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8절 / 마포모임, 20년
- 사회자 형제님 : 네, 안녕하세요. 계속해서 저희가 요한일서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는데요. 우선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10절까지 우선 제가 다시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그래서 오늘은 1장 8절 교제를 할 차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7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빛이신 속성에 대해서 저희가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요한일서는 성도님들이 다 아시는 대로 거짓된 것과 옳은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해주고, 그것을 통해서 저희들이 어떻게 올바른 말씀의 분별과 교리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될지에 대해서 저희에게 분명하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선 저희가 지난 시간에도 계속 교제했듯이 1장 6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해서 이 거짓된 교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주셨고, 오늘 교제할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해서 이 거짓된 이 죄 없음, 성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배울 1장 10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해서 이 거짓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그다음에 2장 4절에서는 "저를 아노라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해서 거짓된 충성, 그리고 2장 6절에서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렇게 거짓된 행동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고, 2장 9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그래서 거짓된 성도의 영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해서 거짓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오늘은 8절부터 할 거고요. 특별히 지금 저희가 6절부터 지금 살펴보면 그 '만일'이라는 이 표현을 통해서 저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저희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총 6개의 표현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우선 1장 6절, 우리가 살펴본 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둔 가운데 행하면" 해서 이 '만일'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쓰인 것에 대해서 우리가 나누었습니다. 그다음에 1장 7절에서도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에서 이 7절에서는 이어서 대조되게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또 오늘 살펴볼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앞으로 공부할 9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다시 1장 10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해서 다시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오고,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해서 긍정적인 표현으로 해서 총 6개의 표현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부정적인 것, 긍정적인 것,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병행되게 배치가 됨을 통해서 저희에게 강조하면서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지금 "죄 없다 하면"이라고 하는 부분 그다음에 스스로 속이는 것, 그리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 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나누면 될 것 같고요.
그래서 6절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고 주장했고, 이번 이어서 또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8절에서 죄로 인한 오점이나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형제님들 묵상하신 것들, 또 질문 있으시면 또 질문해 주시는 가운데 교제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 형제님 : 예, 8절에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하면" 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가르침, 이 세 가지가 6절에 나온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 가운데 행한다"라고 하는 것과 8절에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10절에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세 가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고요.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진리를 알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라고 앞서 살펴본 바가 있었습니다.
여기 8절에 "죄가 없다 하면" 이라고 말씀하신 거에서, 여기서 '죄'라는 것은 단수형으로 '죄의 본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9절과 10절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또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라고 하면" 여기서 나온 9절과 10절은 복수형으로 죄의 어떤 실행이나 행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8절에 "우리가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은 우리가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서 죄 가운데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고요.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게, 7절에 "빚 가운데 행하면",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면 빛 안에서는 어둠이 다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가 있다라는 것들을 깨닫게 되고 또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인데, 죄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고, 그들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그리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오"라고 이야기해서 이 진리가 가운데 없다라는 이야기는 구원받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 전효진 형제님 : "만일"이라는 단어를 써서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객관적인 그런 시선으로 봐도 어둠 가운데 행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은 죄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에게는 말씀하신 것처럼 죄의 그런 본성 뿌리가 없다고 자체 없다고, 그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들은 죄가 육신을 갖고 있는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조차도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 그렇게 간증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스스로 속이며 죄 없다 하는 그들은, "우리가 죄 없다." 말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주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행위로는 부정하는 것들이 정말로 가증한 자인 것임을 이런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 이렇게 살며 이 사귐 가운데 말씀을 지속적으로 상고하고 묵상한다면,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잘 몰랐었다가 계속 말씀 가운데 자신을 살펴보면 그 말씀이 거울이 돼서 자신을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을 비추어 보면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하심이 없다면 정말 아무런 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붙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죄의 뿌리가 없다, 죄의 본성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죄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들 속에는 진리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그들 속에 무엇이 들어 있겠습니까? 