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죽음으로 헛된 인생, 죽음 이후에 새 지평을 여신 예수님 > 강성찬 형제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1-4).
저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예전에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그리고 또 좀 유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재벌 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왕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이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해서 별로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끼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더 좋은 조건의 돈이 많거나, 아니면 높은 지위의 삶을 살았으면 다르지 않았을까?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것을 다 적어놓으셨습니다. 그런 삶에 대해서 어떤 것인지, 그런 삶도 어떤 것인지를 적어놓으셨습니다. 그러한 삶도 특별하지 않다라고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헛되다'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해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라고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좋은 조건의 삶에 대해서, 실제로 살아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여기 그 왕의 입술을 통해서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그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예전에 솔로몬이라고 그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대를 살았던, 가장 부유한 왕국을 이끌었던 그 왕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장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장 놀라운 지혜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도 그가 그 인생을 살아보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3절에 말한 것처럼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그것이 모두 이 헛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이 삶에서 만족이 없는 것이 '이건 해봤어야 되는데', '내가 꼭 저거는 한번 해봤어야 되는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해봐야 되는 일, 내가 죽기 전에 이건 해보면 만족할 텐데, 이제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가 안 해본 것 ,이제 그것에 대해서 동경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 왕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2-13).
여기 이 왕은 특별히 '지혜를 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왕은 자기가 많은 지혜를 가져보기로 한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기가 공부를 많이 하면, 여러 가지 지혜를 추구하고 그 지혜를 얻으면, 이 삶에서 만족을 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괴로웠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지혜가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번뇌가 많아졌더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많아지니까, 근심이 더해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배고파도, 괴로워도, 사람이 지혜가 있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많으면 많을수록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사실인 것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사람이 속이 편한 것이죠. 여러 가지 것들을 살필 줄 아는 그 지혜가 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것입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괴로운 것은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혜도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쾌락을 쫓아야겠다. 뭐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그걸 추구해야겠다라고 살아봅니다. 2장에 보면 이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이제부터 공부는 안 되겠다. 그건 뒷전으로 놔둬놓고 뭐가 재미있을까, 이게 재밌대. 이게 새로운 것이 나왔대, 하면 이제 다른 걸 다 제쳐놓고 가서 그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전 2:2).
열심히 재미를 추구하는 것, 이게 결국에는 자기 정신을 빼먹고 자신의 뇌를 비우고 그냥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에는 아무 의미 없는 그러한 추구가 아니었는가, 이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에도 그런 말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사람이 재미만 추구하면 뇌가 썩는다고 합니다. 이게 의학적으로 재미를 추구하면 이 도파민이 나오게 되는데 이게 그걸 더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그리고 그 도파민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점점 더 이상한 재미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뇌는 예전에 비해서 좀 더 자극적인, 더 큰 재미를 주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게 되는 상태에 간다고 합니다. 이게 이 뇌가 썩는다는 말로 표현을 하더라고요. 이게 사실 어떠한 중독보다도 더 무서운 중독이라고 합니다. 점점 뇌가 사실상 미치게 되는 것이죠.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안 되겠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전 2:4).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전 2:7).
이제 이 사람은 사업을 해야겠다라고 합니다. 사실 돈 버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돈 버는 재미가 얼마나 있는 것이냐면, 사람들이 이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귀신이 있는데, 사업 귀신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업을 한 번 하게 되면 망해도 또 해야 된다는 겁니다. 또 돈을 왕창 빌려서 또 사업을 하고, 아주 집을 다 말아먹을 때까지 사업을 해야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게 자기가 뭔가를 해서 돈을 버는 그 재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여러 가지 돈을 많이 투자해서 사업을 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보다도 많은 돈을 벌고, 이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소용이 없었더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사람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였지만 그것이 '다 또 무익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조금 뒤로 가셔서 2장 16절과 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전 2:16-17).
