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0장 : 무엇이 깨끗한가?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사도행전을 아마 7장부터 쭉 살펴왔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도행전 10장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말씀을 먼저 읽겠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행 10:9).
6시, 그러면 이게 오늘날 저희로 치면 6을 더하면 됩니다. 낮 12시입니다.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행 10:10-16).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4-28).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행 10:34).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행 10:38-39).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행 10:42).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 10:4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8-23).
아멘, 시간에는 유대인 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죠.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 복음의 내용이 뭔지도 좀 살펴볼 필요가 있고요. 그 결과 고넬료와 같이 모인 사람들이 믿고 죄 용서를 경험하고 성령을 받고 그리고 침례받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제 주님이 저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어떤 저희들이 배워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이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하고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먹는 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뭘 먹지 말라라고 해놓으셨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못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뭐 굽이 갈라져야 되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만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돼지고기는 못 먹는 거죠.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못 먹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더러운 짐승입니다. 유대인들은 깨끗하고 이방인은 더럽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유대인들이 이방인하고 식사를 같이 하거나 집에 들어가서 같이 대화를 나누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것이 유대인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이면서 복음을 알고 있는 베드로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고넬료 집에 못 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난처하게 된 거죠.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데,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나는 유대인이니까 이방인하고는 같이 대화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고넬료가 구원받을 길이 없는 거죠.
그리스도인도 복음을 알고 있죠.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죠.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구원받고 싶어서 복음은 듣길 원하죠. 그런데 이제 우리가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말 안 한다, 저런 사람에게는 복음 안 전해줘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다시 이제 이 문제를 이제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러운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저희가 받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뭘 해도 되냐? 뭘 하면 안 되냐? 하는 거죠.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 영화를 보면 됩니까? 요즘에 제가 뉴스에서 보니까 저기 뭐 '서울의 봄'이라고 천만 천만 명이 본 영화가 나왔다고 막 하더라고요.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이면 우리나라가 지금 몇 명이죠? 3500만이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이 본 거죠. 서울의 봄 한번 보러 갈까요? 안 되나요? 그럼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가라고 하는 기준이 뭔가를 저희들이 배워야 합니다. 기준이 뭔가? 그냥 막연하게 감각적으로 저건 괜찮을 것 같은데 저건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뭐 저기 영화관에 가면 안 되고 커피숍은 가도 됩니까? 스타벅스, 제가 맨날 가는데요. 이게 이제 이 기준입니다. 이게 기준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준을 주셨어요. 이건 하고 이건 하지 말라라고 율법의 기준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제 지금 상황을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고넬료한테 가서 복음을 전해라 그러면 고넬료가 구원받을 거다. 이 하나님 뜻은 복음을 전하고 고넬료가 구원받고 침례까지 받고 교회에 들어오고 그게 하나님 뜻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나는 이방인하고는 이방인하고는 안 만납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이제 하늘에서부터 보자기가 이렇게 내려왔어요. 그리고 그 안에 각종 이제 먹을 수 없는 짐승들, 심지어는 곤충 새 이런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한테 말하는 거예요. 잡아먹으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못 먹습니다. 이거 제가 이때까지 안 먹었는데요. 이거 저기 주님이 먹지 말라고 한 부정한 것들인데, 이거 다 죄인데 이거 이거 먹는 건 죄죠, 이거 먹으면 안 되죠. 그래서 저 죄 지을 생각 없습니다. 죄 안 짓겠습니다. 그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다시 하나님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깨끗하다고 했는데 네가 죄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건 죄 아니다 이렇게 이제 바꾼 거죠. 그러니까 이제 이게 베드로 입장에서는 난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륜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이 아니고 새로운 원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것은 깨끗하고 이것은 해도 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하면 안 된다라고 규정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규정을 바꾸신 거예요. 어떻게 바꾸셨냐면 '다 깨끗하다.' 이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뭐든지 해도 되는가? 이제 죄는 없는가라고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규정을 바꿨다고 하는 것을 이제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에서 제가 읽어드린 대로, 마가복음에서 이제 유대인들은 저기 이제 식사하기 전에 막 손을 씻어요. 