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성도 말씀

룻기 3장 : 기도의 책임, 태도, 헌신, 그리고 받게 되는 축복

박이레 2024. 12. 21. 13:26

< 룻기 3장 : 기도의 책임, 태도, 헌신, 그리고 받게 되는 축복 > 강성찬 형제님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찌니라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그 사람의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 3:1-18).

지난 시간에 제가 방문하였을 때 이제 룻기 2장 말씀을 교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이제 룻기 3장을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여기 2장과 3장을 비교해서 보면, 이제 여러 비슷한 부분들이 있고 또 서로 대조가 되는 면들이 있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장소에서 차이가 나는데요. 룻기 2장에서는 보아스의 밭이 그 배경이 됩니다. 주로 보아스와 룻의 대화가 이제 보아스의 밭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 3장에서는 그 배경이 되는 자리가 이제 보아스의 발입니다. 보아스의 발 아래, 거기에 이제 룻이 있게 되고 이제 거기서 이제 보아스와 룻이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각각의 장에서 이제 중심이 되는 이 행동들도 차이가 있는데요. 룻기 2장에서는 우리가 보았듯이 그 밭에서 이제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3장에서는 그 보아스의 발에서 룻이 이제 요청을 하는 이제 그런 내용이 이제 주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을 우리가 교제할 때에 그 이삭 줍기가 이제 상징하는 바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 이제 말씀을 이제 듣는 것을 말씀을 드렸고요. 그리고 이제 3장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아스에게 이제 요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이것은 이제 기도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2장에서는 말씀을 듣고, 3장에서는 말씀을 드리고, 이제 이런 내용들이 이제 배경으로 2장과 3장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먼저 이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우선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또 다른 이제 차이 중에 하나는 2장 3절에 보면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이제 열심히 이삭을 줍는 가운데에 이제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2장은 이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가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된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3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4절에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것을 알아다가" 그래서 여기서는 우연히 보아스의 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눕는 것을 정확히 보고 알아둡니다. '보아스가 여기 있구나.' 그걸 딱 보고 정확히 그 눕는 자리에 그 발 아래 룻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섭리라기보다는 이제 사람 편에서의 책임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항상 성경이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그분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또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제 그게 다가 아니고, 우리가 정확하게 살피고, 말씀을 통해 분별하고, 정확히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는 것을 또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책임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이 3장 내용을 다루면서 첫 번째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는 기도할 책임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영적인 뭐라고 할까요? 수동적인 태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이라고 또 말을 붙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때까지 자기는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떠한 분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면이 있습니다. 여기 3장에서도 이제 마지막 부분에 보면은 이제 여기 '가만히 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제 그거에 대해서 다시 이제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이제 기다리고 가만히 있어야 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시는데 하고, 말씀을 분별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그냥 될 대로 되겠지'라는 영적인 게으름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사단은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지 않고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떠내려가도록, 오히려 그것이 영적인 것처럼 그를 속이고 아무런 판단도 선택도 하지 않게 그냥 가만히 있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행동해야 될 때, 분명히 나와야 될 때, 그걸 하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우리는 항상 깨어 있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고, 그것에 맞게 이제 구해야 되고, 이제 그런 책임이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건 어려운 것이죠. 특히 더 이제 중요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더욱 우리가 이제 그런 자세에 빠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구해야 되는, 기도해야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기도의 이 태도,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특별히 이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를 특별히 '이때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타작을 다 하고 그리고 쉬고 있을 때, 이제 그때 이제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혼자 있을 시간이 그때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아스는 이제 항상 이제 다른 사람들하고 이제 같이 다니는 것이죠. 그런데 타작을 다 한 후에, 그 타작 노적가리를 지키면서 그 옆에서 자는 것, 이것은 이제 주인이 하는 일입니다. 그게 이제 그때의 이스라엘의 관습이었고요. 그리고 혼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집이 아니라 타상 마당에서 자고 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이제 그러한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 우리 생각에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오미는 특별히 보아스가 혼자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찾아 갈 수 있는, 이제 그 시간을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2장에서 보면 여러 사람들이 항상 같이 있습니다. 보아스하고 룻이 대화를 나눌 때에 이제 그 밭에 다른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같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가운데 이제 대화를 나눈 것이죠. 그런데 3장에서도 보아스와 룻의 대화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보아스와 룻만 있습니다. 이제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요. 그래서 특별히 여기서의 제 기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제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에서 집합적으로 기도를 드릴 때가 있지만, 또한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또한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태도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마태복음에서 이 기도에 대해서 주님이 가르치신 부분을 한번 보려고 하는데요. 마태복음 6장 말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5-8).

