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9장 : 주님을 만나 사도바울이 깨닫게 된 것과 그를 직접 교육하시는 주님 > 23년 3월 5일 일요일 / 한봉래 형제님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6-17).
계속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구원은 특별히 저희들에게 본이 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만 이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저희들도 이렇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러번 "나를 본 받는자 되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 이후의 삶을 포함하겠습니다만, 그래서 사도바울의 구원,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렇게 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살펴 보려고 하는데요.
우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전파되고 있었는데요. 특별히 다메섹 지역에까지 예수님을 믿는 복음이 들어가고 거기 교회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다가 다메섹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필요하면 죽일 수도 있고, 형벌을 가하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해보다 밝은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구원은 이렇게 되어 있죠. "주여" 이렇게 부르죠. 사도바울은 이분이 하나님인 것을 딱 압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가 질문합니다. 그랬을 때, 그분이 예수다. 이렇게 하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해서 우선 세 가지를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훗날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보면 이렇게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랐던 겁니다. 다시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다. 유일한 한분 하나님이 계신다. 이게 유일신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이 한분만 계신다라고 하는 종교는 종교 중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교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종교가 진화해서 처음에는 한 하나님이었다가 나중에는 여러 신들이 나온게 아니고, 또 여러 신들이 있다가 한 하나님이라는 종교가 나온게 아니고 모든 종교 중에서 한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믿는 계시 종교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됵고 세개 뿐입니다. 전부 성경에 근거한 이 세 종교만,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한분이다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뭘 배우냐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여기서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했을 때, 이 '주'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 '여호와'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 여호와라는 신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한 분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금 어렵습니다만, 하나님이 세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 아들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세 분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입니다. 한 분인데 세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을 그가 배웁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까지 하나님 한 분만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왜 다메섹에 갔느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 뭐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그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간 거죠.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고 나중에 나오겠습니다만,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이 세 분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교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고,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순종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이 아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사이의 이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세 분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신뢰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관계로, 이 세분 하나님 사이에만 있는 이 관계, 이 놀라운 신뢰 관계로 우리 믿는 자들을 초청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게 교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삼위일체구나를 압니다. 두 번째, 그는 이제까지 율법을 계속 지켰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그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베냐민 지파입니다.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킵니다. 심지어는 8일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자기가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부모님부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웁니다. 예루살레에 젊었을 때 가서 율법을 배우고 그는 순종합니다. 그는 이렇게 느낍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내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나만큼 율법을 잘지킨 사람도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깨닳은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훼방자요" 하나님을 모독한자요. 그 다음에 "핍박자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을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자요. 그 다음에 또 하나입니다. "폭행자다" 사람들을 죽이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아주 폭력적인 죄인이다, 라고 하는 것을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깨닫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는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보니까 자기가 엄청난 죄인이었던 것을 그가 깨닫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 배우고 죄에 대해서 새로 배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그는 이제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기가 유대교에 있으니까 이방인들 가운데, 이 참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종자들입니다. 개종한 사람들인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우리나라 개혁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전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데, 이방 사람인데 이방 종교에 질려서, 이방 종교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에게 돌아온 사람을 하나님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예를 들면 루디아, 이런 여자들이 다 거기에 속합니다. 고넬료, 그렇게 전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이스라엘화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에게 와서 하나님을 배우고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고 이렇게 이스라엘화 되어야만 이방인들은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마가복음 10장 45절인데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런 구절이 있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왜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럽고 사람은 죄인이므로,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께 가야 된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아쉬운 죄인이 하나님께 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대였습니다. 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죄인을 지옥에 던져도 아무 상관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 영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게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까지는 이방인들, 자기들이 와야지. 