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사도행전

사도행전 11장 :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

박이레 2024. 3. 28. 22:21

< 사도행전 11장 :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사도행전 말씀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부터 8장, 사마리아로 복음이 전해지고, 그다음에 9장 사도 바울의 구원, 그리고 이제 고넬료의 구원까지 이렇게 다루어 왔습니다.
이 시간에는 11장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19-3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19-20).

아멘.
안디옥교회에 대해서는 제가 아마 한 번 교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교회의 특징 첫 번째, 성경이 기록한 최초의 이방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고, 그다음에 이제 안디옥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더 우월하거나 이방인이 유대인식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아 동일하게 지체가 되는 이 교회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특징이 이 안디옥 교회가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을 파송합니다. 그래서 이제 처음에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하고, 2차 전도여행을 하고, 3차 전쟁을 했을 때, 그 파송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 지역에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는 데 기여했던, 하나님이 사용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안디옥 교회를 사용하셨을까?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특별히 또 여기서 특징이 이곳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칭호가 사용됩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칭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이제 저희들이 오늘날 믿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어식 말하자면 크리스찬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 이 단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당시에는 어떻게 불렸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세 번 사용됩니다. 그래서 세 번의 용례를 따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보시면, 이제 사도행전 11장 다시 보시겠습니다. 11장 19절에 보시면 이 안디옥 교회를 누가 세웠는가라고 했을 때, 거기 보면 흩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언제 흩어진 자들이냐 그러면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자들입니다. 스데반이 이제 핍박을 받았죠.
그래서 이제 사람,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냐?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에게 묻지 마옵소서, 그리고 "주 예수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스데반의 경우에 성경이 어떤 점을 강조하냐면 그의 인격입니다. 그가 뭘 잘했다, 이런 것보다도 그의 인격과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닮은,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이 일로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지 않기를 기도한, 놀라운 거죠.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 그리고 죽을 때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한다라고 하는 이 기도를 했던, 그래서 보통 이렇게 되죠. 자기의 삶을 의탁한 사람이 죽음을 의탁합니다. 실제 자기의 삶에서 늘 이 문제는 주님께 맡깁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게 좋지만, 그러나 주님이 더 잘 아심으로, 또 주님이 선하심으로,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 문제를 주님께 살아서 맡겼던 사람이 죽을 때 자기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스데반이 이제 그런 사람이고요.
다시 잠깐 성경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를 이룹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가보겠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8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8:1).

사도 바울이 이 스데반 죽는데 거기 있었습니다. 여기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죠.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절) 여기서 장소가 나옵니다. 유대, 사마리아, 사도행전은 1장 8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큰 구조를 말하고 있는 대목이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다음이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게 이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그리고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사도행전이 기록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증거되는 사건, 그다음에 유대, 사마리아 땅 끝이죠. 그런데 이 유대, 사마리아로 복음이 증거되게 만든 것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11장에서 보고 있는 대로 땅끝의 시작, 이제 이제 이방 땅이죠. 여기서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이 시작이 되죠. 모든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데도 스데반의 순교가 기여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이제 원칙을 저희들이, 모임이 세워지기 위해서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스데반은 누구냐 그러면, 그의 인격을 성경이 강조합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 그다음에 두 번째 그가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이제 공회, 예루살렘 공회원들이 질문을 한 거죠. "너 어떻게 된 거냐?" 그랬을 때 그가 복음을 완화시키지 않고, 자기가 믿는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담대하게 증거하고 그리고 죽은 거죠. 그러면 이걸 저희들이 적용해 보면, 대전 중구 모임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죠. 이 모임에서 복음이 증거되고, 복음 기도하고 있는데요. 복음이 증거되고, 그다음에 복음이 증거되어서 영혼들이 구원받으면, 또다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게 되겠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게 뭐냐, 그러면 주님을 닮은 인격을 가진 성도가 희생할 때, 그 희생 위에서, 그래서 저희들이 보통 그러잖아요. 복음은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렇게 합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순교자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헌신적인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도 어느 지역 모임이나 세워지기 위해서는 주님의 인격으로 변화된 한 성도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할 때 교회가 세워진다. 스데반을 통해서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라고 성경이 말한다면 저희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저희들이 속한 지역 모임을 세우기 위해서, 내가 주님의 인격을 닮고, 그리고 나의 희생을 통해 이 모임이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주님 앞에서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다음에 잠깐 더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1장으로 오겠습니다. 19절 보시면 흩어진 자들이 이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전하냐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도를 전한다라고 돼 있는데요. 이 '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제 여기 표현을 그렇게 했는데요. '길'이라고 하는 뜻이고, 도라고 하는 건 이제 길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way이죠. 길을 이제 번역해 놓은 건데 여기서는, 여기 있는 단어는 영어로 보면 '말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을 펴서 전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이겠죠. 그래서 구약 성경을 가리켜 펴서 예수님이 메시아다, 라고 하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고, 성경을 알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 거고요. 그다음에 저희들은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이방인들에게는,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 11:20).

