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사도행전

< 사도행전 6,7장_스데반과 당국자들 >

박이레 2021. 7. 25. 22:01

2018년 2월 10일 토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사도행전 6,7장_스데반과 당국자들 >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11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6:10-15, 개역한글)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행7:2-6, 개역한글)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행7:9-10, 개역한글)

25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행7:25-27, 개역한글)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행7:35-41, 개역한글)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47-60, 개역한글)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은 우선 고소를 당합니다. 그 죄목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행6:11, 개역한글)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행6:13, 개역한글)

그들의 고소는 두가지입니다. 곧, 모세를 모독한것은 율법을 거스른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것은 이 거룩한 곳(성전)을 거스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복음으로 전했던것 같습니다. 이를 듣고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에 율법을 모독했다고 생각하고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곳'은 성전입니다. 성전은 제사장을 통해 유대인들이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있는 곳입니다.
스데반은 이 성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는 완전한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할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를 스데반이 부정함으로,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모독했다고 여기고 고소했습니다.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이 나사렛 예수'의  '이'는 우리 주님을 낫춰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때에 성전을 보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헤롯이 40년간 지은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되신 자신의 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주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두었습니다. 곧 산상수훈, 감란산에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이 건물이 보이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이 헤롯 성전은 당시의 최고의 건축기술로 지어진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서언의 웅장함을 보고 그렇게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성전을 향해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느때에 그러한 일이 있겠느냐고 물었고, 주님께서는 주님의 지상재림의 때를 이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것이 성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파괴되어 버리면 그들은 짐승을 데리고 갈곳이 없게 됩니다. 그들이 제사드릴 곳이 없어지고 죄용서를 받을곳이 없게 됩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성전에서 드려졌던 예배가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1. 성전을 모독하고 2. 율법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고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에 대해 변명해야 합니다. 저희들도 베드로후서에서 이러한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말을 온유함으로 준비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 이후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주님을 보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산 소망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기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한 소망을 갖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다서에 보면 <믿음의 길을 담대하 싸워야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3절)

세상 사람들 중에는 정말 궁금에서 묻는사람이 있고 악한 의도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할것을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대답은 사도행전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1장 8절 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개역한글)

먼저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죽고난 후에 사마리아로 복음이 넘어가고 또 이방인, 땅끝까지 복음이 넘어가는것도 스데반의 죽음이 원인이 됩니다.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11:19-20, 개역한글)

안디옥이 이방인 교회에 세워진 최초의 지역교회입니다. 이 안디옥 모임에서 사도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곧,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고소를 당했을 때 그에 대해서 대답해야 합니다. 잘못 대답하면 그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자기가 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옹호합니다.
저희들이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저희들이 갈등이 많은 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받을때에 "내가 옳다" "우리가 옳다" 라고 할것이 아니라 복음을 옹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대답은 성경을 근거로 들어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4-55, 개역한글)

여기 스데반을 죽이려는 자들과 스데반의 차이가 나옵니다.
한쪽은 이를 갈고 한쪽은 성령이 충만합니다.

이를 간다는 단어를 우리가 다른 성경에서도 본 일이 있습니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를 간다는것은 분노하고 자기의 당한것에 받아들이지 않는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사람은 지옥에서 이를 갈것이고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리고 여기 또 극단적인 대조가 나옵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행7:58, 개역한글)

유대인들의 사형은 돌로 치는 것입니다. 돌로 칠때, 옷을 벗는 이유는 그 돌을 치는 것에 힘을 가히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미움입니다. 그들이 상대방에 대해서 얼마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반대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60, 개역한글)

그들이 틀렸지만, 스데반에게는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대조를 보겠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7:57, 개역한글)

그들은 눈과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소경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7:56, 개역한글)

그러나 스데반은 영적인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차이가 스데반은 죽고 그들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할수 있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누가 죽고 누가 살았습니까? 육적으로는 스데반이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스데반이 살고 그들은 죽은자들입니다.

