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3절

박이레 2026. 3. 12. 10:14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3절 / 마포모임 20년

- 사회 :  오늘은 요한일서 1장 3절부터 진도를 나갈 차례입니다. 먼저 요한일서 1장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1-4).

저희가 이제 계속해서 이제 교제되었던 대로 이제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서신으로, 이제 쓰여졌을 당시 1세기에 이제 영지주의가 만연히 성행했던 그 시기입니다. 특히 영지주의는 교제되었던 대로 이제 모든 물질, 특히 육체는 부정한 것이고 악한 것이고 이제 비물질, 오직 영만이 선하고 깨끗한 것이다. 이런 분별로 육신으로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하고 부인하는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거짓된 교리에 그런 미혹케 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교회에게 이제 그런 것을 주의할 것을 또 설명하시면서, 특별히 이 생명이 되신 우리 주님에 대해서 또 계속해서 또 사랑, 그리고 또 이제 거룩해야 하는 것, 이 생명이 어떻게 나타났을 때 어떤지에 대해서 서신 전체에 걸쳐서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저희가 계속 진도를 나가고 있는 1절부터 4절까지는 시작하는 부분으로서 머릿말로 볼 수 있는데요. 먼저 1절에서 "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사도, '우리'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사도들이 어떠한 경험을 한 자들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처음부터 있으셨고, 이 사도들이 들은 바, 눈으로 본 바, 또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 된, 정말 실체하셨던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계시고요. 또 2절에서는 이제 이 생명이 나타내셨던 것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사도들에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 요한이 이 증거하고 있는, 이 수신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우리에게 나타내셨던 이 생명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희가 또 지난 시간에 계속 교체됐던 대로 이 생명은 단순한 이제 죽지 않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그 생명을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교제할 3절과 4절에서는 이제 이 사도 요한이 첫 번째로 이 서신을 쓴 목적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우리와 이 서신을 받고 있는 이 교회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인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또 그 사귐은 어떠한 것이냐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사귐이라고 이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이제 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것인지, 또 이 사귐이라는 것이 또 어떤 사귐인지에 대해서 이제 교제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묵상하신 형제님들께서 자유롭게 교제해 주시고 또 질문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 형제님1 : 3절은 1절과 2절에 이어서 성육신 하신 주님 예수님에 대한 말씀 하고 있고요. 또 여기는 사귐, 교제에 대한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좀 살펴보자면 '우리'라고 하면 여기서는 사도 요한을 비롯한 그 사도들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 40일을 같이 했던, 그 주님과 동고동락했던 그리고 직접 보고 들은 그 사도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앞에서도 이제 보고 듣고 만진 그 말씀에 대해서 쭉 살펴봤는데요. 여기서 어떤 것들을 보았는가에 대해서 한번 쭉 살펴봤습니다. 주님께서 침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셨고, 또 여러 가지 그 이적을 행하셨던 것들, 그리고 산상수훈 그 말씀하셨던 것, 그리고 그 갈릴리 바다를 걸어 가셨던 내용들, 그래서 가까이에서 멀리서 그리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들도 봤고요. 그리고 이제 잡히셨던 것들, 그리고 그전에 변화산상에서 또 변화되셨던 그런 모습들도 직접 봤고요. 그리고 이제 잡히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시고, 또 직접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승천하셨던 것들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이제 경험을 했던 그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참 얼마나 그 복되고 그런 특권을 누렸는가라는 좀 한편으로는 굉장히 좀 부럽기도 하고요. 나중에 저희가 이제 올림을 받게 되면 직접 뵙게 되겠지만, 이들은 이 땅에서 직접 예수님을 보고 경험하고 듣고 했던 그런 특권들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너희에게도 전함은"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이제 예수님이 직접 보지 못한 나중에 이제 사도를 통해서 듣게 되는 그런 그 성도들을 이 서신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여기서 사귐은 이제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도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이 사귐은 교제를 뜻하고 있는 건데요. 이것과 관련해서 고린도후서 6장 14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래서 여기도 같은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이제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사귀지 말라라고 말씀을 하신 건데, "어찌 의와 불법이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그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은 아예 교제를 할 수 없는 그런 관계이다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귐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사귐임을 말씀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겠고요.
