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5절 / 마포모임, 20년

박이레 2026. 3. 31. 19:05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5절 / 마포모임, 20년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1:5, 개역한글)

- 이병호 형제님 사회 : 예, 오늘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부터 공부할 차례인데요. 먼저 성경을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3-10).

오늘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부터 보게 될 텐데요. 5절 말씀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되어 있는데요. '듣다'는 표현이 1절과 3절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고, 또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너희에게 전한다는 표현도 2절과 3절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는데, 듣고 전하는 부분에 대해서 교제되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을 말하고, '저에게서'는 주님, 사도들이 3년 반 동안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그런 가르침을 들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들었던 내용의 핵심이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이 내용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이 의미하는 것, 또 빛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 교제가 되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반대로 어두움이 나오고 있는데, 이 어둠이 또 의미하는 것, 또 이 어둠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 교제가 되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계속 1절에서 4절까지 공부해 오면서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이 생명에 대해서 배웠었고 또 이 생명은 하나님과 또 주님과 성도들과의 그런 기쁨이 충만한 교제라는 부분이 지난 시간에 교제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5절, 오늘 배울 말씀부터는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이 생명이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또 그 지난 시간에 교제의 충만한 기쁨에 대해서 배웠었는데, 이 기쁨을 유지하는 그런 방법이 무엇인지, 이런 부분들도 함께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5절 말씀, 묵상하신 부분들 형제님들 교제에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 형제님 1 : 5절은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저에게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 이것은 "곧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주님이 하셨던 말씀들을 듣고, 또 그것을 전하는 소식이 하나님은 빛이시고, 주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앞에서 주님은 생명이시라는 것들을 사펴 봤고요. 주님은 빛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뒤에 보면 완벽한 어둠이 전혀 조금도 없다라고 하고 있습닏. 그래서 완벽하신 빛이신 주님으 말씀하고 있고,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과 구별되는 빛이신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지고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쓴 사도요한은 주님에 대해서, 주님은 생명이시고, 빛이시고, 사랑이시라는 말씀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저희가 보게 되겠지만, 생명이시라고 하는 말씀은 제가 2절에서 교제를 한 바가 있고요. 그리고 빛이시라고 해서 빛에 대해서 5절에 언급을 하고 있고, 사랑에 대한 부분은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16절에도 중간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해서 주님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동일한 표현으로 요한복음에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래서 주님이 생명이시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구요. 빛에 대한 언급은 9절에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그래서 주님은 참 빛으로 오셨다라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고요. 그리고 주님이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3장 1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생명이시고, 빛이고, 사랑이시다라는 것들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창세기 말씀을 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그 같은 성정을 갖고 계심을 저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래서 생령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을 주신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빛이시라는 것은 1장 3절과 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리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이렇게 해서 빛을 창조하신 그 부분들을 살펴볼 수가 있고요. 또 사랑에 대한 부분은 3장 21절 말씀해 보면 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 부부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요한사도가 언급한 이 빛이고, 생명이고, 사랑이신 우리 주님과 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드님을 보내신, 이 하나님의 같은 성정을 살펴볼 수가 있고, 이런 것들이 그 아버지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같이 사귀고 교제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된다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 전효진 형제님 :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사도들은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 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고 들었던 것을, 그 소식을, 그 생명의 말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이 소식을 세상에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사도들에게는 소망이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또 커다란 영광일 것입니다.
이 소식의 내용과 주제는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결함이나 불완전한 것, 어둠이 조금도 없는, 순전하고 빛나는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에 지극히 합당한 표현이 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소식인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을 자주 대조시키는 사도요한은 이 빛이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이 합당한 빛 가운데 행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후에 계속되는 말씀으 통해서 권면하고 있음을 저희들이 볼수 있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가 바로 이 빛 가운데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에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 죄의 속성인 어두운 그림자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볼수 있는데요. 하나님과의 사귐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음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라고 선언해 주신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사도는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시라는 말씀을 통해서 또 알게 해 주시고, 또 거짓 교사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반박하여 주는 그런 말씀이라고 보여집니다.