여기서 특별히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는데요. 특별히 이제 개인적인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제 골방에 들어가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왜 이제 골방에 들어가서 하는 기도여야 되냐면, 이것은 이제 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그래서 상을 받는, 그런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모임에서 집합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이제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를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집합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그 내용에 큰 차이가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우리 가정을 위해서나, 또 나를 위해서나, 어떤 가족의 건강과 또 그들의 직장과 또 여러 삶에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런 것들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이제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함께 나와서 모임적으로도 이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적합한, 이제 그런 내용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이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이제 어떤 거냐면,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소원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주님의 어떠함을 생각할 때, 나도 그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자 하는, 그 주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나도 이렇게 행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의 소원들, 이런 것을 올려드릴 때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런 것을 아마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이 다 듣는 데서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경건한 척을 하면서, 자신이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도 자신이 하나님께 이런 이런 일을 하겠다라고 소원을 드리는 그 기도를 많은 사람이 듣는 가운데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선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특별히 이제 골방에서 드리는 것이 적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룻이 보아스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것, 그리고 혼자서만 말하는 것, 이제 이런 기도의 내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뒤에서 더 설명을 드리겠지만, 이제 보아스에게 룻이 요청하는 그 내용을 보면 이것은 구하는 건데, 룻이 보아스에게 요청하는 건데, 이것은 사실 룻의 헌신의 내용입니다. 룻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의 헌신이 그 요청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를 룻은 보아스에게 가지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제 룻기로 3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나오미는 3절에 그렇게 보아스에게 나아갈 때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라고 돼 있습니다. 그는 이제 과부의 옷을 벗고 이제 다른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아가게 됩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이제 우리도 이제 주님 앞에 나올 때 이제 이런 자세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자세를 말하냐면, 기도하러 나오는 것이지만, 구하러 나오는 것이지만, 거지의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장들이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것처럼 이제 그런 옷차림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계시록 말씀을 보면 이 성도들의 기도가 향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저는 그런 부분들을 볼 때마다 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왜 기도가 제사가 될까? 왜 사람들이 구하는 게 제사가 될까? 이제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 구하는 내용이 향기롭게 하나님께 느껴질까? 왜냐하면 여기 기도에 우리의 헌신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뭘 주세요, 뭘 주세요라고 이러는 게 아니라, 물론 하나님이 그것도 이제 기뻐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또한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께 헌신으로 나오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장이 향을 가지고 나오는 것처럼 이제 그렇게 나오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도 실제로 이제 보아스에게 이제 그와 같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스가 기뻐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또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이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이것 좀 주십시오, 이렇게 간구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주시는 그 부요하신 자께 겸손히 나아와서 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향기로운 향연"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안에 우리를 드리는 그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이제 기도할 때마다 생각해 봐야 되는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눕는 곳을 정확히 알아다가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조금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게 뭔가 이제 생각이 드는데요. 이제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마태복음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살 깨우는 겁니다. 종교인들은 중언 부언을 합니다. 큰소리로 여러 번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라는 것은, 여러분이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요즘같이 추운 날에는 저는 발이 시리면 깨어납니다. 발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으면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사람을 깨우는 가장 젠틀한 방법입니다. 알람 시계처럼 그가 추위를 살짝 느꼈을 때 슬슬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이제 그런 방식인 것입니다. 발치 이불을 들라는 것이 그렇게 젠틀하게 깨우라는 것입니다. 그가 잠들어 있을 때에 막 흔들어 가지고 "일어나세요.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짝 그가 때가 되면 일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제 기도가 이제 그런 것인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이 요구를 꼭 이루어 달라고 여러 번 말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 여러 가지 이제 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 모두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그분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그분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이제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책임, 그리고 이제 기도로 나아갈 때 이제 자세를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런데 사실 이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로서 나아가는 것이 이제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이 이제 3장에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나아가라고 이제 시키고 있는데 이게 저 같으면 딱 듣고 룻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딱 하는데, 이게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게 어려운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할 수 있는 부탁을 "저기 저 형제님한테, 저 자매님한테 가서 이것 좀 얻어와라."라고 아이들한테 시키잖아요? 아이들 되게 어려워합니다. 그 말 한마디를 가서 전하는 것도 되게 쑥스러워하고 못하는 것을 이제 보게 되는데요. 그 밤에 타작마당에 가서, 혼자서 가서 이렇게 구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하는 내용도 이게 청혼입니다. 결혼을 해달라는 내용이죠. '아니요;라는 거절을 받았을 때 이게 굉장히 어려운 요청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부탁이 있지만 청혼만큼 어려운 부탁이 있겠습니까? 거절됐을 때 제일 뒷감당이 안 되는 게 바로 이겁니다. 저는 가끔 이제 모임 안에서 이제 형제 자매님을 이렇게 소개시켜드릴 때가 있는데 그게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이 '아니요'라고 말했을 때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거 누구한테 먼저 말을 해야 될까가 되게 중요합니다. 