이 교제와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1장 9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교제를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어떤 자격이나 이유는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교제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 말씀을 하고 있고요. 여기에 그 "교제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 하나님과 또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가 교제를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인데, 이제 교제를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다'라는 그 말씀이 여기 이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삼위의 하나님 이 우리가 교제를 할 수 있는 그런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원동력이 된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전효진 형제님 :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전하는 목적 중에 하나인 사귐을 3절 말씀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죄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죠.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이제 갖게 됩니다. 더불어 이 성도들과 함께하는 사귐을 기뻐하며 또 사모하게 됩니다. 이 사귐은 억지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는 영적인 생명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 것,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이 '사귐'이 있게 하려 한다는 것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과 또 지식이 실제 삶으로써 나타나는 것을 또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고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입증이 안 되는 거죠. 이후에 이제 계속되는 서신에서 이 사귐 또 행함을 통해 이렇게 증명이 되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음을 또 저희들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사귐에는 또 이제 여러 예가 있지만 저희들이 이제 토요일날 성경 공부 시간에 고린도후서 지금 연보에 관한 그런 장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 나타난 그 마케도냐오 아가야에 있는 그런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함께 하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또 사귐의 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성도들의 또 사임의 본질이 아버지와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또 계속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 사귐의 온전한 의미인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통해서 또 우리 주님의 그 신성 또 인성 이런 것들을 무시하는 가볍게 여기는 그 거짓 교사들에게 그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또 경고하는 의미도 이 말씀에서는 포함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 형제님2 :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한다라는 것이 이제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저희가 전하는 이 복음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3장 11절에 보게 될 때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도다." 라고 하는 부분을 볼 수 있고, 또한 침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 중에 3장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받게 된 복음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전하고 사도들이 그것을 보고 들음으로 저희에게까지 오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영지주의자들이 전하는 이것은 참으로 땅에 속한 것이며, 그들이 땅에 속한 자들이 자신의 그 생각의 주장에 따라서 시작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큰 차이가 있음을 또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귐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이제 아까 많은 다 쓰인 다른 성경에서 쓰인 것을 이제 말씀해 주셨는데요. 처음으로 쓰인 부분을 저희가 찾아볼 때 저희 암송 구절이었는데요. 사도행전 2장 42절에 "너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이렇게 돼 있는데 그 '교제'라는 단어가 이제 여기 나오는 이제 '사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 교회를 시작하게 될 때에 그들이 교제하였다라는 이 부분을 또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귐에 대해서 또한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이제 요한일서 전체를 살펴보게 되면서로 사랑하는 것과 그에 더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제 연결됨을 저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장 6절 7절을 보게 될 때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사귐이 있고"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빛 가운데 거하며 행할 때에 성도들과 사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의 예시와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 거하는 것의 예시가 요한일서 2장 10절과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그래서 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성도와 사귐이 있는 것임을 볼 수 있고,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이며 더불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하는 그 발언이 거짓말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을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직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도의 사귐을 통해서 저희가 이 요한일서의 큰 주제인 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또한 그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형제님3 : 저희가 1절,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다, 또 이제 영생이다, 이제 이런 부분에 여러 측면에서 교제가 되어졌었고 3절에서는 이제 이 생명이 사도들이고 또 이제 우리들이죠. 이제 성도들, 또 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제 사귐이 있게 한다. 