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복음 말씀

복음 : 사람들이 오해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

박이레 2026. 5. 15. 17:41

< 복음 : 사람들이 오해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 > 강성찬 형제님 / 26년 4월 26일 일요일

형제님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제가 여기 대전 중구 모임 이번 달에 지금 세 번째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 아이들도 여기 오늘 대전 간다고 하니까 또 가냐고 그랬는데, 그래도 재훈 형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여러 이렇게 모임 이제 방문하는데 그래도 대전 중구 모임 방문하는 게 제일 좋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왠지는 나중에 한번 물어보세요. 베드로후서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9-10).

우리가 금방 읽은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걸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이 성경이 귀한 것은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어떠한 존재이고,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그걸 잘 모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참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기만 해도 우리는 수많은 그 어리석은 행동들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성경이 귀한 책인 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겁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고, 단지 어떤 일을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실 이제 사람의 마음 아는 것도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말에 그런 말도 있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사람의 마음 안다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도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말씀을 귀를 기울여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 성경 말씀이 없으면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흔히 생각하기를, 약간 잔소리를 하는,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는, 내가 뭘 잘못하는지 아주 그냥 주시하고 있다가 조금 잘못하기만 하면 그것을 책망하고, 혼내고, 또 나중에 그것을 다 기록해 놨다가 그걸 가지고 혼을 내는, 이제 그러한 존재로 어렴풋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그런 좀 성가신 존재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제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금방 읽은 것처럼 우리를 혼내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멸망치 않기를 원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여기 보면 사람들은 "주의 약속은 어떠니의 더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이게 무슨 내용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도 대충 이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 텐데요. 이제 하나님께서 뭘 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 그게 느려진다는 겁니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또한 이제 그런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여러 가지 뭐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너 잘못하면 이제 심판하겠다. 이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느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느냐? 이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이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은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분이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10절에 바로 우리가 읽은 다음 부분인데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여기서 이제 '주의 날'이라는 것은 이제 주께서 행하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도적이 그 집을 쳐들어오는 것처럼 몰래,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하시는 대로 심판하시는 날이 있을 것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또한 잘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여러분이 그 심판을 받지 않고, 멸망을 받지 않고, 참 돌이켜서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심판을 안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은 반드시 하십니다. 심판이 여러분이 보기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쁜 놈은 심판을 지금 당장 받아야 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지금 심판을 안 받고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 사람도 살리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도 돌이켜서 회개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지금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중에 여러분도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더 기회를 주시고, 여러분도 돌이키도록 하려고, 지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제 '더디다'고 말하는데요. 이 '더디다'는 것이 '실행 의지가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은 말은 하지만은 실제로 그것을 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고, 의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의를 이루시기에 가장 적극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의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사실 의롭지가 않다면, 어떤 데서는 이렇게 행하고, 어떤 데서는 또 그 반대로 행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우리 가정 안에서도, 그 작은 가정 안에서도 이제 이제 가장이 말할 때, 그것을 말하고 또 그것을 분명하게 실행해야 됩니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가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가정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고, 아이들은 이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잘못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작은 단위인 가정 안에서도 분명하게 그 집안의 규칙이 이렇다면 분명하게 그것이 따라줘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의롭지가 않아서, 그 가장도 의롭지가 않아서,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구부리고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자기가 가장 먼저 어기고 하니까, 이 가정 안에 이제 문제가 있는 거죠. 그 작은 가정 안에서도 의를 올바르게 실행하지 못했을 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온 우주를 지금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다면, 그 의를 실행하지 않다면, 이 우주는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나는 내 경우에는 좀 봐줬으면 좋겠다, 내가 잘못한 거는 좀 봐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에게만 특혜가 있다면, 여러분이 그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면, 특별히 우주의 법칙이 여러분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은 여러분은 금방 그 결과가 얼마나 안 좋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의롭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도 안 좋습니다. 이 의로운 규칙은 반드시 그대로 정해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의를 실행할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또 여기서 '더디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실행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사람들이 하는 잘못들을 어떻게 그걸 다 알고, 다 그것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의롭게 갚으실까? 그런 하나님께 능력이 있는가?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제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빗대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10절에 보면 그 심판을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이 얼마나 크면, 정말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원자 단위로 분해돼서 해체되는 정도로, 하늘이 떠나가고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불에 녹는, 이 정도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으로, 그분의 말씀대로 심판하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데도 아직도 그 심판을 미루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바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지금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고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이 하나님에 대해서 구약 성경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 :11).

여기서도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 악인이 죽으면은 좋아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우리는 저 나쁜 사람, "저 나쁜 사람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악인에 대해서 여전히 사랑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악인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멀리 서서 "저 사람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게 아니라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그 사람이 죽지 않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돌이키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돌이켜서 떠나서 살도록 그것을 기뻐하시고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맹세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정말 분명한 사실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 가지를 이제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렇게 '돌이키도록 하나님은 모든 힘을 다해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여러분이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부분들이 이제 잘 드러난 이 신약 성경의 한 부분을 보려고 하는데요. 신약 성경 누가 복음 15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누가 복음에는 그와 같이 돌이키는 것,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세 가지의 돌이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세 가지 부분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11절부터 32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 잘 아시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제 중간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 15:11-13).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17-20).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눅 15:24-25).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8-30).