왜 다 헛되냐면 죽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헛된 것입니다. 죽고 난 이후에 지혜자나, 그렇게 놀라운 지혜가 있었던 사람도, 아주 어리석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사람도, 죽고 난 이후에는 다 그냥 잊혀지고 다 똑같이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난 이후에는 그 사업을 통해서 많이 벌어놨던 모든 소유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가 행하는 어떤 일도 의미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생각할 때에, 그는 이 죽음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는, 이 해 아래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될 뿐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정말 그렇다. 정말 그 죽음 앞에서 참 이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 정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어떤 분들은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꽤 있더라고요. "어쩔 수 없지. 그 죽음 앞에서 뭐 어떻게 하느냐? 나는 그냥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래도 재미나게 살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그런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그 죽음의 그 폭력성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우리를 얼마나 망가뜨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제 이 교회에 아는 분들이 많이 있다 보니까, 이제 장례식을 많이 참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면 장례식에 꽤 많이 참석한다고, 이제 한번 수를 세워보시면 누구 결혼식이라든가, 또 누구 아이가 태어났다든가, 이런 것보다도 이상하게 장례식이 더 많더라고요. 우리가 이제 평소에 다른 일은 연락을 안 해도,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던 친구나 친척이라도 이제 장례식에는 이제 연락을 하고, 오랜만에 이제 그 형편을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장례식에 가는 것보다 더 뭐라고 해야 될까요? 무서운 게 있는데요. 그게 뭐냐면 요양병원에 가는 겁니다. 제가 이제 복음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요양병원 같은 데를 찾아갈 때가 있습니다. 보통 이제 나이가 들어서 죽기 직전에 그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양병원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분위기가 되게 무겁습니다. 거기 한 번 갔다 오면 '우리 삶의 의미가 뭔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그게 이제 마지막 코스인데, 제 자신도 결국에는 이제 그렇게 될 텐데, 그 요양병원에 많이 누워 있는 그 나이 많은 분들을 보면 굉장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겁니다. 특히나 그분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경우라면, 그분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더 마음이 무겁게 됩니다. 너무나 힘이 빠져 있고, 너무나 살이 빠져 있는, 그냥 힘 없이 그 기계에 의존해서 누워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 사망의 힘입니다. 그 사망의 폭력성, 정말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 버리는 그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망 앞에서 "그건 뭐 아무 상관없어." 이렇게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사망의 실체를 한번 직접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나이 드신 분들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은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 젊었을 때 멋있고 예쁜 거예요. "아니, 이분이 이렇게 예쁜 분이었어?" 이렇게 깜짝 놀랍니다. 참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절정의 생명력이 발휘되는 순간, 그 20대 그때는 정말 누구나 다 멋지고 누구나 다 예쁩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빼앗겨버린 그 모습을 보는 것, 죽기 직전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습 앞에서도 그 사망에 대해서 아무 상관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이 솔로몬 왕처럼 참 이 사망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정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망이 강력하게 우리의 소중한 것을 다 빼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사망이 도대체 왜 이 땅에 오게 된 것일까 생각해 봐야 됩니다. 성경은 이 사망이 이 땅에 온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원래 사망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사망에 대해서 결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사망은 우리랑 너무나 거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 젊음의 절정인 생명을 누리도록 만들어진, 그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망을 결국에는 없애실 것입니다. 이 사망을 나중에 '불못에 던지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사망도 하나님께서 없애실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망은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낯선 것이었고 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여기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망이 이 땅에 오게 된 그 이유를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은 우리 인류의 대표 아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싫어했을 때, 그걸 거절했을 때, 이제 그것을 통해서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생명의 근원, 사람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 손으로 일해서, 돈을 벌어 가지고, 먹을 것을 사고, 그 먹을 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한다라고, 내 손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식량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단지 식량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식량이 여러분 몸 안에 들어가서 소화되고, 그것이 내 영양분이 되고, 에너지가 되도록 그렇게 원활하게 그 몸의 순환을 이루어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직도 과학자들은 그 영양분이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지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그것을 계속 유지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면 이제 그의 생명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을 거절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거절한다면, 그 생명의 근원을 끊어버린다면, 우리가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담은 어리석게도 그걸 선택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라인을 끊어버리고 자기가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니 그 한 사람이 잘못했는데 왜 나까지도 그 사망을 겪어야 되냐라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이걸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담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뜻을 이루고, 내 방식대로, 나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구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마지막 구절 6장 2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도 그 죄와 사망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짧지만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받는 그 월급은 사망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제 죄의 형벌, 또는 그 죄의 심판, 그것이 사망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왜 "죄의 삯이 사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건 이제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이 '삯'이라는 것은 이제 월급이라는 건 좋은 거죠.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에 나한테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 '뭔가 재미있을 거야.' 조금 거짓말을 하고, 조금 불리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취했을 때에 '그건 나에게 이익이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나에게 월급처럼 돈이 되는 걸 거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사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속이는 거라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겉으로 봤을 때, 죄는 처음에 봤을 때는 항상 나에게 뭔가를 더해줄 것 같이 보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주는 것이 사망이다. 죄는 항상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이제 '삯'이라는 것은 죄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망이다. 이걸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동반되는 것', 첫 번째로는 이것은 속이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다. 이걸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이제 시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시간 일하면 만 원을 받습니다. 이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죄도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는 그 시급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1시간 하면 반드시 이것이 옵니다.' 이런 게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죽었을 때에, 죽고 난 이후에 이제 지옥에 가서 받는다. 물론 이제 그게 분명히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죄를 짓는 순간, 마치 이제 알바생이 오늘 일하고 "오늘 3시간 일했으니깐요. 3시간 급여 주세요." 해서 3시간 일한 만큼 3만 원 받아서 가는 것처럼, 이제 일용직 노동자가 오늘 하루 일하고 그 일당을 받아서 가는 것처럼, 죄는 지으면 정확히 비례해서 그만한 대가를 여러분에게 당장 지급해 줍니다. 그날 지은 죄는 그날 대가를 받는 겁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기 스스로 생명의 수도꼭지를 잠가버리는 행동입니다. 자기는 그만큼 그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표현에서 반드시 죄는 여러분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요한복음에 가보면 이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18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라고 돼 있습니다. 사실 죄인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참 죄의 그 안타까운 것은 그는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더 망가뜨리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한 번 지으면 이제 관성이 붙어서 계속 자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자기를 몰고 갑니다. 처음에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지만 그다음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그게 당장 받는 죄의 대가입니다. 