이 생명이 이제 그렇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부분을 이제 말을 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제 '사귐'이라는 단어가 이제 두 번 연속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가 헬라어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좀 이 사귐, 교제라는 단어가 좀 익숙한 것 같습니다. '코이노니아', '펠로우쉽' 이제 그래도 좀 많이 들어봤던 단어인 것 같은데 이제 앞서서 이렇게 그 단어 용례를 말씀해 주신 것처럼 어떤 교제라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또 연보로도 사용되었고, 교통, 참여, 뭐 이렇게 그런 의미들로서 이제 성경에서 많이 사용이 되어졌는데, 이 코이노니아 라는 단어는 이제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공통의 목표와 이해관계에 함께 참여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귐이라는 단어가 이제 동업 관계라든가, 이제 결혼 관계, 그런 친밀한 관계 가운데 이제 주로 사용되어지는데,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러면 우리가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고 또 목표로 하는 그게 뭘까, 이제 그 부분을 이제 3절에서 답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생각하고 있고 목표로 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또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고, 또 이 영생이 계속 교제되어진 것처럼 이 하나님과 또 주님과 그런 복된 교제 가운데, 그런 관계 가운데 이제 들어가는 것임을 3절 말씀을 통해서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또 이것을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제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 영생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또 우리 주님을 알고 영접했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그 영생이 그냥 단지 한 번에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이제 계속해서 아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인격적인 그런 관계 가운데 그걸 알아가는, 그래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또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가 이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신의 성품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고 또 그런 성품들을 이제 더욱더 개발해 나가게 되고 또 성장해 가는 거 이게 이제 실제적인 여기서 이제 앎이고 이제 이게 교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과 또 주님과의 그런 사귐이고, 그런 실제적인 앎이고, 그런 교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귐이 두 번 나왔는데, 그다음에 이제 우리와 사귀는 거죠. 이제 성도들과의 사귐이죠. 성도들과의 사귐은 우리가 이제 그런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같은 생명 가운데, 같은 믿음 가운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것도 교제죠. 사귐이고 또 우리가 만찬을 나누면 또 주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교제고, 사귐이고, 또 우리가 함께 봉사하는 것도 그것도 사귐이고, 또 우리가 함께 고난을 당했을 때 같이 나누고, 또 삶을 나누고, 또 이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이런 사귐의 그런 실제적인 부분인 것을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이제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제 말씀에서 우리를 생각할 때에 이 서신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이제 구분해서 뜻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는 이제 "너희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이제 말씀하신 대로 사도들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는 사도의 증거의 내용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사도행전 2장 42절에 따르면 사도의 가르침,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나타나신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너희에게도 전함은" 이것은 이제 사도의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니" 사도의 그 증거의 결과가 이제 사귐일 것입니다. 사귐은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제 교제, 파트너쉽, 공통된 것을 가지는 것을 이제 뜻하는데요.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그 교제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공통된 사도의 가르침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귄 교제가 있으려면 그 기초가 공통된 것 안에서 이렇게 세워져야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들도 이제 "우리의 사귐은" 여기서 이제 사도들의 사귐을 나타내는데, 요한일서에는 이제 사귐이 세 구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1장 6절에서는 이제 하나님과 사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1장 7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사귀는 것에 대해서, 여기 1장 3절에서는 이제 사도의 가르침의 사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돼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함께하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이렇게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귐의 기초가 되는 것 공통된 것은 나타나신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끊겨진 것입니다. 공통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와 함께 하시던 아들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인성을 입으실 때 취하신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직분을 취하심으로, 이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공통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심으로 이제는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이렇게 선언하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 주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이제 주님의 그 사역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이, 이제 주님을 믿는 자들이 주님을 만나고 이제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사귐 가운데 들어가고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귐, 사도의 가르침을 통한 이 사귐의 기초는 나타나신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전하고 있고, 이 기초 안에 있는 사람들, 그 기초 안에 같이 서 있는 사람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만이 이 사도의 가르침 안에 서 있는 이 사귐 가운데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것을 이제 전하고, 이제 그것을 전함을 받는 자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이제 서로 교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때의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것이 그와 같은 것들을 이렇게 뜻하고 있다고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전하는 것' 단어에 대해서 교제를 해보려고 합니다. 계속 살펴봤듯이 이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변증을 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비밀스러운 지식과 경험을 소유할 수 있다라고 이렇게 여겼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서 형제님들이 교제한 것처럼 우리 주님에 대한 것, 그런 것들을요. 그런데 이제 영지주의자들은 소수만이 아주 특별한 그것처럼 하나님을 초월자, 절대자를 아는 것이 아주 특별한 지식인 것 인냥 그렇게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또 이 당시에는 그랬었고요. 또 이제 중세 시대에서는 카톨릭 어떠한 규례라든지, 전통, 그런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늘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또 그 후에 뭐 신비주의자들은 느낌으로 자기를 가만히 이렇게 정적으로 두었을 때, 아니면 적극적으로 자기의 이성을 쓰지 않았을 때, 그러한 느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이렇게 여겼습니다. 