여기 어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고, 이제 그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받아서 먼 나라로 가서 그 재산을 모두 허비하였습니다. 이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그가 이제 그 가진 돈을 다 쓰고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그는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종들에게도 얼마나 풍성하게 대해주셨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알고, 그가 이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거죠. 정말 그 아버지 마음이 어떤 분이셨는지 그때야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이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갔을 때에, 참 그는 이 아버지를 떠난 자기를 참 아버지께서 다시 아들로 대우해 주는 것이 참 면목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다시 아들로 기쁘게 맞아줍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한 가지 기록이 되어 있는 이야기가 이제 첫째 아들은 그 돌아온 동생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돌아온 동생을 보고 아버지께서 환대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제 화를 내는 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특별히 이제 이 부분을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이제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우리는 거의 비슷한 반응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하면, "왜 저러냐? 저 나쁜 놈!" 다 비슷한 반응을 합니다. 그란데 이제 그 사람이 그것을 이제 돌이키고 "내가 그걸 잘못했다." 이렇게 잘못해서 돌아올 때 이제 그때 반응이 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그렇게 이제 반성하고 돌아오니 잘 됐다." 이제 이렇게 반응을 보일 수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이 나쁜 놈아, 네가 지금 뭐 잘못했다고 하면, 뭐 다야?" 이렇게 반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그 잘못한 사람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만약 정말로 그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돌이키는 것에 대해서 좋아하는 겁니다. 그가 나한테 얼마나 피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그가 반성하고 잘못했다라고 말하면 그래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별 애정이 없는, 사실상 남인 그런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싫어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제 정죄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과 또 별도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도 또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의로운 공의의 감각이 있기 때문에, 사실 이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이의 감각도 많이 왜곡돼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공의의 감각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잘못하면 "저 매 맞아야 되는 놈!", "저 나쁜 놈!" 이렇게 이제 비난을 합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다 동일한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잘못한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있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가 돌아왔을 때의 반응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 대한 그 애정을 여전히 변치 않고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면서 그를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한 애정 없이, 그냥 의로운 것만, 의로운 통치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이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이제 공의로운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제 정죄하는데, 특별히 나에 대해서 잘못했다면 더 못 참습니다. 나에 대해서 잘못했다면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더 보복하려고 합니다. 나한테 잘못한 만큼 갚아주겠다. 이게 이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아버지는, 이 둘째 아들이 일반적인 잘못을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이 둘째 아들이 이 사회적인 어떤 다른 사람에게 다른 잘못을 한 게 아닙니다. 이 둘째 아들은 바로 그 아버지에게 대해서 잘못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싫다고 떠난 겁니다. 아버지한테 "더 이상 당신하고 같이 살기 싫어요. 저한테 유산 다 주세요." 이제 유산을 받았다는 것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살겠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겠다는 겁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영향력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떠난 아버지를 이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자기에게 잘못한 아들을 받아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잠깐 이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겁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한 겁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 영향력 아래서 살기 싫다고 떠난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떠난 겁니다. 이게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우리가 이제 구원받아야 됩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이제 복음 집회에 올 때에 "지금 구원받아야죠." 하면서 여러분들의 이제 가족들, 친구분들이 여기를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구원받아야 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구원을 받는 겁니까?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떤 위험이 있어야 되잖아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지금 안 좋은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과연 어디서 구원받으라고 여러분을 데리고 나오는 겁니까? 이걸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교회 다니시는 분들 가운데, 이제 종교인들 가운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구원받았냐고 물어보면 잘 대답을 못하세요. 왜 그러냐면 그 위험을 못 느껴본 겁니다. 정말 위험한 가운데 있었다면 자기가 어디서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그 사람한테는 우스운 질문이지만, "당신은 어디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은 당연하게 "저는 물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는 그 위험에서 구원받았다고 바로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단순히 교회 다니는 것으로,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분들은 자기가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정말 위험을 느껴본 사람이 어디서 구원받았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죄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가 너무나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다는 게 너무나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 탕자의 이야기에서 그걸 알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다음에 즉시로 위험에 빠져버립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복되게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그가 하는 것은 모두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즉시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이 지금 살아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영적인 복을 잃어버립니다.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영적인 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순간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께서 참으로 복으로 그에게 준 모든 돈을 순식간에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15절에 보면 종이 돼서 살아갑니다. 그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아버지께 받은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누려야 되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노예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이와 같이 위험한 겁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해서 하나님을 떠나면은 자유롭고 더욱 부유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반대로 자유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죄의 고통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죄의 고통 가운데서, 정말 여기서 구원받아야 되는데, 참으로 여기서 구원받아야 되는데, 참 이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죄에서 구원할 자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잠깐 마태복음 한 군데 말씀을 보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여기 구원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고통스러운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해서 구원받았어." 이렇게 하실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제 "교회에 출석을 잘 하게 해서 이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돼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실 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이 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그 죄에서,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죄에서 구원할 자가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이제 누가 복음 15장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이 15장에 나와 있는 '탕자와 아버지의 비유'에서 참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아들이지만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정말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제 또 이제 두 번째 돌아온 비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복음 15장 8절입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8-10).

