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6절 / 마포모임, 20년
- 이기범 형제님 사회 : 예, 먼저 저희가 오늘은 요한일서 1장 6절부터 공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요한일서 1장을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10).
예, 저희가 요한일서 1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6절부터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요한일서를 공부하는 동안 제 기억에 한 번도 두 절을 공부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목표는 두 절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6절하고 7절을 시간이 허락하면 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희가 지금 6절을 보게 되면 "만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그래서 '만일 ~하면'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1장에 세 군데에 그렇게 나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절까지 포함하면 네 군데가 됩니다마는 9절은 다음에 공부할 때 또 하도록 하고요. 6절, 8절, 10절을 보게 되면 "만일 무엇무엇 하면", "만일 무엇무엇 하면", "만일 무엇무엇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6절, "만일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그다음에 8절, "만일 죄 없다 하면", 그다음에 10절에 "만일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이렇게 해서 그 6절과 8절과 10절에 나오는 이 말은 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만일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두움 가운데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 죄 없다라고 영지주의자들이 말했을 것입니다. 10절에 영지주의자들은 또 자신들이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특히 6절에 초점을 맞추면 그들은 사귐이 있다고 말했지만,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저희가 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했던 것을 보면서, 또 저희가 더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6절 하반절, 8절 하반절, 10절 하반절, 그리고 8절 같은 경우에는 죄에 대해서, 그리고 10절에서는 범죄에 대해서, 특별히 6절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영지주자들이 어두운 가운데인데 이것을 저희가 보면서, 그러면 저희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구나, 5절과 연계를 해서 저희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또 여기서 말하는 이 사귐은 뭐 저희가 이미 공부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사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자들은 실제로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저희가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6절을 먼저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 가운데서 교제할 내용이 있으시면은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형제님1 : 네, 그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일'이라고 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련된 절을 조금 전에 말씀을 하셨고요. 그래서 여기 이 부분은 영지주의자들을 고려해서 생각하고 쓰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한다고 하면, 저희가 3절에 살펴봤던 것처럼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와 함께 함이라" 그래서 이 사귐, 즉 교제를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거듭난 성도들이 교제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지주의자들은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런 모습을 봤을 때 거듭나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고요.
그래서 그 뒤에 보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그 "진리를 행하다"라고 하는 이 '행하다'는 단어가 찾아보니까 어떤 것을 '가지다', '얻다'라는 그런 의미도 포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17절과 마태복은 23장 15절에도 같은 단어가 쓰였는데요. 그래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곧 복음을 깨닫지 못했고 거듭나지 못했다라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같은 맥락에 그 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그리고 10절에도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이 주장을 하는데요. 8절에도 보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이야기는 거듭나지 못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요. 10절도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말씀이 없다는 말씀도 또 같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6절에는 영지주의자들을 가르켜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라고 하는 거는 만약에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라고 교제를 한다라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봤을 때 그 행위로 그 사람의 어떤 그 믿음을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같이 말씀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 전효진 형제님 :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이 5절 말씀을 전제로 영지주의자들은 거짓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영지주의자들, 그들이 행하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비양심적인, 세상 사람이라면 그냥 도덕적인 양심 때문에 꺼려하는 문제인데도 거리낌 없이 그렇게 비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말로는 자신은 거룩하여진 존재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율법에서 벗어난 어떤 영적인 자유함이 아닌 방종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다, 이렇게 말하므로 하나님의 본성과 선하심에 모순되는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알게 해주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이 진리의 말씀을 그들은 아예 모르거나 또 율법에서 저것은 벗어나지 못한 삶이다, 이렇게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셨고 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 가운데 있을 때 그 죄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이라"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라는 그러한 말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죄악된 삶을 상징하는 이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새로운 본성을,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 뒤따라와야 되고, 또 빛 가운데서 삶이 동반되어야만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라는 그런 말이 성립이 될 수가 있는 거죠. 어둠은 하나님과의 그러한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사귐과 전혀 관계없이 어둠과 동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거듭난 적이 없음에도 착각하거나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처한 모습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형제님2 : 네, 저는 여기 6절에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동일한 단어로 요한복음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있는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요한복음 12장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어둠에 다니는 자'가 여기 동일한 악을 어둠 가운데 행한다와 동일한 단어인데요. 