐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자백의 결과를 또한 누리는 것으로 또한 사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사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이 하셔서 과거에 지었던 그 장애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미래 지을 그 죄에 대해서도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이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써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힘을 이 자백의 결과로 받게 되는 것을 이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여러 성도 님께서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주셔서 그냥 두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1장 구절을 처음에 읽게 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우리 죄를 자백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고요. 또 하나는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자백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지?' 라고 했을 때 형제님들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지만은 자백하면 결과가 용서해 주실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굉장히 불안한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자백에 대해서 여러 형제님들 말씀해 주셨지만 제가 말을 좀 바꿔보겠습니다. 그 자백이라는 것이 정확히 동일하게 이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다라고 하시는 것에서 이제 저희가 정확히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단순히 나에게 이제 죄가 있는 거지요, 이제 죄의 어떤 이제 그 근원도 있고 죄의 본성도 있고, 이제 죄의 실재도 있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그냥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 정도 나는 죄인이야.'라고 이제 생각을 하는 것이 인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빛 가운데 저희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 구절은 5절, 7절, 9절하고 같이 보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5절에 저희가 들은 소식은 "하나님을 빛이시라"입니다. 정말로 그 어떤 죄도 숨겨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저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희 자신에 대해서 동일하게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갖다 제가 말을 바꿔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는 거기 한 절반 정도 인정하고,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 모든 것을 드러내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저희는 정확하게 동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아까 결과의 문제입니다. 저희는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내가 자백을 해도 결과가 어떻게 될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해서 결과가 명백합니다. 결과 이 구절이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6절, 8절, 10절에서 말하는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이 말씀이 왜 기쁨이 되냐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히 하실 것이요." 이 결과가 이미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자백을 했을 때 그 결과의 불확실성을 갖다 놓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결과가 있기 때문에, 저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께 정확히 완전하게 동의를 하고 또 이 결과를 보게 될 때 저희는 9절을 통해서 저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가족적인 교제 속에서 계속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귐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교육 말씀이라고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지금 이제 5절에서 2장 2절까지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분명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하나님은 또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계시는가를 저희들에게 계속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딱 저희가 이 부분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요구하시는 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7절의 "빛 가운데서 행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그 거룩함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개를 원하십니다. 저희가 이제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약속대로 용서해주십니다.  저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뭐냐면 '죄의 자백'입니다. 그러면 죄의 자백이 뭐냐? 라고 저희들이 계속 얘기를 해 왔었는데요.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이제 여기 계속 '현재형 시제'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일생 동안에 하는 자백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을 때 하는 그 회개가 아닙니다. 그 구원받을 때 했던 자백과 회개가 아닙니다. 그 형제님들이 잘 설명해 주셨다고 생각이 되고요. 저희들이 빛 가운데 행할 때, 늘 저희 가운데 죄를 발견합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에 있어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형제님 말씀해 주신 대로, 그냥 단순히 그냥 이런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하다라고 하는 '자백하다'라고 하는 동사가 '똑같이 말하다'라고 하는 문자적인 그 의미입니다. '똑같이 말하다.' 누구랑 똑같이 말하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똑같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잘못된 언행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제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이죠. "하나님 제가 말로 죄를 범했습니다." "이런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죄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시인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 죄를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이제 계속 지금 저희들이 얘기를 한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정죄하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것을, 정말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던,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주님께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치로, 그 무게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다라고 정죄하고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미워하시는 건데 저희들은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가 범한 죄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두 가지를 해주시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그 사람을 세상적으로 만들고, 그 사람을 육신적으로 만들고, 그 사람을 하나님과 관계에 합당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인한 사람을, 그가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까 형제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 죄를 죄라고 인정한 그 하나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다시 친밀하게 되고, 용서받고, 더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계속 그는 거룩한 삶으로, 죄를 버리는 삶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계속 계속 이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우사" 계속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미쁘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분 자신의 말씀과 그분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근거로, 약속을 근거로 용서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 '주님의 사역'을 근거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셔서 2천 년 전에 흘리신 주님의 피를 근거로, 저희가 시인했던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저희를 불의해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계속 교제가 나왔습니다. 저희가 이와 같은 시인을 하지 않으면, 저희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잘못된 결과들이 생깁니다. 여기 보면 4절에 기록된 대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죄의 문제를 올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아까 시편에서 계속 인용했던 다윗의 고백처럼 시편 32편에 보면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고 내 뼈가 쇠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니 내 진액이 여름 가뭄처럼 마릅니다." 이렇게 그가 영적인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 이 죄의 문제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인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은 더욱 은혜를 베푸셔서 그것을 그것을 사하시고, 또한 우리를 계속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도록, 거룩한 삶을 살도록 저희들을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하나님께서 이제 저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교제'입니다. 교제하기 위해서 저희를 구원하셨죠. 그런데 이 교제를 막는, 교제를 방해하는, 교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요소를 지금 사도 요한이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점점 뒤로 갈수록 더 나쁜 죄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때 이 교제를 막는 게 첫 번째가 '죄의 죄악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것이고 교제를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심상하게, 죄를 괜찮은 것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이 6절, 7절입니다. 6절, 7절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게 뭐냐 그러면, 그가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빛 안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가 빛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이라고 하는 '기준 속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첫 번째고요. 그래서 그 속에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면 죄가 상대적이 되고, 큰 문제가 없는 게 되고,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러니깐 저희들이 표현을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어둠'이라고 하는 '영역 속에서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기준과 거룩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하면 이렇게 돼 있고요. 그래서 6절은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게 교제를 방해를 가져오고요.