여기서는 이제 어떤 여자에게 이제 동전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동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찾도록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찾기까지 부지런히 찾다'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부지런히 찾으시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돌아오도록, 언젠간 돌아오겠지,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그냥 집에 가만히 앉아서 이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으시는 게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제 등불을 킵니다. 그리고 집안을 빗자루를 들고 쓸면서 찼습니다. "부지런히 찾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대해서도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은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님을 보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등불을 키십니다. 이 등불을 킨다는 것은, 등불을 키면은 우리가 그 집안 구석구석을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이런 가구가 있고, 그리고 그 가구 밑에 혹시 동전이 있는지, 등불을 켜고 구석구석을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안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지. 그래 내 마음속에 한쪽에 이런 그늘이 있었어.' 그 그늘도 이 등불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어두운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둠 가운데 그 동전이 놓여 있나 찾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서 이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등불을 켜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빗자루로 쓸고 있는 것'입니다. 빗자루를 이렇게 쓸 때 이제 마루가 이렇게 쓸리는 겁니다. 이것도 역시 이제 성령이 하시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쓸고 계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양심에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긁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은 잘못한 게 맞아.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예전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여러분이 그냥 평상시에 그냥 하는 행동들입니다.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렇게 하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시고 나의 마음속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친구에게 똑같이 하던 행동입니다. 내가 그냥 친구한테 이기적으로 행동하던, 또 살짝 거짓말하는 그런 것,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씀 앞에 섰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인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이제 가정 안에서 나의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원래 그때 하던 행동들입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말하고, 비난하고, 이제 그러한 것들, 평상시에 하던 행동들이었는데 특별하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동들을 정죄하시고,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쓰는 것입니다.
쓸면은 이제 바닥이 깨끗하게 쓸리지만, 또 이렇게 먼지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먼지들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이제 무시하지 않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도 뭐 다 그렇게 사는데," 이렇게 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 지금 이 여인이 등불을 켜고 빗자루를 들고 쓰는 것처럼 동전을 찾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지금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책망하시고, 그 마음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지금 찾고 있구나, 이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참 이게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하고 계시는 일들입니다.

이제 또 한 군데 비유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장 4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여기서는 어떤 사람에게 이제 양 1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어서 딴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 목자는 그 99마리를 놔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서 찾을 때까지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래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99마리는 지금 어떡하란 말이냐? 지금 99마리, 이게 지금 훨씬 더 많은 수의 그 양,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우리 계산으로 하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이제 계산으로 하면 그렇게 되는데, 감정적으로는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감정적으로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찾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양을 단순히 숫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야, 한 마리는 포기하자. 한 마리는 한 마리인데 그것은 그냥 잃어버려도 돼."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100점 만점에 99점 맞으면 잘한 거잖아요. 아이들이 99점 시험에서 받아오면 잘했다고 합니다. 그걸로 만족하죠. 그런데 이게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하나하나에 대해서 애정을 갖고 있었다라면 그렇게 안 되는 겁니다. 그 놓친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가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를 봤습니다. 어떤 부모에게 여러 자식들이 있었는데 한 자식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 부모는 그 잃어버린 한 자식을 찾도록 찾아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 다른 자식들이 제대로 돌봄을 못 보고 그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그런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는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 잃어버린 애를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끝까지 찾아다니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 이제 바리새인들은, 그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이제 그들 사회에서도 죄인들이 있는 거죠. 창기, 이제 그런 죄인들이 있는 거죠. 100명 중에 한 명이 있는 겁니다. 우리도 100명을 뽑아보면 전부 다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아요. 그중에 한 명은 꼭 이상한 사람이 껴 있습니다. '쟤는 좀 없었으면 좋겠다.'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 100명 중에 창기 한 명, "걔는 우리 이스라엘의 수치야. 걔는 없어야 돼."라고 합니다. 없으면 상관 안 하고, 없으면 더 좋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 찾을 때까지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찾으시냐면, 여기서는 이 비유에서는 이제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도로 여러분을 찾냐면은 찾을 때까지 어느 정도 찾냐면, 자기 목숨을 버릴 때까지, 버리기까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되는데도 그래도 찾으신다는 겁니다. 자신이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됐습니다. 죄인인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었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참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죽으셨지만, 여러분이 돌이킨다면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기꺼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찾으면 "함께 즐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양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 그 양과 절대로 다시 헤어지지 않겠다. 그 양을 어깨에 꽉 매고 돌아오는 겁니다. 죄에서 회복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어깨에 얹혀가지고 간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죄라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분리돼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이 구원자의 어깨 위에 이제 매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분께 업힌다는 겁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탕자가 이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부유하신가, 그 집의 종들에게도 얼마나 자비롭게 대하셨는가, 그것을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참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여러분을 찾도록 찾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참 그분은 기뻐하면서 여러분을 메시고, 여러분의 온 생애를 영원토록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