즉,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무지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한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20절, 21절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21절에 '진리를 쫓는 자'라고 나와 있는 이 단어가 또한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 요한일서 1장 6절에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 21절은 동일한 단어로 "진리를 행하는 자"로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빛으로 오는 자들이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저희가 이사야 29장 15절 말씀을 볼 때 "화있을 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 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범죄하는 것에 대해서 빛이신 주님께 나와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숨기는 자들임을 또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6장 후반절들을 보게 될 때 8절과 10절에서 아까 형제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자신이 죄가 없다, 범죄하지 아니하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임을 보게 됩니다. 요약해서 그들은 제 결과에 대해서 무지하고,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임을 보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주를 정말 믿은 자들은 나중에 저희가 배우겠지만, 죄 문제에 대해서 주님 앞에 나와 자백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6절 말씀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앞서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가정법이 어떤 말이 안 되는 경우가 있고, 또는 어떤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인제 가정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는 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 앞서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지주의자들이 해당될 것이고, 그들에 대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다." 행하다는 단어가 현재 시제로 사용되고 있고, 그 삶의 행동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행동들이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거는 죄 가운데 행하는 것을 말하고, 그런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런 행동 패턴을, 죄를 짓고 있는 그들의 행동 패턴을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데, 어둠 가운데 죄 가운데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때는 거짓말쟁이다라고 이렇게 분명하게 말을 해주면서 그들은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여기서도 '행하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제 행하다라는 단어는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은 말 그대로 행동들을 말하는 거고, 여기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에서 행하는 거는 그 행위를 통해서 어떤 결과가 드러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또 진리라는 단어도 빛 가운데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는 그런 뜻을 또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이제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밝게 드러난다.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이런 의미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이제 이렇게 다시 좀 정리해서 생각을 해보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을 하는데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죄 가운데 계속 행하고 있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고 어둠에 속한 자다, 이거를 요지로 해서 교훈해 주고 있는데, 이것도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 교제되어진 것처럼 어떤 행위가 중요한 것이고,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어떤 실체가 있는가, 이게 중요하다는 것들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드로후서에서도 배웠지만 거짓 교사들 또한 그들이 어떤 말은 그럴 듯하게 하고 자신들이 참된 사도이고 뭐 참된 교사인 것처럼 얘기를 했지만,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그들은 불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중역을 따라 행하고 불법을 행하고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 걸 통해서 그들이 거짓 교사란 것이 밝히 빛 가운데 드러난 것처럼, 마찬가지로 또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어떤 말이 아니라 그런 삶이고, 또 그 내면에서 나오는 그 실체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 수가 있고, 또 반대로 정말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빛 되신, 또 진리 되신 이 하나님의 속성이 또 반드시 또 나타나게 돼 있다. 이 부분을 또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이상입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말하고 현재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다라고 사람들 가운데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 여기서 "행하면"이라는 단어는 '걷다'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걷다라는 단어는 그의 전반적인 삶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와 같이 지속적으로 어떻게 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걷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한두 번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교제된 대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고 빛 가운데로 나온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고 생명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은 무지 가운데 또는 자기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라고 착각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없는데도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지를 자기도 알고 있음에도 사김이 있다라고 거짓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와 같이 이런 거짓 교사들이 이야기하냐면 그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므로 내 말을 듣고 거짓된 가르침 가운데로 이끌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행치 아니하고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행하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행동하다, 만들다, 이럴 때 행동하다입니다. 사도요한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얘기하지 않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진리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해 본다면 앞절에 나온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에게 반응을 요구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알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그것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빛시며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빛 가운데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에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과정을 전혀 밟지 않았고, 하나님의 빛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죄를 회개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말은 거짓이고 또 행함은 불순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나타나고 교제된 대로 행동이 그들의 말에 진실성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결국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하는 사람이고 진리에 대해서 불순종해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인 것을 6절에서 드러내고, 우리가 이후에 7절에서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 박성호 형제님 : 계속 앞에서 다 말씀을 하셨던 것처럼 사귐이라는 것이 공통된 것을 수유하고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을 얘기를 하는 것인데요. 5절에서 그러한 사귐의 전제로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한 것임을 말했고요.