당연히 복음이 있는, 구원이 있는 이곳으로 와야지. 하는 생각을 바꾸고 그가 땅 끝까지, 이방 땅까지 가서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게 그를 바꿉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세가지를 압니다. 나는 이제까지 하나님이 한분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교제하시는 분이 계신다. 태초부터 영원토록 아버지 하나님과 같이 계시던 분이 계셨다. 창세기 1장에 그렇게 나오죠.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처음부터 창조할 때부터 성령님께서 함께 계셨구나. 이걸 압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하나님들 사이에 가지고 있는 놀라운 교제, 신뢰와 순종과 이런 교제를 이제 하나님과 나누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자기가 율법으로는,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의 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전하고 다닙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은혜로만 받는다.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게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구원받은 자가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것을 배웁니다. 자기가 구원받았으면 이제 구원받은 증거는 뭐냐?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기 위해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먼 길을 오셨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복음을 들고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 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기꺼이 고난 받으며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생애를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생애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므로 사도바울이 변화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므로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성도들 안에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신뢰와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성도들 간에 참된 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구원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지만, 성장은 점진적이지만 구원은 순간적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적인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나서 점진적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먼저된 자가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이 주관합니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먼저 안 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가겠습니다. 사실은 이제 사도바울이 구원받을 때에 두가지 일을 하죠. "주님 누구십니까?" 두 번째 질문이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무엇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뭘 하느냐? 두 가지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아라비아로 갑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은 것을 보겠습니다. 그가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가 뭘 해야 할까요? 그리고 더군다나 사도바울은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뭘 해야 할까요? 그때 그가 안 한게 이거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열 두 사도가 있습니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이렇게 열 두 명의 사도들을 두셨습니다. 열 두 사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생애를 잘 보았고 주님 십자가도 경험했고 주님의 부활도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명령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영광스러운 사람들 입니다. 얼마냐 영광스럽냐면 저희들이 천국에 가면 새 예루살렘성이 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에 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주님이 이렇게 사도로 거두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도입니다. 안만납니다. 왜요?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또 교회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특별히 예배, 떡과 잔을 놓고 나를 기념하라. 그거 다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을 열 두 사도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 하늘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은 전부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제부터 주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열 두 사도를 뽑으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하늘에 가셔서 한명의 사도를 또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도는 서로 만난 적도 없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도들이 똑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사도들이 똑같은 예배를 드리게 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압니다. 이 복음은 사람들이 만든 복음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해 낸 복음이 아니다. 떡과 잔을 놓고 주님을 기억하는 예배는 열 두 사도들이 주님 가신 뒤에 이렇게 하면 주님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고 자기들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첫 번째로 하는 것, 혈육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베드로에게 연락을 한번 해보고, 혹은 사도바울도 아마 가족이 있었겠지요. 가족들에게 "나 사실 이번에 주님 사도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길을 가야한다." 혈육하고 이야기 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거나, 사람에게서 지지를 받거나,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첫 번째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직접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에게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무엇을 할까요?" "내가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 네가 이스라엘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앞에서 나를 증거해야 된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너는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적용을 하면요.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구원 받았다고 간증을 하죠. 그러면 이제 교회에서 간증을 들어봅니다. 그러면 혹시 교회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 안같은데요." 그러면 섭섭하거나 해서 교회에 안나옵니다. 구원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거 아닙니다. 사람에게 제시하고 똑같은 구원을 받은 사람의 공감과 교제의 악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군요." 이렇게 하는거지, 거기서 인정 받아서, 교회가 인정했으니까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잘못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8장에 있는 박수 시몬입니다. 사마리아 교회가 잘못 분별한 거죠. 베드로가 와서 "너는 악독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는거죠. 그래서 구원간증 하고, 그 다음에 또 주님 앞에서 어떤 부르심이 있거나, 말씀이 있거나 할 때에 교회와 교제하죠. 교제하는 겁니다. 승인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사 누군가가 그거에 대해서 조금 비판의 소리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거나 안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를 통해서 받은 것도 있고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있지만, 기본적인 흐름은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보면 이런 대목이 있는데요. 성경을 하나만 찾아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 1:22-24).