이분한테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야 되나? 이분한테 먼저, 형제한테 먼저 해야 되나, 자매한테 먼저 해야 되나, 그러면 이제 아니오라는 게 됐을 때 가장 타격이 없을 순서로 이제 말을 하는 거죠. 이렇게 굉장히 어려운 요청을 하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제 기도도 이제 그런 부분들이 있는 것인데요. 그래서 나오미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몇 가지 말을 해 줍니다. 보아스에 대해서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해주냐면, 2절에 보면은 "너와 함께하던 시녀를 둔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그냥 보아스한테 가라고 해도 되는데, 너와 함께하던 시녀를 둔 보아스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이제 그에 대해서 또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제 우리의 친족이고 네가 함께 지내던 시녀들과 잘 지내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생각이 됩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가 이제 기도하러 나아가는 그 자리죠. 그리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도록 그 앞에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나아가도록 격려하면서 이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친족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다 체휼하신 분이다.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제 잘 아시지만 히브리서 말씀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그리고 또 2장 말씀도 한 군데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여기서도 우리가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도록, 그 주님께 나아가서 간구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점에서 간구를 하고 있냐면, 첫 번째 그분은 우리와 같이 혈육을 입으신 분이다.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신 분이다. 형제들과 같이 되신 분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친족이라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들의 친족이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친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다 경험하신 분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과 같은 그런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보아스라고 나오미는 특별히 언급을 해 줍니다. 보아스가 그런 사람들하고 멀리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저 높은 곳에서 따로 지냈던 사람이 아니라, 보아스는 그 일꾼들한테 찾아오고, 그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에게 복을 빌고, 그들과 함께 또 일하고 같이 있었던, 그런 시녀들을 거느린 그런 보아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 가운데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신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이미 2장에서 보아스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된 사람인지, 그 말씀의 사람인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의 형편을 잘 알고 있고 나오미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이제 그런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도 이 주님께 참 계속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를 맛보았으므로, 더 신뢰하는 가운데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제 룻기 3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룻은 어떤 것을 구하냐면,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업, 그 땅을 다시 회복해 달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나오미와 룻은 가난하게 돼서 그것을 다 팔아버린 상태입니다. 원래 그 집에 상속받아서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땅인데 그들이 어려움이 생기자 그것을 다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사서 올 힘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 집에 남자들은 다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있으면 그 기업은 그 가문에서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것입니다. 그 땅은 다른 사람에게 팔려 있는 상태고, 그리고 그 땅을 회복할 또 이을 후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오미와 룻 과부들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땅도 없고 후사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계속 보존하고 다음 세대로 이을 힘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보아스가 자신과 결혼해서 그 기업을 계속 이어주도록, 그 기업을 다시 사 오고, 그리고 그 기업을 계속해서 보존시킬 후사를 낳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청혼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보아스는 이것에 완전히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11절에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그것은 보아스의 뜻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한 요청을 받았을 때 보아스는 충격을 받고 "이게 무슨 소리야? 좀 생각을 해봅시다." 이제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 중에 어느 누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저와 결혼해 주시고 이 기업을 잇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즉석에서 바로 "그렇게 해주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미리 생각하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라고 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그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100% 그것을 자기의 뜻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그것을 구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보아스가 원하고 있는 것을 나도 원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요청이라기보다는 룻의 헌신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미 원하고 있는 것을 룻이 자원에서 "저도 그것을 원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우리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보아스의 뜻과 룻에 구하는 것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인격과 룻의 인격이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면 11절에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와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현숙하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2장 1절에 보아스에 대해서 "유력한 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유력하다'는 말과 이 '현숙하다'라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보아스에게 있어서는 유력하다라고 되어 있고 룻에 있어서는 현숙하다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그대로 분별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구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일한 것을 이제 구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냥 엉뚱하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상관없는 엉뚱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주님의 성품과 엉뚱한 전혀 정반대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 구원받은 생명의 모습이고 이제 우리의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것, 이제 그것을 이제 분별하고 그것을 이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대해서 앞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것은 이제 헌신이라고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특별히 보아스는 룻이 이제 이렇게 요청을 하자 룻을 이제 칭찬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원하는, 그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고, 왜냐하면 룻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기업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이 계속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빈부를 무론하고" 룻이 구한 것은 물질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연소한 자를 쫓지 아니하고" 룻이 구한 것은 육신적인 정욕을 따라 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것은 룻이 인애를 베푼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해 줍니다. 