6절부터는 그러한 사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하고 사귐이 있다라고 있기를 원하면 자기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한다는 것은, 사귐이 실제로 있지 않는데 혼자 사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착각 가운데 있는 사람의 상황, 마음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의 체험한다라는 것은 또 어떠한 것을 얘기를 하는 건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바도 있는 것처럼 자기 기만과 거짓과 그다음에 망상과 환각입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죠. 심리적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그 6절, 8절, 10절, 아까도 형제님들을 잘 말씀해 주셨는데 그런 6절, 8절, 10절에서의 사람들의 그런 그러한 잘못된 판단과 거짓말하는 모습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을 수 없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육체는 악한 것으로 보는데 그렇기 때문에 행동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영혼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 행동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비밀한 지식인 거죠. 그런 태도를 가져도 된다라고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신비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신비한 그런 지식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행위가 거룩하지 못하여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모르고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고, 앞서서 형제님들 말씀하신 것처럼 빛 가운데 나아간 적이 없는 사람이고 회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생명이 삶에 있어서 거룩한 행실로 드러나야 되는데요. 그것은 아무리 그 생명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본연의 특징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라고 하고 이전의 악한 행실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라고 신비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하는데요. 그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오류가 여기에 있는데요. 자기의 체험, 그리고 자기 마음의 어떤 내적 상태에 대해서는 굉장히 주의하고 이게 강조하고 그러는데 정작 그 실제 삶에 있어서, 행실에 있어서, 열매에 있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20장 11절에 어떻게 돼 있냐면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에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라"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생명을 얻었다면 그것이 얼마 안 됐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이 삶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은 자기가 어떠한 신비스러운 어떤 내적인 어떤 체험을 가졌다, 이런 것보다도 정말 하나님의 생명과 빛으로서의 어떤 거룩함, 그다음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지, 그것으로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라는 것이 요한일서에서의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하나님과 사김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실제적으로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도요한이 표현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도 요한은 '사귐'이라는 것을 '구원받았다'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에 대해서,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우리 주님의 생명에 대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귀는 생명이었고, 그것을 전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그 생명을 받은 자들은 사귄다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생명과 그 사귐이 같이 연결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간 오해할 수가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가 형성이 되었고, 아버지와 자녀로서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 관계는 훼손되지 않지만, 그 관계는 끊어지지 않지만 그 관계에서 사귀는 것은 훼손될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맥락에서는 그렇게 사용할 수가 있는데요. 사귐이라는 단어와 교제라는 단어를 그 맥락에서는 그렇게 사귀는 게 우리의 상태에 따라서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고 할 수가 있는데,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사귐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구원받는 것과 동일하게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귐이 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귐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귐 가운데 그 기쁨은 우리가 충만히 누리거나 그러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 행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을 때, 앞에 설명을 해주셨지만 어떤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그 삶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그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그 본질적인 성격과 정반대되는 그 성격이, 그 어두움이 그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생명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적으로 어둠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뒤에 2장에서도 보면 거의 같은 표현으로 9절에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리고 11절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여"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 생명이 없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는데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으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2장 계속 걸쳐서 두 번째로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의 어두운 곳에서 행하는 두 번째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부인하는' 그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어두운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을 행하는 모습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보다도 더 먼저 1장 5절부터 10절까지는 그렇게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는 그 