또 이제 현대에 와서는 이제 '신사도 운동'이라고 해서 저희가 잘 알죠. 오순절 교회 같은 데서 하는 그런 것들이야 성령을 받았다, 소위 말하는 것들. 이제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제 19세기 같은 경우에 이제 뭐 잘못된 성화론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제2의 축복'이라는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해야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야지만, 한 단계 성화에 대하는 그런 지식과 경험을 가지게 된다라고도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도 요한은 앞서서 다 얘기가 됐지만 주님의 꿈 속에서 이제 식사도 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경험했던 사람인데, 그러한 것들을 어느 누구의 예외도 없이 어떤 특별한 경험도 없이 성도들에게, 모든 성도들이죠. 이 요한일서를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을, 동일한 그러한 경험과 지식을 저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그러한 지식을 성경으로, 이렇게 말씀으로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말씀을 성경을 완성하였고, 이제 저희는 그러한 것들을 말씀으로 저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신비스러운 경험이라든지 이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도들이 경험했던 동일한 것들을, 동일한 지식과 경험을 저희는 말씀을 통해서 이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앞서서 얘기했던 그런 많은 사람들이 연기주의자들이라든지, 뭐 신비주의자들이 이렇게 얘기했던 특별한 어떤 경험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설마 사도들이 경험했던 그런 주님에 대한 것, 하나님이 아는 지식에 대한 것보다 더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것이 더 사도들이 전한 것보다 더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는 말씀으로 그러한 동일한 경험과 지식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사도들이 저희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희가 받은 그런 것이 얼마나 존귀한지 참 이렇게 제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정말 이러한 것이었던 건가라는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이제 "우리의 사귐"인데 이제 중간이에요. 흠정역에서는 라고 '트롤리아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그냥 개혁 성경에서는 그런 말은 없는데요. 이제 이 '트롤'이라고 한 것은 이다음에 할 말이 얼마나 확실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이것이 정말로 확실하고 진실한 것인가? 이러한 하나님과 주님의 사귄 가운데 저희가 들어간다라는 것이 정말로 확실하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 세 번째로 살펴볼 말씀은 '사귐'인데요. 앞서서 형제님들 많이 얘기를 하신 것처럼 공통된 목표와 공통된 것을 소유해서 공통된 목표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런 뜻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것을 그 당시 요한일서의 수신자들뿐만 아니라 저희들까지 그러한 사귄 가운데 게 갖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 다 각자 각인각색의 성격과 분별과 지식이 다 다릅니다. 또 이제 요한일서 2장에서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영적인 어떤 성숙도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제가 있기 때문에 공통된 목표와 방향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귐이라는 것이 이제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그런 신비주의자들이라든지, 성화론자들이라든지, 뭐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신기한 것처럼 이렇게 이것이다라고 이렇게 주장을 하고 뭔가 대단한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이제 앞서 형제님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애매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굉장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저희가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지금 이렇게 있는 이 시간과 이 자리가 사귐이라는 그런 단어로 저희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라든지, 만찬 예배라든지, 복음 집회라든지 이런 것들이 왜 그러냐면 주님께서 저희 가운데 임재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 1절, 2절 3절을 보면서 또 어떠한 장면이 떠올랐냐면 구약에서 이와 같은 1, 2, 3절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그림이 있어서 한번 좀 시간이 지났지만 좀 교제 해보겠습니다. 1절은 저희가 살펴봤듯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2절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를 얘기하고 있고요. 3절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기 25장에서 10장에 10에서 22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지성소에 대한 묘사인데요. 지성소의 안에 있는 그 속죄소,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고 그 안팎을 정금으로 쌓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요. 황금은 신성을 가지신 우리 주님을 예표를 합니다. 그래서 1절과 2절은 언약궤를 저희에게 보여줍니다. 3절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이제 셰키나 그 영광의 구름이 그 속죄소를 덮고 있는 시은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여겨집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내게 이르리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지성서소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표한 제사장과 만나는 것입니다. 교제하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있는 율법의 돌판은 말씀을 순종한 주님을 상징하고, 또 만나는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서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한 것, 싹난 지팡이는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것은 말씀이 육체로 오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제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의미인데요. 요한일서의 주제와 딱 이제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참고로 이제 지성소의 바닥은 그 광야 모래로 되어 있었는데요.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지역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서 이제 있는 것을 또 의미한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1절에서 3절까지는 이러한 지성소가 어떻게 지금 현재 우리 가운데 이제 보여지는 그림으로 나와 있는지 어떤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라고 보여지고 또 나머지 부분들이 있습니다. 1장 7절이라 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좀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 때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금방 형제님 교제해 주신 대로 특별히 1장 3절에서는 이제 '경험한 바'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이제 잘 정리해 가지고 어떤 이론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사실을 전했다는 것을 이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참 이게 가능한 것이 이제 하나님과 함께하신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그 이 행동으로 그 생명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 사실을 보고 들은 바를 이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사도들이 전할 때에,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사도들과 함께 사귐이 있게 됩니다. 