룻은 처음에도 인애를 베풀었고 나중에도 인해를 베풀었는데, 그 나중 인애가 처음보다 더 크다 이렇게 말합니다. 룻이 어떤 것이 처음 베푼 인애입니까? 그것은 나오미를 따라서 모압에서 떠나 나온 것입니다. 그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해서 같이 나오미를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스는 처음 인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나중 인애입니까? 그것은 다른 물질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정욕대로 구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하나님의 것이 계속적으로 보존되길 원하는 마음에서 보아스에게 나아와 보아스에게 결혼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 인애인 것입니다. 정말 룻은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에게도 그랬고 보아스에게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아스는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루이 구하고 있는 것이 요청이고, 이 기도이고, 이제 결혼해 달라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룻이 자신을 헌신해서 하나님의 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 이것에 대해서 세상은 오해합니다. 세상은 항상 이제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이제 오해하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평가 절하합니다. "아니, 너희가 결국에는 너희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너희가 원하는 것을 받는 거 아니냐?" 이렇게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고자 한다면 이제 그런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기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냥 종교적인, 다른 사람들이 이제 종교적인 100일 기도 드리는 것처럼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룻기 3장에 이 뒷부분에 보면 이제 이것에 대해서 이제 조심히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이라" 해서 이제 그들의 간증을 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조심하는 모습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이제 그들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그거 룻이 그냥 밤에 보아스를 찾아가서 보아스를 그렇게 미혹시킨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이제 조심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보아스는 전혀 미혹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과 결혼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확인한 것은 룻이 자기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룻에게 있어서 희생이었지만, 그건 룻이 베푸는 인애였지만, 룻이 그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희생을 주님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하는, 그것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시고 우리가 그 자리로 나오기까지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도의 이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이제 보아스가 15절에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그리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이어줍니다. 이제 보아스가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룻과 나오미에게 필요한 그 곡식을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2장에서도 이제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곡식을 풍성하게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래 이제 과부와 이방인들은 이삭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곡식 단에서 곡식을 빼서 막 던져줍니다. 2장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받을 그것 이상을 주는 그 은혜를 말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이상의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게 이제 룻기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약간 이제 각도가 다릅니다. 항상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지만, 또한 제 3장의 이 전체적인 흐름이 이제 우리가 받는 측면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룻이 펴서 잡은 그 겉옷의 크기만큼 그가 이제 받게 됩니다. 거기에 이제 여섯번 되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특별히 이제 단위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앞에서는 그 곡식을 받은 것을 다 되어보니까 "보리가 한 에바쯤 되더라" 한 에바라고 이게 단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에바라고 그 단위가 나와 있지 않고 이제 여섯 번 되어 주었다.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서의 단위는 그 겉옷의 크기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런 부분들이 몇 번 나옵니다. 이제 엘리사 시대 때 어떤 과부가 이제 기름병을 가지고 온 만큼 그 기름병에 기름이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로서 나아올 때에 그만큼 우리는 그 주님의 어떠하심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교제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더욱 거하면 할수록, 주님과 말씀과 기도로 더욱 그분 안에 거하면 거할수록, 그분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나의 기쁨을 너희가 풍성히 누리도록" 말씀하셨다고 돼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 여기서 그 보리로 상징되는 그 주님의 기쁨, 그것은 이제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면 누릴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때 룻은 뭘 또 누리게 되냐면, 보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에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룻은 보아스가 내 형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 나오미, 이 룻이 형편이 어렵고, 지금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필요한 것을 알고 빈손으로는 가지 말라라고 말을 합니다. 특별히 이 빈손이라는 단어는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왔을 때 "아, 내가 지금 빈손으로 돌아왔다."라고 말한 그 단어입니다. 그 나오미에게 보아스는 그 상황을 잘 알고 빈손으로는 가지 말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무엇을 느낍니까? 주님께서 내 형편을 잘 알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보다도 더 알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구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왜 하나님은 이 상황 가운데서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모르시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로 나온 사람은 즉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은 내 상황을 관심을 가지고 잘 알고 계시는구나, 그분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구나를 즉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누리는 이제 기도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 3장의 내용이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여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때로 그 마음이 낙심돼서 이제 기도하지 못하고, 말씀 읽지 못하고, 이제 그렇게 무거운 마음 가운데서 지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참 이럴 때 나오미가 옆에서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아스는 참으로 우리와 가깝게 우리의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냐?" 이제 이러한 말을 또 우리 동료 성도들이 피차 해 주는 것입니다. 또 모임 집회 가운데서 그런 말씀들이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하시는 대제사장인 것을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러한 일이 이 모임 가운데 계속해서 있기를 바랍니다. 참 이런 기도가 계속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깊은 교제를 통해서 참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한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또한 그러한 교제 가운데서 더욱 풍성한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