온갖 거짓밖에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담아둘 공간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거짓을 그래서 버리고 그 속에 그 속을 완전히 비워내야만 비로소 진리가 마음속에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멸망 가운데로 가도록 스스로를 또 속이며 또 속고 있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참빛이 되신 예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이 진리의 말씀조차도 부정하는 그들은 스스로가 거짓말쟁이인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이 8절 말씀이 얘기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 형제님 2 : 네, 이 8절 말씀을 살펴볼 때 이 거짓된 말의 파급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전에 배웠던 6절에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므로 거짓말을 하여 거짓말을 듣는 사람들을 속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배우는 이 8절에서는 죄 없다 말하므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되고 또 나중에 배울 10절에서는 그들이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 세 마디가, 그 결과가 이 광범위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가 이 야고보서 3장 말씀을 볼 때 거기 혀를 조심하라는 그런 부분의 말씀인데요. 5절에서는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비유를 들고, 6절에서 혀가 바로 그 불이며, 혀는 불의의 세계며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통해 말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으며 또한 이 말을 조심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거짓 교사들은 이 자신들의 죄 문제를 계속 교만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반면에, 성도들은 7절에서 빛 가운데서 행하고 9절에서는 이 죄를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자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죄 문제를 대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가져가서 우리의 죄 문제를 고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이병호 형제님 :8절에 보면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있는 거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속이다는 게 '탈선시키다', 이런 뜻이고 현재 시제로 사용되고 있고, 그 진리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계속 그런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는 거고,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가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해 하였다." 이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죄가 없죠. 죄가 없는데, 주님의 피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으니까 죄가 없는데,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여기 주님의 피가 우리 죄를 가리운 거죠. 가리워서 보이지 않는 거고, 죄 없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거고, 그 죄성은 없어진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을 때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우리가 죄인인 걸 알고, 이 죄의 본성, 아담으로부터 이렇게 유전되어진 그 죄 본성이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그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인제 우리가 구원받은 거고, 그래서 이제 그때 죄가 가리워진 거고, 죄가 이제 없어지는 것은, 우리가 3일 동안 수양회 하면서 계속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휴거된 후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졌을 때 그가 그때 죄가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는 계속 이런 그 근본적인 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앞에서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빛 대신 하나님과, 의로우신 하나님과 계속 사귐을 갖다 보면 우리 안에 있는 그 죄를 우리가 더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때로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탄식을 했던 것처럼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이 죄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죄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고 우리가 이 죄와 계속 싸워야 되고, 그런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이 죄가 없다고, 내 안에 이 죄 본성이 없어졌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빛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렇게 그 빛이신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의로운 그 앞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죄인인지 그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증거해주고 있고, 저희들도 이 죄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사도바울과 같은 탄식도 나오고 그렇지만, 하지만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성령의 법이 또 우리 안에 새롭게 있다"고 사도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죄가 있지만 빛 되신 하나님과의 그런 교제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죄를 이길 수가 있고, 또 그래서 하나님과의 그런 복된 사귐, 또 우리 주님을 계속 의지하고, 또 그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1장 8절에 보게 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입니다.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형제님들께서 여러 측면에서 교제를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8절의 '죄'라는 것은, 10절이 만약에 어떤 죄가 실행되는 것을 말한다면, 8절은 어떤 죄의 본성, 근원, 이런 것을 말한다고 이미 교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측면을 규제하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그러니까 죄의 본성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이 하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무엇을 말하냐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하고 관련이 없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죄의 본성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관계하지 관계할 것이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저희가 7절을 통해서 '예수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교제를 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거부했던 이름이 예수입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이 물질적인 것을 이렇게 배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만약에 죄가 없다고 죄의 본성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인데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나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말을 한다면, 영지주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나에게 필요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저희가 요한복음 1장 17절에 보게 되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크리스도로부터 왔다"라고 이렇게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그 진리가 그러니까 그들의 속에, 여기서는 자문을 해보는 것이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없다라고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아니하고 또 그 관련이 없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결국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이상입니다.