- 조재훈 형제님 : 5절 전까지는 교제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케  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5절에서는 그 교제의 조건, 또는 기초가 되는 사항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신 성품이 그 교제의 기초가 되는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6절부터 10절까지는 이 교제를 방해하는 요인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2장 1절부터 2절까지는 교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주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2장 3절부터 후반부까지는 교제 가운데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진리를 알고, 가르침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은 "이것이 바로 그 소식이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교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것이 바로 그 소식이다" 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 가운데 계속 거하려면 선생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소식은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그래서 사도들이 생각해낸 것이나 또는 세상의 가르침으로부터 유추한 것이 아니라 직접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지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그들 가운데 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전한다는 것은 밝히 선포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주님이 바로 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그들의 가운데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교제된 대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라고 되어있고, 또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시며 또한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빛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곳에서 임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은 또한 빛 가운데서 행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 사도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을려면,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한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그래서 여기서는 두 번의 부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없으시되 조금도 없으시니라" 이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화에 나오는 거짓된 신들을 보면, 어떨 때는 올바른 것들이 보임에도 또 악한 것들이 섞여 있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거짓 신들의 특징이라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하나도 어둠이 없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것들은 하나님은 허용하실 수 없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죄에 대해서 피하고 또 그런 것들을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 박성호 형제님 : 5절부터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고 기쁨을 빼앗는 요소들 첫 번째에 대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무엇무엇이다' 라고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요. 성경 여러 부분에서 또 이런 동일한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이해하고, 납득하고, 하나님을 탐구해서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나 철학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는데요. 창세기에서 어떠한 배경 설명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라고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시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알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편에서 그것을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인지하심을 기대하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방법과 또 우리의 지식과 이성의 어떤 무력함이 철저하게 드러나고 정말 진정한 해결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빛이라"라고 하셨는데요. 앞서서 여러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빛에 대해서 자기 안에 있는 어떠한 비밀스러운, 신비스러운 지식, 이것들을 비유적으로 빛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것은 죄와 같이 어둡고 더럽고 냄새 나는 것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전에 저희가 앞에서 사귐이라는 것, 교제라는 것은 '공통된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5절은   이러한 사귐의 전제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러한 말씀이 떠올랐는데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거룩함이 요구되는데, 그 수준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인 것입니다. 과연 이 정도가 어느 정도일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수준에 이룰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렇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이 정말로 필요하다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최선의 것도 배설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절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망상이 될 거고요. 그러한 것들은, 또 자기를 속이는, 기만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성화에 대한 잘못된 분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든지, 또 완전주의라든지, 자기의 사람의 수준으로 거룩하심을 낮춰서 그것을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잘못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그러한 능력도 저희에게 없는 것이고요. 또 저희의 상태라든지, 환경도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가 그런 사귐 가운데로 들어가기 전, 구원받기 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계속적인 사귐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준인 것입니다. 그 부분이 6절부터 나오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이런 거룩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죄 같은 어둡고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만약에 정말 하나님의 빛이다라는 그러한 말씀을 떠올린다면, 그 달려가는 발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지난번에서도   1절에서 3절까지에 대해서 구약에서 예표로 지성소에 대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5절 말씀은 특별히 그러한 측면에서 또 한번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요. 지성소에는 속죄소, 시은좌, 언약궤가 있다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대재사장이 1년에 한 번 피를 들고 그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지성소에 대해서, 구조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본다면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고 휘장을 열고 이렇게 들어갔을 때, 성소에서는 등대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그 안에서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에서는 인공적인 불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세사장이 과연 어떻게 그러한 의식들을 행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됐는데요. 제가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지성소에는 어떠한 다른 불빛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셰키나 그 하나님의 영광이 시은좌 위에서 그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공적인 빛을 내기 위한 도구들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빛이라는 것은 구약에서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갔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시내산에 있었고, 또 모세가 내려왔을 때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런 것들이라든지, 솔로몬의 성전이 준공되었을 때, 또 베들레임에서 예수님이 나실 때 별들이 빛을 비추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빛, 하나님 임재하심이 빛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형제님들이 얘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저희도 거룩해야 되는데요. 