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4절 / 마포모임, 20년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요한일서 1장 4절을 하려고 하는데요. 먼저 제가 성경을 요한일서 1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10).
지난 시간에는 저희가 요한일서 1, 2, 3절을 하면서 영지주의에 대해서 좀 많이 배웠고요. 또 영지주의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형제님들께서 교제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영지주의에 대해서 좀 간단하게 다시 말씀을 하자면, 영지주의를 저희가 잘 알 필요는 없는데요. 그래도 말씀을 잘 알면 되죠. 그런데 영지주의를 요한일서가 쓰여진 배경이 영지주의라는 그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반박하고 바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니 영지주의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아는 것도 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는 이제 한자인데요. '영영' 자에 '알지' 자 씁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지식, 영적인 지식을 얻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영과 물질을 분리를 하고요. 그리고 물질은 나쁘고 영은 선하다. 서로 공존할 수가 없고 그러므로 사람이신 하나님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든지, 혹은 예수님의 인성과 또 예수님의 능력을 분리를 하든지, 이상한 형태로 예수님을 하여튼 갈라놓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1장 1절부터 우리 교제하는 대로 사람이신 하나님께서 실존하셨다라고 명백하게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늘 제가 4절을 할 텐데요. 4절이 짧아서 5절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절부터는 또 이제 영지주의의 또 중요한 형태 중에 하나는 이 사람들이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육의 죄는 이제 상관이 없고 영적인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라고 해서 죄의식이 없는 형태로 또 삶이 흘러갔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5절부터 죄를 이제 자백해야 된다, 우리가 죄 없다 하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쳐 바로잡고 있습니다.
또 이제 그 후로 교제가 될 텐데요. 이 영지주의자들은 앎과 깨달음만 중요하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순종과 실천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이제 후에 나오겠지만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도 중요하고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그리스도처럼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예, 그 정도고요. 저희가 이제 3절에서 지난 시간에는 저희가 이제 사귐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침을 배웠는데요. 그 사귐은 저희가 교제를 말하고 또 저희가 진리를 근거로 사귀는 것으로서, 이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여기서 보면 "너희에게도 전함이라"고 돼 있는데 그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특별한 자만이 누리고 뭔가 하여튼 전부 다 이렇게 뭐 전하고 이런 게 없이, 하여튼 특별한 신비주의 같은 가르침을 취했는데요.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들어간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4절인데요. 4절은 이제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해서 3절에서 말한 그 교제의 결과가 이제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을 형제님들께서 교제해 주시고요. 또 질문을 해 주셔도 되고요. 오늘 5절도 가능하면 나가고 싶기 때문에 형제님들께서 짧고 굵게 간략하게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요한일서 1절부터 4절까지는 저희가 '서론'으로 이해를 하고 있고요. 그래서 4절에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해서 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이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에 대해서 조금 교제를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기쁨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이 사귄을 통한 교제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이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사도 요한과 사도들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흠정역을 살펴보면 흠정역에는 좀 다르게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흠정역에는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게 하려 함이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가 이것을 쓰는 목적이 너희에게 쓰는 거고요. 이 서신을 받는 대상들에게 쓰는 거고,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한다라고 해서 해석을 좀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흠정역에서는 이 사도들이 이러한 기쁨들을 서신을 받는 사람들에게 써서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한다라는 그런 의미이고요. 이 개정 개혁판에는 사도들이 이것을 쓰는 것은 사도들이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 기쁨을 전해주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한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약간 조금 의미가 좀 다를 수는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거는 저희가 지난번에도 교제했던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또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되고 원천이 된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좀 살펴볼 말씀이 기쁨과 관련해서는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갖고 계셨던 그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해서 주님과 교제 안에서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라는 것들을 말씀하고 계시고요. 또한 요한복음 16장 22절 말씀에 보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은 이제 주님께서 승천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자 이제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께서 이제 하신 말씀인데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또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갖게 되는 기쁨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상입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성도들은 이제 구원 받은 후에 본능적으로 이제 행하게 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생명 가운데 있는 기쁨을 혼자만 알고 담아둘 수가 없어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먼저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더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본성이 이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이렇게 믿는다면 받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동시에 복음을 전한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은 더욱더 충만함으로 이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3절에 이 서신의 목적을 이렇게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했던 사도는 이 사절에서 이 '사귐의 