앞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제 사귄다는 것은 이제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특별히 이제 사도들과 사귐이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을 한 것이 이 사도가 전한 그 말을 듣는 사람들도 사도들이 경험해서, 보고 들어서 얻게 되는 그 확신을 듣는 자들도 동일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 사도들의 기록된 말을 통해서 이제 간접적으로 듣는 거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성령님을 사용하셔서, 그 감동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는 사도들이 경험한 것처럼 그것을 영적으로 경험하고 동일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과 함께 사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사귐에 대해서 생각해 봤을 때 이제 이 사귐이 이제 뭘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을 해봤을 때, 이 성경에 이제 그 사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이제 문맥에 따라서 이제 여러 가지를 말을 할 수가 있는데요. 특별히 여기서는 '구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말 그 주님의 생명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이제 그것을 듣고 이제 구원을 받는 일이 가장 먼저 그리고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그 사귐에 대해서 이제 또 한 번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데요. 그 사귐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라고 돼 있는데 이게 2절에 나왔던 그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그 특징을 여기에 적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참 그래서 이 사귐이라는 것이 이제 구원받는 것이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영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임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이제 2절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으로 그 특징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도 그 영생을 가진 자들의 사임의 특징을 첫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이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을 생각해 봤을 때, 그 영생을 생각해 봤을 때, 이 구원이라는 것은 항상 사귐, 이제 교제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단지 죄의 형벌에서 놓임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 구원이라는 것은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구원받은 사람, 이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홀로 따로 구원받고 나서 따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고 또한 빛 가운데서 행하면서 그 교제를 이제 분명하게 즐기게 되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이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분명히 그것은 특별히 이제 주님에 대해서 이제 아들이시고 또 그리스도라는 이제 그분을 이제 온전히 수식하는 그런 이름으로 이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전치사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고, 이제 원문에는 그 '함께'라는 것이 각각 아버지 앞에, 그리고 또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사용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두 분이 이제 분명히 구분되는 인격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그 두 분이 동등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이제 그리스도 를 부인하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실제로 아버지와 교제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고 그들은 이제 거짓말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이제 증명하고 나중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영생을 보지 못한 것이고 그 영원한 생명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는 것이고 또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그 이제 사귐이 없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사교에 대해서는 형제님들께서 다 교제를 해 주셔서 저는 간단하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전함은"에 대해서 저도 이렇게 생각난 바가 있어서 잠시 교제하고자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 사도들은 이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이제 이 땅 가운데 걸어 다니시고 걸어가시고 그다음에 말씀하시고 이렇게 교제하는 그것을 실제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 이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너희는" 실제로 이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원한 생명이 보통 이제 저희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어떤 것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더욱 깊이 영향을 받고, 그것을 이제 들은 사람들은 조금 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원한 생명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실제로 보았던 이 사도들과 그리고 이 사도들로부터 그것을 전함을 받은 사람들, 이 모두에게 이 동일하게 영원한 생명이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형제님들이 말씀을 이제 많이 해 주셨는데요. 그 사귐에 대해서 그 사귐이 이제 공통된 어떤 생각이라든가, 목표라든가, 아니면 여러 가지 이제 공통된 이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은 그 동일하게 실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전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도들과 이로부터 전함을 들은 또 그 후 세대 사람들과 그리고 지금 오늘 저희에게도, 이 영원한 생명은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1장 8절에 사도 베드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실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세대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그것을 전함을 받은 사람들도 이 사귐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귐은 이제 방금 형제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2절에 나온 것처럼 주님의 그리스도의 아버지십니다. 