위생적인 이유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저기 의식적인 이유로 손을 씻고 막 이렇게 음식을 먹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거 아니다. 음식은 배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와버린다. 음식이 더럽게 안 한다.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속이 중요하지 음식이 아니다."라고 주님이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12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가 가졌으니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고도 베드로는 아니 나는 이방인하고는 이방인하고는 같이 식사하거나 같이 이야기하거나 이방인 집에서 같이 머물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이미 주님께서 공생애 시절에 말씀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모든 족속으로 복음을 전하라 이렇게 했는데도 베드로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자기는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민족이 다 들어옵니다. 유대인 사실은 이방인들이 더 많이 들어옵니다. 교회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들어와서 구원받고 교회 안에 있고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교회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어서 하늘로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땅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여간 베드로가 그걸 자세히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데 이제 베드로가 세 가지를 이렇게 세 번이나 이런 걸 보고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해석이 잘 안 됐어요. 무슨 뜻이지? 이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주님이 저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좋은데요. 베드로한테 "야, 저기 고넬료 올 거거든 가서 복음 전해." 이렇게 하시면 좋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세요. 환상을 보여주세요. 이건 더 쉽게 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더 쉽게 하셨는데 더 어려워요. 왜 더 어렵냐 하면 생각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하면 훨씬 쉬워요. 그래서 이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하나님이 정확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시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 집을 두드립니다. 이것도 잠깐 한 가지 더 생각만 해보면요. 고넬료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싶으셨어요 그런데 이제 고넬료의 생애를 하나님이 건드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셨어요. 그래서 이제 고넬료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막 이렇게 한 거죠. 주님이 마음을 넣어주신 거죠. 그래서 이제 주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그렇게 이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온 거죠. 이제 복음만 들어가면 딱 구원받게 돼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천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면 되죠. 그런데 천사를 보내고 복음을 안 전해요. 복음은 사람만 전합니다. 누구만요? 구원받은 사람만, 자기가 구원을 경험한 사람만 전할 수 있어요. 복음의 내용은 천사가 더 잘 전할 수도 있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고 구원받은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만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그래서 복잡하게 하십니다. 고넬료한테 베드로를 불러라. 베드로가 또 안 가려고 그러니까 베드로한테 환상을 보여서 고넬료한테 가라. 그런데 베드로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베드로가 생각을 그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딱 도착해가지고 베드로를 찾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지금 생각 지금 아직 결론을 안 내리고 있는데 이렇게 오니까 성령께서 내가 보냈다. 의심하지 말고 가라. 이렇게까지 한 거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넬료 집에 가자 이제 두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립니다. 고넬료로서는 천사가 말하기를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초청하면 그가 구원받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것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자기가 구원받을 거예요. 구원의 복음을 전해줄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 앞에 하나님처럼 엎드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하죠? "일어나십시요." 뭐라고 하죠? "나도 사람입니다." 일단 사람이 높아지면 안 돼요. "일단 이제 일어나십시요.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그다음에 이제 고넬료와 함께 이제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있었죠. 그 사람 그래서 아니 나 원래 여기 오면 안 된다. 나 여기 올 생각이 없었다. 나 안 오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 내가 깨끗하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 죄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 사람은 죄인입니다. 나 이런 죄인하고는 이야기 안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인이라고 부르지 마라. 죄인 아니다. 내가 다 깨끗하게 했다. 너희들하고 동등하게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거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와서 이제 이렇게 말하는 게 "왜 나를 불렀냐? 나 원래 안 오려고 했는데 왜 불렀냐?" 그랬더니 이제 사정 이야기를 하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당신 부르라고 그래서 우리가 부른 겁니다."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이제 첫 번째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구나." 