"헬라인에게도" 이게 이제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두 가지를 합니다. "말했다" 입니다. 말했다. 그다음에 "주 예수를 전파하였다"입니다. 이거 두 개를 보겠습니다. 우선 말했다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지역에 와서 성경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를 전파하였다. 이 말은 공적으로,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공적으로 복음집회를 해서 예수님이 주님이다,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했냐, 개인적으로 교제하고 그다음에 공적인 복음집회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했다. 이게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11장에 안디옥 교회를 설명할 때 어떤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냐면 "주"라고 하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첫 번째, 20절에 보면 "주 예수"를 전했습니다. 21절, "주의 손"이 함께했습니다. 21절,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다음에 23절, "주께" 붙어 있으라, 했습니다. 24절, "주께" 더하더라 합니다. 그래서 다섯 번, "주"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은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마가복음 마지막 절을 읽었는데요. 주님은 어디 계시죠?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일은 첫째,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으로 기도하고 계시죠. 그 사역을 하고 또 하나, 이 하늘에 계신 주님이 친이 이 땅에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를 누가 세웠냐? 흩어진 사람들이 세웠죠. 그런데 누가 세웠냐? '주님이 친이 세우신 교회다'입니다. 주님이 세우셨다. 이게 사도행전 11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세웠냐? 보겠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첫 번째 흩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들을 핍박이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지만, 고난이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지만, 안디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핍박이 나서 이제 예루살렘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럼 어디 가서 살까? 그리고 여기저기 여기가 좋은가? 이쪽이 좀, 예를 들면 내가 가진 기술이 이 지역에서 이렇게 좀 사용해서 생활할 수 있나? 혹은 어디 가면 그래도 내가 비빌 수 있는 친척이 있나?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왔겠지만, 그 배후에 주님께서 그들을 그리 보내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저희들이 굉장히 인상적인 것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낙심하고 슬퍼하고 하는 가운데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가 이렇게 이야기, 아마 이제 제 개인적으로는 이 두 제자는 부부라고 보여집니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식사하고 했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들이 가고 있는 이 슬픈 길, 이 절망의 길, 낙심의 길에 주님이 함께 찾아가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제 처음에는 이렇게 되다가 결국 이야기가 어디로 가냐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자신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 메시아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길에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해가지고 그들이 겨우 도착한 엠마오에서 그날 저녁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이렇게 말을 걸고 그 대화를 통해서 결국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이야기했듯이, 이 안디옥까지 보낸 겁니다.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이제 거기서 이제 만나죠. 이제 누구를 만나가지고 이제 생활을 해야 되죠. 제 생각에는 부동산 찾아가서 여기 싼 월세방이 있나요? 뭐, 전세면 더 좋고요. 이렇게 이제 하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시장에 가서 우리들이 좋아하는 음식 재료들이 있는가? 직장을 알아보기도 하고 뭐 이제 장사를 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거겠죠. 그와 같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성경에 나타난 주님을 말하는 거죠. 이렇게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들에게도 주님처럼 똑같이, 자기들이 만난 어떤 사람들에게 주님을 이야기하게 하고, 그다음에 주님을 이야기했을 때,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서로 괜찮은 사람이네, 믿을 만하네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 모임에 와서 복음을 한번 들어보실래요? 했을 때, 복음 집회에 참석하고 여기까지를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배후에 주님이 계시지만, 그렇게 했을 때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저희들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누가복음 24장에 7가지가 열린다고 돼 있죠. 하늘이 열리고, 가정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성경이 열리고, 열리는 거죠. 그들이 똑같이 이와 같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마음이 열리고, 성경이 열려지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안디옥교회를 누가 세웠냐? 흩어진 제자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냥 하늘에서 그냥 보고 있는 게 아니고, 제자들이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그러니까 주님은 어디 계시죠? 땅에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한 곳에, 한 시간에, 한 번밖에 못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닙니다. 동시에 하늘에 계시고 동시에 땅에 계십니다.