그다음에 이제 8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여기서는 이제 두 번째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서'입니다. 죄의 행위가 아니고 "우리가 죄 없다 하면"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람 자체는 이제 죄를 짓지 않는다,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거나, 구원받은 후에 사람에 대해서, 구원받은 성도에 대해서 죄가 없다, 이렇게 이제 '사람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8절과 달리 9절은 죄를 시인합니다. 그는 자기가 구원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구원받았지만, 그가 아직도 부족이 있고 죄를 짓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시인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까 계속 나온 대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이 이렇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만 저 죄인 아니잖아요. 저 신분적으로 이미 다 용서됐잖아요. 이제 왜 죄를 또 물으십니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그 죄를 하나님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 라고 했을 때 다윗이 "내가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렇게 한 거죠. 그런 면에서 인제 9절이, 그래서 자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냐면 '우리가 빛이라고 하는 영역 안에서 행동하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면, 말씀을 의식하며 살아가면, 그는 항상 자기의 부족을 의식하게 됩니다.' 자기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늘 의식합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다는 건 뭐냐? 자기 자기가 늘 부족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죄를 안 짓는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인제 주님과 교제하려면 죄가 조금 더 없어야 된다. 죄를 조금이라도 지면 주님과 교제가 안 된다. 이렇게 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빛이라고 하는 영역 안에 있으면' 그렇죠. 그래서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늘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지적하십니다. 네가 오늘 한 행동 중에 오늘 품었던 마음 생각 중에, 또 오늘 했던 어떤 선택 중에, 성령님께서 주도권을 성령님이 가지십니다. 성령님께서 지적해 오십니다. "맞습니다. 주님." 그것을 여러 다른 이유로 변명하거나, "주님, 이건 저기 어쩔 수 없는데요."  라든지 이렇게 변명하지 않고, 그걸 계속 시인하고 자기가 그와 같은 하나님이 지적하신 대로 행동했음을 하나님 앞에 자백할 때, 인정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죄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범한 죄가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모든 죄를 말할 수도 있고, 그 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영역, 또 가져올 수 있는 미칠 수 있는 여러 가지 결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정결하게 해 주시는, 그래서 인제 저희들이 아까 계속 나왔습니다마는 이제 요한복음 13장에서 물로 씻는 것, 그러니깐 목욕한 것, 발로 씻는 것, 다 이런 것들이 연결돼 있는 그런 구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처음에는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고, 두 번째는 성도가 죄를 짓지 않는다 쪽으로 가는 거고, 그다음에 이제 내일 다루게 될 10절은 가장 나쁜, 가장 심각한 범죄를 교제를 막는 장애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박성호 형제님 사회 : 저희가 교제한 것처럼 이제 이러한 올바른 교리 가운데서 서로 나누고 배우고 이러한 것이 또 얼마나 큰 은혜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또 이러한 것에 대해서 참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를 할 때마다 생각되는 게, 지역교회가 참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 이것이 얼마나 이제 실감이 나는지, 저희가 이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전에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것들, 또 배우지 못하고, 헤매고, 이러한 것들을 이러한 것들과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성경 읽기를 허락해 주시고, 또 배울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희가 여기에 지금 이렇게 있기 때문에 잘 실감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경 읽기를 경험하지 못한 선도님들도 있는데요. 그러면 이제 이것이 얼마나 은혜이고, 저희에게 축복인지를 조금 이제 잘 이렇게 실감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저희가 이제 하나님께서 저희를 이렇게 인도하셨다라는 것이 굉장한 저희에게 축복이고, 또 이러한 것에서 떠난다라는 것은 저에게 얼마나 불행인지, 제가 이 성경읽기 이 부분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이 됐습니다. 그리고 모임 밖에서는 올바른 교리와 분별을 배우기가 너무나 어렵다라는 것, 이것을 모두들 다 잘 아시겠지만 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교제에 참여해 주신 여러 형제님들과 경청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