본질적인 문제를 또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빛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이 없음을 1장 후반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 빛 가운데 자신이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앞에 형제님이 인용하신 것처럼 요한복음 3장에 그 빛이 세상에 왔는데 그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그 행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빛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됨이 나타나는 것을 싫어하고 계속 어둠 가운데 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는 세상이 빛이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8장도 마찬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과 사귐이 없는 사람들, 그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전부 다 도망가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그 간음 그중에 잡힌 여인만 남고 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 여인을 정죄하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왔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죄악은 알지 못하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정말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일 바로 다음에 "나는 세상에 빛이니"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6절에 "만일 우리가"라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요. 그 사도는 자신을 포함해서 이 질문을, 이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정말 빛 가운데 있는 양심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양심 무딘 사람들은 항상 "너는 뭐" 이렇게 이렇게 저렇게 테스트를 합니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 가운데 있고 그래서 그도 민감하게 이것을 느끼고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가"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거짓말을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그냥 조금 틀린 소리를 했다, 정도가 아니고 이게 전부 하나님이 하신 말과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그래서 이 요한서신서에서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나온 걸 보면 전부 굉장히 심각한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과는 정반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아마도 거짓 고백을 하는, 특별히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한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의 실체를 사도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진리를 행한다면, 그들은 죄에 대해서 민감할 것이다. 죄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사는 것은 전혀 진리를 행하는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에서 앞에 읽은 것처럼 진리를 행하는 자는 정말 빛되신 그 거룩하신 분 앞에 나와서 그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지난 시간에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이 말씀에 대해서 저희들이 교제를 했는데요. 제가 그때 한 가지 말씀을 안 드린 것이 있는데, 이건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하는 것은 그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의미는 또 뭐냐면 하나님 앞에 가면 모든 게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가면 저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저희 안에 있는 죄입니다. 성도들도 여전히 죄의 성을 가지고 있고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우리의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를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잘못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처리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까 사회자 형제님 말씀하신 대로 6절, 8절, 10절에 이게 우리나라 성경에는 빠진 단어라서 넣고 설명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말하고'" 이게 '말하다'라는 동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냥 저희들은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아니함이거니와" 8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말하면"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면" 이게 지금 죄에 대한 잘못된 지금 인식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계속 저희들이 교제한 대로 영지주의자들이 했던 주장이고, 이것들을 다루고 있고 8절, 7절, 9절에서는 이것을 올바로 교정을 해나가고 있는데요. 6절에서는 지금 뭐가 잘못돼 있냐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죠. 이게 우리도 잘못할 수 있는 겁니다. 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우리 안에 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거 하나님과 사귀는 데 문제가 없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 사람들이 했던 잘못된 주장입니다.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것은 우리 본성 가운데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죄가 더 이상 없어, 라고 얘기하는 것이고요. 10절에서는 죄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 말하면 이것은 우리가 행동으로 죄를 안 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죄가 교제를 방해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죄의 본성이 더 이상 없다. 혹은 우리는 죄를 행치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들 안에 진리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하는 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증거이고 그들이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말하고" 여기 우리라고 해서 사도를 포함하고 있고 읽는 자들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게 왜 이렇게 포함을 하고 있냐면 이러한 위험에 누구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도 그렇고, 이 읽는 자들도 그렇고, 그런 잘못된 죄에 대한 인식, 잘못된 가르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하다'고 하는 이 자체가 벌써 이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말하고 하는 사람들은 다 잘못돼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저희들이 생각이 되고요.
