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가상칠언

가상칠언 :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임재

박이레 2022. 10. 6. 21:35

< 가상칠언 :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임재(지역모임)> 호림 호두 성도 방문 / 2019년 / 한봉래 형제님

저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마디를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8-43).

주님이 십자가에서 일곱번 말씀하십니다. 맨 첫번째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셔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첫번째 기도입니다. 두번째 기도는 이 십자가 상의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세번째 말씀은 모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을 보고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주님께서 하신 세가지 말씀입니다. 주님은 시밪가에 아홉시에 못박히십니다. 그리고 열두시까지 세시간동안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나서 12시부터 세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어둠이 물러가면서 주님께서 "엘리엘리 라마 마박다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나서 어둠이 그치고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곱마디는 각각 그 의미가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단지 사실을 기록했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길을 뒤따라 가도록 기록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뒤따라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살펴 봄으로써 주님이 어떤 길을 걸으셨는가를 알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였습니다. 이 주님의 첫마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새벽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열두사도를 선택하시기 전날,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김회상 형제님이 교제 하셨는데요. 제 앞에서 기도에 관한 말씀을 교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셨습니까?" 우리들이 처음 구원받을때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하루를 담배를 피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린다고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나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말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하루를 마칠때, 다시 하루를 회고해 보면서 주님께 감사 기도로 마치고 있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와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모든일이 생길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억울하신 분입니까?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데 십자가에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형제님은 이렇게 분별합니다. "주님이 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그 현장에서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용서라는 단어는 주님 잠시 진노를 멈춰주십시요, 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죄 용서의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 진노의 심판을 잠시 젓혀 주십시요.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가리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은 말씀을 가리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을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용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가족들은 서로 일생동안 같이 살게 됩니다. 그러나 가족간에 문제가 생기면 용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역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지않은 성도들이 평생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섭섭한 일들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주신 관계를 유지할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실때 이와같은 말씀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얼 모르고 있을까요? 주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더 문제는 자기들이 사단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는 알지 못하겠지만 사단이 지금 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눈을떠서 영적인 진실을 볼수 있도록, 주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신 것을,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고 있다고 하는것을 그들이 보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기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놀랍게 바로 응답됩니다. 여기 한 강도가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믿음에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 십자가에 못박하실때, 양쪽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개의 십자가를 보고있는 것입니다. 가운데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 없으신 분께서 세상 죄를 대신하여 죽이시는 십자가 입니다. 어느쪽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쪽 십자가는 죄인이 자기 죄를 지고 지옥으로 가는 십자가입니다. 다른 한쪽 십자가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어 구원받아 천국으로 간 십자가입니다. 여기 십자가가 세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주님은 가운데 계셨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죄가 없으신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 중에 자기 죄로 죽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또 한사람은 죄인이었지만 자기 죄를 용서받고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볼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다." 그래서 구원은 회개하고 믿을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기 한 강도가 낙원에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그의 구원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회개와 믿음이 나올 것입니다. 그는 회개합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죄인이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두가지를 일으킨 첫번째 요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고 말합니다. 옆에 있는 강도가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마땅한 형벌을 받는 것이거니와 이분에게는 아무 죄가 없느니라."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몇가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리고 로마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이 있나 세상을 찾아보셨습니다. 의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비난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지혜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사람의 몸을 죽이고 그 이상을 할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죽인 후에 그 영혼을 지옥에 던져넣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그래서 저희들이 반복해서 늘 말합니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는 비난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가할수 있는 어떤 위협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되는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나의 이 행동과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실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어야 합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가 하나님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기전에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나쁜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런것을 의미할 것입니다.저희들이 잘 아는 성경 구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것입니다. 죽는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죽음을 피할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볼때 그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그 죄로 인하여 이와같이 사형집행 받는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됩니다. 이분은 죄가 없는데 왜 심판을 받고 계실까요? 이분은 죄가 없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심판을 심판을 피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이같은 구절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지금 천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만하면 천사들이 주님을 돕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열두영 더 되는 천사들이 지금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부르지 않고 죽고 계실까요? 이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원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가 그와같은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강도를 책망합니다. "너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마땅한 죄로 벌을 받고 있는것 아니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시인합니다. 이게 회개한 것입니다.