잠깐 이건 제가 최근에 읽다가 좀 이런 구절이 있었구나, 느껴진 규절인데요. 요한복음 3장 한번 보시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저는 이제 이걸 보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올라가신 분이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구나, 이렇게 그냥 이 구절을 이해를 했는데요. 어떤 형제님이 영어로 쓰고 그다음에 그걸 번역한 글을 보니까 이렇게 돼 있습니다. 13절에 영어로 보시면, "인자 외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없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영어로는요. 그다음에 그래서 이제 인자는 주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죠. 자신은 지금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에 계십니다. 이건 뭐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이분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게 번역을 지금 정확하게 영어 쪽 번역을 잘 안 해놔서 그런데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고, 인자는 지금 하늘에 있느니라." 이게 추가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지금 땅에 계시고, 그런데 지금 땅에 계신 이 예수님은 지금 현재 하늘에 계신다. 이게 요한복음 3장 13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한글로 번역된 것만 보고 주님이 그렇지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고 주님 외에 하늘에 계셨던 분이 없지, 라고만 생각했는데 주님은 동시에 두 군데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고 땅에 계십니다. 하나님 이외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뭐 하시냐? 현재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죠. 이 주님의 대 명령을 따라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주님이 함께하셔서 기적으로 그들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봅시다. 안디옥에서도 어떻게 어떤 일이 벌어졌냐?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잘 전해서, 혹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참 믿을 마음이 생겨서 구원받은 것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거기 보시면 11장 20절에서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주님의 손, 이 손은 어떤 손입니까? 모든 것을 통제하는 손입니다. 모든 게 주님의 손 아래에 있는 거죠. 주님의 손이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신 거죠. 그래서 주님의 손이 함께 계시매, 누구하고요? 제자들과 또 누구하고요? 복음을 듣는 자들과 함께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성경을 풀도록 주님께서 함께해 주셨고, 그다음에 듣는 자의 마음을 열도록, 또 말씀을 들을 때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도록 주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행전 11장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땅에서 역사하셔서 안디옥이라고 하는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주님은 흩어진 자들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셨다. 이게 이제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랬더니 수다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믿고 믿었습니다. 전해진 복음을 믿고, 믿음은 어떤 거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누가 주인이었죠? 자기가 주인이었죠. 그런데 믿은 사람은 이제부터 주께 돌아갑니다.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까지 보면 이제 안디옥교회의 복음이 전해지고 이제 성도들이 구원받고 교회를 이루게 되는 이 과정들을 나와 있는데요. 잠깐 몇 가지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전파했다." 주 예수를 전파했다가 뭐냐 하면 예수라고 하는 단어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와있죠. 예수님의 땅에서 이름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라고 하는 단어는 항상 주님 사람이 되셨을 때 그 주님을 가리키고,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도 예수님을 예수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간편하게 기도할 때 기도 맨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안 합니다. 성경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죠. 그런데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님" 이렇게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불렀죠?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주 예수님" 이렇게 반드시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기도할 때도 그냥 간단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렇게 풀네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 예수" 그러면, '예수'라고 하는 단어는 사람이 되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뜻이 뭐냐?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피를 가지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이게 "주 예수를 전파했다." 로마서 10장 보면 구원을 이렇게 말하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이 뭐냐?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 구원받도록 하는 복음의 내용이 뭐냐?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을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의 평가이고, 판단이고, 하늘 하나님이 세상의 평가를 뒤집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을지라도, 죄인이라고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셨다. 이게 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나의 삶의 주인으로,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는 날 동안 인도하시고 마침내 하늘에서 심판하실 분으로 주로 시인하면 구원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 예수를 전파했다. 이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주의 손이 함께했다." 이 모든 과정에 사실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사람들을 사용하셨을지라도, 그 일을 시작하시고 그 일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이게 "주의 손이 함께했다"는 뜻이죠.
