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1절 / 마포모임, 20년

박이레 2026. 1. 28. 16:20

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1절 / 마포모임, 20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사회 : 처음부터 나가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일단 요한일서 처음 시작 다가가는 데 있어서 간략하게 한번 요한일서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요. 이제 요한일서는 많은 성도님들 아시다시피 저희가 아는 사도 요한이 지은 서신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도 요한은 이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서, 그리고 이제 요한계시록을 지었다고 저희가 알고 있는데요. 이제 요한복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하고, 또한 요한계시록이 또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얘기하고 있다면, 또한 이제 요한 서신서에 대해서는 또 우리 주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오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보면 말씀에도 이 사도 요한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아들이라고 한 것처럼, 약간 급한 성미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또 이 요한일서에 나타난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을 볼 때 보면, 참 사도 요한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이제 변화되었는지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이 시대 배경적으로 보면 이때는 서신서를 쓸 때에는 영지주의에 물든 많은 이제 좀 이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은 모든 것이 악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이제 육에 대해서 자기 방임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 그대로 생명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한 내용인데요. 그래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 요한께서는 이제 1절에 나온 것처럼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하여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얘기하시면서 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을 사도 요한은 직접 들었고 눈으로 봤고 또 한 손으로 만진 바로 얘기하면서 그거에 대해서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이제 그런 영지주의를 띈 자들에 대해서, 그런 이단에 대해서 조심할 것과 또한 이제 참된 성도라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이것이 밖으로도 드러나야 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참 빛이시며 또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따라 그 의를 행하고, 또한 죄를 미워하며, 그리고 이제 또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을 사랑함으로써, 참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권면하고 있는 서신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5장까지 이루어져 있는데요. 오늘은 그 1장 1절부터 한번 나가보고자 합니다. 나가기에 앞서 요한일서 1장을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10).

네, 그래서 일단 오늘 말씀 가운데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은 이제 사도 요한 형제님께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대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라는 거에 대해서 얘기하시고, 또한 이제 이것을 전하는 이유가 그 그리스도 안에 생명 받은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한 것임을 계속해서 먼저 서두에 얘기해 주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방금 말씀한 것처럼 일단 1장 1절에 대해서 먼저 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님 1 : 요한일서 1장 말씀을 보면서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을 잘 해 주셨는데, 그 글 초반부에는 이 요한 사신의를 쓴 목적에 대해서 서술을 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은 그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거에 대한 어떤 명확한 근거, 그러니까 주님에 대한 실증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고요. 그리고 교제에 대한 내용들을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 기록하고 계시다고 생각이 되고요.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여 눈으로 본 바에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태초부터 있다'라고 하는 내용들이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언급이 돼 있고요.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생명의 말씀,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해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때 당시에 그 예수님을 부정했던 자들에게 이 요한 사도는 직접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했던 사람으로서, 명확한 근거를 본인이 직접 증언해 보이고자 이 말씀들을 기록을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말씀도 듣고, 직접 보고, 주님을 만지기도 하는 그런 특권을 누렸고, 또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돼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본인이 직접 경험했고 확실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그 자격을 가지고 있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에 대한 부정에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그런 자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전효진 형제님 : 사도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직접 그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을 어 충분히 들었습니다. 또 그 말씀이 이제 하나님이심을, 또 주님께서 행하신 그러한 사역을 통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보았고 또 확인한 그런 제자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영광의 하나님이 이 육체를 입으시고 오셔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신 것을 충분히 증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입에서 나온 그러한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의 그 하나님의 말씀이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하신 능력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 능력의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그들은 직접 본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사실을 이제 모든 감각기관인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또 주목하여 직접 경험한 이 요한은,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주님에 대해서 귀로 들은 그러한 증인일 뿐만 아니라, 또 눈으로 본 증인이며, 또 마음 가운데 이렇게 분명하게 이렇게 주로 시인함으로 이렇게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주님께 드리는 것을 이렇게 사명으로 여긴 여러 증인들 중에 하나임을 이 1절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신,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인 것을 요한은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서 충분히 이렇게 증언하고 있음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형제님 2 : 1절에 보면 이제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봐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표현하고 있고 또 1절에서 생명의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태초부터 계신 그 예수님, 그리고 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만진 바라, 이제 이런 표현을 통해서 주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 가운데 오셨고, 그래서 이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 하나님을 나타내신 부분을 이제 1절에서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이고 또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이런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이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 이것을 들었고, 받고, 또 주목하고 만졌다, 이제 이런 표현을 쓰는 쓰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가 이제 이 생명의 말씀이 어떤 그런 한 사람이고, 또 한 인격인 것을 이제 알 수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 사도 요한이 이제 그것을 이제 들었죠. 