유대인은 깨끗하고 로마 사람은 죄인이고, 이렇게 안 하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말하냐면 나도 하나님한테서 교정받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흠 없고, 하나님 말씀을 완벽하게 알고, 그래서 그 삶도 분명하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데 하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 베드로 자기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고, 옛날 생각을 하고 있고, 하나님이 베드로 생각을 바꿔가고 있고, 그래서 나도 하나님께 아직도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복음 전도자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기는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뭐 다 알고, 이제 구도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은 아무 소리 말고 나한테 배우고, 이런 게 아니고, 전도자 자체가 나도 하나님께 계속 배우고 교정받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 전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복음의 내용을 보면 어떤 복음을 전하냐 그러면 이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데, 당신은 죄인이고 그런데 당신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서 해결하셨고 이제 이것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고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사람들 가운데 선한 일을 하셨다. 선한 일, 병을 고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시고, 그런 선한 일, 그리고 정말 궁극적으로 선한 일,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이런 선한 일을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예수님이 계속 이렇게 일을 이루고 계셨는데,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을 죽여버렸답니다. 이게 그가 전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택한 백성,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이 택하고 사랑하시고 축복해 오신 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방인은요? 이방인은 명함을 내밀면 안 되죠. 이스라엘도 죄인인데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이, 물론 이방인도 같이 죽였죠. 예수님을 죽이는데 누가 합작을 했냐면 이제 이스라엘 대제사장, 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했죠. 그리고 누가 동의했죠? 빌라도가, 로마 사람이 동의한 것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 이거 죽일 죄가 없는데 이거 죽이면 안 되는데, 그리고 자기 아내가 꿈을 꿨는데 여보 그 사람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까지 했어요. 자기 양심으로도 이거 죽이면 안 돼요. 로마 법으로도 죽일 만한 죄가 없어요. 그래도 죽입니다. 왜요? 자기 직장에 걸려 있거든요. 이거 안 죽였다가는 유대인들이 막 우리가 로마 황제한테 당신 자기 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살려줬다 이렇게 할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죠? 자기 총독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죠. 직장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그 이 총독자리 때문에 자기가 누리고 있는 부귀 영화 다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무서워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방인도,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주시고 계속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 이스라엘도 죽였는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인생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온 이방인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이렇게 나오죠. 로마서 1장, 이방인이 죄인입니다. 로마서 2장, 유대인도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이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게 이제 복음이죠. 그래서 이제 베드로가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예수님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다, 이렇게 전한 거죠.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은 그렇게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키시고 지금 현재 재판장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이 재판장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이면 그분이 재판하실 때 딱 하나 물어보겠죠. "나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이거 물으시겠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재판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이제 이 질문에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재판하실 거예요. "나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죽으실 일 하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이제 지옥 가야죠.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저희들이 오해했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였나이다. 이제 이 죄를 회개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 복음을 이제 베드로가 그렇게 전한다고 하는 것은 이제 이런 뜻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지금 문제가 어떻게 되냐면 누가 깨끗하고 누가 더럽냐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음식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 그러니까 소고기는, 소는 깨끗한 짐승이에요. 이건 먹을 수 있죠. 돼지, 그다음에 다른 낙타, 뭐 이런 것들은 더러운 짐승이에요. 먹으면 안 돼요. 짐승을 그렇게 분류하죠. 그런데 이게 사실은 사람을 분류하는 겁니다. 더러운 것을 먹는 사람은 먹을 것이 그를 더럽게 하니까, 이방인도 더러운 죄인입니다. 유대인은 깨끗한 것만 먹으니까 깨끗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된 거죠. 그런데 이제 베드로 복음을 잘 들으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인입니다. 깨끗한 것만 먹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한 이스라엘도 죄인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이 먹으면 안 된다는 부정한 것 실컷 먹고 그랬으니까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죠.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다. 이방인 저것은 더러운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더러운 거 안 한다. 이런 거 안 먹고 이런 짓 안 하고, 이방인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 실컷 하고 있다. 죄인들이다. 나는 깨끗하니까 저는 죄인하고 같이 안 논다. 이게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베드로 복음을 통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 너희들 죄인이다. 너희들이 음식 안 먹었다고 깨끗하냐?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랬죠? 이게 그림자로 말한 거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 성경에서 율법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몽학 선생'이라고 말합니다.