그다음에 "주께 돌아오다"라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삶의 주인이 주님이시는 것이 구원의 결과다. 이건 저희들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 이와 같은 고백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이런 게 이제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까지 이제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입니다. 이 당시에 얼마나 서로 소식들이 전해졌는지, 예를 들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가 굉장히 먼 거리일 텐데요. 여기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집니다. 정확하게 전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요? 그래서 계속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이루고 계셨다. 설명돼 있지 않지만, 어떻게 누군가가 안디옥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다, 라고 하는 소식이 정확하게 예루살렘 교회에 딱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역 모임 사이의 교제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이제 유대인들로 이루어져 있죠. 여기는 이제 이방인 교회입니다. 유대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떻게 하냐? 그들이 뭘 어떻게 했는지, 뭐 이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배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을 안디옥 교회로 보냅니다. 이 같은 일들을 주님께서 하늘에서, 두 지역 모임, 그리고 새로 세워진 안디옥 모임을 다시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소식이 증거되게 하고, 소식이 전달되게 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보내게 되고, 이와 같은 일들을 하고 계셨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잘 알 수 있는 것은 앞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가 원래 이름이 바나바가 아닙니다. 바나바는 위로자, 격려자라고 하는 뜻이죠. 그래서 그가 어떻게 격려했느냐? 예루살렘교회 자기가 구브로에 밭이 있었습니다. 그걸 팝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도움을 줘서 사람들이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이 바나바로 바뀝니다. 격려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지금 현재 사도행전 11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첫 번째 스테반이 나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 스데반 같은 분이 꼭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흩어진 자들이 나오고,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 나오는 것이 바나바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바나바가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누구냐? 격려자입니다. 모임 가운데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을 섬길 때, 말씀을 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또 성도를 접대하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죠. 이렇게 할 때에 비록 서툴지라도, 처음에 하는 데 조금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익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일을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라고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죠. 특별히 안 하고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격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일을 해보지 않으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을 해보면 이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로 그냥 별거 아닌 것 같고, 그렇게 훌륭한 것 같지 않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게 많은 많은 시행착오와 기도와 나름대로의 계획과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필요한 사람,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와서 23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와가지고 "하나님 은혜를 보고" 그랬는데요. 하나님 은혜는 보이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어떻게 보입니까? 그런데 그가 은혜를 보았습니다. 어떻게요? 뭘로요? 이 이방인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 은혜를 본 겁니다. 이 이방인인데,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 십자가가 자기의 죄를 용서했던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대해서,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예배드리고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 은혜가 아니고 이 이방인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된 거죠. 그다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니까 고집도 세고 있는 분인데, 그리고 보니까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자기를 낮추고,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뭐 지위도 있고, 뭐도 있고 하지만, 모임에서 와서 하는 거 보니까, 자기를 낮추고, 누구나 다 안 하려고 하는 그런 일도 하고, 이걸 보고 바나바가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일들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안디옥 모임의 이 성도들의 변화를 보고, 그들이 기도 집회하는 걸 보고, 주님께 간절히 의탁하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그러고, 이런 모습들을 보고, 바나바는 "하나님 은혜를 보았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많이 있죠. 자녀들 재롱, 이것도 정말 마음을 기쁘게 하는 거죠. 또 여러 가지 세상에서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죠.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쁜 게 뭐냐?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삶에 역사한 증거를 보고 기뻐한다. 저희들 가운데 이 같은 기쁨이 넘치기를, "아, 저 성도님이 구원받았구나." 구원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간증, 뭐 이런 걸 할 때 정말 우리 마음이 기쁘고, 그다음에 연약한 성도가 점점 성장해가는, 굳게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발휘하고, 이런 걸 볼 때 정말 우리 마음에 이것으로 인한 기쁨, 기쁠 때 어떻게 해야 되죠? 찬양하고, 나누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그러잖아요. 이거 나누고, 이제 이렇게 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바나바의 권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주께 붙어 있으라는데요. 구원받은 후에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가르침이 주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께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원받으면 이제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 돈이 필요하다. 또 이제 현실적으로 해야 될 게 많이 있는 거죠. 그때 주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므로 이 주인에게 묻고, "이렇게 할까요? 주님 이제까지는 제가 쭉 이렇게 해왔는데" 이제 제가 믿었으니까 믿은 후에 다시 물어보는 거죠. "옛날에 이렇게 해왔는데, 이거 계속할까요? 아니면 이제는 달리 할까요?"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해라. 내 뜻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 주님을 계속 따라가는 거죠.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후에 사단이 역사합니다. 세상의 역사입니다. 그 목적이 뭐냐? 그 사람하고 주님하고를 떨어뜨려 놓는 것입니다. "야 뭐 그런 것까지 뭐 성경 보고 하냐? 그건 네가 알아서 하면 되지." 이렇게 하는 거죠. 그리고 "야, 이건 뭐 기도할 일이 아니야. 이건 이렇게 해야 돼."라고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유혹입니다.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교회는 나가고 교회 생활은 하지만, 직장생활, 학교생활, 또 가정생활은 그게 뭐 그거 성경대로 다 해야 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지금 돈이 필요한데 그러면 그 주님께 달라고 기도하고 뭐 그럴 필요 있어? 네가 가서 벌면 되지. 알바해. 이런 식의 유혹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을 싫어하는, 주님을 배척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나바가 요구한 것입니다. "주님을 붙드십시요.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면에서 주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면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게 주님을 굳게 붙들라, 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굳게 붙들라는 이런 뜻입니다. 