결과인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 말 이렇게 성경에는 그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의 기쁨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흠정역에는 이렇게 진리의 소식을 받는 성도들의 기쁨을 기록한 것은 이 기쁨은 이렇게 전하는 자나 또 받는 자가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며 또 그로 인해서 더욱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연로한 이 사도, 이 요한은 이 편지를 쓰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던 그 젊었을 때의 그 즐거운 경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보고 그 몸에 손을 대어 보고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들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그 주님과의 사귐, 그 경험, 이 사도들에게는 자신들만 이 경험이 자신들만 즐거울 수 없는 이 귀하고 값진 그러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그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에 참여하도록 권하였고 또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이 기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 또 그리스도와 성도들과 함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성령의 열매인 것임을 이 말씀을 통해서 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그래서 퍼 올리면 또 퍼 올릴수록 더욱 풍성하게 솟아나는 특성을 또 갖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성도들이 사귐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마르지 않는 샘인 것입니다. 기쁨 하면 이제 떠올릴 수 있는 그러한 장면이 이렇게 가나의 혼인잔치 때 이렇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그러한 것인데, 그 근본적인 기쁨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라면 매순간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쁨이 이제 하나님과 또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에 이 소망을 가진 그런 성도들은 누구나 이제 빈부 격차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헌신적인 사용 가운데에서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됨을 4절 말씀을 통해서 또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형제님 1: 네 저도 앞에 형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제 이것을 "우리의 기쁨"이라고 하였을 때 이 우리가 저자와 독자를 모두 지칭해서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였을 때 참 저희의 모든 그런 소원이 참 주 안에서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까 이제 전에 형제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이제 요한복음에 15장에서 17장까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기쁨과 매우 큰 연결성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주님께서 이 '기쁨이 충만케 된다'라고 이제 15장에서 17장에 걸쳐서 각 장씩 한 번씩 이제 언급을 하시는데요. 요한복음 15장 11절과 요한복음 16장 24절과 요한복음 17장 13절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저희가 살펴볼 때 참으로 저희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 안에서 기쁨이 충만케 될 수 있는지를 몇 가지를 볼 수가 있는데요.
그중에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5장 11절에 보면 형제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이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앞에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이르렀다'고 이제 말씀하셨는데요. 이 이것들이 그 18장의 전반부에 세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저희가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내 안에 거하라"라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주님께 이제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이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드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희가 주 안에 가까이 붙어 있어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저희가 요한일서에서 2장 27절에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저희가 요한일서 3장 4장을 살펴볼 때 어떠한 것이 주 안에서 거하는 것인지를 저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요한복음 15장 7절을 보게 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이제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저희가 기쁨이 충만케 될 수 있는 것은 저희가 주께 구하고 그것을 주께 얻었을 때 충만케 됨을 또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복음 16장에 주님께서 두 번째로 기쁨을 충만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16장 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제 부활하심으로 살아계신 주님께서 저희의 구함을 들으시고 구한 것을 주님께서 주실 때 저희의 기쁨이 충만케 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일서에서 3장 22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또한 5장 14절에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5장 15절에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 또한 아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요한일서에서도 요한 사도께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요한복음 15장 9절을 보게 될 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15장 10절에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저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12절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이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저희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그 기쁨이 충만케 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이것은 요한일서의 큰 주제이며 또한 요한 사도께서 이 사랑에 대해서 이제 말씀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참 주 안에서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이 참 교회 안에 있어야지, 교회가 없다면 그러한 기쁨이 충만케 될 수 없게 됨을 이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중요성을 또한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4절에서 이제 이제 그리스도인의 그런 사귐이 교제가 기쁨이 충만한 교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우리 안에, 또 우리 그런 사귐 가운데 3절에서 교제되어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 우리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제 이 기쁨이 있는 것이고 또 충만한 기쁨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기쁨을 생각할 때 좀 세상적인 기쁨이랑은 이제 다른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기쁨은 이제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기쁨이죠. 