직접 듣고, 이제 받고, 주목하고, 만진 바를 이제 증거하고 있고, 그리고 이제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이제 특이하게 우리가 이제 베드로 전후서를 이제 앞에서 배웠고, 또 여러 서신서들을 봤었는데, 이제 그런 인사말이나 서론, 뭐 이런 거 없이 바로 주님의 이제 성육신에 대해서 1절에서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제 생각하게 될 때 앞서서 이제 형제님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성육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제 이런 부분들이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 가운데 그런 큰 해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베드로서 말씀에서도 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제 주님의 강림을 부인하고, 심판에 대해서 부인하고, 이런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 그런 부분들을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요한일서에서는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그런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가운데 침투해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께서 이제 그것에 대항해서 또 그런 필요에 의해서 이 서신이 이제 쓰여졌음을 1절 말씀을 통해서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4장에서는 좀 더 그것을 더 자세히 이제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요. 4장 1절부터 3절 보면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고, 4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이렇게 이제 4장에서 좀 더 그걸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아무튼 1절 말씀에서 이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님이 이제 성육신을 하셨다. 이런 어떤 중요한 교리를 1절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재훈 형제님 : 사도 요한은 신약에 이제 다섯 부분의 책을 쓰는데요. 요한복음을 쓴 목적은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몇 군데에서 이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4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또 2장 1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2장 26절,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제 서신서와 이제 요한 복음서를 쓴 목적을 비교해 보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말하고, 이제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이제 나타내는 것이 요한 복음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이제 말씀하신 대로 배경에 미혹하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제 나이 들었을 때, 거의 AD 90년 때에 영지주의가 이렇게 있고,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거짓된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 또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생명을 소유한 자는 어떠한 특징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자녀가 구분이 되고, 또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아버지와의 교제 가운데서 어떤 기쁨을 누릴 수 있는에 대해서 이제 요한일서는 이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의 그런 이런 서신서의 목적을 이렇게 생각했을 때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와 교제 가운데 있게 되는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앎을 통해서 이제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참으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에 대해서 더욱더 강조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 1절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음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창세기 1장 1절은 이제 세상에 처음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는 이제 '영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태초부터 있는" 다른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형제님들이 교제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말씀'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이제 하나님이 어떠하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온전히 알려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이십니다.
그 말씀은 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신 분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 동일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하심으로 이제 아버지와의 또 그 아들과 사귐이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 우리는 이제 사도요한과 함께한 사도들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들은 들었고, 또 흠정역에는 "우리의 눈으로 본 바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처음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는 요한복음 1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와 보라"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는 이제 와서 주님을 이제 보았습니다. 그의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돼 있습니다. 주목한다는 것은 경외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관찰해서 보았던 것입니다. 지각을 사용하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빚을 통해서 이분이 참으로 어떠하신 분인지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돼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품에 의지해서 이렇게 누워 있었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여러 번 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만지다'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사용된 부분은 누가복음 24장 3 9절에서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이 만지다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도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만짐에는 그와 같은 것들이 또한 포함되어 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라는 이 동사는 '완료형'으로 돼 있습니다. 보고 들었던 그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생생하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에서의 동사는 과거형으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그들이 객관적으로 또 사실로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말하면서 참으로 미혹해 하는 자들, 거짓 교사들이 말하듯이, 주님께서는 어떤 환상이나 환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체로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인 것을 그의 개인적이고 또 경험을 통해서, 또 사실을 통해서 증언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김회상 형제님 : 예, 앞에서 형제님들 말씀해 주신 대로 이제 요한 복음이 기록된 목적을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 있는 그 생명이 믿는 자들에게 가는, 믿는 자들이 그것을 받는 그 측면을 지금 복음서에서는 계속 말씀하고 있고요. 요한일서에서는 이제 믿는 자들에게 있는 영생이 이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이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는 저희들이 영원한 생명을 주님을 통해서 저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아, 정말 이분이 영원한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저희들이 주님을 통해서 저희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영생이 있고, 그 영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이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저희들이 믿는 자들 안에 이러한 영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 영생이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 여기 말하는 저희가 이제 3절 4절에서 교제하겠지만 '사귐'입니다. 