이게 다니엘서 1장 8절에 있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다니엘이 이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가 이제 세 가지 해야 되죠. 이름 바꾸고, 공부해야 되고, 그다음에 왕의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결정합니다. 그가, 다니엘이 "마음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을 딱 정한 것입니다. 이게 마음을 굳게 한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묻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도,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사인이 있어야 움직인다. 주님이 싫어하는, 혹은 이것은 저기 주님 뜻은 아니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지 뭐, 주님 뜻대로 어떻게 다 하냐? 이것까지 어떻게 할 거냐?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모든 것을 주께 묻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움직인다. 라고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처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구원받은 성도가 첫 번째로 받아야 되는 교훈, "마음을 굳게 하여 주께 붙어 있어라"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이제 저희 모두에게도 필요합니다. 조금 느슨해져 있다면 다시 한 번 구원받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서 나의 삶의 모든 문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묻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가는 이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이렇게 권면한 이제 바나바에 대해서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격려자입니다. 격려할 뿐만 아니라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주께 붙어 있어라." 그런데 이와 같은 가르침이 힘을 갖는 이유는 그가 이와 같은 세 가지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다'에 대해서는 보겠습니다. 착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이제 번역을 이렇게 했는데요. '선하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선하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이런 이런 사건을 한번 떠올려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왜 선하다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주님은 이렇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선하다라고 하는 말을 하려면 나를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된다. 선한 선생님은 안 된답니다. 선하신 주님,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거 붙이면 안 된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도다. 이게 이제 선한 거죠. 그러니까 바나바가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뜻은, 그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만을 선하다고 보고, 사람의 뜻이나 사람의 방법을 선하다고 부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방법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이 착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안디옥에 오니까 구원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속한, 그때는 유일한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복음을 알고 교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예루살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자기들이 전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흩어진 자들이 전했는데,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그러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교회로 모이는 거예요. 사람 같으면 이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의심스러운데 이거, 구원 간증 다시 해봐. 복음은 온전하게 전해진 거야? 복음 전할 때 이것도 들어갔어?" 이렇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 것을 보고 그가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게 착한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보겠습니다. 그가 나중에 보면 사도 바울을 데려옵니다. 그가 안디옥에서 잘 사역합니다. 성공적으로, 그런데 바울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바울이 자기보다 더 훌륭하게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이걸 누가 하겠습니까? 처음에 자기가 도왔던 교회인데 자기보다 더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을 기꺼이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선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안 하는 일을 그가 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안 하는 거다. 이게 이제 바나바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이제 "성령이 충만했다"인데요.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이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되는 게, 제가 이제 역초 모임에서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잠깐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 번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다. 그리고 예루살렘 장로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방인에게 넘기울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세 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3일 후에 부활할 것이다." 이게 주님이 명백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은 아무도 주님의 부활을 못 믿습니다. 세상에, 열 두사도 중에 하나인 도마가 "나는 못 믿겠다. 내가 내 손으로 그 손의 못자국, 발의 못자국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나 못 믿겠다." 세상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은, 또 믿지 않는 유대의 장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살았을 때 말하기를 3일 만에 부활한다고 했거든요." 물론 부활을 믿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훔쳐가면 안 되니까, 제자들이 훔쳐가고 이거 부활했다고 하면 안 되니까, 이 무덤을 지켜야 됩니다."하고 이 사람들은 정확하게 주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상하죠. 아니, 왜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은 기억 못하고 안 믿는 사람들이 기억해요? 그걸 이제 성령님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야 된다." 제자들이 다 주님이 가신다니까, 저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3년이나 따랐는데 주님이 그냥 가버리신다니까 "주님 가면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제자들이 슬퍼하고, "이렇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야 성령님이 오신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유익 아닐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좋은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래서 이 성령님이 오셔야 됩니다. 이 성령님은 뭐 하시는 분이냐?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분입니다.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계속 지금 이 사도행전 11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주님이다. 다섯 번 나오죠. "주 예수를 전파하고" "주의 손이 함께하고" "주께 돌아오고" "주께 붙어 있어야 되고" 그래서 성령이 충만했다고 하는 것은 바나바가 주님에 대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했는지,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제대로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믿음이 충만했다"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이제 믿음 그러면 항상 믿음은 어디서 나죠?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해서 나는 거죠. 그래서 그는 계속 성경을 근거로 가르쳤다. 성경을 설명했다. 말씀이 이러하다, 이렇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일,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고 말씀의 의도를,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안디옥 모임을 굳건하게 세웠고, 저희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죠.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행 11:25).