어떤 걸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자기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빼앗고, 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들을 내가 취하고, 그런 세상적인 기쁨은 그런 이기적인 기쁨인데, 앞서서 규제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쁨은 전하는 자도 기쁘고, 또 받는 자도 기쁘고, 이렇게 다 만족을 주는 그런 기쁨인 것 같습니다. 이게 영적인 기쁨이고 또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이 참 이와 같이 놀라운 기쁨인 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참 우리의 기쁨과 또 세상이 주는 기쁨하고 이렇게 비교가 되면서, 세상은 이걸 이해할 수가 없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을 그들은 경험하지 못했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이제 성도님들이 한 분씩은 다 이런 얘기는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희들은 무슨 재미로 사냐? 무슨 낙으로 사냐? 뭐 무슨 기쁨으로 사냐?" 이런 얘기를 한 번씩은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 그렇죠. 이제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별로 재미가 없죠. 저희가 뭐 교회, 집, 직장, 이게 세 가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사냐? 이렇게 그런 얘기를 들어봤을 것 같은데 이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이 교제의 기쁨, 또 그런 성도들과의 그런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그 기쁨, 그 원천을 모르기 때문에 참 세상에 알 수 없는 기쁨이고, 또 이 기쁨이 이렇게 '충만케 하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게 충만하다는 거는 이제 컵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적인 기쁨과 비교하자면 세상적인 기쁨은 그냥 일시적이고, 그냥 사라지는 기쁨이고, 또 그냥 표면적인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꽉 차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겉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내면에서부터 이 꽉 차 있는 기쁨이 이렇게 넘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까 요한복음 말씀하셨는데, 요한복음 7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그런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또 각별히 이제 사도 요한은 이 기쁨을 맛보았고 경험하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쓴다." 이것을 참 선포하고 있고, 그리고 이게 "충만하게 하다"는 이 동사가 또 수동태로 돼 있습니다. 이게 어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힘이나, 어떤 우리의 환경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걸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또 이걸 생각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기 때문에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그런 것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참 이 기쁨이 충만한 기쁨이고 또 이것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음 없는 부분을 생각할 때 참 감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2절에서는 이제 영원한 생명이 나오고, 3절은 이제 교제가 나오고 4절은 이제 기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것은 이제 교제로 나타나고 교제 가운데는 이제 기쁨이 있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됩니다. 서신서는 기쁨에 대해서 계속 한 번씩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4절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요한일서 1장 12절에서는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의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또 요한삼서 1장 4절에서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더 기쁨이 없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사도는 이제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기쁨이 충만케 됨을 항상 생각하고 있고, 그들의 기쁨이 또 진리 가운데서 거하는 것들을 듣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참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의 특징이 그와 같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정말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는 것, 그것이 이제 사도 요한의 기쁨이었습니다.
본래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교제 가운데 기쁨이 있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로 인하여서 기뻐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고 또 자언 말씀에서는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기쁨, 주님이 누리신 그 기쁨을 이제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함으로 주님이 가진 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나온 대로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13절에도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그래서 이 기쁨이라는 것은 별도로 다른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사귐 가운데서 누리셨던 그 기쁨이 이제 우리 가운데서도 누려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교제된 대로 그 기쁨은 일시적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교제를 통해서 우리로 아버지와 그 아들과 누리는 교제를 통해서 누리게 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성도님들이랑 이제 식사를 하게 하면서 교제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에 어느 누구랑 교제하는 것보다도 더 기쁘고 즐거운 그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희의 모두 공통적인 경험이고요. 그걸 위해서 저희가 시간과 수고와 비용과 이 모든 것들을 지불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성도들 간의 교제를 소망하고 또 누리게 되는 것을 이제 저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저희가 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성도들과 함께 사귀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즐거워하고 그곳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이 사람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저희가 살펴본 대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에서 우리가 참여함을 말하였는데요. 4절에서는 그러한 교제로 인하여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모임에서 냉랭하게 되거나, 또 형제를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거나, 또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든다면, 이제 기쁨을 이렇게 상실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우울하거나 불행하다라고 느낀다면 이때 해야 될 것이 이제 3절에 나온 것처럼 주님과의 그러한 사귐, 주님의 임재를 이제 경험을 통해서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4절 말씀을 이렇게 준비하면서 내가 정말 이러한 기쁨이 충만한 것을 누리고 있는가? 지금 현재,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럼 나는 언제 이러한 기쁨이 충만했던가?' 이렇게 짧은 그렇게 길지 않은 저의 신앙의 여정이지만 좀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어떠한 본연의 모습일 텐데 나는 정말로 매 순간 기쁨이 충만했었던가? 라는 것을 한번 되돌아봤고요.