그것도 역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그전에 새마포를 입고 물로 씻고 또  아사셀 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이렇게 정결하게 한 다음에 들어가게 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그러한 거룩함을 가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형제님 3: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하나님과 빛과의 관계에 대해서 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희가 성경에 첫 책의 첫 장인 창세기를 볼 때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저희가 복음서의 시작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은 또한 빛을 보내신 분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저희가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에 보면, 계시록 22장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빛이 되셔서 영원히 천국에서 비추실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것들을 보게 될 때 또한 이 빛과 어두움이 항상 나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1장 3절에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그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비추셨지만 죄인들은 그 빛 어두움으로 표현돼 있으며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나눠지는 것을 또한 이렇게 보게 됩니다. 또한 저희가 후에 마지막 천국에서 있을 것을 보게 될 때 영원한 빛이 있는 천국과 또한 어두운 구덩이인 지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빛과 어둠이 나뉘는 것을 보게 될 때 또한 이 고린도후서 6장 말씀에 있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매지 말라" 말씀하시면서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라고 하신 그 말씀을 또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말씀을 쭉 살펴보게 될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것을 계속 보게 됩니다. 마치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으며 항상 나눠지듯이 이러한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이 항상 나뉘게 되고 둘이 서로 교제할 수 없으며 사귈 수 없음을 또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5절에서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1절부터 4절까지는 앞부분에서는 사도가 주님을 보고, 주님을 듣고 해서 쓴 내용이라고 하면, 5절은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소식이 하나님이 빛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빛에 대해서 여러 가지 속성을 저희들이 얘기할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희들은 이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빛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어두움과 반대되는 것이고, 죄와 거짓과 반대되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겠고요.  
1절에서 4절까지는 저희들이 '생명'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의 특성상, 그 생명의 그 본성상,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리고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게 되고, 그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그 교제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제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그 교제를 하고 싶고 그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함께하는 교제입니다. 여기 6절에서는 그것을 '하나님과 사귄다'라고 얘기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과 사귄다는 것은 저희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고, 아까 형제님 지적해 주신 대로 빛 가운데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희가 교제하기 위해서는 빛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로 하여금 교제할 수 있게 하는 능력, 힘은 '생명'이라면, 저희가 교제하는 '영역'은 '빛'인것입니다. 저희들은 '빛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그 특징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10절에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해서 저희들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는 힘, 그 본성은 생명이라고 영생이고, 그리고 이 교제의 영역은 빛인 것입니다. 왜 빛이냐면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희들이 빚 가운데서 교제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면, 그 책임을 또 그 이하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7절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것이 저희들이 구원받았지만 우리가 그 빛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이것인 것입니다. 아까 앞에서 어떤 형제님이 지적해 주셨는데요. 2장 1절, 2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셨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녀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 주셨느냐를 말씀하고 있다면, 7절 이하에서는 우리가 교제하기 위해서, 그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빛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이 그 빛 가운데에서만 교제할 수 있다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5절에서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형제님 말씀해 주셨지만, 사도가 앞에서는 듣는 것도 있었고, 눈으로 본 것도 있었고, 그리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3절에서도 보고 들은 것을 얘기를 했고, 그리고 5절에서는 듣는 것만 얘기합니다. 어떤 형제님도 그런 질문을 던지셔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여기서는 듣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을 하는데요.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듣는 것이 그 말하는 사람에게 강조가 있습니다. 보고 만지고, 이런 것들은 받는 사람이 그 의도가 있는 거죠. 어떤 부분을 보고 어떤 부분을 만지고, 그런데 듣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주님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고, 그리고 주님의 의도를 주님이 가장 강조해서 첫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금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가장 첫 번째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소식임을, 바로 하나님은 빛이심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전하다'라는 단어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2절에서도 전하다라는 단어가, "전하노니" 이렇게 있고, 3절에서도 "전함은" 있는데, 비슷한 단어이긴 하지만 5절에 있는 지금 보고 있는 이 '전하다'라는 단어는 조금 다른 단어입니다. 이 전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부분들을 구절을 보면 내용들이 다 이렇습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먼저 듣고 들은 대로 말하다" 이런 표현들이 계속 나오는 단어가 이 5절에 나오는 전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님이 가장 강조하는 소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주님에게서 들은 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다'라는 표현도 이 요한일서에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게 왜냐하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사람들이 막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야. 다른 것은 무시해도 돼." 