몽학 선생은 어떤 뜻이냐면 유치원 선생님입니다. 이 선생님은 주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같이 놀아줘요. 같이 놀아주고, 유치원을 다니는 습관을, 이렇게 유치원 재미있는 거야, 가야지, 가서 유치원을 가게해서 그리고 이제 이렇게 익숙해지면 그다음에 이제 학교를 다니게 합니다. 그리고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결국은 뭘 말해주냐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가르치는 것을 잘 듣도록 율법이 이렇게 하는 거죠. 예수님은 지금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냐면 이스라엘도 죄인이다. 너희들이 하는 짓도 다 죄인이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이제 질문이 나와요. 그러면 세상에 깨끗한 게 있나요? 다 더럽네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 깨끗한 것이 나온다. 어떻게요?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된 사람이 깨끗하다. 아무도 깨끗한 사람 없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죠.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래도 내 평생 동안 남한테 해코지한 거 없고 남 괴롭힌 거 없고 내가 했다면 남한테 선한 일을 했으면 했지. 나는 억울한 일 많이 당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한테 해친 거 없다. 나는 깨끗하고 나한테 억울한 일 하게 한 놈들 그 나쁜 놈들, 그놈들은 뭐 지옥 가도 할 수 없지.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남한테 해코지한 것 없고 내가 그래도 양심적으로 살아온 그 사람이 죄인입니다. 나한테 잘못한 사람, 그 사람은 더 죄인이죠. 물론 근데 이 사람은 깨끗한 게 아니고 이 사람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이면 세상에 천국 갈 사람 없고 다 지옥 가야 되는가? 맞습니다. 다 지옥 가야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깨끗한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어서 죄 용서된 사람들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렇게 전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다. 이방인도 죄인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가 용서된 사람들이 이제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들고자 하신다. 고넬료가 아멘입니다. 받아들입니다. 고넬료가 얼마나 했냐면요. 그가 의인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가 금식 기도하고요. 그가 남을 구제했어요. 자기 재산 가지고 다른 사람 많이 도왔어요. 그가 로마 사람이지만, 로마 군대 군인이지만, 이스라엘을 위해서 보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누가 봐도, 사람들이 다 누가 봐도 고넬료는 칭찬하는 사람입니다. 저렇게 살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가 죄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 용서를 믿고 죄가 용서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10장이 말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래서 이제 고넬리오가 믿고 구원받고 이렇게 됐는데요.
그러면 이제 저희들은 이제 고넬료의 구원보다도, 그건 이제 제가 다음번에 어떻게 해서 그가 구원받게 됐는가는 말씀드리겠고, 제가 오늘은 무엇이 깨끗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은 더러운 것인가라고 하는 기준입니다. 과거에는 어떤 행동을 외적으로 규정합니다. 율법은 예를 들면 이방인의 집에 간다 이거 죄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식사하였다. 이거 죄입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규정을 해놨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교회로 들어오면, 외적인 제약이 없습니다. 뭘 해도 괜찮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입니다. 외적인 행동 제약을 안 합니다. 저기 저랑 같이 영화 보러 가셔도 됩니다. 스타벅스 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뭐 영화 보고 뭐 맨날 커피숍 가고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신약의 수준이 훨씬 높습니다.
겉에 있는 행동을 규제하지 않습니다. 등산 가도 좋고,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죄인인데 아주 품행이 나쁜 사람인데도 가서 복음 전해도 문제없습니다. 그 사람하고 같이 대화해도 문제는 없어요. 근데 이제 문제는 가서 영향을 받고 와서 그렇게 변화된 이건 이제 문제가 되죠. 그리고 이제 내적인 이유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지 않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내적인 이유를 규제합니다. 왜 하느냐? 스타벅스에 갈 수 있습니다. 왜 가느냐? 커피에 중독돼서 그거 꼭 마셔야 정신이 차려진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관에 왜 가느냐? 성경 보는 것은 지루하고 거기 가면 그냥 기분이 좋고,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적인 이유, 동기, 중심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가서 가는 이유는 이런 이유로 가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가? 내가 누구하고 복음을 증거하려는데 그 세상 사람들의 어떤 심리적인 것, 세상에 대한 관점들에 대해서 내가 복음 증거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까 해서 가야 합니다. 거기 가서 같이 희지덕거리고, 영화 잘 만들었네. 그거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뭐가 깨끗한 거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하죠. 그래서 이제 이 죄 용서를 받고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죄가 용서된 사람이 의인입니다. 이게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깨끗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두 번째로 주시는 것이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는 이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게 깨끗한 일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이 죄입니다. 이제 기준이 성령님이 되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기준입니다. 그러면 이걸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뭘 할 때마다 첫 번째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가, 그다음에 두 번째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있는가?' 내가 영화 보러 갔는데 누가 어떤 영화 이런 거 좋아하다가 그게 죄다라고 생각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은 성도가 있었는데 한봉래 형님도 영화관에 가네. 다른 사람에게 실족시키지 않고 영적인 유익을 주는가? 이게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자기 자신에게는 새 생명, '내가 받은 새 생명과 일치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통과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걸리면 됩니다. 이게 우리의 행동 기준입니다.