그리고 이 요한일서에 지금 저희가 살펴봤던 1절부터 4절까지는 서론입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나오는데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어떤 목적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런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이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앞으로 전개하고 있다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도 요한께서 요한 서신서를 썼을 때 나이가 90세 정도 되셨을 텐데, 할아버지가 이제 그 주님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 또 초대교회의 성장과 또 그 핍박과 뭐 여러 가지 경험을 다 했습니다. 온갖 모든 쓴 것을 다 맛봤습니다. 즐거웠을 때도 있었고 이제 성도들의 어떠한 연약함, 실패, 이런 것들을 보고 또 이런 반응을 보고, 또 여러 가지 수많은 수많은 것을 다 거쳤습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에 대해서 기쁨이 충만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이제 생각나는 말씀이 이제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는 솔로몬이 썼다라고 되어 있는데, 솔로몬이 인생의 말년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그 즐거움을 다 누리고서 낸 결론입니다. "헤아래 수고했던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서 즐길 대로 다 즐겨봤고, 뭐 아내를 천 명이나 두어 봤고, 그 지혜와 부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이제 만족함이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제 전도서의 말씀들이 있는데요. 그리고 이제 이것과 딱 대비가 되는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솔로몬의 말년에 경험과 지식과 사도 요한의 말년에 경험과 지식이 참으로 대비가 되는구나. 솔로몬의 그러한 교훈으로부터 저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참으로 만족함이 없고 아무리 아무리 해도 충만하게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 부족함과 갈급함이 있는 것이고요. 사도 요한은 저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었을 때, 이제 아까 여러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충만하게 끝까지 다 채워지는 그런 기쁨이 저희에게 허락된다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난 시간에 교제되었던 대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과 아들과의 교제에 함께하는 특권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은 창조시에 그러한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하였다라"는 것은 이제 저희의 측면인데요. 하나님의 측면에서 본다면 창세기 1장 31절의 말씀이 이제 생각이 났습니다.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만족하였더라." '심히'가 이게 아주 가득한 거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만족하셨는데 그 이유가 사람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 교제로 인하여 이제 즐거워하시고 만족하셨다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이제 16편에 있는 말씀들을 보면 이제 인용하겠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이 요한일서 1장 4절 말씀과 이제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지고요. 이 4절 말씀이 어떻게 보면 짧은 말씀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5절부터 요한일서의 그 뒷부분에서는 어떤 부분들이 나왔냐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귐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계속 교제해 나갈 텐데요. 바로 뒷부분에는 죄가 저희와 하나님의 교제를 방해한다. 그다음에 2장에서 또 어떤 것이 있으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또 하나님과 저와의 교제를 방해해서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또 어떤 것이 이런 기쁨을 빼앗아 가는 자라고 얘기를 하냐면 세상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다음에 또 어떤 것이 나왔냐 하면 이제 미혹하는 자의 가르침, 적 그리스도의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귐을 방해해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고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대항해야 될 것인지 계속 이제 앞으로 쭉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계속적으로 어떠한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기쁨이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도 요한이 이러한 이 서신서를 쓴 목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앞에서 형제님들이 다 여러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해 주셔서 조금 반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계속 저희들이 지금 공부해 온 대로 이제 하나님 안에 있던, 그 주님 안에 있던 영원한 생명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또 하나님과 아버지와 또 사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게, 성도님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그 교제 가운데 이제 충만한 기쁨을 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제 계속 말씀해 주신 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교제가 있었고, 이제 기쁨이 있었고, 그리고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그것을 나타내 주셔서 이제 사도들이 그 교제에 더해지고, 그리고 이제 이 사도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또한 그 교제에 더해짐으로써 큰 기쁨을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계속 하는 교제하는 내용입니다만 참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이 땅에서부터 저희가 구원받은 순간부터 이제 누려가는 것입니다. 