이런 발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대로 온 소식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요한일서 뒤에도 보면 "그 소식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여러 가지 잘못된 이야기들이 있지마는 진정한 것이 이것이다." 라는 것을 2장 25절에,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다." 3장 11절에, "이것이 바로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다." 그리고 3장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다."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다." 4절에,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다." 그리고 5장 20절에, "바로 이분이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니라" 후반부에, 그러니까 이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잘못된 발언과 다른, 이것이 진리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표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 "하나님은 빛이시라"인데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 특히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절대적인 그 거룩함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분의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도 같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진리를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정죄하시는, 심판하시는 그런 부분들이 함께 그분이 빛이심과 함께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온전한 거룩함으로 또한 그 성품에 맞게 행하시는 부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앞에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고요. 그리고 또한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중간 지대가 있겠지, 좀 어느 정도 회색 지대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던가, 아니면 거짓이던가, 참이던가, 거짓이던가, 이 둘 중에 하나만 있다는 것을 또한 이 표현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절대적인 거룩한 분이시고 그러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인데, 그럼 과연 어떻게 사람이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서 나아갈 수 있는가? 그 앞에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그분에 대해서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시며"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거룩한 분에게 어떻게 죄인인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가를, 그 근거를 말해주는 부분이 이 5절부터 2장 2절까지라고 생각이 듭니다. 잠깐 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 그 내용을 말하고 있는 첫 번째 부분을 한번 잠깐 간단하게 개요를 나눠서 생각을 해 볼 텐데요.
1장 5절부터 2장 28절까지가 이 "하나님은 빛이시다"와 관련돼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5절부터 2장 2절까지가 '빛 가운데서 어떻게 교제할 수 있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2장 1절, 그리고 우리의 화목 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교제를 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2장 3절부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요. 여기서는 그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 어떻게 빛 가운데 행하는가'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2장 3절부터 11절까지는 '그리스도의 계명'과 관련돼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관련돼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계명의 첫 번째 계명인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말로만, 거짓말로 거짓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그 계명을 지키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이 부분에서는 계속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대조적으로 반복해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계명과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2절부터 17절까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무라기보다는, 의무이기도 하지마는 또한 그 생명을 가진 그리고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그 동일한 성품을 그 생명으로 받은 자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그 생명의 현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장 18절부터 28절까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부분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생명을 가진 자들이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 마지막 부분에서도 거짓 교사들, 그들이 말하는 잘못된 교리들, 하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그러한 거짓된 가르침을 부인하고 진리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빛이시다" 이 부분에서 또 그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예, '빛' 그러면 항상 빛, 어둠, 하면 항상 두 가지가 관련됩니다. 하나는 '계시하다'입니다. 빛은 어둠을 비춥니다. "하나님은 빛이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람에게 알리시는 분입니다. 이게 빛의 첫 번째 특징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특징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문에선 주로 거룩하고 연관돼 있습니다. 문맥이 그런데, 하여간 그 빛이라고 하면 항상 쉽게 이야기하면 지식을 의미하고, 진리를 알고 있는 게 빛입니다. 어둠 그러면, 무지한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다."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가 죄인인지도 모르고, 천국 지옥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고, 이게 어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가, 이걸 아는 게 빛입니다. 그래서 빛은 '알다'와 연관되어 있고요. 하나님 쪽에서는 '드러내답'니다.
이런 구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렇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주님이 누군지, 주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분인 줄을 아는 사람이 아버지 외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또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성경의 하나님을 누가 아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이 아버지에게 "이 사람은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한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건 알 수가 없는 거죠. 사람 쪽에서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무엇인가를 계시해 주셔야 합니다. 이게 빛인데요. 보통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데 히브리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한테 말씀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하나님은 자기를 어떻게 드러내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냅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안다, 이거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이런 구절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내 말은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하시는 말이다" 이렇게, 그래서 빛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성품이고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시는데 어떻게 드러내시냐면,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방금도 말씀하신 거죠. "하나님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에는 하나님이 빛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구절은 없습니다. 그렇게 명백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표현해 놓은 거고요. 그다음에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시되 말씀과 예수님의 생애, 삶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행함으로, 특히 기적이나 이런 걸로 드러내시고요.