과거에는 외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유대인들은 외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했어요. 이건 안 되는 건데 하고 행동들을 그래서 목록이 있습니다. 1번, 이거 안 된다. 2번, 이거 안 된다 이런 목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적인 동기로 변화되었다. 이게 이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만 보겠습니다. 이제 율법을 줬더니 이제 어떤 부작용이 생기냐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고 부정한 것을 못 먹게 하신 의도는 이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아브라함, 모세, 사람들을 보내서 계속 내가 너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이렇게 알고 있는 백성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고, 다른 모든 민족에게는 내가 말하지 않지만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너희는 특별한 민족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다른 민족과 달라야 된다는 의미로 뭘 못 먹게 한 것입니다. 달라야 된다. 그러니까 이걸 못 먹으니까, 이제 뭐가 문제가 되냐면 다른 민족하고 섞이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들이 많이 말하는 건데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뭘 안 하냐 그러면 술을 안 먹죠. 술, 담배를 안 해요. 사실 그런다고 그리스도인이 깨끗한 건 아닌데 그리스도인이 술 담배를 안 해요. 그러다 보니까 직장에서 늘 욕을 먹습니다. 직장에서 오늘 이제 부장님이 새해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한 턱 쏜다. 모로 와가지고 같이 이제 단합대회 하고 '위하여'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거 웬수 하나가 저는 안 합니다. 그래갖고 이제 미움 받는 거죠. 미움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걸 줘서 이제 이스라엘이 그 사회에서 못 어울립니다. 유대인들 보면 이게 독특한 거예요. 뭔 안 한다고 그러고 무엇은 안 된다 그러고, 그게 이제 미운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너희들은 다르다. 다른 민족하고 섞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준 거죠.
그랬더니 이스라엘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이방인보다 낫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우리는 천국 갈 거고 저것들은 다 지옥 불쏘시개들이다. 그래서 자기가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뭐죠? 이스라엘이 훌륭해서요?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장 소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이유가 있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로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뭘 하면 안 되냐면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혹시 이스라엘 민족은 노벨상을 몇 개나 받고, 그들은 독특한 교육법이 있고, 그거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수해서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우수하다면 하나님이 선택한 결과지, 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자랑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삶이 깨끗합니다. 우리는 중심까지 살피면서 삽니다. 그래서 다르지요. 자랑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알게 하신 분, 그것을 실행하게 하신 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깨끗한 삶, 그리고 이쪽에 보니까 막 원칙도 없고 그냥 막 성질대로 살고 그래서 막 엉망인 사람을 보면서 쯧쯧, 혀를 차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저렇지 않은 것은 우리가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도덕적이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양심이 더 민감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거 자랑하면 안 됩니다. 이게 우리가 늘 넘어지고 실수하는 곳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는 '먼저'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돼 있습니다. '먼저' 이게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우선순위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 우선순위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제 잘 아는 거죠. 마태복음 6장 33절이죠.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무엇을 먹을 것인지, 마실 것인지 염려하지 마라. 이건 누가 구하는 거라고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방인하고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이 뭐냐?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그렇다고 직장도 안 다니고 막 이렇게 하는 게 아니죠. 성실히 일하고 사회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하지 않습니다. 먼저가 뭐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합니다. 필요하면 여기는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이렇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에서 그 중심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다. 제가 맨날 이야기하지만 돈은 나중에 생각하는 겁니다. 모임에서도 뭘 정할 때 영적으로 필요한가가 먼저입니다. 재정 얼마 남았어? 이거 되는 거야? 이런 거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뭐 무계획적으로 뭐 말도 안 되는데 막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먼저 구한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면 그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재정은 주님이 주신다. 이게 성경 원칙입니다. 우리 삶의 원칙도 그렇죠. 물론 직장생활 잘해야죠. 그런데 제가 이제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모임 생활을 못하게 만드는 직장을 왜 다닙니까? 그거 다니지 말아야죠. 그런데 다 세상에 있는 대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뭐 어떡합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다 안 맞는 겁니다.
두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요. 바리새인들이 막 겉을 깨끗하게 하니까 주님께서 막 비난하시는데요, 너희들이 겉은 회칠한 무덤이다. 겉은 깨끗하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해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겉을 깨끗하게 하면서 그러면 속이 깨끗해질 걸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겉을 깨끗하게 하고는 나는 깨끗하네라고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하면 겉이 나중에 깨끗해진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겉을 깨끗하게 하고 속은 놔둬버립니다. 우리가 정말 깨끗해야 되는 것은 '사람 보기에'가 아닙니다. 누구 앞에서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깨끗한가?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가? 이걸 하면 나머지 행동들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하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부터 본다, 뭐 한다, 이렇게 겉을 교정하는 거예요. 그걸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우선순위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하라." 그러면 겉은 깨끗하게 된답니다.