펠로우십, 그니까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는 믿는 자들과의 그러니까, 아버지와 그 아들과 믿는 자들이 함께하는 그 교제입니다. 그래서 그 영생이 이제 교제 가운데 나타나게 되고, 그 여러 가지 그 교제 속에서 영생이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계속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요한일서에서 이제 1장에서 4절까지가 '서언'이라고 하나요? 이건 이제 요한일서 1장은 1절부터 4절, 5절부터 10절까지 나눌 수 있는데, 1절부터 4절까지는 '그 생명이 나타났다.' 이제 주님 안에서 그 나타난 그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부터 10절까지는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그 영생으로부터 어떤 소식이 전해졌는가를 이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그 영생을 통해서 교제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생을 통해서 우리가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교제, 사귐의 특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5절부터 10절까지는 그 교제, 그 사귐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전반부에서는 저희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하반부에서는 또한 그 교제에 관한 책임을 저희들이 좀 교제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여기서 "우리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앞에 계속 보시면 1절에서 4절까지 "우리가"라고 돼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열두 사도를 대표해서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앞에서 형제님들 얘기해 주셨지만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만져"봤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친밀하게, 그리고 주님에 관해서 주의 깊게, 아주 그런 3년 반의 공생애를 통해서 주님과 경험한 것들을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님들이 말씀해 주신 대로 이것은 주님의 분명한 인성을 또한 증거해 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냥 '말씀'이라고 돼 있는데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돼 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이 말씀은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느니라.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는 저희가 중점적으로 봐야 될 게 '생명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그 주님을 통해서 영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고 저희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이런 것이구나.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저희들이 앞으로 교제하겠지만 단지 오래, 그러니까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저희들이 교제를 할 거고요. 그리고 그 우리가 그 생명의 말씀, 그 영생의 영생을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영생이 무엇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우리 안에 그러한 생명이 나타나도록 이제 사귐을 갖도록 하는 말씀이 요한일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박성호 형제님(?) : '생명'이라는 단어가 요한일서에서 많이 쓰였는데요. 신약에서 찾아보니까 27권에서 134군데에 쓰였고요. 그런데 이제 사도요한께서는 신약 성경 5권 중에서 63곳에서 썼더라고요.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도 13번을 썼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의 중심이 되는 이 단어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제 첫 단어, 이 '생명'이라는 단어가 이제 1절에서부터 언급이 돼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도 그렇고, 요한일서에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고, 계속 '태초'라는 어떻게 보면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그러한 구절을 많이, 글을 많이 썼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 앞서서 다 설명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 영지주의자의 영향 여기 굉장히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이 쓴 모든 서신들은 복음서와 서신서들은요.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이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한 것이다, 보이는 것은 악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선한 것이다, 이런 식의 어떤 가르침이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도 요한께서 계속 창세기의 어떤 구절들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시작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이제 말씀으로 지으셨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랬는데 사람에 대해서만은, 물론 말씀으로 지으셨는데 흙으로 지었다라고 이렇게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두 번이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이 그 모든 지으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아담은 물론 이제 타락했지만 타락하기 전에는 우리 주님의 어떠함을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 봤을 때 이제 물질로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셨는데, 이것은 나중에 주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어떤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 좋았다라고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물질,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은 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지주의자들의 논리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선언을 하신 거죠. 처음부터 사실은 창세기를 저희가 읽는다면, 영지주의자들의 어떤 반론이 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제 태초라는 말이라든지, 그리고 이제 생명나무 같은 경우,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생명나무가 연상이 됐는데요. 아담이 이제 선악과를 보고서 따먹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아담은 생명나무를 보고서 따먹었었어야 되는 거죠. 원래는, 그렇다면 영생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래는 의도한 목적이셨을 거고요. 그래서 이제 이 구절을 보면, 마치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나무의 열매를, 생명나무도 사실은 우리 주님을 상징하는 것이잖아요. 창세기에서 나오는 생명의 나무 역시,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어떤 반론, 그런 것이라고 연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앞서서 이제 형제님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생명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요한일서 1장은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와 저희와의 관계, 이것은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지는 그런 모습이 연상이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1장에서는 그것이 이제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을 얘기했다 하면, 2장에서는 또 형제와의 관계, 이제 이것은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그러한 것이 연상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이렇게 어그러지고 잘못된 그러한 것들에 대한 회복이, 사실은 이제 요한일서의 어떤 주제에서 이렇게 나온다라고 할지, 제가 표현이 잘 참 어려운데 그런 이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 때문에 요한 사도 요한께서 '태초'라는 말을 썼다든지, '생명'이라는 말을 썼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어 영지주의자들에게 공박을 하는 그 논거로 삼았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강성찬 형제님 : 예, 여기 앞에 형제님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에 대응해서 또 사도 요한이 이런 서신서를 쓰고 있는데요.