설사 육체는 죽는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이 어디 계신가를 보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고 성령으로 충만할수 있는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어떻게 이 논리에 대해서 대답하는지 보겠습니다.
그는 말씀으로만 대답합니다.

스데반이 고소받는 내용은 율법에 대한 모독과 성전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선 모세, 율법을 보겠습니다.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쌔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21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23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행7:18-23, 개역한글)

모세의 생애를 크게 세개로 나누면 40세까지 애굽 왕국, 80세까지는 미디안 광야, 120세까지는 출애굽 광야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행7:37, 개역한글)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이는 모세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모세와같은 선지자가 곧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있는것이라고 스데반은 말합니다.

모세와같은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십세에 자기 백성을 돌아볼 생각이 난 것' 입니다.
그는 편하게 왕국에 있는데 노예인 이스라엘을 돌볼 생각이 난것입니다.
곧 우리주님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이신데,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행7:27, 개역한글)

그러나 모세는 거부당합니다. 우리 주님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스라엘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또 26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때에 모세는 화목시키려 했습니다.

모세의 제안은 두가지입니다. 1.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겠다. 2. 이스라엘을 화목하게 하겠다.
우리 주님의 말씀도 똑같이 두가지 입니다. 1. 이세상의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2.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29절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우리 주님도 거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80세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 초림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부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였지만, 미디안으로 갔고 이방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이방인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번 거절받으셨지만 다시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말하고 있는 <나와 같은 선지자> 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특징을 가진, 모세가 그림자이고 우리 주님이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 당신들은 이에 순종하지 않지만 나는 순종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7:38, 개역한글)

두번째, 모세가 율법을 주었습니다.

여기 <광야 교회>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불러내 모으신 무리' 입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행7:39-40, 개역한글)

이로 인해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 오다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것을 보고 돌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스데반이 이것을 인용하는것은 '율법은 시행하기도 전에 깨어졌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기도 전에 그것을 어겼으며 이것을 바벨론 포로 되기까지 지키지 못합니다. 곧 이스라엘 역사 내내 지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율법을 지켜본적이 없습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7:43, 개역한글)

몰록은 자기 자식을 우상에게 바쳐야 하는 신입니다. 그야말로 아주 끔찍한 신입니다.
레판의 별은 앗수르의 신이며, 바벨론의 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대로 우상의 고향인 바벨론에 가서 마음껏 우상을 섬기고 살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율법과 관련하여서 스데반이 설명한 것입니다.

이제 '증거의 장막' 성막을 보겠습니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행7:44-45, 개역한글)

성막은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때에야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리고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서 스데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7:49, 개역한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만일 성전안에 어떠한 형상을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하고 섬긴다면 그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만든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도 봉헌식 때 기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여기 계시리이까. 단지 저희는 기도할 뿐입니다"

여기까기 하면, 스데반이 모세, 율법, 성전에 대한 모독 고소에 대해서 대답한 것입니다.
"나는 모세의 말에 순종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키지 않았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곧, 지역모임이 성전입니다.

여기까지 대답하면 끝이지만, 스데반은 그전에 아브라함과 요셉을 언급합니다. 왜 언급한 것일까요?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7:2, 개역한글)

아브라함의 때는 율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두가지가 없이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7:3, 개역한글)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행7:5,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오직 가족무덤만을 소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그가 살아있는 중에는 그 어떤 땅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불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것을 따르지 않고 손에 쥐어지는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숫자, 재정으로 결정되는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보이는 것을 측량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스데반의 이러한 사람들의 허구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행7:6-7,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살았을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의 후손은 외국에서 400년동안 종 살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햔한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과 공회의 사람들과 어떻게 대치가 되나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체제가 되고 주님이 빠져버리면 참된 신앙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와같은 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변해저린것이 교회 역사의 이야기 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행7:8, 개역한글)

할례는 남자아이들이 받는 포경수술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사도바울의 고백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흔적은 삶에서의 고난입니다. 그 몸에 흔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꾀를 내어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대로 했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수 없을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할례는 곧 이것을 의미 합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었다는 것을 할례가 뜻하는 것입니다.