여기 보면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을 받고, 원래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게 말인되냐? 하나님은 한 분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또 하나님이 되냐?" 이렇게 하던 사람이, 그 다음에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거지, 어떻게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은혜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구원 받으면 세상의 도덕이 타락한다. 사람들이 막 함부로 죄 짓고 부도덕한 사회가 된다. 안된다."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돌아서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전하고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은혜로만 받는거다." 이렇게 전하니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냐? 이들은 사도바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뭐냐, 그러면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놀랍게 구원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설마 사도바울이 구원받으려고..."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가서 사도바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해라. 그리고 그가 지금 기도하고 있으니까, 그에게 내 뜻을 알려라, 이렇게 했을 때 아나니아가 뭐라고 했지요? "주님 저 사람은 우리 잡으려고 온 사람인데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구원받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받아서, 그럼 그 구원은 어떻게 된거죠? 순전히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전한 복음을 보면 유대에 있는 교회가 보니까, 그 교회 성도들이 자기들은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그 복음을 들은거죠.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교회로 모여서 놀라우신 예수님을, 그분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죠.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교회로 모여서 그렇게 하고 있었죠. 그런데 조금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이와 동일한 복음을 듣고 동일한 구원을 받고 증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죠.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한 동일한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구원하셨구나, 라고 하는것이 분명해진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첫 번째로 한 것입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는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한 거죠.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두 번째로 한 것은 아라비아로 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구원받고 다메섹 모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모임에 들어가자마자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다. 라고 전합니다. 즉시 전합니다. 왜 즉시 전했을까요? 사람의 확인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나려고 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서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만나본 적이 없느니까, 예수님 침례받을 때는 어땠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어땠고, 가서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직접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그리고 이제 떡과 잔을 말합니다. 이 주께 받은 것은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이 주님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같이 유월절 잡수시고 그 다음에 만찬 의식 들어갔죠. 그리고 주님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셨죠. 그때 사도바울은 믿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과 잔을 가지고 이것은 내 몸이니" 베드로에게 배운 것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전해 들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계시하신 것입니다. 지상에 계실 때 육체를 가지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그 주님이 지금은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을 가지고 사도바울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개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한 것이 뭐냐면 아라비아로 갑니다. 성경에 보면 약 3년간 거기 있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만나게 된 것은 3년 후에 갑니다. 3 년 후에 예루살렘에 가고요. 그리고 두번째,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두 번째 올라갑니다. 3년 후에 올라갔는데 그때는 베드로와 악수하기 위해서 간 겁니다. 며칠간 머물렀냐? 2주 머무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와 야고보, 두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2주를 머무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냐면 "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입니다. 이 2주 동안 어떻게 주님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14년 후에 올라갑니다. 그때는 디도를 데리고 가죠. 디도는 이방인입니다. 할례받지 않고 데려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할례를 요구하는지,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시험을 하기 위해서 디도를 데리고 갑니다. 디모데는 할례를 줬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복음과 진리가 분명한 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도를 알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아라비아로 갑니다. 아라비아로 간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오고, 그 다음에 다메섹에서 죽이려고 하니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코스가 되는데요. 그러면 아라비아로 왜 갔느냐? 첫 번째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의 승인 없이 그가 아라비아에서 사도로 행동합니다. 사도로써 기능합니다.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저희들이 배우려고 하는 것은 그가 아라비아에서 3년을 머무는데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보통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름을 받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어떻게 택했느냐? 모세는 태어나면 죽는 시점에 태어납니다. 그때 바로왕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나일강에 던져라, 라고 하는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무보들이 어떡합니까? 할수 없이 그를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넣지요. 모세를 누가 기르느냐? 바로의 딸이 기릅니다. 뭘 말하는거죠? 이 시대는 바로가 통치하지 않는다, 입니다. 하나님인 내가 통치한다. 태어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시기에 모세를 태어나게 하시고 모세를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합니다. 바로가 아니고 바로 배후에 내가 있다. 그 다음에 모세가 40세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이 나서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애굽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는 도망갑니다. 그리고 40년을 다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칩니다. 이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훈련을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받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입니다. 그 왕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나요? 일찍부터 왕으로 낙점 받아서 세자가 되서, 그 다음에 왕궁에서 자라는게 아닙니다. 그가 사무엘에 의해서 어릴 적에 기름음을 받습니다. 그는 왕입니다. 그런데 게속해서 양을 칩니다. 그리고 사울왕이 죽고나서 그가 비로서 왕이 됩니다. 왕도 처음에는 유다지파의 왕이되고 그 다음에 온 지파의 왕이 되는데 또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셔도 실제로 그가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 가운데, 이 인생들 가운데, 이 복잡한 이 죄악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3년간 아라비아에서 훈련받습니다. 그가 왜 율법을 지키면서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서 메시아를 몰라 봤는가? 왜 그는 예수님을 오해했는가? 그는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약 성경에 이미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있는데, 왜 그것을 놓쳤는가? 그것을 3년간 배웁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뭘 했나?