아까 그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해 주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행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도바울도 행하다라고 하는 단어를 그런 의미로 씁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모든 가치관에 있어서 그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죄를 나타내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이런 것들이 그 사람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은 교제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삶의 특징이 어둠입니다. 죄입니다. 불순종입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고, 이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가 없으면서 자기가 교제하고 있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되어 있고요. 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내 안에 죄의 본성이 없다고 말하면, 그렇게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지금 속이는 사람입니다. 10절에서 "범죄하지 아니했다 하면" 나는 죄 짓지 않는다, 라고 얘기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죄에 대한 개념, 죄에 대한 생각들이 엄청난 심각한 결과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말씀을 드린다면, 그래서 저희들이 6절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그의 삶 가운데 그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나는 교제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정말 저희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뀔 뿐만 아니라 저희들의 삶이 또한 말씀으로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보게 되고요. 앞으로도 교제를 하겠지만, 저희들이 빛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슬퍼하고, 죄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죄에 대해서 무지하고, 죄에 대해서 핑계대고, 죄를 계속 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귐 가운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이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저희들의 죄 본성의 문제, 죄가 행하는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것들을 올바로 했을 때 하나님 안에서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씀으로 저희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한봉래 형제님 :6절에 "하나님과 교제한다 하면서 어둠 속에서 행하는 사람은" 쭉 설명이 됐습니다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도 좋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어떤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간다, 맞는 말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살아도 좋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담이 범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랬을 때 아담과 하와가 한 행동은 숨는 것입니다. 나무 사이에 숨어버리죠. 하나님이 찾아가십니다. 찾아가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서 물으셨냐면 하나님은 빛 가운데에 계속 서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숨어버린 어둠 속에 들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숨어버렸죠. 교제가 안 되는 거죠. 아담이 하나님과 대답은 했는데, 실제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은 가죽 옷을 입은 후입니다. 가죽옷을 입은 후에야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에 나타난 분명한 그림입니다. 교제에 대해서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그럴 수 없다. 이런 거고요.
또 하나 보면 도덕적인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예를들면 유교라든지,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수준이 올라가면, 도덕의 수준을 이렇게 끌어올려서 상당한 위의 수준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도덕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은 죄의식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죄의식이 민감해집니다. 이게 도덕과 구원의 차이입니다.
예를 하나 성경에서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세인이 주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이때까지 아직 바리세인도 주님을 알아보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세인이지만 주님을 초청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대해서 환대하지 않습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머리에 기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죄인인 여자가 발 뒤에 가서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그 사건이 있었을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시몬아 500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자하고 50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자하고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니까 이 죄인인 여자는 500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거죠. 바리세인 시몬은 자기가 바리세인이니까. 죄용서 받는다해도 50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깐 주님을 초청해도 환대하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모든 사람이 500대나리온 이상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죄를 사실은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지옥갈 죄가 용서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살아보면 자기가 범한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갈수록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할 수밖에 없고, 또 자기의 삶 속에서 옛날에는 죄가 아니라고, 그 정도는 뭐 다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뭐 그걸 민감하게 반응할 게 뭐냐라고 했던 것들도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민감해집니다. 이게 도덕과 신앙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에 대해서 오래 살면 살수록 죄를 둔감해지는 게 아니고, 그다음 8절에 나오는 대로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나는 죄에 짓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가짜인 거죠.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대로, 신비한 지식 가운데 있기 때문에 괜찮다, 이런 게 하여간 6절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에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 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 이상입니다.
- 이기범 형제님 사회 : 오늘 6절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6절에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사람들은 그들이 빛 가운데 없습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둠은 저희가 5절에서 배운 것처럼 결코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빛과 어둠이 동시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빛 가운데 속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인데요. 저희가 아까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마는,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저희가 어디 가운데 있는지,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요한일서 1장 6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행합니다. 걸어갑니다. 그런데 저희는 빛의 자녀들로서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희가 에베소서 5장 8절을 이렇게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빛과 빛 가운데 저희가 있다는 것이 몇 군데 더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에도 저희가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업계에 합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대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도 "저희가 어둠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저희가 다음 주에 또 교제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마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저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그 영지주의자들, 거짓된 사람들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데, 저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가져오고, 또 얼마나 다른지를 성경에 여러 부분을 통해서 이렇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많은 형제님들께서 교제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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