교재의 특권이 있고 그 가운데 충만한 기쁨입니다. 저는 이제 이 '충만한 기쁨'을 이제 '완성된 기쁨'이라고도 저는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원래 이제 완성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이 영생을 통해서,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서 이 땅에서부터 누리도록, 그 기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이 땅에는 형제님 지적해 주신 것처럼 여러 가지 방해하는 것들이 있지만, 저희들이 하나님과 아버지와 또 성도들과 함께 그 교제 가운데 들어갔을 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저희들이 그러한 기쁨이 없을 때에 이걸 확인해 봐야 됩니다. 내가 정말 온전한 교제 가운데 있는지, 내가 빛 가운데 있는지, 내가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을 하고 이제 이러한 기쁨을 이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이 기쁨은 세상의 어떤 환경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희들이 하나님과 함께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누리는 기쁨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어떠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늘 이러한 정말 완성된 기쁨을, 충만한 기쁨을 저희들이 이제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 형제님 말씀해 주신 대로 이 기쁨은 영적인 아비가 그 말씀을 전해준 그 사람들이 정말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을 때, 교제 가운데 있을 때, 또한 그것을 보고 사도 요한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성도님들을 향해서 가져야 되는 마땅한 마음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 영적인 유익, 성도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또한 이 사도 요한은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님들이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정말 주님과의 그런 충만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저희들도 함께 그런 것들을 즐거워하고 이제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원래 아버지와 아들께서 누리던 것들을 그 기쁨을 사도도 누리게 하시고, 또 사도가 그 이 교제를, 이 생명을 전함으로써 또한 사도도 또 누리고 있는 그러한 기쁨이 되겠고, 이제 저희들도 마찬가지로 성도들과 교제 가운데 또 저희들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러한 기쁨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예, 짧게 두 가지 정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형제님들께서 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먼저 저희가 지금 3절하고 이제 같이 보았을 때 그 기쁨의 근원이 이제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그 '교제'입니다. 그래서 저희 저희의 기쁨은 그 교제가 이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입니다. 그런데 이제 형제님들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 기쁨이 아버지와 이제 아들 사이에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이제 아들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그 사도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또 이제 기쁘죠. 그다음에 그 사도들에게 그 전함을 받고 있는 이 독자들이 또 이제 기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전해질 때마다 이렇게 조금씩 이렇게 감해진다거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게 왜냐하면 여기에 이제 나온 대로 "우리의 기쁨이 이제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돼 있는데, 형제님들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의 특징은 전해질 때마다 그 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은 그냥 충만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아까 이제 그 우리 성경에는 이제 "우리의 기쁨"이라고 나와 있고 이제 흠정역에서는 "너희의 기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이 사실 둘 다 맞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 그러니까 사도들, 그러니까 특별히 이제 사도 요한을 비롯해서 실제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누렸던 기쁨도 충만한 것이고 또 그로부터 전해 듣고 있는 그 독자들, 그리고 지금 세월이 지나서 이것을 말씀을 읽고 있는 저희의 기쁨도 동일하게 이제 충만한 것입니다. 이 기쁨의 특징은 동일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쁨이 아버지와 아들이 누렸던 그 기쁨을 저희도 지금, 그러니까 이 "우리의 기쁨이 있게 하려 함이로라"가 아니고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기쁨을 이 땅 가운데서도 저희가 이것을 실제로 충만하게 이제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우리의 기쁨"으로 이제 번역이 되나, 또 "너희의 기쁨"으로 번역이 되나, 이것이 다 저희가 둘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은 사도들의, 이것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과 실제 주님을 보았던 그분들의 기쁨이 충만케 한 것과 또 이것을 전해 듣고 있는 저희가 그 기쁨이 충만한 것을 저희가 이제 어떤 번역본을 따르든지 간에 이 둘을 갖다가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상입니다.