사도바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저희들이 전번에도 했습니다만 어디서 구원받냐 그러면 다메섹에서 구원받습니다. 그가 구원받을 때 세 가지가 그에게 혁명적으로 변화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압니다. 하늘에서부터 밝은 빛이 그를 둘러싸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가 배웁니다. 그는 그전까지는 하나님은 한 분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깨닫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고 그가 나중에 배우게 되겠지만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율법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 이렇게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내가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다가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3장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을 자가 없느니라." 그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야 된다. 낮은 자가 높은 자한테 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찾아온다.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사람이 하나님을 섬겨야죠.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큰 자는 누구냐? 섬기는 자다." 이게 이제 그에게는 충격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지만, 교회에서는 반대로다. 이렇게, 그래서 그가 이방인들을 찾아갑니다. 이방인들이 나한테 와서 복음 듣고 배워야지, 구원받으려면 나한테 와서 배워야지, 구원을 알고 있는 나한테, 아니요! 그가 구원을 싫어하는 자들에게 가서 호소하고, 믿도록 권면하고, 땅끝까지 가고, 여기 이제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세 가지 중대한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메섹에 있다가 이제 아레다 방백이 죽이려고 하니까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 오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하죠. 원래는 저기 다메섹에 가서 이단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 이 이단들 잡아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려고 했죠. 그런데 자기가 자기가 믿는 자가 돼서 왔어요.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하죠. 사도바울은 그들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랬으니까요. 구원받기 전,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이들을 잘 압니다. 제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너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아니,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자기처럼,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기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 마음의 핵심을 찌르고, 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해내고, 그리고 복음이 가장 그들에게 필요하게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하겠다고 그랬죠.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너를 이방인에게 보낸다." 사도바울은 이것도 납득이 안 갔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제일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잘할 것 같은데, 내가 제일 적합한 사람인데, 아니요. 하나님이 유대인의 사도로는 베드로를 씁니다. 어부 베드로를 씁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지식 필요 없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율법에 통달하고 있는 사도바울을 씁니다. 이게 하나님 방식이죠. 그리고 예루살렘 나가라, 그래서 나가서 다소, 자기 고향에 조용히 있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을 바나바가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냐? 변화된 사람, 하나님에 대한 율법에 대한, 그리고 섬김의 원리에 대해서 분명한 차이를 이해한 사람,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데, 내가 가장 잘할 것 같은 것들을 하지 않고, 주님이 시킨 것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안 사람, 그리고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조용히 자기 고향에 있었던 사람, 이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스데반, 바나바, 사도바울, 그리고 이들을 다 사용하셔서 주님께서 안디옥의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성장시키셔서 마침내 7명의 인도자들이 나옵니다. 인도자가 7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명을 빼서, 바울과 바나바를 빼서 전도여행을 시킵니다. 이게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저희들도 주님이 저희 가운데 말씀을 듣고 잘 자라서 인도자들이 나오고, 그 인도자들이 풍성해질 때 주님이 그들을 또 다른 곳으로 보내고, 이렇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26절 보시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여기 나오고 또 한 번은 사도행전 26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사도바울이 막 복음을 전하니까 아그립바왕이 깜짝 놀랐죠. "지금 재판받는데 복음을 전하네,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할 때 그리스도인이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26절에 한번 그리스도인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 번 나오는데요. 각각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 사도행전 11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누가 불렀냐 그러면, 안디옥에 있는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붙여준 것입니다. 이게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이렇게 조금 애매하긴 한데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을 보니까 그 믿는 사람 저 사람들이 저렇게 믿고 저렇게 살고 있는데 저걸 뭐라고 부를까? 저 사람들을 뭐라고 부를까, 자기들은 자기들은 제자라기도 하고, 형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제 자기들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저 사람들을 뭐라고 부를까? 