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승인을 받는게 아니다. 두번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이 만든 곳에서 배울 필요가 없다,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라비아에서 훈련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부름받은 우리가 실제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디서 훈련 받느냐? 하나님이 머리가 되신, 주님이 주가 되신 지역모임에서 훈련받는다. 이게 저희들이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혈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요. 혈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곳을 네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먼저는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 피조물이 창조주의 가족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거죠. 이게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속한 자 중에 하나가 된다는 거죠.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습니다. 이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특권이죠.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이 혈자 따고요, 육정의 육자 땁니다. 혈육으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거듭나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혈육으로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은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자녀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자녀의 구원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지지해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가 분명해야지, 내 자녀니까 구원받았겠지. 구원받도록 말하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이게 첫번째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혈육이 들어간 곳은 마태복음 16장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시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교회에 관해서, 교회 진리를 깨닫고, 교회에서 섬기고, 교회의 원칙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혈육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와..."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영적인 싸움을 싸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복음을 전합니다. 또 연약한 성도를 성숙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성장 시키는 일을 합니다. 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합니다. 이런 것을 할 때에 늘 방해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늘 말한 대로 하나님이 일하시면 사단도 일합니다. 사단도 교묘하게, 겉으로는 굉장히 좋은 논리를 가지고 영적인 일을 방해합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해서 나옵니다. 그때 이걸 깨닫고, 마치 사단이, 제가 덕언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를 메시아의 발은 땅에 닿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입증해 보시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그 말대로 행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입증될 게 아닙니까?" 할 때, 주님이 금방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 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논리나 이해로 이것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심령 속에 참된 정체를, 그것이 참으로 영적인 것인지를 알게 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 하나님 나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부활장인데요.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육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해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혈육에 관해서 네 가지를 말합니다. 구원, 교회, 영적인 싸움, 하나님의 나라, 네 가지가 혈육과 무관하다. 혈육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네가지 영역에서 사람에게 속한 지혜, 인간적인 생각, 세상적인 방식을 배제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져야 할 것을 추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희들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다, 이렇게 하는데요. 왜 예배가 가장 중요하냐면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삼위의 하나님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영광 중에 계시던 분인데, 그 보좌를 떠나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다면 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분이 아니고, 한분이시지만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관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관계를 누리고 이루어 내도록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에 사도바울이 변화됩니다. 우리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래야 된다. 이게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에 변화됩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느니라" 그래서 저희들이 예배를 중시하는 것은, 예배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말하냐면 주님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예배드려야 되니까, 저희들이 성경에서 주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준비는 전부 주님이 누구냐를 잘 보고 예배 시간에 주님 당신은 이러한 분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는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딱 생각을 해 봅니다.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일거야.'라고 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에서 계시된 주님을 찾아내서 그 주님을 말합니다. 이 말하는 예배시간이 왜 중요하냐면 이렇게 주님을 말할 때에, 주님이 그런 분이라고 고백하고 높이고 찬양할 때 우리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것이고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저부터 그렇게 해야 되는데요. 조지뮐러 형제님이 하신 건데요. 조지뮐러 형제님이 QT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는 어떻게 QT하는가를 말합니다. 성경을 쭉 읽으면서, 성경읽기 표가 있잖아요. 쭉 따라서 읽죠. 그런데 이 본문이 딱 나오면 그 형제님이 제일 먼저 한 것, 이 본문 중에,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말하고 있는가? 이것을 본문에서 찾아냅니다.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것, 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입니다. 이 본문은 사람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뭘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성경을 읽는 원칙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약속이 있는가? 네 번째, 내가 피해야될 죄가 있는가? 이게 그가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원칙입니다. 늘 이것을 본 것입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보면서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나오면 그것은 내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 나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럴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셨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뭐냐면 감탄입니다. 놀라움입니다. 책을 제가 자세히는 읽지 않았습니다만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 중에 제목이 그런게 있더라고요. '기이하신 구주' 주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분인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분인가? 이게 스위트넘 형제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게 항상 우리의 주제가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율법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율법의 핵심적인 것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문제점이 뭐냐하면 명령은 했는데, 그 명령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안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맹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은 어마어마한 수준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일 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계명,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쭉 가죠. 