죄는 짓는 즉시 죄의 종이 돼서 계속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망이라는 것은 그 결국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은 지금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하나님과 단절이 되는 그런 고통을 현재적인 고통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이 사망이라는 것은 또한 우리가 최종적으로 받는 그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에 우리를 최종적인 심판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불못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이라는 곳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육체의 죽음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영원토록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할 수 없는 그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둘째 사망이고 불못에 던지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망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 사망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로마서 6장 23절은, 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6장으로 돌아와서 그 후반부 말씀을 주의 깊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분으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알게 되는 것은 이 영생은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은사'라는 것이 이제 '은혜의 선물', 은혜로 주시는 것, 선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 선물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노력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그래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른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한 행동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받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한 번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이유가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려 함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이 '자녀들'은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혈육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그분이 우리처럼 사람이 되어 오셨는지, 왜 그도 또한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시고 오셨는가? 그 이유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 목적은 바로 그 죽음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방을 어떻게 이루시냐면 그분이 죽음으로써, 그분의 사망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셨다. 그의 힘을 무력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걸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여기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뭍힌 무덤은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산소나 이제 묘지를 가게 되면, 거기 이제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그 비석들에 보면 보통 거기에 이제 묻혀 있는 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분이 이제 태어난 날, 그리고 그분이 이제 죽으신 날이 이렇게 적혀 있고, 중간에 이렇게 물결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인생이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났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무덤이라는 것은 그 인생의 끝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런 표현도 하죠. 어떤 것이 끝났을 때, 특별히 끝났는데 패배했을 때, 뭔가 이제 졌을 때,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것의 무덤' 이렇게 합니다. 거기는 누가 가도 다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해, 그러면 거기는 어떤 사람들의 무덤,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역은 무덤이야.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거기서 끝내는 것, 실패하는 것, 이렇게 무덤이라는 용어를 써서 이제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무덤은 시작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제 이 땅에 이제 혈육을 입고 태어나는 날이 있었습니다. 다 똑같죠. 그리고 그분이 죽으신 날이 있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날과 죽으신 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 무덤은 예수님의 실패다, 죽었으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 그것은 이제 다 끝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점이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시작했고, 그리고 물결, 언제까지 해서 끝났다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으신 날 다음에 물결이 하나 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살아나고 끝나는 날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태어나신 날, 물결, 십자가에 죽으신 날, 그런데 그다음에 또 물결, 끝나는 날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실패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시작의 그 시작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무덤은 거기가 끝이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거기서부터 이제 놀라운 일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여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외에 누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인정되었다라는 말이 '어떤 지평을 열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였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의 지평도 여셨습니다. 사람의 새로운 지평선을 여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 허무한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그래서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님께서 그 무덤이 끝이 아니라 그 부활로 말미암아 무덤이 새로운 시작이 됨을 여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무덤이 끝이 아니라 무덤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지평을 여신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새로운 지평을 여신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끝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처럼 부활해서 영원토록 그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에 대해서 이제 한 군데 더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9-10).
여기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그때 일어났던 일과 그 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일은 9절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여기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죄를 범치 않으신 분입니다. 그 입에 어떠한 거짓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참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아 죽은 그런 죄인들처럼 그 악인과 함께 예수님의 그 몸을 처리하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사형수로서 죽은 그 죄인들의 몸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처리하고 마는 것이 이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제 일반적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에 한 부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특별히 예수님의 그 몸을 자기한테 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부자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가 들어가려고 그 준비해 놓은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의 몸을 모셔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큰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이게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의 문은 열려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심을 보라라고 천사들이 증거하였습니다. 참 이게 우리 주님의 부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이 미리 예언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악인과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제 미리 그분이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일어난 그 사건을 미리 말한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분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은 강포를 행치 아니하고 그 입에 궤사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 형벌을 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돼야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대신 원하신 것이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자신의 아들이 대신 그 형벌을 받게 하기를 원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이 속건 제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갚는 희생 제물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은 그 죄를 대신하는, 그 죄 값을 치르는 희생 제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그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는 속건 제물인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피 흘리지 않으면 죄사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거룩한 사람이 자신의 피로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죄사함이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혈육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사망을 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고 속건 제물로 자신을 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죄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앞에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의미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여러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이제 여러분의 죄 사함을 받고 여러분은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망이 여러분의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것들이 영원토록 의미가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삶을 여러분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상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강성찬 형제님 > 복음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복음 :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2) | 2025.12.11 |
|---|---|
| 복음 : 사도행전 16장,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복음 (1) | 2025.12.05 |
| 복음 : 예수님을 오해없이 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2) | 2025.06.17 |
| 복음 : 세가지 병, 문둥병, 중풍병, 열병 (0) | 2025.04.20 |
| 복음 :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방법(요약) (0) | 2025.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