그런데 저희에게도 이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귐은 "그의 아들", 영지주의자들이 들었을 때는 이것이 어떤 거부 반응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만 이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저희의 사귐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그의 아들, 그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성경에 이제 보게 되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표현된 부분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제 표현된 부분도 있는데, 아까 이제 형제님들께서도 말씀을 해 주셨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히 저희가 이제 이 이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그 성육신 돼서 실제로 이 땅 가운데 오신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인성과 이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는 이제 신성과 관련이 있다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이 표현은 저희의 이 사귐은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이 사도 요한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 땅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걸어 다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의 사귐은 전함을 통해서 저희는 보지 못하였지만 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계셨던 이 예수 그리스도와 저희도 동일하게 이렇게 사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영원한 생명이 지금도 저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저희의 사귐에 근거가 되며 또 저희도 아버지와 또 예수 그리스도와 이렇게 사귐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가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1절 2절에서는 이제 그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는 부분이고요. 이제 3절, 4절은 그러한 영생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축복이 될 수도 있고 특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영생,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사귐이 있고 이제 계속 말씀해 주신 대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이고 그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간에 또한 사귐이 있고요. 또 그 사귐 속에서 이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이제 그 축복이고 특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3절에 보면 저희들이 지난 시간에도 공부했던 대로 이제 이 사귐은 원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사임이고 교제입니다. 영혼 전부터 두 분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있었고 또 그 안에 기쁨과 또 영광과 또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이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고 경험한 사도들이 이제 주님 그 생명을 얻고 이제 주님과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 속으로 이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이 또한 생명의 말씀을, 이 주님을 또 증거했을 때 이제 주님을 보지 못한 자들이, 이제 저희 같은 자들이 동일한 사귐으로, 사도들이 누렸던 사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영혼 전에부터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그 교제 가운데로 사귄 가운데로 저희들이 이렇게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3절 말씀을 읽으면서 제 개인적으로 좀 묵상했던 내용을 좀 말씀을 드리자면 저희들이 영생을 얻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 목적이 이제 사귐에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아까도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 언급해 주신 대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안다'는 것은 형제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계속적인 사귐입니다. 계속적으로 알아가는 거고, 깊이 알아가는 거고, 친밀히 알아가는 거고, 그래서 저희들은 이 영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누리는 거고 이제 계속 더욱더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저희 입장에서 이제 생각을 해보는 거고요. 하나님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이제 예를 들어서 저희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내가 오늘 밤에 1시간 동안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랑 이제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이제 성도님들 한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랑 교제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누구와 만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저희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이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제를 이루시기 위해서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그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저희들을 만나시기 위해서, 저희들과 함께 얘기하기 위해서, 그 아드님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러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정말 나를 만나기를 원하시고, 나와 얘기하기를 원하시고,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하시기 위해서 그 아드님을 내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저희들이 더욱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교제하고 그분과 사귐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저희들이 이제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참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고 내 안에 영생을 주신 그 특권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또 아까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을 통해서 정말 내가 구원받아서 영생을 가진 자로서 정말 내가 얼마나 그동안 많은 사임을 가져왔는가, 그리고 정말 내가 하나님과 그 아버지와 그 아들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내가 알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또 이렇게 돌아보는 그러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이 교제에 대해서 이제 처음 언급된 부분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이 교제가 처음 언급된 곳은 사도행전 2장 42절입니다. 저희들이 아는 대로 "사도 가르침을 받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힘쓰니라"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교제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근거로 교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 교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만찬 예배로 표현합니다. 만찬 예배는 교제하는 사람들이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함으로써 이제 그 교제를 이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제는 기도에 의해서 계속 유지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게 이제 사도행전 2장 42절을 이제 교제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제 이해해 본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 두 번째는 교재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이제 저희들이 쓰는 아까 '코이노니아', 혹은 '펠로우쉽'인데요. 