그래서 여기까지는 행위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자기는 사람 안 죽였으니까 자기는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주님이 와서 말씀하십니다. 미워만해도 살인한 것이다. 이렇게 가죠. 주님이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지말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살인의 근거가 되는, 근원이 되는, 살인은 미움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를 미워하고 그 미움들이 쌓이고 쌓여서 살인까지 가게 된다. 그래서 살인이라는 결과물을 없앨게 아니고 미움이라고 하는 원인을 없애야 된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쭉 할 때, 마지막 계명이 뭐냐면 "탐내지 말라"입니다. 마지막 계명은 뭐냐면 마음을 건드립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탐내지 말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우상일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을 원하는게 탐심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마지막 계명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로마서 7장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더라면 전부 행위만 말했을 것으로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지막 계명을 주십니다. 마음을 건드리십니다. "탐내지 말라"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뭐가 우리를 변화시키죠? 사람들이 그토록 염려하는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정말로 은혜 받은 사람은 변화됩니다. 가짜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남용합니다. 죄를 짓고도 "뭐 다 이 천 년 전에 예수님이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해졌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죄를 미워합니다. 죄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주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죄 떄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만, 머리로만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짓고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를 지었지만 이거 용서된거지.'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짓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든 그 죄를 지었구나. 주님은 이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죽인 이 죄를 지었구나. 이를 어찌할까?' 이것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뭐냐?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내가 저주받아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나는 저주를 기꺼이 받겠다." 이게 로마서 9장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하는거죠. 그런데 하여간 사도바울의 마음이 변화됩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그렇게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 그를 변화시킨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우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해라고 하지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요.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에 그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이 표현은 미묘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표현하면 간단하거든요.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실 때에' 그러면 이해가 쉽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들은 내 안에 타나내실 때에"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눈으로 보고 외적인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내 안에 나타내십니다. 내 안에서, 내 삶에서, 내 인격에서, 그분이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들이 교리적으로 잘 아는 거죠. 구원받으면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영원토록,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경험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우리에게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이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후에 압니다. 자기의 구원이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음을, 그리고 이제 자기의 영원한 미래, 그리스도를 닮고, 변화된 몸으로 영원토록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자기의 미래를 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들이 보통 그렇게 말하는데요.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역을 합니다. 그가 천국 열쇠를 가집니다. 그래서 천국을 엽니다. 그가 사도행전 2장에서 이 열쇠를 사용해서 유대인들을 천국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국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를 천국에 넣습니다. 이게 천국 열쇠는 쓰는 단어인데요. 사도바울은 교회가 그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하나님이 다섯 번 계시하십니다. 직접 나타나셔서, 다메섹 도상 말고, 다섯 번 직접 계시하십니다. 그 계시 내용이 성경이 나와 있는데요. 언제 계시하셨다. 전부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시고, 다시 로마가 파괴해 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더이상 율법대로 제사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쳐짐으로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은혜가 넘어왔고, 그리고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면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회복되고,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에 축복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회복은 세상에 어떠한 축복이 되겠는가? 라고 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배드리고 찬양드리는 내용의 절정입니다.
저희들도 은혜로 구원받고 그리고 교회에 더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찬양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 전에 예비되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루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경륜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구원받는 장면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세가지를 압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율법을 그토록 잘지킨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영광의 하나님이 이땅에 선교하러 오셨다는 것, 이 세가지를 알고 그가 변화됩니다. 그리고 변화된 그는 두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는다. 이 영역은 혈육이 들어오면 안된다,라고 하는 영역을 그는 갖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라비아에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습니다. 삼 년간입니다. 거기서 그가 배웁니다. 예배에 대해서, 주님의 지상 생애에 대해서, 주님의 뜻에 대해서 거기서 다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배운 후에 그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세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이 천 년 전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구유에 누이신 이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세상을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살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앞에 감사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보내시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구원과 교회와 영적인 것에 대해서 혈육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고 지역모임에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이 지역모임의 구체적인 이 모임 생활을 통해서 이 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인간 관계, 여러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인격이 다듬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곧 오실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를, 사도바울을 변화시키시고 구원하시고 임무를 주셨듯이, 동일하게 저희들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저희들이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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