- 박성호 형제님 : 다윗이 범죄하고 나서 지은 시편인 51편인데요. 거기서 5절해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그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형제님들이 얘기한 것처럼 여기서의 죄는 본성을 얘기하는 것으로써 아담의 후손들인 사람이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라는 것은 앞서서 얘기하셨던 것처럼 어떤 구체적인 어떤 결과라든지 행동이 아니라 본질적인 걸 얘기하는 건데요. 왜곡된 것을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왜곡된 방향에 있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사람이 그러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 목적을 향해서 그 방향으로 가지 않고 그 과녁을 엉뚱한 과녁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이것을 죄라고 볼 수 있고요. 또 앞서서 형제님께서 로마서 3장 23절 얘기하신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지 못한 그러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가장 본질적인 죄 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처음에 이렇게 밧세바를 보고 그 탐심이 생겼을 때, 그때 인정했다면 그 다음에 도둑질과 간음과 살인, 점점 더 크고 심각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죄를 짓게 된 것이죠. 반대로 저희가 정말 저희의 사람의 본질이 죄악 중에 출생한 것이고, 그런 것을 직시하고 있다면 더욱 큰 죄를 짓지 않을 거고, 더 나아가서 거룩하게 살려고, 거룩하게 사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한번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정말 어떠한 정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한번도 그 거룩하심 앞에 나와서 자기를 인정하고 회개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여기 "스스로 속이고"라고,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이 거짓 교사들은 6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8절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빚이신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이 그 안에 얼마나 부패해 있고 죄가 있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이게 우리가 데설로니가후서에서 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또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스스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계속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자신이 죄 없다, 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7절에 나온 사람과 대조돼서 생각하게 됩니다. 7절은 '빚 가운데 행하는 사람', 그리고 '서로 사귐이 있고'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7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사귐에 표현인 서로 사귀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굉장히 친밀한 그 사귐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자신 안에 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욱 뚜렷하게 그 빛 가운데서 더러운 것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다고 해서 그 가운데서 그의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낙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귐 가운데 그는 더욱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을 더욱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로 인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온전하게 느끼고, 참으로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8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말은 자기가 죄 없다고 자기가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속인 것입니다. 오히려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어두움의 속박 가운데 있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그 사귐과 온전한 자유와, 또한 그 반대로 어둠 가운데 있는 자의 속박과 매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진리라는 것은, 이 사람은 나중에 5장에 보면 성령님에 대해서, 성령님은 그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안에서 계속적으로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책망하는 그런 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그런데 이 사람 안에는 그게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겉으로도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이제 그의 바깥에도 빛이 없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그런 사람이고, 그의 안에도 빛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안도 어두워서 진리가 그 속에 없어서, 그는 그의 행하는 것과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모르게 된 그런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앞에서 형제님들 다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셔서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시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성, 이것이 그 교제를 방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때때로 범하는 죄들, 이런 것들이 교제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저희들의 구원을 위한,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교제가 방해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해결하는 여러 가지 은혜로운 하나님의 방법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계속 배우겠지만, 지난 시간에는 주님의 보혈이 여전히 효력이 있어서 저희들을 깨끗히 하고 있고요. 9절에서는 자백하는 자에게, 회개하고 자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죄를 사해주시고 불의해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2장 1절에서는 또 대언자가 있어서 그러한 모든 방해되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빛 가운데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 이들의 죄와 이런 죄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런 것들 속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람은 '자기가 죄가 없다'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자기에게는 죄의 본성이 없다라고 인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빛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를 살펴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고, 빛이 그 기준이 아니고, 뭔가 잘못된 생각과 어떤 사람의 이론이 기준인 것입니다. 아마 저희들이 계속 공부하고 있는 대로 영지주의자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결코 빛 가운데 서거나 빛 앞에 가본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인,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그 하나님 앞에 서 본 사람이 아니고 거짓된 진리, 영지주의라는 어떤 잘못된 가르침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지금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 빛에 자신을 비춰보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의 철학, 헛된 철학, 이런 신화, 영지주의, 이런 것으로 지금 자신을 비춰보고 있고, 그런 것으로 자기가 죄가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대로 특별히 모든 진리가 다 포함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빛이시다. 정말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라고 하는 이 진리 앞에 진리가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저희들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배웠지만, 이게 이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 것을 믿게 돼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안에 참된 것이 없으면 늘 거짓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영혼을 채우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참된 진리, 하나님에 관한 참된 말씀을 받지 않으니까 이러한 것들, 영지주의라는 거짓 것을 그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인 그런 오류 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저는 좀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요한일서 3장 5절을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을 때 죄 없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죄는 없으시니라" 이렇게 해서 한 분밖에 없으신 거죠.