쿠리안 쿠리안 형제님이 오셔서 이제 이 펠로우십하고 대조되는 단어로 프렌드쉽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교제는 예를 들면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결혼 안 되고, 동업도 안 되고, 이제 이런 거죠.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함께 하는 건데 그러면 이렇게 함께 교제하는 것하고 그냥 이렇게 서로 친밀하게, 아니 이렇게 우정을 나누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건데요. 그동안 이제 사실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구원받은 성도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구원받았어요. 예를 들면 저희 모임에 속하지 않았어도 구원받은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만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뭐 그렇게 인정치 않는 어떤 교파에 있거나 혹은 성당에 다닌다 할지라도 확률은 굉장히 떨어지겠지만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교제를 생명을 근거로 할 것이냐, 아니면 진리를 근거로 할 것이냐, 사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할 거냐, 사도행전 2장 41절은 '생명'이죠. 그리고 42절이 이제 교회에 영접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랫동안 저는 오랫동안 모임에 있으면서 이 펠로우십하고 프랜드쉽을 구분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오랫동안 고민이었습니다. 틀림없이 구원받았고, 틀림없이 모임에 속해 있는데, 그리고 모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건데 내가 뭐라고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멀리하고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이 오랫동안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고민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저희들이 이제 정리해 가는 것은 하여간 진리를 근거로 한다. 가르침이 같아야 교제가 된다. 그러면서 생명을 가진 분들의 생명을 인정하고,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주님께서 그 진리를 밝혀주시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하고 아마 이제 이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요.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과 교제하기 위해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창세기에 보면, 창세기 2장, 3장에서 하나님이 짐승들을 쭉 만드시고, 동물들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이제 아담 앞으로 오게 해서 이름을 아담의 이름을 지어주죠. 그러면서 이제 저희들이 그러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뭐냐? 그때 이제 동물들을 쭉 창조하신 것하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하고 이제 결정적인 차이가 뭐냐 그랬을 때 두 가지가 완전히 다릅니다. 첫째, 언어가 있습니다. 사람은 말을 할 줄 압니다. 동물들은 언어가 없습니다. 이게 굉장히 큰 차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차이가 사람은 사랑합니다. 짐승들은 짝짓기 합니다. 이거 두 개는 다릅니다. 이게 사람을 짐승과 구분하는, 인간만이 갖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특징이 '말'과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래서 하나님이 서늘할 때 에덴 동산에 찾아가셔서 아담과 대화합니다. "어디 있느냐?" 교제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교제가 깨집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제 새 생명을 주십니다. 새 생명을 주셔서 이 새 생명의 특징이 뭐냐 그러면 이제 교제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관계가 회복되어서, 저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게 그거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냅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순종해 갑니다. 이게 이제 가능한 거죠. 그리고 필요가 있을 때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께만 기도합니다. 이제 이런 이런 교제가 실제로 저희들 가운데 일어난 거죠.
그런데 이제 이게 얼마나 이제 복된 교젠가, 복된 교제인가는 이런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이렇게 하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또 저희들이 배운 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이제 이 거듭난 생명이 아담이 가진 생명보다 오히려 더 우월한 어마어마한 거죠. 또 로마서 8장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후사입니다. 후사인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가 어떤 생명을 얻었는가? 또 교제하기에 충분한 것들을 얻고 있다,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나중에 기회가 되면요.
이제 순서를 보면 요한일서에 보면 생각해 보십니다. 1절을 보면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그래서 듣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 "주목하고 만졌다", 이렇게 돼 있고요. 하니까 듣고 보고요. 2절에서는 보았습니다. 보고 그다음에 이제 본 것을 증거하여 전했고요. 그다음에 3절에서는 보고 듣습니다. 약간씩 지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1절에서는 '듣고 보았고', 3절에서는 '보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거 왜 순서를 바꿨을까, 이게 이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좀 생각해 볼 수 있겠고요. 그다음에 이제 여러분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마는 그러면 직접 경험을 한 사도가 우리보다 유리한가 아니다 하는 거죠. 아니다, 왜 아닌가? 우리 생각에는 직접 본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저희들이 묵상해 볼 내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사회 : 네 교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짧게 말씀드리면 3절에서 이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이제 말씀하시는데 이제 우리가 본다고 했던 거는 이제 육신으로 나타나신 주님 자체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을 말씀하시는 것일 것이고, 또 들은 바는 이제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 특별히 5절 이하에 나올 말씀들을 이제 말씀한다고 생각이 들고요. 또 특별히 보았다고 하는 부분에서 이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참 그 인성과 신성을 다 나타내셨는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저희가 주님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교제에 사귐이 있는 것은 이제 이 예수님 주님의 말씀, 주님의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아는 것으로 저희가 또 계속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고, 또 참 생명되신 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나는데 참 저희가 그 생명 대신 주님 안에서 같은 가르침과 말씀으로 참 저희가 자라가면서 그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것을 이제 마음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러면 3절까지 교제를 한 것으로 하겠고요. 다음 시간에 4절부터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