특별히 1장 1절에서 사도들이 실제로 이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또 주목하고, 그분에 대해서 지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손으로 만진, 이런 것들을 그래서 특별히 언급을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서신의 목적을 이제 "내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데요. 이제 그중에 세 가지를 이제 살펴보자면, 특별히 이제 영지주의와 관련돼서 생각을 해보자면, 1장 4절에 첫 번째,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특별히 첫 번째는 이 기쁨을,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쓰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여기서 흠정역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이제 너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영지주의자들은 앞에 설명해 주셨지만, 그 육신에 대해서 이제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 가지 이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 가지는 이제 금욕주의적인, 또 한 가지는 반대의 극단인 방임하는, 그 육체로 하는 모든 것들이 그 영을 더럽히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이제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제 그런 금욕적인 잘못된 교리를 가진 것에 대응하여, 참 진리인 이 참된 이 복음은 참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교리는 그들에게 참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단지 육신을 억누르고, 금욕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참된 복음은, 참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임을 이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2장 1절에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또 반대의 극단이 그들이 이제 방임 하는,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그 목적에 대해서 쓴 5장 13절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지 않았다는 그 잘못된 교리는 참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대속사역의 의미를 부정하게 되는 이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제 그런 것임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육체로 임하신 우리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한일서를 이제 전체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때에 여러 형제님들께서 다양하게 이제 나누어서 보고 계시고, 다 이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단순하게 이제 말씀을 이제 한 가지를 드리려고 하는데요. 이 요한일서 전체적으로 일단 단순하게 먼저 한번 보면, 그 나중에 다른 형제님들께서 더 자세하게 나눈 것이 또 더 잘 이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우선 크게 세 부분으로만 나누어서 생각을 하겠습니다. 1장 1절부터 4절은 일단 인사를 대신하는 '서론' 격으로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1장 5절부터 2장 28절까지를 우선 하나로 나누어 보자면, 이제 '빛'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이게 1장 5절에 나와 있는 것인데요. "하나님은 빛이시라"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사도 요한은 이제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이제 빛이 있고요. 그리고 생명이 있고, 그리고 이제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이런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고, 이제 그런 개념들을 우리에게 자주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인데요. 우선 첫 번째 1장 5절부터 2장 28절까지는 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이것과 관련돼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제 행해야 되는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어떻게 드러나는 것이 마땅한지, 정말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첫 부분에서 말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2장 29절부터 이제 제일 긴 파트가 될 텐데요. 5장 5절까지는 '사랑'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4장 8절에서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관련해 가지고,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 정말 그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 생명이 이제 형제를 사랑하고 이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에 더 중점을 두고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 이제 6절부터 마지막까지는 '생명'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생명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하지만, 또한 이제 5장 20절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다시 한 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영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이제 구원받은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이제 알고, 그것이 증거가 됨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일서를 일단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또 계속 우리가 교제에 나가면서 더욱 자세하게 이런 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봉래 형제님 : 우선 서신을 쓴 분이 이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기를 소개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여지고요. 자기 이야기 안 하고 지금 바로 나오는 거죠.