성막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막의 식양, 청사진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하실때에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팔리우고 십자가에서 죽을것이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림으로 보여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또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할때에도 주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요나의 표적은 그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동안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속에 삼일동안 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고 그 식양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말씀이 있고 식양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식양을 보여줍니다. 곧 예루살렘 교회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완전히 주님의 모형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종으로 팔아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주님을 시기하여 죽여버렸습니다.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행7:9-16, 개역한글)

그리고 바로가 요셉을 온집의 총리로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그림자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훗날 메시아가 오셔서 이렇게 생애를 살것을 보여줍니다.

11절, 예수님을 죽여버린 유대인들은 영적인 기근속에 살것입니다.
13절, 그들이 두번 애굽에 갑니다. 그리고 두번째 갔을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주님이 처음오셨을때는 몰라봤지만 이스라엘이 두번째 주님이 오셨을때 메시아임을 알아볼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말씀과 식양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고소에 대해서 이와같이 설명합니다.

신앙과 교회는 영적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것은 성경에 모형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왜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꿰뚫고 어떻게 복음의 진리와 자기의 믿음을 지켰을까요?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6:3, 개역한글)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6:5-6, 개역한글)

첫번째, 스데반은 자기가 섬기고 있는 지역모임에서 칭찬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지역모임에서 먼저 인정되어야 합니다. 곧 사도의 가르침에 배우고 성경을 이해한 것입니다.

두번째, 모임 생활을 통해서 그의 인격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5절 <믿음과 은혜>  6절 <성령과 능력>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갑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둘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성경을 가까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시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자기 생애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제시한 것입니다.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그의 생애를 통해서 주님께서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안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기에 죽는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이 있기에 예루살렘에서 과부들을 공궤하는 은혜로운 일을 합니다. 이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능력>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낄때에는 죽음앞에 서 있을때입니다. 스데반이 지금 그러했습니다. 자지가 죽을수 있지만 그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렇게 담대히 말할수 있을까요? 이는 그 능력이 성령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 <항상 성령을 거스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을 거스리는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1. 성령을 근심시킬수 있습니다. 2. 성령을 소멸시킬수 있습니다. 3. 성령을 훼방(거스려)할수 있습니다. 4. 성령으로 충만할수 있습니다.

근심과 소멸과 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훼방하는것은 불신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것은 성도들이 죄를 범할때 입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지역모임이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역모임에게 은사를 주셔서 성도들을 감독하게 하시는데 불순종하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지역모임안에서 성령이 역사할수 없습니다.
세번째로 성령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물론 스데반이 말한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그에게 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읽었던 말씀에서 해야 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자세하고 핵심적인것들을 표현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첫번째로 지역모임에서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것이 그의 인격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믿음과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과 능력이 충만하고 그가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납니다.

얼굴에서 천사처럼 빛난사람은 구약에서는 모세가 그랬습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도 빛났습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그가 말씀으로 교제한 주님의 영광이요, 그가 역사가운데 깨닫고 있는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가 그의 얼굴에 드러난 것입니다.

주님은 얼굴이 빛난 이 두사람을 세워서 증거하신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구약을 인정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회원들에게 스데반을 통해서 신약의 복음임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거부한 이스라엘은 성전이 무너질 것입니다. AD70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꼐속해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죽임으로서 신약의 복음을 다시한번 거부합니다. 이제 복음은 이방인이게로 넘어갑니다.

한 두가지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거룩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그 조상들이 우상을 섬길 때 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에 제약되는 분이 아닙니다. 꼭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과 장소가 제약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곳 갈대아 우르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진통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합니까?

유대인들은 구약의 전통을 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으며, 곧 무너지게 될 성전을 붇들고 있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을찌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따라가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이 공회원들에게 담대하게 대답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싸우고,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하는 것은 성경대로 하고 우리를 정당화 하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여야 합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죽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넘기고 이방 땅으로 가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이어지게 합니다. 저희가 부족할찌라도 하나님앞에 서서 저희의 생애를 걸고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제시할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