그런데 제가 교제할 내용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할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주님께서 죄사함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 "죄가 없습니까, 있습니까?" 이렇게 전하는 것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해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한글 성경에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것은 우리 표현대로 죄가 없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들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옮기다, 제거하다, 이런 뜻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몇몇 죄를 없애다라는 표현이 한글개혁 성경에 있는데,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죄상을 받았기 때문에 죄가 없어졌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위험성들이 다분히 있고 물론 죄가 없다, 있다가 전할 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압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전하는 것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하게 그런 부분들이 잘못 사용되지 않도록 우리는 표현에 있어서 주의할 것들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이 구절들은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된 구절인데요. 아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마는 저희들의 영적인 배경을 이렇게 살펴보면 교파에서는 주님의 십자가가 지금은 어떻게 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만 자범죄, 스스로 범한 죄는 용서하지만 원죄, 죄의 본성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르치는 데도 있고 대체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의 죄는 용서되지만 믿은 후의 죄는 자백해야 된다. 이렇게 이런 식의 이해가 있어서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교파 교회가 새벽 기도를 합니다. 그때 새벽 기도의 대부분의 시간이 자백입니다. 그래서 죄를 낱낱이 생각, 죄를 떠올리는 거죠. 여러 가지 죄를 떠올리면서 그걸 써서 종이에 써서 태우기도 하고, 하나님께 이와 같은 죄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백했을 때 용서가 된다고 이렇게 믿었기 때문에 교회가 새벽마다 울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오면 집값이 떨어진다. 이게 이제 제가 있었던 한 80년대 그 영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 복음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되었다. 이렇게 복음이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정말로 그게 합당하고, 기쁘고, 그래서 받아들였죠. 거기에 아까 형제님이 말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표현을 성경적으로 하는 게 옳다고 늘 느껴집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주님께서 죄를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히 용서해버렸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들입니다. 여기 요한일서로 치면 6절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6절입니다. 주님이 다 용서했는데 죄 가지고 자꾸 민감하게 오늘도 내 삶 속에서 뭘 잘못했니, 이런 거 따지지 말자. 이게 제가 마포 모임에서 2000년도에 징계할 때, 그때 일부 형제들이 주장했던 가르침이 다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그때 동조했던 원당 모임에서도 함께 징계를 했었는데요. 그때 그 형제님 참 생각이 나요. 태국의 선교했었던 어떤 형제님 형이었는데, 원당에 있는 몇 분하고 이렇게 교제를 했는데 그분들 주장이이었어요. "아니, 성도들이 뭔 죄를 그렇게 짓길래 맨날 죄, 죄 그러는지 자기는 이해가 안 간다." 이런 분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후에 저희들이 믿기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 민감해집니다. 기준이 주님 기준이고, 그 작은 것을 이렇게 순종하지 못한 것이 고통이 되고,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성도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은 "싹 끝났는데 뭘 그걸 또 새삼스럽게 자꾸 또 이야기하냐?" 우리 삶 속에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행동이 좀 잘못될 수도 있지만 이미 다 처리됐는데 그거 말할 필요가 없다. 이게 6절입니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저희들이 로마서에 있는데요. "그러면 이미 그 용서해 주셨으니 우리가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이렇게 돼 있는 거죠. 이렇게 용서됐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통이 있는 거죠. 그리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는 구절이 로마사 7장입니다. 그래서 8장으로 어떻게 넘어가는가? 이런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8절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6절은 7절하고 연결돼 있고요. 8절은 9절하고 연결돼 있습니다. 10절은 연결이 없습니다. 10절은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이 발언으로 끝나는 게 10절입니다. 그래서 6절에 속한 사람과 7절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대조되어 있고요. 8절에서 가짜의 고백이 나오고 9절에서 진짜의 삶이 나옵니다. 그리고 10절은 가짜만 나오고 더 이상 말도 안 합니다. 대조할 가치가 없는 발언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죄 용서, 완벽한 단번의 속죄가 전해졌을 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신경 쓸 거 없다." 자기 삶은 엉망인데,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서 자기 스스로 그런 게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죄 용서가 됐으니까 상관없다, 라고 하는 게 6절입니다. 구원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다음에 8절은 제가 어디서 경험했냐면 저번에도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만 연길에 있는 형제님이, 형제라고 부를 수 없죠. 연길에 있는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죄를 짓지 않는대요. 그래서 제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조건이 몸이 변화돼야 되고, 사단이 통제하고 사단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에 있지 말아야 되고, 그다음에 천국에-세상과 육신과 사단 이 셋으로-천국에 가 있어야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완벽하게 의로울 수 있다. 여기서는 안 된다. 그랬더니, 그분이 저한테 그렇게 질문하더라고요. "1초라도 안 되겠느냐? 단 1초라도 완벽하게 있을 수 없느냐?" "1초도 안 된다. 셋을 갖고 있는 한 안 된다." 이게 뭐 1초나 2초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완벽한 거룩은 어떤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거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또 이제 어떤 분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죄 없이 살았다. 그러면 말합니다. "몇 년간 그렇게 죄 없이 사셨습니까? 죄 없는 상태를, 만약에 당신이 30년만 버티면 주님보다 위대한 사람이 될 겁니다." 