그랬더니, 가장 좋은 단어가 '그리스도인'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뜻이냐면 이 사람들은 우리하고 다르다라고 하는 걸 말합니다. '우리하고 다르다.'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변화된 사람이다. 우리하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하고 달리 사는데 그 변화의 핵심이 뭐냐 그러면, 그리스도다. 이 사람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리스도에게 물어본다. 결정할 때마다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뭐 하는 거 보면 그리스도가 이렇게 하시기를, 이렇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이제 쓰는 표현인데, 그리스도인이다 할 때, 지금 안디옥교회에서 계속 나온 거죠. 주 예수를 전파하고, 주의 손이 함께하고, 이게 이제 주님이 그리스도잖아요. 주께 붙어 있고, 주께 돌아가고, 이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그리스도인'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인격, 그리고 주님의 결정, 그것이 그들의 삶에 배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이렇게 한 것이에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가보겠습니다. 그다음에 사도행전 26장 28절 보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그런데 그 앞에 보겠습니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

아그리바는 이렇게 생각하냐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내가 열심히 설득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28절에 있는 대로 설득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말을 잘하고, "오! 그 말이 맞네." 하고 받아들여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느냐? 27절,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두 번째 특징입니다. 사람의 설득, 인간의 지혜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되는 사람,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다음에 한 번만 더 보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세 번째 특징입니다. 고난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분명히 고난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자녀를 고난 속에 넣죠? 연단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생긴 고난을 일반적으로는 이거 불평해야죠.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고난을 사용해서 흠 없고 점 없는 주님을 닮게 만든다고 하는 걸 알기에, 고난을 찬양하는 사람,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세 가지입니다. "주께 돌아가고" "주께 붙어 있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 말씀을 믿는 사람,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저희들이 가장 많이 쓰는 게 그리스도인인데요.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저희들에게 있는가 한번 살펴볼 수 있길 원합니다.

그다음에 또 밑으로 가보겠습니다.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이 나왔는데요. 아가보는 성경에서 자주 나옵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인데 예언을 합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다." 예언을 합니다. 그러면 미리 미래를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예언을 주신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준비하라는 거죠. 마치 바로에게 7년 기근, 7년 흉년 해서 저기 요셉이 이렇게 하듯이, 이제 아가보도 와서 이야기하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건 우리대로 무엇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기근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뭘 준비해야죠? 기근이 들면 이제 먹을 게 없죠. 뭐 양식이 떨어지고, 양식값은 오르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어려워지죠. 그때 이들이 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들을 위하여 준비하지 않습니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준비합니다. 이게 놀라운 거죠.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사는 거죠? 주님을 위해서 살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장 16절, 가장 유명한 거죠. 그리고 요한일서 3장 16절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고 우리는 기뻐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다음에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주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이와 같은 모습을 볼 때 주님이 하늘에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이고, 요한일서 3장 16절은 형제의 사랑입니다. 형제를 다시 바꿔보겠습니다. 교회의 사랑입니다. 지역 모임 안에서 이 같은 사랑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고, 지역교회 간에 이와 같은 교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변화된 것입니다. 기근이 있을 때 대비합니다. 자기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대비합니다. 이게 안디옥교회의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다시요, 안디옥교회를 주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늘에 계셨지만 이 땅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주님께서 동일하게 안디옥교회처럼, 뭐 이제 주님의 뜻이니까 저희들에겐 다르겠지만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 가운데 스데반 같은 형제가 있는가? 내가 스데반 같은 형제가 돼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바나바와 같은 형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격려하는 사람, 그다음에 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형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다른 모임의 연약을 위해서 기꺼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먼저 생각하는 놀라운 사랑의 실행이 있는 모임, 이 같은 모임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저희들에게 도전하시고, 저희들이 자기를 이렇게 점검하고, 또 주님이 허락하시면 우리들이 주님 말씀 앞에서 결단하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