그러면 이 서신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했을 때 일반적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로 봅니다. 왜 그렇게 보냐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이제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게 해서, 한 그 메시지의 마지막이 뭐냐 하면 "내가 떠난 후에 이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도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고 갑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갔다가 체포되고 그다음에 이제 로마에 갇히게 되죠. 그래서 이제 로마 감옥에 2년간 이제 갇혀 있게 됩니다. 그때 쓴 서신서가 이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죠. 그리고 잠시 나옵니다. 첫 번째 투옥에서는 이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납니다. 풀려나가지고 이제 쓴 서신이 이제 디모데전서, 이제 사도바울이 풀려나서 지역 모임을 방문하죠. 그중에 하나로 에베소 교회를 방문합니다. 방문하고,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출교시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다시 떠나서 이제 다른 지역 교회를 방문하면서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를 쓴 거죠.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이외에 이렇게 잘못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다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다시 체포됩니다. 그때 이제 디모데전서 디도서를 썼고요. 다시 체포돼서 이번에는 순교합니다. 감옥에서 쓴 게 이제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겨울이 되기 전에 나에게 오라. 성경책을 가지고 오라." 이렇게 하면서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냐면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렸다." 아시아의 수도가 에베소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성도는 아닐 거고, 아마 이제 많은 일꾼들이 사도 바울을 버려버립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가 굉장히 비극적인, 사실은 저희들이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가장 오랫동안 사역한 곳입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해서, 3년간 있었고, 가장 오래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라" 이렇게 됐던 곳인데, 이제 완전히 이 에베소 교회가 무너진 거죠.
그리고 나서 이 에베소 교회의 사도 요한이 와서 일을 했던 것으로 보통 전해집니다. 그걸 어떻게 이제 뒷받침하냐면,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이제 주님께서 이제 쓴 7개의 교회의 편지를 쓰는데 에베소 교회에다가는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첫 번째 비난이 저희들이 잘하는 '첫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게 이제 에베소교회의 문제입니다. 첫사랑을, 처음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을 때 그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그 단순함, 헌신된 감사의 사랑이 사라진 거죠.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이 있습니다. 칭찬 혹시 기억나십니까? 요한계시록 2장에 에베소교의 칭찬이 뭐냐 하면 그들이 거짓 사도들을 분별해 냅니다. 그리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이제 서신서로 보자면, 이제 저희들이 성경으로만 보자면, 사도행전, 그다음에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를 보면 이게 지금 에베소 교회거든요.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지금 이렇게 됐는데, 다시 계시록 2장에서는 칭찬을, 적어도 교리적인 면에서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요한일서입니다.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고, 이쪽에 와서 거짓 사도들을 분별해내고, 그러니까 그들이 요한일서에서 보면 그들이 나갑니다. 그들이 요한일서 2장 쪽에 가보면 그들이 나갑니다. 사도 요한이 와서 원래부터 있었던 복음, '태초부터'라고 하는 것이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이나 요한복음 1장하고 약간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이나 요한복음 1장은 영어로 하면 '인더 비기닝'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프롬더 비기닝'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복음, 이제 이걸 같이 이렇게 해석하신 형제님도 계시고요. 그다음에 이제 저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주님의 성육신 시작'입니다. 복음이 처음에 전해질 때부터, '처음에 복음이 시작되고 전해질 때부터'입니다.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시작이고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제 그때부터 변함없이 주님을 본 사도 요한이, 주님과 함께 있었던 사도 요한이, 계속 이제 에베소교회에 와서 분명한 주님에 관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나갑니다. 이 사람들이 나갔는데,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죠. 저희들이 나간 이유는 "처음부터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구원 안 받은 사람들이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나가가지고도 경험에 의하면 그렇죠. 나가가지고 곱게 분리돼 있는 게 아니고, 계속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를 이제 쓰고 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해가 되고요.