이게 우리 대답입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서 30년을 거룩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거룩을 언제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몇십 년을 살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 위에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그분에 대해서 제가 나중에 또 소식을 들어보니까 어떤 여자 선지자, 직접 계시를 받는 여자 선지자와 함께 어쨌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부활시킨다고 기도하고, 이렇게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완전히 이단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짓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다음에 제 개인적으로는 제가 전번에 작년에 말레이시아 갔을 때, 올 5월달 파라마운트 수양회를 한다고 오겠느냐고 이렇게 물어봐서 제가 그 파라마운트 수양회에서 다룬 성경 읽기 구절이 어딘가를 봤더니, 요한일서를 다루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겠다고 요한일서 1장 8절, 9절, 10절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해서 완전히 이상한 것으로 넘어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요한일서 1장, 2장이 교리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저희들이 성경적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다음 다루게 될 9절에서 '자백이 뭐냐' 했을 때 저희들이 인제 반대했던 것이 맨날 울면서 자기가 지었던, 죄의 예를 들면 "지난 한 주간도 언행 심사간에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이와 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거거든요. 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단번한 속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때야 되느냐? 그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자백은 뭐냐? 이런 것들이 저희들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성경으로 이해하고, 다윗은 어떻게 자백했나? 또 성경에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사람들의 자백의 예는 뭔가? 그게 구원받지 않은 종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자백하고 뭐가 다른가, 이런 것들을 저희들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성경적으로 그와 같은 생명을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첫 번째 6절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느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양심 속에 말하십니다. 잘못 생각했던 것, 잘못한 행동,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걸 판단하고 그다음에 이걸 어떻게 해결할 거냐 하는 거죠. 그게 이제 9절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걸 해결해야 합니다. 아까 7절에 있는 대로, 7절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7절은 이미 '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7절을 설명할 때 나왔었는데요. 이건 우리가 뭘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한 속죄의 근거로 계속 신분적으로, 사실로서 주어져 있다. 이게 7절에서 말하고 있는 거고요.
그다음에 계속해서 저희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고 느끼고요. 잠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까 말한 대로 8절은 성경이 구원받은 성도에 대해서 명백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여전히 죄의 가능성 속에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아는 대로 로마서 7장, 사도바울 구원받을 때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경험이 아닙니다. 7장 같은 사람은 구원 안 받았다, 이렇게 하면 교리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우리는 두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소욕이 있고 하나는 성령의 소욕이 있습니다. 이 둘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고 있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한 가지 본성만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다 이단들입니다.
그다음에 이와 같이 자기는 그러니까 구원받았으니 죄에 대해서 신경 쓸 것이 없다가 6절입니다. 8절은 자기는 충분히 성숙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은 8절이거든요. 그다음에 10절은 내가 한 것은 죄가 아니답니다. 그 죄라고 하는 카테고리에 안 넣어버립니다. 이게 10절인데요. 하여간 이 8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한 모든 경계를 풀어버립니다. 이제 죄 안 짓는 거죠. 이게 사단이 정말로 원하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넘어지는 거죠. 그래서 다시 한번 저희들이 생각해보면 죄가 뭐냐? 했을 때 성경이 자주 말하는 거죠.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성경에서 죄가 뭐냐? 감사치 아니한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지 않는, 그래서 여기 나온 대로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비추어 볼 때는 자기가 죄인이 아닌 거죠. 그래서 그는 기준을 달리 쓰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 속에 있지 않는 거다. 이게 8절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점이라고 보여집니다. 이상입니다.
- 사회자 형제님 : 앞서서 형제님들께서 교제해 주셨지만 지금 한글로는 뭐 그냥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어떻게 형제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읽으실 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게 죄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강한 강조를 의미하고 있는 표현을 지금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지금 여기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 'Have no sin'으로 영어로는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이게 'not si'n으로 되어 있지 않고 'have no si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have' 이렇게 되는 이 표현이 굉장히 강한 강조를 표현하는 의 의미를 담고 있는 문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이 단순히 뜻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표현되고 있는 형식 자체도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지금 사도 요한이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정말로 너희들은 진리가 없다라고 이어서 이렇게 강조해서 지금 되고 있는 표현인 것을 볼 수가 있고요.
특별히 지금 개혁 성경에서는 그냥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오"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이게 흠정역에서 보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재귀대명사라고 다 아실 텐데 주어가 한 행동의 결과가 다시 주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속이는 결과가 결국은 자기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자기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결과 속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그런 잘못된 결과로 인해서 자기들이 그렇게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스스로 속이고, 이런 부분들이 다 능동태로 쓰여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자유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서 그들이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말씀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어떠한 것을 전달하실 때, 확실하게 이렇게 표현된 형식도 정확하게 표현을 하고 계시는구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8절까지 교제한 것으로 하고요. 다음 시간에 9절부터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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