이 순서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다음 세 번째 먼저 하는 게 또 있는데요. 남의 눈에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내 눈속에 있는 대들보를 먼저 빼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고치려고 하기 전에 자기를 스스로 살펴봐야 된다. 자기도 문제가 많으면서 자기 자신도 해결이 안 돼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어떤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다른 사람이 잘 고쳐지는 게 아니다입니다. 뭘로 고치라고요? 본으로입니다. 말이 아니고 본으로, 삶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켜야 된답니다.
이 세 가지 우선순위를 바꾸면 안 됩니다. 첫 번째 자랑할 수 없답니다. 두 번째 우선순위가 분명해야된다.
이제 저희들이 사도행전 10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구약에 가지고 있는 율법을 폐해버리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베드로한테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이제 이게 보통 '형용 모순'이라고 그러죠. 모순되는 말을 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선한 선생님이여"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렇게 하시죠. 그러니까 이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그가 예수님을 선하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으라고는 생각 안 한 거예요. 그걸 지적한 겁니다. 선하다라고 하려면 나를 하나님으로 보든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면 선 빼라, 이렇게 하신 거죠. 그 중심을 읽으신 거죠. 베드로가 '주님' 해놓고 못하겠습니다. 말이 안 되죠. 주님, 그러면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할 때만 주님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못합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잡아먹으라 그랬더니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그랬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말이 되냐? 그거 너 지금 말이라고 했냐?" 이렇게 하셔야 되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세요. 그렇게 안 하시고 내가 베드로가 잡아먹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내가 규정을 바꿨느니라. 너는 구약에 부정한 규정을 갖고 있는데 내가 신약에 와가지고 규정을 바꿨다. 그러면서 순종하도록 하신 거죠. 그래서 이제 겉에 항목, 겉에 어떤 어떤 것들은 안 된다라고 하는 규제가 아니고 속을 변화시키는 상황으로 주님이 바꿔가신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 우리가 받은 교훈으로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 되냐? 라고 했을 때 외적인 것으로 규제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게 수준이 훨씬 높은 거예요. 그걸 왜 하느냐? 물어보는 거예요. 그걸 왜 하느냐 그걸 하는 동기가 뭐냐? 그걸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그리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겠느냐?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경건한 삶을 살겠다고 하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너의 삶의 태도하고도 일치하느냐? 이 세 개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이 이제 모임 생활을 할 때, 이제 어떤 성도가 모임을 안 나왔어요. 혹은 또 합당치 못한 일을 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거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걸 왜 했는데?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이제 물론 그런 거죠. 그다음에 그의 중심을 물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오면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우선순위를 다시 한 번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를 먼저 구하고,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하고, 그다음에 내 눈의 대들보를 먼저 빼고, 이 세 가지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이제 우리 모임에 여러 가지 있었던 행동, 활동들에 대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행전 7장에서는 스데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어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서 그다음에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했던 거죠. 그다음에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다룹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서는 이제 사도바울이 구원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받을 때의 그 원칙들이 나오고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칙의 변화, 그래서 계속, 사도행전 7장에서 저기 이제 대제사장들이 스데반을 죽이지요. 예배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전 예배, 여기서는 지역 모임에서 영적인 예배, 이 두 개가 충돌해서 죽은 것입니다. 8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갈등, 그걸 다룬 거죠.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산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이게 8장입니다.
9장에서는 이제 사도바울이 이제 구원을 받죠. 그럼 그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했냐면 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런데 보니까 하나님이 세 분이면서 한 하나님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세요. 자기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분이 하나님이세요. 이분만 하나님이신 게 아니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그게 다른 거죠. 그리고 10장에 와서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를 규제하는 원칙이 바뀝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렇게 사도행전을 쭉 따라가면서 어떻게 구약하고 신약의 차이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 중에서, 가장 복된 이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이 밝히신 새로운 원리와 진리를 따라 기쁘게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이것들이 이제 사도행전에서 계속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서 저희들이 이제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원칙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들을 저희들이 잘 익히고 실제 삶에서 그와 같이 적용해서 저희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중심이 올바른 그와 같은 모임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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