- 형제님2 : 네, 4절에서 사도 요한이 "이것을 씀은"이라고 해서 현재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2절과 3절에도 현재형으로 나온 부분은 "증거하여" 그리고 "전하노니" 라고 2절에 나와 있고, 3절에서는 "전함은"이라고 해서 이렇게 현재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하여 들은 바, 본 바, 또 주목한 바, 이것은 다 과거형으로 쓰여져 있고 또 이 과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그러한 경험이 주님을 향한 경험, 그리고 말씀에 대한 경험이 과거로부터 쭉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지금 현재 그가 하고 있는 것은 전하고 있습니다. 전하고 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전한 것은 주님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전했고 3절에서는 사귐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뭔가 2절과 3절에서는 이렇게 주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시고 또 주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사귐에 대해서 전하고 있고, 그런데 3절에서는 뭔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함이다"라고 하는 그 부분에서 뭔가 앞에 있는 그 절과 비교했을 때 약하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또 말씀에 대해서 경험을 한 사도 요한이 마지막 부분에 이것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결코 약한 부분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형제님들께서 앞에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기쁨의 수준이 저희가 생각하고 일반적인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는 다르게 훨씬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태초부터 이렇게 함께 사귀던 그 사귐을 잠깐 내려놓으시고 또 사람으로서 이 땅 가운데 오셔야 했던 이유가 저희에게 이게 지금 충만케 하시는 그 기쁨을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냥 단순히 자극적인 이 세상에서 느끼는 기쁨의 그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위치를 잠깐 내려두시고 사람으로 오기까지의 그 놀라운 기쁨을 위해서 이 기쁨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형제님 또한 이 노년의 마지막으로 이렇게 쓰고 있는 그 글은 자신이 주님의 보혈로 그 결과로 누렸던 그 기쁨, 이 기쁨을 교회도 성도들도 모두 누려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사귀셨을 때 누렸던 그 기쁨이고 또 저희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기쁨이며 이것은 앞서 형제님께서 충만케 하신다는 그 기쁨입니다. 그래서 주유소에 가면 저희가 '만땅'을 외치죠. 이 '풀'을 외치죠. 그래서 완전히 충만케 할 때까지 기름을 채우죠. 저희의 기쁨에 한계가 저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그 한계이고, 이것은 계속 채워져야 되는 거고, 이 사도바울 형제님이, 그리고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주시려고 하셨던, 저희에게 선물로 주시려고 하시는 그 기쁨입니다.
참 이 현재 사도 요한이 쓰고 있지만, 앞으로의 이 기쁨은 미래로 마땅히 성도들이 모두 다 누려야 될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고, 이것을 받고 있는 독자가 또 저희 성도들 모두가 그 기쁨을 채우기 위한 숙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사도는 이제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고 이것을 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받는 이제 우리 입장에서는 이 쓴 것에 이제 착념하고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도가 쓴 것에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때에 사도의 의도대로 이제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가 쓴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와 또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사귐에 이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이제 결코 이제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지만, 이제 그 사귐을 누리는 사람 가운데에 이 기쁨의 정도는 다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 기쁨을 다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 목적이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이제 말씀해 주시는 것은 그 영생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생명을 가지고 사귀는 것이 무엇이고, 이제 이런 것들을 쭉 이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생명이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요한일서에서는 계속적으로, 이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거기에 강조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이제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설명을 이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단지 주관적으로 나의 기쁨에 대해서, 나는 이럴 때 기쁘고 저럴 때 기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의 기쁨을 찾아야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5절 부분이지만 잠깐 말씀을 하자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그리고 이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이제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사실을 