그 다음에 우리 쪽으로 오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아들과 아버지를 드러내십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들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되지만, 또 하나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주님께서 하신 경우는 이게 어떤 분은 이게 성경 본문에 포함되면 안 된다. 뭐 이렇게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나오는 그 죄인인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이 부분이 어떤 분은 사본에 없다, 이렇게 하는데요. 하여간 그 구절을 넣으면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렇게 주님이 빛을 딱 던집니다. 그러니까 이 주님의 죄에 대한 기준, 주님이 죄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기준이 각 사람에게 쭉 이렇게 기준이 돼서 양심을 비추는 거죠.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물러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여자 외에는 아무도 안 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시고, 또 하나입니다. 사람이 어떤 죄인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이게 주님이 하시는, 이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는 것들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빛, 그러면 항상 이렇게 알게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가 나오는 대로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임으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이게 본문의 흐름이 되겠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를 보시면 요한일서의 목적은,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요한일서 5장에 보면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쓴 게 요한일서입니다. 요한복음은 구원 받도록 쓴 것입니다. 요한 일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쓴 것입니다. 이게 요한 일서의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목적이 구원을 확신해서, 2장 26절에 나와 있는데요. '미혹된 자들', 구원을 흔들려고 하는 자들, 구원을 다른 각도에서 말하는 자들에게서 지키기 위해서, 보호해 주기 위해서 쓴 게 요한일서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나중에 보면 지금 뭐 구원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아닌 사람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내는, 그래서 진짜에게는 구원 확신을 갖고 기쁨을 갖게 하고, 그다음에 가짜들을 보여줌으로써 구분시키는, 참된 구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이게 목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아까 여러 번 나왔는데요. 하나님을 빛이라고 했을 때, 저희들이 빛을 못 봅니다. 저희들 눈이 빛을 못 보게 되어 있습니다. 태양을 직접 못 봅니다. 보면 눈이 멀죠. 우리는 빛을 통해서 사물을 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설명을 드릴 때 약간 좀 이해는 잘 안 가는데요. 예를 들면 어떤 사물 자체가 색깔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색깔은 오히려 빛 쪽에 있습니다. 어떤 빛을 반사해 주냐에 따라서 그 사물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이지, 실제 그게 색깔이냐는 이렇게 그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여간 우리는 빛을 볼 수는 없지만, 빛을 통해서 사물들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실은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이렇게 돼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빛이 보면 어떻게 돼 있냐면 아까도 나왔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빛을 창조합니다. 이게 첫 번째 창조의 시작입니다. 1장 2절인가요? 빛을 제일 먼저 만드십니다. 그런데 해와 달은 나중에 만듭니다. 그럼 이 빛은 어디서 나온 빛이냐 하는 게 문제가 되죠. 그래서 빛을 먼저 만든 후에 해와 달에게 이 빛을 주관하게 하십니다. 이게 우리 생각하고 다릅니다.
그리고 아까 그런 이야기도 나왔는데요.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는 정사각형이죠. 지성소는 정사각형인데 거기에는 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인공적인 빛이 못 들어오도록 빛이 차단돼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 뭐 등대라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완성됐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뭐냐면 이 지성소에 영광의 구름이 임합니다. 그래서 빛을 만든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성막과, 그래서 창조에서 그렇고 성막, 성전에서도 그렇고요.  요한복음 1장에서도 주님이 빛이고, 1장 5절입니까, 주님이 빛이고 그다음에 그 빛이 비춰집니다. 항상 순서가요, 그래서 어떤 빛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비쳐질 때, 우리가 비로소 무엇들을 인식할 수 있는, 이 순서로 이렇게 그 항상 이렇게 돼 있어요. 세상도 그랬고, 성막, 성전도 그렇고, 그다음에 복음서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갖는 여러 가지 그리고 실제로 빛이 성경에서 어떻게 묘사됐는가, 이런 걸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요. 하여간 빛, 그러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는 것, 두 번째는 죄, 거룩, 이게   빛에 관한 성경의 설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 이상입니다.

- 이병호 형제님 사회 : 예, 오늘도 5절 말씀 교제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내용에 대해서 주로 교제가 되어졌고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우리가 더 좀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또 빛의 특징들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여러 형제님 통해서 말씀의 의미들을 풍성히 드러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시간에 6절부터 다시 성경읽기 진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