그다음에 이제 또 하나는 제가 구원받을 때가 1980년대입니다. 그때 저희들이 이제 성경은 잘 모르고, 성경은 방대하고, 단순한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서 이제 주님을 기뻐하며 섬기고 교회 진리도 잘 모르고, 이럴 때죠. 이제 가장 많이 성경 속에서 굉장히 인상적이고 두렵고 또 심각한 구절이 마태복음 7장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때 어떤 사람들이 와서 주께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렇게 말하자 주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구절은 굉장한,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이게 이제 그 당시로는 그렇게 생각하죠. 말씀을 설명한 사람입니다. 강단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선지자 노릇하며, 선지자 노릇만 했냐? 귀신을 쫓아내고, 그다음에 능력을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불법을 행했다. 내게서 떠나가라." 이런 구절들이 구원 받았을 때 굉장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제가 어렸으니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도 있고, 제가 먼저 알고 있는 여러 유명한 분들이 있는데, 그걸로 되는 건 아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여기까지만 있으면 좋아요. 구원받으면 되니까, 그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이제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구원의 생명을 얻은 게 문제가 아니구나, 생명을 얻는 것도 있지만 그래서 그다음 이제 이걸 들어서 많은 메시지들이 그때 행해졌습니다. '풍성한 삶', 정말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구원을 풍성하게 산다고 하는 게 뭐냐? 그래서 이제 제가 인상적인 것은, 그때는 이제 제가 모임에 있지 않을 텐데요. 이제 많은 분들이 구원받고 헌신합니다. 자기 생애를 선교사가 되려고 하고, 이제 전심 사역자가 되려고 하고, 이렇게 이제 자기 삶을 통째로 주님께 드리려고 많이 하죠. 꼭 구원 같죠. 그런데 그렇게 주님 일을 하다가, 열심히 전도하고 일을 하고, 그리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말씀이 내가 풍성하게 살고 있는가? 풍성하게 일하고 있지만 풍성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를 느낍니다. 특별히 구원받고 헌신할수록, 정말 내 다른 사람에게 다른 곳에게 많이 이렇게 내어줄수록, 자기 속에 쌓인 게 없고 맨날 주기만 하니까, 오히려 자기가 더 허무해지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을 회의하고, 정말 구원과 참 생명은 뭔가? 라고 하는 어떤 회의,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추구, 이런 것들이 저는 이렇게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여러 번 나왔습니다마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항상 말씀은 항상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요한복음이고요.
그다음에 요한일서는 '생명'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안 사람이 어떤 생명을 사는가, 그래서 이 영생이 시간적인 영혼이 아니고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명입니다. 자연적인 생명, 그냥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그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게 이제 요한일서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그 생명이 뭐냐?' 이렇게 했을 때 하나 보는 것은 저희들이 이제 보면 "들은 바요"인 거예요. 이렇게 한 것은, 이제 여기서 들었고, 그다음에 보았고, 그다음에 주목했고, 그리고 만졌다, 이렇게 돼 있는데요.
생명이 뭘로 나타났냐면 이제 '말씀'으로 나타난 거죠. 그러니까 들은 거죠. 이 대목에서는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냐 그러면, "이같이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산상수훈을 하고 났을 때 그 반응이 뭐였냐면, "그 교훈의 놀라니" 이제 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훈과 같지 않았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이같이 말하는 자가 있는가?" 이런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보았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처럼 기적을 행한 분이 없습니다. 주님을 반대한 사람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주님이 행한 기적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온 세상이 그를 쫓는도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자연을 통제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못 고치는 병이 없으셨죠. 이거 이제 이걸 본 거죠. 이제 그다음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래서 이 두 개하고 이제 그거하고 이제 동사 차이도 이제 말해 주셨는데요. 그다음에 이제 우리가 "주목하여 보니" 여러분 이건 이제 주님이 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걸 근거로 그가 생각해 보니, 그걸 듣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보았을 때 그가 주목해서 느낀 게 뭐냐 그러면, 요한복음 1장 14절인가요?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게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만진바라" 그랬을 때, 이제 형제님들이 이 '만진 바'라고 하는 단어가 언제 어디서 이제 함께 쓰였느냐? 이제 단어를 가지고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를 만져봐라." 누가 복음에서 하셨죠. 그리고 저희들이 잘 아는 요한복음에서 도마에게 "내 손에 못자국에 손을 넣어봐라." 이렇게 하죠. 그래서 이제 부활하셨어도 육체를 가지고 계신 거죠. 이제 그걸 이제 만졌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요. 만졌다를 어떻게 느낄 수 있냐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다음에 이제 느끼는 겁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은혜와 진리를 봅니다. 그리고 만졌다라고 하는 것은 이게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그러니까 이제 저희들이 베드로전서에서 한 대로 주님이 십자가에 지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이 뭐냐?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셨던 그 걸음을, 그리스도인들이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생각이 나는데요. 니고데모가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없었냐?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난 주일날 덕언 시간에 나왔는데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러니까 구원받기 전에는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우리가 살아난 거죠. 그래서 이 생명, 그래서 그 지식이 아니고 그래서 지적으로 동의한다. 그 모든 내용을 내가 다 알고 받아들인다가 아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산다' 그에게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관점과, 다른 실행이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뭘 말하느냐? 이걸 이제 저희들이 쭉 배워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장 1절에서 풍성한 삶,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는 내용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상입니다.


사회 : 형제님들 교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요한 1서 1장 1절까지 먼저 교제한 걸로 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이제 요한 1장 2절부터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