무미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좋은 약속을 이제 말하고 있는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소식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말씀이 이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좋은 소식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그 참된 의미를 알게 될 때에, 정말 거룩하시고,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죄를 의롭게 처리하시는 그 하나님은 빛이시라라는 그 소식을 듣게 될 때에, 우리는 정말로 참된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제 거기에 근거해서, 그 쓴 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기쁨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면 저희들이 다 구원 받을 때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할 때 우리가 그 누렸던 기쁨, 첫사랑, 이런 것이 저희들에게 다 있을 거고요. 아마 지금도 생각해 보면 참 구원받은 날 감격스러웠던 이런 느낌들이 있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이 기쁨이 계속되고 있는가, 그때는 기뻤는데 구원받은 후에 세상에서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니까, 이제 기쁨이 좀 침식됐는가, 잠식돼 갔는가, 이제 이런 건데요. 저는 이런 것에서 하나만 이 점 하나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쁨이 충만케 된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이제 자꾸 나오는 대로 기쁨은 어떤 환경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상황에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거죠. 그랬을 때 이 기쁨이 충만케 된다라고 했을 때, 이런 측면에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청년들이 그런 교제를 해서 제가 도전을 받았는데요. '충만하다'라고 하는 것을 어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기쁨이 불필요하답'니다. 주님은 여우도 돌아갈 굴이 있고 새도 공중에 거처가 있지만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어디에 있었냐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으로 나머지 것들을 다 이겨내신 거죠. 그러면 우리의 경우도 우리가 저희가 구원받고, 말씀 가운데 있고, 또 주님과 교제하고, 이렇게 이제 교제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교제는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뭘로 표현이 되냐면 '만찬'으로 표현됩니다. 사도의 가르침으로 교제가 시작되고 그다음에 만찬 예배, 만찬으로 표현됩니다. 가족들이 제일 기쁠 때는 저녁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식탁에 모였을 때입니다. 이게 가장 기쁠 때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기쁠 때는 주님의 만찬 앞에 온 성도가, 성도들 가운데 어떤 한 지체도 빠지지 않고, 징계되거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그 지역 모임에 온 성도들이 다 함께 만찬에 참여했을 때가 가장 기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요즘에 좀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래도 맨날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술집이 제일 기쁩니다. 먹고, 술 먹고 그냥 막 이야기하고, 또 뭐라고 그러면 술 먹어서 나오는 소리니까 봐줘, 그러면서 비난받지 않는 이 술집이 그들의 교제처입니다. 그걸 이제 막 못하게 하니까 어떻게든지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이 주님과의 교제, 개인적으로 교제할 때 또 지역 모임 가운데서 교제하며,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교제하는 거니까 만찬상 앞에서 예배드리고 떡에 참여하고 이때가 제일 기쁠 때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충만하면 다른 기쁨이 불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청년 학생 자매가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러더라고 "너는 세 군데만 가면 된다. 학교, 교회, 집, 나머지는 갈 필요 없다." 그래서 굉장히 굉장히 도전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기쁨을 누렸으면, 예를 들면 그래도 젊었을 땐데 호기심도 있고, 한 번 좀 세상도 즐거운 것이 뭐 있나? 하고 좀 이렇게 찾아볼 필요가 없다. 세 개면 충분하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 가운데, 또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그 이외에 딴 데 가서 무엇을 더 재미있는 것 혹시 또 뭐 보고, 뭐 괜찮은 거 있나? 라고 찾아보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도 굉장하고요. 또 그렇게 사는 것처럼 말하는 학생도 대단하고, 그래서 제가 그날 저녁에 저를 돌아보면서 '나는 이것저것 좀 하는 데, 있는데, 저녁에 침대에 누워서 인터넷도 좀 들어가고 유튜브도 보고 그러는데 이거 안 되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기쁨이 충만한가? 다른 것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 이게 이제 사실이죠.
그런데 이제 이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지만 기본 원칙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충분하다. 이걸 이제 아마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상입니다.
- 박용수 형제님 사회 : 네, 오늘은 제가 잘 몰라서 5절까지 해보려고 했는데요. 보니까 4절로 충만하게 교체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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