그는 두번째, 이제 주님을 믿습니다. 그는 주님이 죄 없으신 분이심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를 피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어떤 성경에서는 "주여"라고 말하고 어떤 성경에서는 "예수여"라고 말합니다. 어떻든지간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기억하십시요."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실 왕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죽으실뿐만 아니라 아니라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예수님이 왕이되는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해하기로 이는 천년왕국입니다. 그때 주님이 영광과 능력으로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 옆에서 십자가 옆에서 처형당한 강도인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요. 제가 매우 늦게 믿었을지라도, 죽기전에 내가 죄인인 것을 믿게 되었음을 주님 기억해 주십시요. 제가 하나님께 회개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요. 주님이 죄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제가 믿었음을 기억해 주십시요. 그리고 주님이 세우시는 그 나라에 저를 들어가게 해 주십시요. 저는 믿지 않는 자들이 받게되는 그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을 압니다. 몸을 죽이고 그 영혼을 지옥에 던져넣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압니다." 그렇게그가 기도했을때 주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주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그리스도여든 내가 누구인지 맞춰봐라." 주님은 이 모든 모독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받은 강도의 기도에 즉각 대답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즉각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때 주님은 즉각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강도는 언제를 기도했습니까? 주님이 재림하셔서, 왕이 되셔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같은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삭개오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누군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같은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멀리서라도 주님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 이름을 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무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급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묵어야 하겠다." 삭개오가 상상할수 없는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그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한번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밤새 그의 집에 함께 머무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강도에게도 주님은 "오늘"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는 예수님이 세우시는 이 땅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천년왕국은 이 땅에 세워져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에 있는 낙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땅에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낙원입니다. 성경에 낙원이라는 단어가 세번 나옵니다. 여기 한번 나오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낙원에 올라간적이 있다고 간증했을때에 한번 나옵니다. 셋째 하늘에 있는 곳이고 사람이 가히 말로 할수 없는 것들을 본곳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장에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 관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이기는 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실때 나옵니다. 이 세 구절을 합쳐서 이해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예루살렘 밖 골고다 언덕, 십자가 피흘리는 그 저주받은 곳에서 그곳에서 죄인으로 심판받고있는 이 강도가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대로 셋째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사람이 말로할수 없는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나무의 영원한 생명을, 영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게 주님께서 이 회개한 강도의 기도에 하신 대답입니다.
한가지만 더 찾아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죽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진실로 말하노니" 이것은 주님께서 많이 말씀하셨던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은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구약을 가르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게 주님의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실때도 그 권위를 변함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고계실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권위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강도는 이와같이 놀라운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는 주님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 주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행복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위험한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그 전에 믿어야 합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물론 낙원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겠습니까? 십자가 상의 강도는 이 특권을 안타깝게도 많이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릴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주님은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십자가 상의 강도가 짧았지만 행복하게 느꼈던 그 주님과 함께있는 그 시간을 우리는 상당히 오래 누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역모임에 모일때마다 주님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행하신 일을 알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게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상이 할수 없는 것이니다.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할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하실때 장소가 필요합니다. 물론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곳에서 자기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시는 거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이스라엘에게는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는 장소가 성전과 성막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곳을 지역모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보면 완성된 상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3절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 곳에 그와같은 놀라운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했을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계속 강퍅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삼천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다시 시내산으로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의 이 죄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한 땅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내가 함께하지 않고 천사들을 보내서 인도하게 하겠다." 이때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도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갈까요? 하나님이 직접 함께하지는 않지만 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니, 천사가 대신 같이가고 가나안 땅에 가니까 괜찮을까요? 모세는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도 데려가지 마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축복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선택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고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요. 이것은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는 유명한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이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이 그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는데 사도바울의 복음으로 그 영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이 두시간 동안이나 데모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를 씁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거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이 땅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역모임에 계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때에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너희가 지어져가고 있다고 그는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합니다. 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형성되어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은 이것이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축복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선택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을 영광으로 이해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들어가는 희생을 그는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최초로 언급되는 곳은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교회는 다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벧엘이 최초로 나오는 곳은 야곱에게서 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그는 돌베개를 하고 잡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돌을 기둥으로 세웁니다. 돌은 주님입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이지만 하나님이 택한 모퉁이 돌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의 이름을, 그 전 이름은 루스입니다. 왜 옛날 이름을 성경은 말하고 있을까요? '루스'라고 하는 뜻이 '부패'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집을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벧엘에서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말씀대로 지역모임을 세우려고 할때, 너무 까다롭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너무 진지하다. 좀 편안하게 하면 안되느냐? 야곱이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그리고 그는 벧엘을 떠나갑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20년을 고난의 세월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돌아가라." 그는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역모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 지체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두려운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질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야곱은 떠나갑니다. 그리고 20년 세월동안 그는 하나님의 훈련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십자가 상의 구원받은 강도는 놀라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가 일찍 구원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죽기전에 구원받았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죽기전에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상에서 주님과 너무 짧게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은 지상에서 함께 계실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역모임입니다. 오늘도 저희가 지역모임의 집회에 오게 된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영혼이 어떻게 주님께 구원받았는가를 들을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지상에서 어떻게 걸었는가를 말씀을 통해 보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에 다시한번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우리도 걸을수 있도록 마음을 격려해 주신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일을 기도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같은 말씀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